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23. 연중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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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제자도-겸손히 가장 약한 이를 하느님처럼 섬기는 의도적인 수행’입니다. 1독서는 구약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장 잘 포개진다는 고난 속에 있던 ‘예례미야의 고백’입니다. 2독서는 욕심과 욕정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따라 살아가라는 야고보서의 교훈입니다. 복음서는 두 번째 수난예고와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은 이기적 야심과 욕심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꼴찌가 되어 어린이처럼 가장 약한 이를 겸손히 섬기는 일이 두 번째 제자도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이 제자도를 삶의 자리마다에서 겸손히 수행하는 지혜의 사람들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11:18-20
  • 시편 – 54
  • 2독서 – 야고 3:13-4:3,7-8상
  • 복음서 – 마르 9:30-37

연중 2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제자도-겸손히 가장 약한 이를 하느님처럼 섬기는 의도적인 수행’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십니다(마르 8:31-32; 9:31-32; 10:32-34). ‘수난예고’ 다음에는 공통적으로 제자들의 ‘몰이해’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의도적인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서는 두 번째 수난예고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의도적인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이 수난예고와 의도적인 제자도의 배경으로 구약 인물 중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가장 많이 포개지는 예레미야서가 선정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멸을 애도하는 예레미야> Rembrandt, 1630

1독서 예레미야는 흔히 ‘예레미야의 고백’(탄원)이라 불리는 본문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자신이 처한 ‘불의’(不義)한 상황을 탄식하며 피맺힌 절규를 토로하는 다섯 개의 고백록이 전해집니다(예레 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 본문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다소 복잡한 묶음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열왕기하 21장부터 25장을 먼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는 기원전 7세기 후반 ‘요시아’ 왕 때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후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에 이르는 4명의 ‘악한 왕’들을 거쳐 유다가 멸망한 6세기 초까지 약 40년 간 활동했습니다(예레 1:1-3; 열왕하 21-25장). 특이하게도 그는 자기 민족만을 위한 예언자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예언자’가 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예레 1:5,10; 25:15-38; 46-51장). 실제로 그는 격변하는 고대근동의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는 탁월한 식견(識見)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BC 627년 유다의 왕은 ‘요시아’(BC 639-609년)입니다. 고대근동의 맹주(盟主)였던 아시리아가 계속된 전쟁과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한 국력소모로 쇠퇴하고, ‘바빌론’이 강성해지던 과도기입니다. 그 과도기 때 ‘요시아’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다윗 왕의 옛 영화를 잠시 회복합니다(열왕하 22:8-13; 23:1-3, 21-30). 그러나 ‘므기또’(Meggido)에서 그가 아시리아를 도우려던 ‘느고 2세’를 저지하려다 전사한 후(열왕하 23:29) 유다의 권력가들은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사이에서 정치력을 발휘해 살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옹기장이와 진흙, 예레 18:1-12

예레미야는 민족의 살 길이 정치적 외교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정신’(신명 8:11-20; 27장; 28:15-68; 29:22-28)에 입각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거짓 예배와 우상숭배라는 허영과 변절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 외쳤습니다. 그 유명한 ‘성전 설교’(예레 7:1-8:3, 26:1-24)에서 생활태도를 고치라 선포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민족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선포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참회하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정의를 하루 속히 실천해야 합니다. 불순종을 돌이키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약 백성인 유다도 북이스라엘처럼 멸망할 것이고, 포로로 끌려가리라 선포했습니다(예레 7:14-15; 13:18-19:24; 18:6; 19:11; 21:10). 특히 고대근동 최강국으로 등극한 ‘바빌론’도 하느님의 택한 백성인 자신들을 돌이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종’(도구)이라 통찰했습니다(예레 27:6-22). 비가 올 때는 처마 끝에서 잠시 쉬어가야 하듯이, ‘바빌론의 우산’ 속에 들어가서라도(바빌론의 ‘멍에’를 메고서라도) 민족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예고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종노릇 할 것이지만(예레 13:18-19:24), 70년이 지나면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예레 25:11-12; 29:10). 이처럼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도 예언하였습니다(예레 30:1-33:26). 특히 예레미야는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과 ‘새 계약’(신약(新約)은 여기서 나온 명칭입니다)을 맺으실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그 새 계약은 ‘시나이산’에서처럼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법을 말합니다(예레 31:31-34). 우리는 이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있었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예레미야의 소명> woodcut from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s Picture Bible , 1860

예레미야의 선포를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에 이르는 4명의 악한 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여호야킴과 시드키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를 믿고 바빌론에 반기를 들다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운명 역시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언자로 처음 부름 받았을 때 그는 여러 가지 이의를 제기하며 거부합니다(예레 1:4-8). 그러나 하느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거부하던 그에게 ‘소명’을 주어 예언자의 길을 가게 하셨으면 좀 살살 다루시지 전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의 별명은 ‘눈물의 예언자’, ‘고난의 예언자’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멸망의 길로 치닫던 민족의 운명을 돌리고자 장가도 들지 않고(예레 16:2) 애썼지만 민족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왕들과 거짓예언자들과 귀족들과 백성들, 심지어 고향사람들마저 심판을 외치는 그를 매국노 취급하며 박해했습니다. 조롱과 핍박과 채찍질과 투옥과 죽음의 처지로 그를 내몰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본문에는 누가 무슨 이유로 ‘암살’ 음모를 꾸민 것인지 명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 이어지는 21절에는 누가 그런 일을 꾸몄는지 하느님이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판단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자기 민족 유다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이기에 결코 멸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심판을 외친다면 그는 민족을 거스르는 거짓 예언자라는 판단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이사 53:7; 예레 11:19

암살당할 곤경에 처했던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미리 알려 주셔서 겨우 음모를 면했습니다. 이 사실에 그는 먼저 감사로 자신의 고백(탄원)을 시작합니다(18절). 이어서 자신의 절박했던 상황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하며, 억울한 사정을 하느님께 탄원합니다(19절). 이 ‘어린양’의 상징은 오늘 전례독서들과 연결됩니다. 1독서에서는 예레미야 자신, 시편에서는 도망자 신세의 다윗, 복음서에서는 수난의 예수님과 연약하고, 순진하며 무력한 어린이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내몰린 이를 상징합니다.

그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결백을 탄원합니다(20절). 만일 자신에게 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어떤 벌도 달게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수를 갚아달라는 탄원입니다. 무죄한 자신을 암살하려던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 달라’는 호소입니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이러한 탄원은 ‘다섯 개의 고백록’ 모두에 이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무죄한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탄원 외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법이 그 역할을 해 줄줄 알았는데, ‘양승태 사법부 농단’ 기사들을 접하면서 어째서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반복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고백’이 1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처했던 그 절박했던 ‘고난의 상황’(19절)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고난 받는 야훼 종의 노래’(이사 53:7-8)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고난 받는 야훼 종의 노래’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서 성취되었다고 그리스도교는 해석합니다. 이처럼 예레미야가 탄원한 그 고난의 상황은 오늘 복음서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이어지기에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가 언급한 어린양은 예수님 자신일 뿐 아니라 섬김의 대상으로 언급하신 가장 무력한 존재로서의 어린이와도 연결됩니다.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 마르 14:22-25

사실 예레미야와 예수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유다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던 당대 최대 강국 치하에서 하느님 말씀(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에 붙잡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사역 초기부터 변절과 허영에 빠진 세대에게 담대히 회개를 선포했습니다(예레 1:16-19; 마르 1:14-15). 고향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했고(예레 11:21; 12:6; 마르 6:1-6), 장가도 들지 않았습니다(예레 16:2; 마태 19:12). 바룩(예레 36장)과 12제자로 대변되는 작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두었고, 하느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인들로부터도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니야’로 대변되는 거짓 예언자들로부터(예레 27:9-10,14-17; 28:1-11) 예수님은 원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마르 3:6; 루가 19:47; 요한 11:53). 신성불가침처럼 믿어지던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울었으며 파괴를 예언했습니다(예레 7:14-15; 마르 13:2). 동족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박해를 당했으며, 불의하게 체포되어 모진 고난을 받았습니다. 형식이나 고정화된 전례가 아니라 ‘내면(마음)의 변화’와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 ‘새 계약의 복음’을 가르쳤습니다(예레 31:31-17; 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고린 11:23-26). 예화와 비유로 당시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능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하느님께 받은 사명마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는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다> 예레 38:1-13

이렇듯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고난의 예레미야를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형(豫形)으로까지 가르쳐왔습니다. 실제로 그의 삶은 수난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가르침’(마태 5:38-48)과 십자가 위에서 바친 ‘용서의 기도’(루가 23:34)를 묵상해 보면 그와 예수님은 의식수준이 비교불가라 보는 것이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예레미야는 자신을 무고(誣告)한 동족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 호소한 반면,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가르치셨고,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의 삶을 묵상하면서 다짐해야 할 신앙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나,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가라는 곳으로 갔고, 하느님이 전하라는 말씀을 살아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라는 ‘궁극적 사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오해나 모함, 조롱이나 핍박이라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거기서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꿋꿋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그런 고난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을 부르신 ‘위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고난은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이 보내시는 자리마다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 사명을 꿋꿋이 잘 완수하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54편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시(詩)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다닐 때입니다(1사무 23:15-24; 26:1-5). 전반부는(1-3절) 고향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암살하려 했던 것처럼, 악인(원수)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던 도망자 다윗이 탄원하는 ‘애가’(哀歌)입니다. 예레미야가 언급한 어린양처럼, ‘가장 힘없는 사람’으로 내몰린 다윗의 탄원입니다. 다윗은 예레미야처럼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후반부는(4-7절) 다윗이 예레미야처럼 하느님께서 자기편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의 기도와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주위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동서남북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억울한 처지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괴로워서 스스로를 누구도 다가올 수 없는 ‘섬’으로 만들며, 신앙마저 내버리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다윗처럼, 도우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간직한다면 ‘하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공정하신 주님께서 건져주시고, 눈물은 어느 새 감사의 노래로 바뀔 것입니다. 진정 그리 될 것입니다.

<사울왕 앞에서 연주하는 다윗>

2독서 야고보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제자도-겸손히 가장 약한 이를 하느님처럼 섬기는 의도적인 수행’이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13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을 동반하는 ‘믿음’을 주장한 사람답게 ‘생활의 증거’, 즉 ‘실천’을 강조합니다(13절). 자칭 “지혜 있다, 총명하다, 이해력이 높다”는 이들의 말은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할 때에 그의 사람됨이 증명됩니다. 반면에 온유함과 착한 생활이 없는 말이나 행실은 단지 잘난 체(거만함)와 거짓말일 뿐입니다(14절). 그렇습니다. 온유함과 착한 생활의 수행 없이 거만함에서 나오는 지식은 ‘독’(毒)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무엇이 참된 지혜인지 언급합니다. 그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입니다. 세속적이고,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지혜와 비교합니다(15절). 간단히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과 ‘육체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입니다(갈라 5:19-23). “위에서 내려온 지혜”는 “온유, 순결, 평화, 친절, 유순, 자비, 착한 행실, 편견과 위선이 없는 삶”에서 드러납니다(17절). 특히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둡니다.”(18절) 그렇습니다. 항상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법”입니다(시편 85:10). 이번 제 3차 남북회담 슬로건으로 민주당이 “평화가 경제입니다”를 내세웠습니다. 시대상을 반영한 ‘경제’라는 두 글자였지만, 가진 자들의 욕심만 더욱 키워주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이어서 야고보서 기자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싸움과 분쟁의 원인에 대해 답합니다(야고 4:1).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 다른 말로 하면 욕정과 욕심이 모든 악한 행실의 근원입니다(야고 3:16; 4:1b-2). 복음서와 연결하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을 돌아보라는 회개의 교훈’입니다. 마음을 순결히 하여 악마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살피고(야고 4:7), 겸손히 하느님께 간구하라는 교훈합니다(야고 4:8). 정말이지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답게 인간 심리의 본질과 관계를 꿰뚫는 탁월함이 돋보이는 성경입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다시 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96

이런 전례독서의 이해를 바탕으로 복음서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예고’를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무력하게 고난을 겪거나 죽어서는 안 되고 강한 힘으로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유다 백성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 일행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이사 와 살던 집일 겁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로 ‘길’에서 그렇게 소란스러웠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오는 길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지를 두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참 스승을 쫓아다닌다던 다 큰 어른들이 다투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꼭 어릴 적 형제들(자매들) 간에 다투다 시장에 다녀온 어머니께 들킨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도, 어머니는 자녀들의 얼굴 표정을 통해, 씩씩대는 호흡을 통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이를 통해,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채십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아마 그들은 집에 다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어도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 다툰 사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마르 9:33

집안에 흐르는 공기가 탁하다는 것을 느끼신 예수님은 열 둘 모두를 곁으로 부르십니다. 두 가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둘 다 ‘제자도’에 해당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b

예수님이 꿈꾸는 세상이자, 이 세상 가치의 전도(顚倒)입니다. 사람들이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첫째는 둘째, 셋째, 넷째보다 ‘힘’(돈, 정보,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습니다. 힘을 적게 가진 사람이 많이 가진 사람을 섬기는 일을 당연시 합니다. 세상에서는 섬김을 받는 일이 위대함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힘을 갖기 위해 불철주야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겸손한 섬김이 위대함의 척도입니다. 2독서 야고보서와 연결하자면 이기적인 야심이 없는 사람, 욕정과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섬기려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그런 제자를 예수님은 빚고 조각하고 싶었습니다.

그 가르침 후에 예수님은 앞의 가르침에 대한 시청각 교육을 하시려는 듯 어린이 한 명을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오늘날 사람은 누구나 존귀합니다. 하지만 1세기에는 어땠을까요? ‘어린이’는 종종 무시당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장 힘없는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격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소유물로, 상품처럼 팔려나가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어린이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린이를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라”(데코마이 δέχομαι, 받다, 영접하다, 환영하다, 인정하다)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의도적’(고의적)인 행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 보잘 것 없다며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 힘이 없어 무시당하는 변두리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고의로) 환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며, 겸손히 섬기는 일은 곧 바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일입니다(마태 25:40).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를 가장 약한 사람들과 동일시하십니다. 더욱이 그 행위는 하느님 아버지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이런 ‘제자도의 수행’에 ‘의도적으로’ 몰두해야 할 그들이 잘난 체하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를 두고 다투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고 있는 ‘의도적’이라는 말의 무게를 잘 생각하십시오. 어린이(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환영하는 일은 결코 ‘저절로’,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꿰뚫은 것처럼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 욕정과 욕심에 끌려 다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고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훈련해 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자가 꿈꾸는 삶은 제일 높은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군림하는 위치의 사람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 특히 가장 취약한 사람을 ‘의도적으로’(고의로) 겸손히 섬기는 사람이 되는 일이 제자의 삶입니다. 교회생활에 적용하면 그리스도의 지체들 중에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고의로) 돌아보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심은 ‘어린이’에게 가 있지 않았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제국을 전복시킬 위대한 ‘메시아’에 관심했습니다. 그들은 어린이가 아니라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힘센 메시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가르침으로써 자신을 어린이, 즉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동일시(연대)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까? 힘센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의도적으로’ 환영합니까? 혹시 우리는 야고보서 기자가 혐오했듯이 의도적으로 부자를 환영합니까?(야고 2:1-4) 정치인 같은 세상의 유력자들을 의도적으로 환영합니까? 예수님은 어린이, 즉 가장 취약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환영하는 일이 당신을 환영하는 일이라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대단한 위세를 갖는 종교권력이 되었지만, 한 때 교회는 어린이와 같았습니다. 로마 황제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박해를 받았고, 멸시를 받던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언제든 가장 연약한 어린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다음의 이야기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도로 가르치신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일”, 그리고 “어린이를 내세우신 일”은 두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 주님이 이 세상을 위해 하려고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셨고, 어린이처럼 세상 권력가들로부터 천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제자들이 오해했듯이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국을 차지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의 사명을 수행하러 오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뿐 아니라 어떤 인류도 상상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세상의 생각과 가치를 거꾸로 뒤집은 일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류의 원수인 ‘죽음’ 자체를 물리치러 오셨습니다. 죽음은 십자가에서 패배합니다. 죽음은 부활에서 완전히 정복당합니다. 비록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난예고’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레미야는 예수님처럼 공정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이 맡기신 사명을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완성했습니다. 성시의 시인 역시 배신과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억울한 처지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며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켰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쫓아 행하라 교훈했습니다. 욕심과 욕정을 채우기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기도하라 교훈했습니다. 이 지혜를 선물 받은 이들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일로 불러주신 제자의 삶을 잘 수행합니다. 가장 약한 이들 속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며 투신합니다. 핍박이나 고난이 닥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아무쪼록 성찬례에 참여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섬기는 사람’으로 불러주신 그 ‘제자도’를 ‘의도적으로’ 잘 수행하는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배고픈 이웃을 안으시고
주께서 굶고 계시네
우리가 먹일 때까지
성가 355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된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세계적인 도움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해외 출장중인 클라라 교우의 안전과 보람된 연수를 위해 기도합시다.
  9. 수술 후 회복중인 비비안나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1.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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