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16. 연중24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용기를 내어 고달픈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라’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원하여 수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로써 생명에 이르는 길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도 교회가 물려준 이 ‘복음’을 굳게 믿고, 예수님처럼 타인을 중심에 두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용기를 성령께서 선물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를 도우시어 서로 용서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0:4-9상
  • 시편 – 116:1-9
  • 2독서 – 야고 3:1-12
  • 복음서 – 마르 8:27-38

연중 2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용기를 내어 고달픈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라’입니다.

1독서 이사야는 제 2이사야(40-55장)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제 2이사야 본문이기에 시대 배경은 바빌론 포로생활이 끝나갈 무렵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바벨론에서 포로로 두 세대 이상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쳐 더 이상 구원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절망입니다.

“바빌론 포로생활에 지친 유다인들”

먼저 제 2이사야는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40장). 이제 그들은 모든 ‘죄과’(罪科)를 용서받았습니다. 심판과 분노, 저주와 절망의 관계는 청산되고, 자유와 회복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한마디로 ‘제 2출애굽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뭘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그들의 운명을 반전시킬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로 얼굴을 향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운명의 반전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와 언약의 신실성 덕택입니다. 따라서 제 2이사야는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여 죄의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 기간이면 충분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고, 이제는 구원과 위로를 받을 때라고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이스라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이처럼 40장부터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전환되고, 이것이 55장까지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점 때문에 구약학자 ‘버나드 둠’(Bernhard Duhm)은 이사야 예언서를 3부분(1-39장, 40-55장, 56-66장)으로 구분했고, 대부분의 구약학자들도 그의 구분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제 2이사야를 시켜 이 모든 ‘임무’를 성취할 ‘야훼의 종’, 즉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제 2이사야에는 4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42:1-4; 49:1-6; 50:4-9; 52:13-53:12). 본문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야훼의 종’은 고난 중에서도(6절)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먼저 야훼께 청종하며(4절), 자신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야훼를 신뢰하고 의지합니다(7절). 놀랍게도 그의 고난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8-9절). 그 고난은 하느님이 주신 위로와 희망의 임무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원’(自願)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6절). 야훼의 종이 ‘자발적으로’ 받는 고난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기에 복음서의 배경 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노래’를 읽던 내시는 필립을 마차에 태웁니다”, 사도 8:26-38

특히 야훼께 청종하는 종의 ‘태도’(성품)는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포개집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고달픈 인생’들은 하나 같이 그 ‘말씀’(지혜)에 감동을 받고 격려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학자 같은 지혜의 말솜씨를 익혀 주시고, 고달픈 이들을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지혜)을 가르쳐주시기(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시편 116편은 ‘죽음의 올가미’에서 건져주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찬미합니다. 1독서 ‘야훼의 종의 노래’에 대한 응답입니다. 시인은 야훼를 향한 믿음의 확신을 회중 앞에서 먼저 선포합니다(1-2절). 한 때 그는 ‘저승(스올)의 문턱’까지 다다른 절망적인 처지에 있었습니다(3절). 그는 하느님께 ‘믿음’으로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4절). 그 신뢰의 근거는 ‘하느님의 성품’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시며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5절). 하느님은 미약하고 고달픈 그를 위해 몸소 행동해 주셨습니다(6-7절). 죽을병에서 회복되어 평안을 되찾은 시인은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신뢰를 선포합니다(8-9절).

우리가 이 시편을 묵상하는 이유는 시인의 찬미가 ‘수난의 예수님’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마태 27:46, 시편 22:1). 그러나 그 신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참혹한 고통 속에서 건짐을 받지 못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뢰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흘 만에 예수님을 영원한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이 시편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미약하고 고달픈’ 인생들이 신뢰할만한 너그럽고 의로우시며 자비하신 분임이 증거 되었습니다. 특히 시인은 그 처지가 죽을 만큼 고달픈 중에도 ‘말’을 조심했습니다. 말로써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했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향한 그 ‘신뢰의 말’ 한마디가 죽어가는 그를 살렸습니다.

 

2독서 야고보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용기를 내어 고달픈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 3:8

야고보서 기자는 ‘혀를 다스리라’는 교훈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사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미 ‘혀’를 억제하지 않는 위험성(1:19b,26)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야고 1:19b,26

오늘 본문에서 그는 이 주제를 더 발전시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교회의 선생’(교사)임을 밝힙니다(1절).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특히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자신의 ‘지식’으로써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 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그는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악마의 종이 됩니다. 따라서 ‘선생’(교사)이 되려는 이들은 스스로를 삼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제(司祭)로 살아 온 제 자신을 성찰합니다.

<성공회기도서>는 ‘관할사제 취임식’ 2양식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서약하며 신임 관할사제(司祭)를 영접하게 합니다.

우리는 (    ) 사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 교회를 위하여 말씀과 성사를 충실히 거행하도록 합법적으로 선임되었음을 믿고, 그를 우리의 ‘목자’와 ‘교사’로 영접하며, 그의 직무를 수행할 때에 성심으로 도와줄 것을 서약합니다.
성공회 기도서 796 쪽

또한 ‘관할사제 취임식’ 1양식은 관할사제의 직무를 좀 더 세분화해서 신자들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 보여줍니다.

신자회장은 ‘성서’를 관할사제에 증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사제회장은 ‘성작’(聖爵)과 ‘성반’(聖盤)을 증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작과 성반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빵을 떼고 잔을 축복하여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제’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신자가 ‘영대’(領帶)를 증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영대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성공회기도서>는 관할사제의 직무를 ‘설교자’(교사), ‘사제’, ‘목자’로 분명히 명시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에 비추어 이 세 단어를 묵상해 봅니다. ‘설교자’(교사)의 본질은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먼저 듣는 자입니다. ‘사제’의 본질도 가르치는 자가 아닙니다. 먼저 배우는 자입니다. ‘목자’의 본질도 길을 인도하는 자가 아닙니다. 먼저 인도함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관할사제로 살아온 제 삶을 돌이켜보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먼저 들으려하기보다 말하기를 앞세우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었습니다. 먼저 배우려하기보다 가르치려는 교만을 떨다가 신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청종하기보다 앞서 나가는 실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야고보서 기자는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는다.” 경고합니다. 이 엄위하신 말씀 앞에서 낯을 들기가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어리석게 살아오면서 여러분을 아프게 한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용납해 주시고 날마다 기도해 주신 교우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제가 이 ‘거룩한 직무’를 바르게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재주를 부리는 말솜씨가 아니라 1독서 말씀처럼 고달픈 이들을 다정한 말로써 격려하며 ‘교사’(설교자)와 ‘사제’와 ‘목자’의 직무를 다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혀’에 대한 야고보서의 ‘잠언’은 저뿐 아니라 모두에게 언제나 진실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혀는 인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야고 3:2,5,8-9

우리는 주로 말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상대방의 메시지를 전달 받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것도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시편 기자는 “입에 문지기를 세워주시고, 말문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시편 141:3) 그만큼 한번 입을 나간 말은 되돌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어떤 말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정말이지 말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 말로써 마음을 열리게 할 수도 있고, 닫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말 때문에 한 번 깨어진 마음은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을 할 때는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에 따르면, 우리가 말실수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 드리듯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10절). 모든 말과 행동을 하느님 뵈옵듯 하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 나눔을 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27-30절). 둘째 단락은 예수님의 첫 번 ‘수난예고’와 ‘베드로의 몰이해’입니다(31-33절). 셋째 단락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에 비추어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경고하시는 ‘제자도’입니다(34-48절). 전부 전례독서 주제인 ‘용기를 내어 고달픈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라’와 연결됩니다. 한마디로 ‘살아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예수님,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5-1523)”

첫 단락은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27-30절).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가이사리아’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가이사리아’(Caesarea)라는 지명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리아’로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BC 73년경~BC 4년)이 로마의 ‘첫 황제’(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재위 BC 27년∼AD 14년), 일명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를 기념하여 세운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의 아테네와 더불어 지중해 3대 항구로 불릴 정도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유대 총독부’가 있던 곳이고(사도 23:23-35), ‘빌라도’도 그곳에 상주(常駐)하다 명절엔 순례자들로 붐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다른 하나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Caesarea)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 일행이 향하던 곳입니다. 이 도시는 갈릴래아 북동쪽에 있던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인 ‘헤로데 필립보’가(루가 3:1, 재위 BC 4~AD 34년) 로마의 2대 황제(가이사르, 그리스어로 카이사르) ‘티베리우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재위 14년~37년)를 기념하여 세웠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가이사리아’(사도 23:23-35)와 구별하기 위해 자기 이름인 ‘필립보’를 붙였습니다. 자기 아버지 헤로데 대왕을 따라한 셈입니다. 특히 이 도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간과 양(염소)을 합친 모습의 ‘목축’ 신(神) ‘판’(Pan, 사람에게 악몽과 공포를 불어넣어 주는 신으로 영어로 ‘공포’(공황)를 뜻하는 panic이 여기서 왔습니다)을 섬기는 ‘신전’(神殿)이 있던 곳이며, 많은 우상을 섬기던 곳입니다.

이렇게 ‘판 신’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에서(오늘의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마르 8:27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는 ‘소문’이 돈다고 전해드립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기적을 많이 베푸신 분이니 종말에 때에 다시 온다던 ‘엘리야’나 ‘예언자’ 같은 분이라는 소문은 있음직합니다. 정작 ‘세례자 요한’이라는 소문은 다소 의외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월의 간격을 두고 살아온 사이가 아니라 같은 시대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 생각한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던 이들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점만으로도 당시 예수님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위대한 인물은 당시의 부패한 권력가를 향해 일어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민족의 개혁가’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을 대항해 일어섰습니다(열왕상 18:16-19). 세례자 요한은 부패한 영주인 ‘헤로데 안티파스’를 대항해 일어섰습니다(마르 6:17-18). 이런 소문을 통해 당시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부패한 권력을 타도해 줄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민족적인 어떤 특별한 인물, 즉 ‘메시아’를 줄기차게 희망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묻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처음부터 하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르 8:29a

그 때 베드로가 나섭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르 8:29b

베드로도 예수님을 칭송하는 소문을 들은 바 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체험한 바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언자 그 이상의 분입니다. 민족의 정신을 개혁하려는 분이나 기적을 베푸는 분이라는 칭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라고 엄청난 말을 쏟아냅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그는 그 ‘말솜씨’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칭호를 긍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마르 8:30).

사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은 옳지만 오해될 수 있는 칭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민족적인 영웅입니다. 주로 다윗 왕과 같은 인물로 상상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개조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며, 의로운 왕국을 세울 가장 이상적인 ‘왕’입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자가 되어 적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초인적인 인물로 상상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오해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둘째 단락은 예수님의 첫 번 ‘수난예고’(受難豫告)와 ‘베드로의 몰이해’(沒理解)입니다(31-33절). 이제 예수님은 ‘첫 번’ 수난예고를 하시며 자신의 ‘사명’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라는 칭호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지칭하십니다. 마르코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십니다(마르 8:31-32, 9:31-32, 10:32-34). 이 ‘수난예고’ 다음에는 공통적으로 제자들의 ‘몰이해’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제자도’를 가르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수난은 ‘메시아’가 겪어야 할 일이며, 이 같은 사실을 1독서에서 살펴본 ‘야훼의 종의 노래’(특히 이사 53:3-12)들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의’(他意)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自願)하여, 즉 자발적 선택에 근거한 ‘자기희생’입니다. 그 수난으로써 예수님은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반드시 있어야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죄에 대한 궁극적인 예시이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고, 죽음 후에는 반드시 부활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난예고’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그 다음은 ‘부활’이라는 ‘전말’(顚末)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이러한 수난예고가 어떻게 들렸을까요? 예수님을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로 기대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예고였습니다. 정말이지 ‘고난당하는 메시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함’이 아니라 ‘강함’의 상징이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대표하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수난’으로써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예고는 예수님이 ‘범죄자’ 취급을 받을 것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대에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는 어떤 이들입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최고 법원’(또는 의회) 격인 ‘산헤드린’ 구성원입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도층이고, 명성이 자자한 높은 사람들이며, 권력가들입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 죽어야 할 정도라면, 예수님께 큰 ‘죄목’(罪目)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는 마치 다른 동료들의 대변자라도 되는 냥 나섭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그였지만, 예수님을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이 ‘틀렸다’는 ‘항의’입니다. 좀 거칠게 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나올 수 없다”(야고 3:11)고 교훈하는데, 그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가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틀린 말을 할 만한 가장 정확한 순간을 붙잡아내는 기발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속내를 드러내면 이렇습니다.

선생님, 그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이 만일 범죄자 취급을 받고 생을 끝내버리신다면 지금껏 따라다닌 우리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지금 잘못하시는 겁니다.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일은 하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더 깊은 속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자신이 붙여드린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칭호에 맞게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러고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패한 현실 권력가와 대항할 수 있는 ‘정치적’ 인물(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로 생각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매몰차게 꾸짖으십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고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b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가 ‘펄쩍 뛰었다’고 할 때의 그 기세(氣勢)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전령’으로서 일했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던 그는 ‘하느님을 위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마태 16:17).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사탄의 전령’으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라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사탄’(적대자)이라는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악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악마적인 영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탄을 위하여’ 말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마르 8:33). 분명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인간적 사랑 때문에 말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사탄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선하신 도구가 되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훨씬 더 빈번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마에 동조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본래 그리스어로 ‘사탄’은 재판정에서 ‘검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검사의 책무는 피고인에게 잘못(죄)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한 것은 ‘검사여!’라는 뜻입니다. 마치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을 대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뭔가 ‘잘못’하고 있는 분으로 몰아붙였다는 뜻도 됩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예수님께 잘못이 있는 것처럼 ‘까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에서 십자가 수난의 사명을 막으려는 그런 사탄의 목적이 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 목적이 성공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물러가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은 “가! 내 뒤로”(Hypage opiso mu)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마르 1:17, 20; 8:34 참조)는 주님의 부르심을 다시 듣고 있는 장면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를 따르라”는 원문에 “내 뒤로!”(opiso mu)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그 유명한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셋째 단락은 ‘제자도’입니다(34-48절).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비추어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르 8:34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시려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새 계약의 자녀답게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엄숙한 요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언급하셨을 때 군중과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에 반역한 ‘정치범’(국사범)을 처형하는 끔찍스런 ‘사형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처형 장소까지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습니다(요한 19:17). 당시 권력이 예수님께 걸어 넘긴 ‘죄목’도 ‘국사범’과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총독 입장에서는 종교적인 차원의 ‘신성모독’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 했다는 고발은 총독에게 골칫거리였습니다.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수세기가 흘러 그리스도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면서 십자가는 끔찍스런 처형 도구에서 정화되어 전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에 십자가는 죽음 외에 다른 목적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날마다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형 터, 즉 일방적인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나 단지 전례만을 위한 도구가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세상에서 자기 욕망에 대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며 그 어떤 조롱과 멸시도 감내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자기를 버리고(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요구는 똑같은 표현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도 아니었고,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수단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자기를 버리는”(부인하는) 일은 ‘금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성훈련’ 차원에서, 때로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음식이나 활동을 포기하는 ‘금욕’(극기)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는”(부인하는) 일은 ‘자기 유익’을 위한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버리는” 일은 자기가 중심이 아니라 ‘타인을 중심으로’(고달픈 이들) 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는 이 같은 행동을 가장 완벽하게 성취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요구는 더욱 극명하게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고난)’과 ‘자기죽음’을 보여줍니다.

이 ‘제자도’ 앞에서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한국교회를 오염시켜온 ‘자기번영’, ‘자기성공’의 신앙도 ‘제자도’ 앞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지난 주간 세계 최대 장로교회라 알려진 명성교회 부자 세습을 교단 총회에서 제동을 걸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교회 원로목사는 이 일을 두고 ‘기획’ 세력 운운하며 “마귀”라는 비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며 덕스럽지 못한 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한국교회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원로목사는 세습을 정당화하기에 앞서 ‘대형교회 십자가론’을 교인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비판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아들에게 교회를 맡기는 것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는 고통스런 일과 같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교회 목회자들 사이에서 그런 십자가라면 자신이 지고 싶다는 자괴감 섞인 말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런 옹색한 설교로써 스스로가 ‘탐욕’과 ‘세상의 가치관’과 ‘특권’에 물들었던 목회자요, 마귀에게 동조해 온 세력임을 공공연히 증명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대형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또 그런 부끄러운 결정에 대한 자성(自省) 없이 축복과 평안만을 간구하는 입술은 이 ‘제자도’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1945년)라는 분이 있습니다. 독일 루터교회 목사요, 신학자며, 히틀러 암살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옥살이를 하다 순교하신 분입니다. 그는 악에 저항하지 않고 ‘나치당’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히틀러를 구원자로 숭배하던 독일 제국교회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나치당’에 영합(迎合)했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했습니다. 고난의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 신앙, 신학, 삶은 ‘값싼 은혜’이자 교회를 죽이는 일이라며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순교했습니다. 독재자와 손잡고 이 땅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침묵하며, 교세 성장에만 앞장섰던 한국교회의 ‘자칭’(일부) 원로들과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권력자의 조찬기도회에 초대받기 위해 줄을 대던 거짓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과 ‘삶’을 일치시킨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고, 20세기 인물 중 예수님의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서 본문으로 시작하는 그의 책 「The Cost of Discipleship」(국내 출판: 나를 따르라) 제 1장, 4절 Discipleship and the Cross(제자도와 십자가)’에서 ‘제자도’를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우리 앞에 놓인 너무나 힘든 길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시니, 그분을 굳게 붙들라는 것이다.
(To deny oneself is to be aware only of Christ and no more of self, to see only him who goes before and no more the road which is too hard for us. Once more, all that self-denial can say is: “He leads the way, keep close to him.”)
「The Cost of Discipleship」, “4. Discipleship and the Cross”, p.43.

본회퍼 목사에 따르면 “자기를 버린다.”(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탐욕에 물든 ‘옛 사람’과 ‘세상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오직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로(중심으로) 알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고, 어떻게 사셨기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당시의 권력과 영합(迎合)하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그들의 삶은 위선이며,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르 12:38-40; 마태 23:2-36; 루가 11:37-52, 45-47).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병자와 장애인, 여성과 이방인, 과부와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지는 정죄와 편견, 차별과 멸시에 저항하셨습니다. 더 큰 ‘선’(하느님 나라)이 통치하는 세상을 위해, 타인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한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란 앞서 가신 스승처럼 ‘행동’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지 단지 지식을 듣기만 하거나 알기만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불의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고달픈 인생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신 예수님을 입술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자기화’(自己化)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행동으로 봉헌’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지금도 고달픈 인생들 속에 함께 계시며 거기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안락’(安樂)을 버리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타인의 고달픈 삶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는 일, 그 ‘좁은 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삶)라는 본회퍼 목사의 고백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처음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걷는 그 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미 그 길로 가고 있기에 제자로 따르려는 사람은 ‘심사숙고’하라고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계속 따를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 둘 것이지 양자택일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이렇게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르 8:35-38

우리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가 명백해 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우리가 ‘생명’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코앞에 두신 분이 죽음과 멀리 있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서, 박해시절을 살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오늘의 우리를 향해서 약속하시는 ‘생명’의 길입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에게 있어서 ‘목숨’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그 ‘절대적’ 목숨을 당신께 ‘봉헌’하라고 오늘도 요구하십니다. 그 목숨을 ‘옛 사람’의 완성과 ‘세상 가치’의 실현을 위해 봉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봉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도’는 ‘옛 사람’과 ‘세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 ‘자기희생’입니다.

“최후의 심판, 프라 안젤리코, 1435년”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목숨’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장차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시어 ‘준엄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38절). 그 날 우리의 ‘목숨’이 완성에 동참하느냐 아니냐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했느냐에 따라 판결날 것입니다(참고 마태 25:31-46).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고달픈 인생길을 걷는 이들 편에 서 준 ‘믿음의 실천’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판결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 목사는 옳았습니다. 그 분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짐” 없는 구원과 영생을 말하는 이들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느님의 ‘절대적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역사 속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목숨은 완성됩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제자도’를 감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십자가는 항상 개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다고 깨달은 이가 짊어집니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큰 진리(眞)’, ‘큰 선(善)’, ‘큰 아름다움(美)’이라 부릅니다. 아마 이 모두를 수용하는 말이 ‘큰 생명’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나’, ‘복음’, ‘말씀’이라 합니다(35절, 38절). 큰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 ‘제자도’를 감행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 덕택에 ‘나로부터의 자유’라는 빛을 발견한 이들이 ‘제자도’를 감행합니다. 큰 진, 선, 미(眞, 善, 美)를 향한 이타적 ‘자기희생’으로의 부르심을 온전히 깨달은 이들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 그 분을 ‘중심’으로(전부로) 사는 행동이 ‘자기를 버리는 일’입니다. 좀 더 현실화하면 자기가 중심이 아니라 ‘타인을 중심으로’(고달픈 이들) 사는 행동이 자기를 버리는 일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피부 바깥은 전부 타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는 이 같은 행동을 가장 완벽하게 성취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도 아니었고,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수단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완전한 ‘자기죽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십자가라는 자기죽음을 통해 ‘참 생명’이 왔습니다. 먼저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한 알의 씨앗은 땅에 묻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을이 오면 결코 그 씨앗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밀알뿐 아니라 나비는 부활의 상징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온 세상을 얻고도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36절). 복음서에 보면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절함으로써 손쉽게 온 세상을 얻을 기회를 가지셨습니다(마태 4:8-9). 그래서 예수님이 절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선택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다시 말해 십자가라는 자기 죽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목숨을 생명으로 완성하는 길과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마태 4:10-11).

그렇습니다. 교회사는 예수님 말씀대로 산 이들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 증언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예수님과 복음 말씀을 위해 바치고, 또 타인 중심적인 사람으로 사는 일은 우리의 목숨을 허비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히 생명에 이릅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또 ‘신앙의 길’은 이 세상에서 영광과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멸시와 조롱 속에서 처형된 예수님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길입니다. 만일 이러한 길을 걷는 삶이 부끄럽다고 피한다면, 다시 말해 스승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면, 마지막 날 영광의 왕으로 오실 ‘사람의 아들’도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부유하고 힘센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성육신 하셨다면 예수님 곁에는 힘센 위선자들로 넘쳤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갓난아이로 오셨고, 고달픈 이들의 벗으로 사셨습니다. 어부나 이방인, 병자와 장애인들과 어울리셨고, 스스로 의롭다고 위세를 떨던 위선자들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편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습니다(38절). 만일 우리가 이 절개 없고 죄 많은 세대에 저항하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과 함께 영광 또한 차지할 것입니다. 한 때 독재자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마저 이용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탐욕스런 종교인들이 동조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다면 독재자가 세운 제도나 질서에 복종해야 되는 것인 냥 가르쳤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의한 권력과 질서(제도)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신체적 억압에 저항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불안을 조장하고, 가진 이들의 가치를 강요하는 세상에 저항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비인간적인 전통에 저항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인간적 존엄을 훼손하는 일들에 저항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노예로, 사탄의 노예로, 세상의 노예로 살던 이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거짓 주인들을 향해 저항하는 용기를 오늘도 북돋아 주시는 참 주인이십니다.

오늘 이 성찬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이의 ‘목숨’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십니다. 참된 생명이 그를 기다립니다. ‘용기를 내어 고달픈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느님 나라의 영광이 그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그 주인공이기를 축복합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성가 452장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3차 남북 정상회담(18~20일)에서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한 힘찬 걸음이 성사되도록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9.16. 연중24주일”의 4개의 댓글

  1. 하나 더 여쭈어 봅니다. 1년 전에 출간된 예쁘고 작은 공동번역 성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데, 지금 사진에 있는 두껍고 큰 공동번역 성서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성공회 출판사에서 판매를 하시는지요?

    1. 평화를 빕니다. 사진에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제가 사제품을 받을 때 당시 집전자이셨던 주교님께 선물 받은 성서입니다. 지금은 그런 판형으로 출판되지 않습니다. 평화.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 가지 질의 드리려 합니다. 예수님과, 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림에서, 맨 뒤에 두 사람이 같이 십자가 위에 얹혀쳐 있는데, 그 두사람은 누구 인가요???

    1.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글씨가 너무 작기도 하거니와 출처가 명확친 않습니다. 어찌어찌 찾아보니 둘 중 오른쪽 이미지는 성녀 ‘마뜨로나’이고 왼쪽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위는 성녀 마크리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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