2018. 9.30. 연중26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람-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을, 반목(反目, 다툼)이 아니라 화목(和睦, 평화)을 살아가는 이’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님과 하나로 연결된 몸의 지체들입니다. 물 한 잔만으로도 세상에 복을 날라다주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눈물짓는 약자들과 연대하며 ‘포용’, ‘열림’, ‘공평’, ‘더불어 함께’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우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자선도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웃의 어려움을 늘 살피고,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민수 11:4-6,10-16,24-29
  • 시편 – 19:7-14
  • 2독서 – 야고 5:13-20
  • 복음서 – 마르 9:38-50

연중 26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람-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을, 반목(反目, 다툼)이 아니라 화목(和睦, 평화)을 살아가는 입니다.

복음서는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요한의 ‘배타적’이고 ‘닫힌’ 태도를 예수님은 ‘포용적’이고 ‘열린’ 태도로 바로 잡아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치의 원칙’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 다음 지옥으로 치닫는 죄를 철저히 물리칠 것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서로 화목(평화, 샬롬)하게 지내라 교훈하십니다.

<만나를 내려주시다> 출애 16:14-35

1독서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체류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합류한 외국인들이(출애 12:38)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음식을 탐했다는 뜻입니다. 그 불평에 이스라엘도 동조하여 고기 타령을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만나’가 있었습니다. 그 만나를 먹을 때마다 자신들이 하느님 덕분에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이집트를 그리워함으로써 하느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자유인의 여정(旅程)으로 초대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부정하는(외면하는) 죄를 지었습니다(민수 11:20). 복음서에 ‘죄짓게 하는’ 사람(이것을 교사죄(敎唆罪)라고 합니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외국인들이 ‘죄짓게 하는’ 사람에 해당한다면 이스라엘은 거기에 놀아나 ‘죄짓게 된’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누가 더 나쁜 지는 그 때 언급하겠습니다.

그들의 우는 소리에 모세마저 그만 시험에 들어 하느님께 ‘우는 소리’를 합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벗겨달라고 호소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민수 11:21-23).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죄짓게 하는’ 사람이 되고, 모세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심하는 ‘죄짓게 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이 일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우선 모세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질 ‘장로’(長老) 70명을 세워주십니다(민수 11:16-17; 참고 출애 18:13-27). 다음으로 백성들이 한 달 동안 넉넉히 먹을 ‘메추라기’를 보내주십니다(민수 11:18-20, 31-32). 1독서는 그 중에서 장로 70명을 세워주신 단락만 배정해 읽었는데, 복음서의 배경 역할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모세의 무거운 책임을 나누어 질 장로 70명을 세워주시자 그들 역시 모세처럼 하느님의 영을 받아 ‘입신’(入神)합니다. 입신이란 그들이 황홀경 가운데 예언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때 진중에 남아 있던 2명의 장로도 하느님의 영을 받아 ‘입신’(入神)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염려증’이 발동한 ‘여호수아와 모세의 대화’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예언적인 황홀경을 옹호하면서 여호수아의 ‘배타적인 태도’를 바로잡아 줍니다. 자칫 하느님의 역사를 거슬러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질 수 있었는데 식별한 모세 덕택에 공동체에 ‘화목’(평화, 샬롬)이 찾아 들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서에 기록된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와 조화를 이루어 1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시편 19편은 하느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1-6절) 창조 세계가 한(大) ‘중심’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선포한다는 찬미입니다. 후반부는(7-14절)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다른 말로 법, 법도, 분부, 계명, 말씀, 법령)에 대한 예찬과 기도로 끝이 납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후반부가 성시(聖詩)로 배정되었습니다.

‘율법’(말씀)이 예찬 받는 이유는 ‘하느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 예찬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7-10절). 과거에는 1독서의 모세나 72명의 장로처럼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특정한’ 사람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심으로 ‘누구나’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공동체’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 말씀(율법)으로 깨우침을 받고 그대로 지키면 후한 상을 받을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그 말씀에 어긋난 길을 걸을까 걱정하면서 ‘정화’를 간청합니다(11-13절). 모세와 72명의 장로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혔듯이 시인은 ‘하느님 말씀’에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말이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14절). 율법, 즉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에게서 볼 수 있는 태도의 완결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마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이 복음서 후반부와 연결됩니다(마르 9:42-50). 예수님 말씀처럼 철저히 죄를 물리치고(마르 9:42-47) 공동체가 화목하게(마르 9:50) 지내는 비결은 우리의 생각과 말을 감찰하시는 하느님 가르침(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서 ‘생기’를 얻습니까? 하느님 말씀 덕택에 ‘진실’(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까지 포함하여)을 보는 눈이 더욱 밝아졌습니까? 하느님 말씀을 세상 그 어떤 것(순금덩이)보다 존귀하게 여깁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실만합니까?

 

2독서 야고보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기도의 능력’과 ‘형제애’(자매애)로써 교회를 지켜나가라는 교훈으로 지난 한달 동안의 독서가 마감됩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의 사람-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을, 반목(反目, 다툼)이 아니라 화목(和睦, 평화)을 살아가는 이’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온전해질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한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줄 것입니다.
야고 5:16,20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성찰(회개)을 동반합니다. 성숙한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영원까지 기념되는 행위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를 판단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병든 그의 치유를 위해 먼저 기도해 주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정죄가 아니라 용서의 화신이 되라고 존재합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라고 파송 받았습니다. 불화가 아니라 ‘화목’의 직분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변모(The Transfiguration 1528-1520>, 라파엘로(Raphael 1483-1520)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복음서는 이미 형성된 ‘교회’를 대상으로 합니다. 마르코는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진짜 위대함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합니다. 진짜 힘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치의 원칙’을 깨우쳐 줍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 나라’(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옥으로 치닫는 죄를 철저히 멀리할 것을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깨우쳐줍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서로 화목(평화, 샬롬)하게 지내라 교훈합니다.

우리는 연중14주일 복음서 말씀에서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르 6:7-13). 분명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수님과 세 제자가 ‘주의 변모’를 체험하는 동안(마르 9;2-8) 산 아래 남겨져있던 제자들은 ‘악령’을 쫓아내지 못한 것으로 나옵니다(마르 9:14-18).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를 한탄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어 아이를 온전케 해 주십니다(마르 9:25-27). 무안스러워 고개를 못 들던 제자들은 나중에 집에 돌아온 뒤에 자신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대답하십니다(마르 9:28-29). 기도 수행. 예수님 닮는 삶을 최고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잠언입니다.

이 일 후에 일어난 두 번째 수난예고와 두 번째 제자도에 대해 우리는 지난주일 복음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복음 말씀에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어느 날 요한은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증언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복음서가 그 이름 모를 기적 행위자를 알려주지 않으니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 마르 6:14-29

요한은 그가 누구인지 수소문 끝에 ‘안드레아’와 함께 찾아갑니다. 가보니 안드레아와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안드레아도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다녔지만 나중에 그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요한 1:35-37). 하지만 그는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스승인 세례자 요한은 이미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처형당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백성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승의 이름이 아니라 스승이 자신들에게 증언했던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요한 3:22-30).

생각해 보니 ‘요한’ 역시 그를 일전에 한 번 본적이 있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은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마태 11:2-6; 루가 7:18-23).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예수님인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묻게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아마 자신들을 파견할 때처럼 그들에게도 악령을 쫓아내는 능력을 선물하신 것 같습니다. ‘시기심’이 발동한 요한은 어째서 예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 그 이름을 사용하느냐면서 핀잔을 줍니다. 다시는 자기 스승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요한은 기회를 봐서 예수님께 이 일을 알립니다. 처음에는 칭찬을 들을 줄 알았습니다.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배타심’을 훈계하십니다. 비록 그가 따르지 않고 있더라도 그 역시 ‘같은 편’이라고 타이르십니다. 그가 선한 일을 하고 있기에 막지 말라고 훈계하십니다. ‘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을, ‘닫힘’이 아니라 ‘열림’을, ‘특권’이 아니라 ‘공평’(公平)을, ‘독선’(獨善)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를, 한마디로 단절된 ‘나’가 아니라 연결된 ‘우리’를 일구려 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배타성’과 ‘닫힘’과 ‘특권’과 ‘독선’에 물들었다고 비판받는 이 땅의 그리스도교가 떠올랐습니다. 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단기간에 확산된 땅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불리고, 금란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불립니다. 천주교는 두 분의 추기경을 모실 정도로 교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는 이들답게 서로 힘을 합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정의를 세우고 평화가 되는 일들을 보다 활발히 펼쳐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그리스도교는 ‘교파 이기주의’와 ‘배타성’이 전 세계에서 으뜸처럼 보입니다. 분명 같은 편인데도 같은 편이 아닌 것처럼 정죄하고, 진리의 파편일 뿐인 교리를 가지고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네는 교회고, 다른 곳은 단지 신앙공동체일 뿐이라는 막말도 한심하고, 그들을 향해 마리아 우상을 섬기는 이단이라고 운운하는 꼴도 한심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교회는 성공회도, 천주교도, 정교회도, 기타 개신교회도 아닙니다. 그 교회 성직자나 수도자나 신자들은 그렇게 말할는지 몰라도 제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가 좋은 교회입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를 더 ‘사랑’(연민, 자비) 많은 사람으로 빚어가는 교회와 관계”들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이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천’으로 나타나는 ‘사랑’(연민, 자비)입니다. 그 실천적 사랑의 대상은 우선 내 눈앞에 있는 ‘너’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단지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내 눈앞에 있는 너를 행동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단지 한번에 한 사람씩만 사랑함으로써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너를 행동으로 사랑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인류’를 사랑하는 일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너’를 미워하지 않고 행동으로 사랑하는 일이 언제나 더 어렵습니다. 분명 ‘실천적 사랑’은 배우고, 훈련해가는 수행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내 앞에 있는 ‘너’에게 마음을 다 기울이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수행을 하다 보면 결국 모든 사랑의 본질은 자기죽음, 자기희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사랑이 ‘진정한 나’를 회복하는 길임도 깨닫게 됩니다. ‘배타심’, ‘닫힘’, ‘특권’, ‘독선’의 경계로 둘러쳐진 단절된 나를 실천적 사랑 수행 속에서 점점 버리지만,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이 역설. 잃어버릴 뻔한 진정한 나를 회복하게 해 주는 수행이 바로 실천적 사랑입니다.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보다 그런 사랑의 사람으로 빚어가고 있다면 분명 그 교회는 좋은 교회요 관계들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치의 원칙’을 가르치십니다. 이 일치의 원칙은 문학적으로 겸손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제자의 ‘정체성’을 세워주시는 말씀입니다. 넓은 의미로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절’(使節)이라는 뜻입니다. 이웃 종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웃이 ‘복을 짓는 밭’(福田)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마르 9:41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제자,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잔’을 줄 수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 운동에 공감한 사람입니다. 예수께 공감하고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물을 줄 때는 ‘예수의 이름’으로 줍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자신 이름으로 행해진 그 공감의 손길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에 공감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동참하는 아주 작은 봉사도 귀하게 보시겠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과 예수님은 둘 도 아닌 하나, 즉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치의 원칙’ 때문에 단지 물 한 잔이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친절과 선행은 ‘보상’을 받습니다. 사실 ‘물 한 잔’은 사소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 한 잔이 아니라 그 ‘마음’(정성)을 기억하십니다. 나누는 물질이나 친절(봉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손길에 담긴 ‘마음’을 보십니다. 더욱이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되갚음을 기대치 않고 베풀어진 어떤 친절과 선행이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하느님을 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빵을 나누어 먹고 같은 잔을 마시는 형제자매를 향한 실천적 사랑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사제 서품 선물로 받은 공동번역성서와 기자생활하는 교우로부터 선물받은 벤허>

저는 ‘물 한 잔’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면 ‘루 월리스’(Lew Wallace)의 소설 <벤허-그리스도 이야기> 속 장면들이 마음속에서 동영상으로 펼쳐집니다. 소설에는 세 차례에 걸쳐 ‘물 한 잔’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어디어디 나오는지 여러분도 한번 책으로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벤허>는 영화로도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큰 틀에서 영화는 원작 소설과 같지만 중요인물이 빠져있고, 흔히들 스펙터클한 전차경주 장면이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좀 두껍긴 하지만 한번쯤 책으로도 읽어보면 영화가 줄 수 없는 묘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다’가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해 가는 장면을 읽다보면, 저자의 내면에서 싹터 자라나는 믿음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월리스는 <벤허-그리스도 이야기>를 집필하기 전에도 신자였지만 그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이자 사실상의 무신론자였던 ‘로버트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l) 대령과 우연히(나중에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같은 기차에 타게 됩니다. 대화중에 하느님, 내세, 천국, 지옥, 악마의 존재를 믿는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월리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한 마디 대꾸도 못합니다. 그 날의 충격이 그가 그리스도교를 공부하며 <벤허-그리스도 이야기>를 집필하게 된 동기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그가 그리스도교를 정말 깊이 공부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영화로 보신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아서 소설 <벤허-그리스도 이야기>의 내용을 언급해 보겠습니다. 주인공은 ‘유다 벤허’(Ben-Hur)입니다. 히브리어로 ‘벤’(Ben)은 아들, ‘허’(Hur)는 그 가문 선조의 이름으로 ‘허의 아들 유다’, 또는 ‘허 가문의 아들 유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허’(후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느헤 3:9). 또한 ‘벤’은 오늘 복음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옥’의 히브리어 ‘게 벤 힌놈’(힌놈의 ‘아들’ 골짜기)에도 쓰입니다. 영화에서 압권이라 회자되는 ‘전차경주’가 있기 전 만난 ‘시모니데스’라는 유다 생부의 하인이 있습니다. 나중에 유다와 결혼하는 ‘에스더’의 아버지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던 무덤동굴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면 복음서의 지옥과 관련 있기도 하지만 ‘라헬’을 향한 ‘시모니데스’의 구애가 눈물 나도록 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서 ‘유다’와 예수님의 눈빛이 처음으로 마주친 곳은 ‘나자렛의 우물가’에서입니다. 유다는 친구 ‘메살라’의 음모로 갤리선의 종신 노예로 ‘홀로’(영화와는 다릅니다) 끌려가던 중입니다. 그를 끌고 가던 십인 대장과 병사들은 ‘우물가’에서 마른 목을 축이면서도, 탈진한 유다에게는 물을 주지 않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조롱박에 한가득 물을 퍼서 쓰러져 신음하는 유다에게 다가갑니다. 첫 번째로 그려지는 ‘물 한 잔’의 장면입니다. ‘연민’과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 그 사람의 눈길이 유다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되는 순간입니다.

<유다와 예수님의 첫 눈빛 교환>

갤리선의 노잡이가 된 유다는 해적과의 전투에서 익사 직전의 로마 사령관(나중에 집정관에 오릅니다) ‘아리우스’를 구해줍니다. 그는 유다의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었음을 알려주며 유다를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이제 아리우스 집정관의 아들로 견문을 넓힌 유다는 예루살렘을 떠난 지 5년여 만에 안티오키아에서 ‘시모니데스’와 ‘에스더’를 만나고, 드디어 오랜 숙적 ‘메살라’와 전차경주를 벌여 복수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으러 돌아온 유다는 그들이 ‘나병’에 걸렸다는 비참한 소식을 듣고 비통함과 절망, 로마를 향한 원한과 증오의 노예가 됩니다. 비밀리에 군대를 조직해 로마에 대항할 준비를 하던 그는 ‘왕의 사자’가 나타나 “‘왕이 곧 오실 것이라’ 외치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요르단강을 향해 떠납니다. 왕의 사자는 다름 아닌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요르단강에 이른 그는 세례자 요한이 한 사람을 향해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이라 증언하던 말을 들으며 그를 주목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그의 얼굴을 지켜보던 유다는 그가 바로 갤리선의 종신 노예로 끌려가던 자신에게 물을 준 ‘나자렛 사람’임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점차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납니다.

소설 마지막 즈음에 ‘물 한 잔’을 건네는 이야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 날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성지주일’입니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이 가까이 왔으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알리려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는 유다의 어머니 일행을 오솔길에서 만납니다. 그는 그들이 나병환자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길로 오실 것이니 꼭 치유를 간청하라고 전해준 뒤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돌아옵니다. 곧 해가 뜨거워질 테니 목이라도 축이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이 가득 찬 호리병을 어머니 손에 쥐어줍니다. 놀란 그들에게 자신이 한 것과 같은 일을 말과 모범으로 매일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전해줍니다. 잠시 뒤 그 길 위에서 벳파게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고 극적으로 유다도 만납니다. 며칠 뒤 예수님은 잡혀가시고 유다는 비밀조직을 통해 무력으로 예수님을 구해낼 생각까지 했지만 종국에는 그 방법마저 내려놓습니다.

소설 결말부에 세 번째로 ‘물 한 잔’을 건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하실 때 ‘물 한 잔’의 빚을 갚습니다. 물론 복음서와는 다른 상상력입니다. 유다는 나자렛 우물가에서 물 한 잔을 건네주신 그 장면을 떠올리며 ‘해면’을 집어 포도주를 적신 후 십자가의 예수님 입술에 대드립니다. 그렇게 그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켰고, 나중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카타콤’(초대교회의 비밀 모임장소)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이처럼 유다 벤허라는 한 인물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걸으며 복수의 집념과 증오의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내적 변화를 그린 구원 이야기가 소설 <벤허>입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꼭 필요한 순간 건네진 ‘물 한 잔’이 그를 ‘구원’으로 이끈 ‘영원한 생수’였던 셈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물 한 잔의 선행’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자맷돌: 죄짓게 된 사람보다 죄짓게 하는 사람이 더 나쁘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또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마르 9:42

예수님은 그 ‘일치의 원칙’을 선행뿐 아니라 유혹하여 죄짓게(걸려 넘어지게) 하는 악행에도 적용하십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미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행해진 아주 작은 친절(선행)도 예수님께 기억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41절). 그리스도인과 예수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을 ‘유혹하여, 그로 하여금 죄짓게 한 사람의 행위 역시 예수님께 기억한바 될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를 경고하기 위해 ‘맷돌’을 언급하십니다. 이 맷돌은 적은 양의 곡물을 손으로 가는 그런 작은 맷돌이 아닙니다. 많은 양의 곡물을 갈기 위해 소나 나귀가 돌리던 거대한 ‘연자맷돌’입니다. 그 맷돌을 자기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 하십니다. 쉽게 말해 ‘죄짓도록 사주한 그 사람은 자살해서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범위를 ‘그리스도인’으로만 한정하는 것이 과연 바른 해석일까요? 예수님의 사역하심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요한의 배타성을 질타하시고 포용성을 훈계하신 일을 생각해 볼 때 아닐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로부터, 가진 자들로부터 ‘무한한 행복 추구’에 방해된다며 ‘변두리로 내몰린 약자’들이라면 다 해당될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한 개인의 일탈보다도 (죄짓게 하는) ‘제도자체’가 약자들을 범법자로 만듭니다.

아시다시피 ‘제도’를 만드는 데는 관련 사회세력들이(기득권이라 부르지요) 갖고 있는 ‘이해관계’와 ‘가치’라는 힘이 작용합니다. 물론 1차적으로 제도는 우리가 겪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제도라 할지라도 ‘사각지대’는 있기 마련입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제도를 보완하거나 개선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고 외치지만 한번 만들어진 제도는 여간해서는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진짜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악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악마적 제도’인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짓누르고 죄짓게 해 온 대표적인 악마적 사회제도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제를 허락지 않았던 병역법, 장애인등급제, 장애인부양의무제, 비정규직 등이었습니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년 7월부터는 ‘장애인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개인 사정에 맞춘 의료, 복지 지원을 시행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증 신체장애인’이 지원을 더 받게 되고 ‘시각장애인’은 상대적으로 지원이 줄어드는 문제로 역차별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장애인부양의무제’도 ‘국가책임제’를 선언한 것이 아니기에 정부 발표처럼 ‘폐지’가 아니라 ‘완화’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인간을 한 인격이 아니라 이익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비정규직제’의 악행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동안 악마적 사회제도 하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겨운 투쟁과 희생이 있어왔습니다. 때로는 범법자가 되기도 했고,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악한 현실 속에서 울부짖으며 악마적 제도와 싸워온 그들에게 착한 이웃이었습니까? 혹시 세상을 주도한다는 강자들이 펼치는 ‘돈’의 논리에 빠져 약자들의 눈물어린 투쟁을 죄라고 정죄하는 데 동참해 오진 않았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예수님처럼 약자들을 편드는 교회여야 합니다. 섬뜩하지만 ‘연자맷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죄짓게 해도 괜찮은 보잘것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죄짓게 된’ 사람보다도 ‘죄짓게 한’ 사람, 집단, 세력, 제도는 더 나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죄지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잔혹하리만치 생생하게 경고하십니다(마르 9:43-47; 비교 마태 5:29-30). 다소 엽기적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악한 행위가 그 일을 수행하는 각각의 신체 부위나 기관에 관련되고, 거기에 뿌리가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령 ‘눈’은 교만, ‘혀’는 거짓말과 관련됩니다. ‘손’은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뿌리이고, ‘심장’은 악한 계교를 꾸미게 하는 뿌리입니다. ‘발’은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닫게 한다는 식입니다. 따라서 몸 전체로 ‘지옥의 불’ 속에 던져지기 싫다면 악행과 관련될 뿐 아니라 뿌리에 해당하는 해당 신체 부위나 기관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본문도 그런 사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자해’(自害)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원한 생명’,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룰 정도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비유로 새겨야 합니다. 첫 번째 제자도로 교훈하신 것처럼(마르 8:34-35),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자기희생’과 ‘자기죽음’을 감내하면서까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상징적 경고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신체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만큼 철저히 하느님 주신 몸이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교회사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극단적 신앙인들도 있었습니다. 가끔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헛소리를 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게 한다면 몸이 성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저 같은 사람은 잘라낼 몸이 남아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죄짓지 않기 위해서는 신체를 훼손하는 것으로도 결코 충분치 않습니다.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해서 그 손을 찍어버렸다 하더라도, 남아있는 왼손은 여전히 죄 지을 준비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제나 죄는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죄짓게 한 신체의 일부를 찍어버리며 점점 자기 몸을 최소화 하더라도 여전히 생각과 마음으로는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주님,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왼쪽에 ‘힌놈 골짜기’, 가운데 ‘티로포에온 골짜기’, 예루살렘 성전 오른쪽에 ‘키드론 골짜기’>

예수님은 오늘 ‘지옥’을 언급하셨습니다. ‘지옥’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게엔나’(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 벤 힌놈’을 번역한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게’는 골짜기, ‘벤’은 <벤허>에서 설명했듯이 아들, ‘힌놈’은 ‘애통’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에는 ‘벤힌놈(Ben-hinnom) 골짜기’라고 음역했는데(열왕하 23:10; 역대하 28:1-4),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위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남쪽에 걸쳐 있고 ‘키드론 골짜기’와 만납니다.

지난주일 1독서 배경 설명에서 유다의 선(善) 왕 ‘요시아’(BC 639-609년)의 종교개혁을 언급했습니다.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벌이기 전까지 백성들은 ‘벤힌놈’에 있는 ‘도벳’ 산당에서 불의 신 ‘몰록’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산 채로 제물로 바쳤습니다(예레 7:31-32). 요시아가 그 산당을 무너뜨린 뒤에는(열왕하 23:10) 장례가 허용되지 않은 ‘부정한’ 시체(나병과 같은 부정한 질병으로 죽은 자, 부랑자, 처형당한 죄수, 반역자 등)나, 동물의 사체, 쓰레기 등을 태우는 소각장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냄새는 물론 시체와 쓰레기를 태우느라 항상 불과 유황불이 타올랐습니다. 특히 불에 타들어가는 구더기들은 저주받은 운명에 대한 생생하고 효과적인 시각적 이미지였습니다. 이처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게 벤 힌놈’과 그리스어 번역인 ‘게엔나’(영어식으로는 게헨나)는 죄인들이 벌 받는 영원한 저주의 장소(이사 66:24), 즉 ‘지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벤허>에서는 ‘게엔나’ 남쪽 절벽에 나병환자 집단거주지가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곳이 ‘시모니데스’가 태어난 곳이자 나병에 걸린 유다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숨어살던 곳입니다.

<‘벤힌놈’에 있는 ‘도벳’ 산당에서 불의 신 ‘몰록’에게 아이들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침>, 예레 7:31-32

마르코에 따르면 ‘지옥’에 떨어진 이들의 운명은 너무나 끔찍합니다. 구더기가 파먹고 불도 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무시한 이들입니다. ‘일치의 원칙’과 ‘사랑의 계명’을 무시하고 죽음의 길로 달려간 이들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은총의 말씀을 ‘고의로’ 거부한 이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비록 강조하진 않더라도 그 맞은편의 영원한 지옥도 경고합니다. 아마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구원의 사람들이기에 굳이 가지도 않을 지옥을 알 필요 없다는 뜻에서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덜 강조하든 아니면 지나치게 강조하든 예수님의 교훈이 갖는 무게는 결코 줄지 않습니다.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시각화하여 전해주는 지옥의 참혹함은 결코 흐릿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 기자가 서신을 끝맺는 ‘마지막 한 줄’은 참으로 대단한 잠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그릇된 길, 즉 ‘영원한 죽음’(지옥)을 향해 가는 이를 한없는 ‘형제애’(자매애)와 ‘용서’로 돌아서게 하고,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합니다(야고 5:20). 그 분은 믿음의 본질을 “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정의했습니다(야고 2:14-26). 그런 분답게 ‘사랑과 용서’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1세기 교회와 그 후예들에게 교훈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형제를 하느님 나라로 데려올 수 있는 하나의 힘은 ‘우리’입니다. 그 분의 당부처럼 교회가 ‘서로를 위한’ 사랑의 사이인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이지 우리 교회가 서로를 향해 포기될 수 없는 사랑과 용서로 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룰 정도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경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바로 잡아줍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희생’이 아니라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알았다면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보상’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나라(영원한 생명)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희생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나라(영원한 생명)를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세 가지 은유를 말씀하십니다(마르 9:49-50). 첫째,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둘째,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셋째,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이 중에서 첫째 은유는 너무 짧아서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불소금’은 불과 소금을 합친 말이니 불과 소금의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이 갖는 상징은 ‘정화’, ‘시련’입니다. 불은 금속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마찬가지로 불같은 시련도 그리스도인을 단련시켜 믿음을 ‘순수’하게 만듭니다(이사 48:10; 다니 11:35; 즈가 13:9. 1베드 1:6,7). 소금의 상징은 ‘거룩함’, ‘정화’, ‘계약’입니다. 향(香)을 만들 때나 모든 제물에는 항상 소금을 넣어 ‘거룩하게’ 해야 했고(레위 2:13; 에제 43:24; 출애 30:35), 소금으로 더러운 물을 ‘정화’했으며(열왕하 2:20-21). 계약으로 소금이 언급되었습니다(민수 18:19; 역대하 13:5). 결국 불과 소금의 공통점은 ‘정화’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진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정화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정화의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지는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이라 표현했습니다(로마 12:1).

둘째 은유는 ‘본래 좋은 것이라도 변질되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니 그들의 ‘제자도’를 성찰하라는 요청입니다. ‘처음에’ 그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따라나선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예고 후에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제자도’를 가르치셨고(마르 9:34), 두 번째 수난예고 후에는 “섬기는 삶”을 제자도로 가르치셨습니다(마르 9:35).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기보다 반대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며 자기욕망의 노예로 점점 변질되고 있었습니다(마르 9:34). 예수님은 처음 마음에서 변질되고, 부패해 가는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처음처럼.” 제자가 제자다워야지 변질되면 따라나서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경고입니다.

셋째 은유는 둘째 은유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마르 9:33-34). 예수님은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서로 불화하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타이르십니다. 그 방법은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서입니다. 그들이 간직해야할 마음의 소금은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삶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제자의 맛을 간직한 삶입니다. 세상을 향한 착한 ‘의무’입니다(마태 5:13).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진정한 위대함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입니다. 진정한 힘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를 판단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병든 그의 치유를 위해 먼저 기도해 주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정죄가 아니라 용서의 화신이 되라고 존재합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라고 파송 받았습니다. 불화가 아니라 ‘화목’의 직분을 위임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예수 따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님과 하나로 연결된 몸의 지체들입니다. ‘물 한 잔’만으로도 세상에 ‘복’(福)을 날라다주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눈물짓는 약자들과 연대하며 ‘포용’, ‘열림’, ‘공평’, ‘더불어 함께’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죄를 철저히 물리치고, 우리 자신의 구원(영원한 생명)을 성령 안에서 완성해 가야 합니다. 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형제애(자매애)로써 ‘화목(평화, 샬롬)의 향기’가 풍겨나게 해야 합니다. 향기는 말하지 않아도 옆 사람이 먼저 압니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이 만들어내는 ‘평화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온 천지에 퍼집니다. 진정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느님 내신 수많은 민족
오묘히 지은 모든 생명
서로의 다름 주님의 솜씨
우리는 서로 존중하네
<성가 346장>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된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수술 후 회복중인 홍비비안나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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