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1. 성삼위일체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성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연중시기의 첫 주일을 ‘삼위일체대축일’로 출발합니다. 이유는 우리 구원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 여정이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가는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고 진리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거룩하신 하느님, 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영광과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이 신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신비를 굳게 믿어 진리로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1-2:4상
  • 시편 – 8
  • 2독서 – 2고린 13:11-13
  • 복음서 – 마태 28:16-20

 

성공회는 교회력(전례력)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교회력은 하느님이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역사, 즉 구원사를 전례를 통하여 경축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중심을 두고, 성서와 교회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을 기억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시를 경축합니다.

성령강림주일로 위대한 50일의 부활절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지난 월요일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전례공동체인 교회는 연중시기의 첫 주일을 ‘성삼위일체대축일’로 출발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영적 여정이 성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고백하고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출발한 연중시기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날, 즉 왕이신 그리스도주일로 완성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된다는 것이 성령 안에서 탄생한 교회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통찰했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로마 8:18-23). 그러나 이 신음과 진통의 속박에서 해방(구원)되어 창조의 본래 목적인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성령은 교회가 이 희망 속에서 오늘을 견디며 그 날을 기다리도록 지금도 우리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성자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 아래 머물며, 창조의 본래 목적인 ‘감사’와 ‘찬미’를 성부께 드리도록 성령께서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진실에 눈을 뜬 교회는 자신들이 모든 피조물을 해방(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음을 연중절기를 통해 더욱 숙고(熟考)해 갑니다. 더불어 성자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례를 봉헌하도록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부활의 증인이 되라 명령하셨음을 성령을 통하여 교회는 기억합니다. 한마디로 연중시기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계시를 믿는 교회가 그 인도하심 속에 더욱 자라나 ‘하느님 나라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성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교회력의 다른 대축일(성탄일, 공현일, 부활일, 승천일, 성령강림일, 모든 성인의 날)이 구원사 가운데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념이라면 성삼위일체대축일은 신학사상(교리)에 관련합니다. 신경으로 대변되는 삼위일체 신앙고백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선조로 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구별하는 가장 독특한 차이점입니다. 또한 정통과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으로도 작용합니다.

교회사에서 삼위일체는 참 많은 방법으로 설명되어 왔습니다. 아주 어려운 철학 사상을 동원하는 이들도 있고, 아일랜드의 호수성인인 ‘성 패트릭’처럼 그림 은유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 패트릭(386-461)은 “클로버는 세 잎이면서 또한 하나의 잎입니다. 하느님도 이처럼 삼위(성부, 성자, 성령)가 하나의 본질 속에 계십니다.”라고 삼위일체를 설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도 하느님의 존재나 본질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짧은 머리로 다 헤아리기 어려워서 부정의 신학을 동원해서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며, ‘신앙의 신비’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증언해 주시는 만큼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선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서로 구별되는 ‘삼 위’(인격)로 각각 존재하시지만, 본질(본체, 실체)은 하나이시다는 뜻입니다. 위격은 다르지만 신적 본질은 같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위격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홀로 계시지 않고 완전한 사랑의 친교 속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형상인 인간이 진정한 자신을 실현하는 길 역시 사랑의 친교 속에 있을 때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의 친교 속에 계신 놀라우신 분인 것처럼 우리 역시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 서로를 위해 그러하시듯 자신을 위한 정말이지 특별한 선물입니다.

성삼위일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처럼 으뜸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배타하는 삼신(三神)이 아닙니다. 아무 관계없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삼신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로 완전한 연합(협동, 공동체)을 이루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신학입니다. 즉 동등한 ‘사귐’(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 속에 계신 하느님의 관계방식(κοινωνία)을 증거 하려는 신학입니다. 완전하고 동등한 사랑의 ‘사귐’(교제)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교리입니다. 어떤 목표냐면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구원’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이 자신의 정체성, 즉 존재방식과 관계방식을 ‘친교’(κοινωνία)의 공동체로 계시해 주셨음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신앙이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오늘 독서들도 다 이 교리와 관련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11제자에게 내리신 선교 명령입니다. 본문이 선정된 이유는 마태오 교회에 전해 내려온 세례문,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싹이 보입니다.

2독서(사도서)는 고린도후서입니다. 선정된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축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 기도서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밤기도와 간략한 기도예식에서 이 축도를 사용하도록 정해놓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1독서는 창세기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선정된 이유가 같습니다. 창세기는 복음서에 언급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과 대응되는 ‘한 처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가 한 처음, 즉 과거에 대한 언급이라면, 2독서는 지금, 즉 현재에 대한 언급이며, 복음서는 세상의 끝날, 즉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렇듯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삼위일체를 드러내는 도구로(하느님의 지배)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26절에 보면, 하느님이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우리’라는 단어가 삼위일체의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에 독서로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이 ‘우리’라는 구절을 삼위일체의 근거라 주장하기보다는 ‘복음서’ 전체에 기반을 두자는 쪽이 더 우세합니다.

연중시기와 전례독서에 대한 이런 배경 설명을 가지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 창세 1:1-3

지난주에 우리 교우 한 분이 교회 밴드에 ‘새물결 플러스’에서 나온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이라는 책소개를 올렸습니다. 그 출판사는 우리가 독서운동을 하고 있는 ‘비아’ 출판사와 함께 참 좋은 책을 출판하는 곳이니 여러분도 꼭 한번 사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또 우리 교회에 과학(물리) 전공 박사님이 두 분이나 계신데 과학을 언급하는 것이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 같아 은근 압박이 됩니다. 제 설명이 부족하거나 실수가 있다면 나중에 특강을 한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과학은 현상계(現象界)에 관한 것입니다. 현상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의 원인과 결과, 즉 자연법칙을 지성의 힘을 사용해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지식체계입니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자연법칙이 인간의 신념이나 신앙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담아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객관적이라는 말은 수치화, 계량화와 같은 실증성을 통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기에 현상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인간이 갖는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이처럼 과학은 형이상학이나 초현상계와 관련한 종교처럼 인간의 주관적 신념이나 신앙에 기반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은 과학이 지성의 힘을 사용하여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려는 가치중립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필요한 태도는 과학이 일구어낸 성과들을 ‘선하게’ 사용하는 ‘인간다움’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런 태도는 더욱 요청됩니다. 또한 수치화, 계량화, 객관화 될 수 없는 소중한 물음들의 영역을 다시 되살려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 집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 ‘일상 안에 담긴 신비’, ‘생의 자각’ 등과 같은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본질적 물음’, ‘궁극적(窮極的) 질문’은 과학 그 자체는 결코 답해 줄 수 없는 영역입니다. 당연히 이런 물음들에 대한 의미(해석)와 통찰의 영역은 인문학, 특히 종교의 역할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과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과학이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의 설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의 ‘주의(主義)’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과학주의(科學主義, scientism),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라는 말처럼 종교화 되고 신앙화 되었습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신무신론자들이 여기 해당합니다. 그는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고, 종교는 우연히 발생한 심리적 부산물이자 절대적 생존 능력을 지닌 종교적 ‘밈’(meme: 문화적 정보단위 및 진화의 단위)의 선택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 비판했습니다. 전통적 차원에서의 신과 종교를 조롱하고, 신앙을 비난했던 사람들의 후예답습니다.

그 이전에도 포이에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는 신을 “인간 욕구에서 비롯된 환상의 창조물”이라 비난했습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신을 “억압에 근거한 그릇된 환상이자 자아가 투사된 결과물”이라 비난했습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종교를 “억압받는 자들의 탄식이자, 민중의 아편”이라 비난했습니다. 좀 무시무시한 주장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죽었고, 종교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아무튼 도킨스처럼 과학을 형이상학으로 격상시키는 과학주의자들의 태도는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오류들입니다.

과학이 현상계에 대한 설명이라면, 성서는 무엇일까요? 성서는 당연히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닙니다. 성서도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지만 그 의도(목적)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성서의 어떤 저자는 ‘다른 의도’가 있기에 역사적 사실의 진위(眞僞) 여부조차 개의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에는 과학적 사실과 부합하는 언급도 있고, 과학적(의학적) 영감을 제공해 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서가 과학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말하면, 성서는 인간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영적,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정보’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책입니다. 삶의 본질적 물음, 궁극적 질문에 대한 신앙적 대답을 제공하려는 책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조주 하느님을 증언하려는 신앙적 의도(목적)로 기록된 책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겪는 그 신음과 진통에서 구원(해방)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드러내기 위해 집필된 책입니다.

이 의도(목적)에 주목하지 않고 성서에서 역사적(과학적, 의학적) 사실의 참 거짓 여부나 과학적 답만을 찾으려 든다면 심각한 오류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문장이나 표현들에서 우주의 기원이나 형태, 인간의 시초에 대한 과학적(의학적) 지식(사실)이나 정보를 얻으려 든다면 초점이 빗나갔습니다. 더욱이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 따위의 과학적 결론을 성서에서 얻으려 든다면 그 역시 초점이 빗나갔습니다. 게다가 과학을(그것이 인간 지성의 총체라 할지라도) 절대적 기준 잣대로 사용하여 성서의 정확성을 따지려드는 태도는 성서의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그런 외적 사실에 기초해 좌우될 수 없는 인간의 전인격적 도전이자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1장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을 대할 때는 ‘문자(文字)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표현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신적 체험’이 저자에게 먼저 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격해야 합니다. ‘근본주의자’(문자주의자, 반지성주의자)처럼 문자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그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의미와 해석’, ‘본질적 물음’, ‘궁극적 질문’, ‘저자의 의도’, 무엇보다도 기록 이전의 ‘신적 체험’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 성서를 대할 때마다 자신의 신적 체험을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어서 며칠을 고심했을 한 인간의 한계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 저자들은 자신의 표현이나 설명이 실제의 신적 체험과는 너무도 격차가 큰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어설픈 일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기록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고, 디딤돌이 되어, 다른 이들이 자신과 같은 그런 신적 체험으로 향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록했습니다.

근본주의자(문자주의자, 반지성주의자)들은 이 점을 애써 외면하고 문자적 진리만을 찾으려는 이들입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잊은 채 손가락의 길이나 굵기, 각도나 손톱 모양만을 따지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학문적 치밀함을 가지고 성서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도 주의해야 합니다. 그 열의와 정직성을 존중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일은 학자 자신도 ‘달’을 보는 체험입니다. 달을 보도록 지시하는 그 온전한 목적 외에 손가락(기록된 문자 또는 학자의 연구성과) 자체가 가진 다른 중요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신자들이 달을 보게 되었다면 이제 그만 자기 손가락을 내려야지 여전히 허공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기 손가락만 쳐다보게 한다면 더 큰 일입니다(그런 성직자들이 일부 있기도 합니다). 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나도록 기록된 ‘거룩한 수단’입니다. 이 목적을 망각한 성서 읽기나 공부, 전례 안에서의 설교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신자들을 잘못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 특히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그 문자 너머의 정신을 찾고, 의미를 찾아서 그대로 사십시오(마태 7:12, 22:34-40; 2고린 3:6).

제 경우, 1독서인 창세기 1장을 읽을 때면 가슴이 무한히 넓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지금까지 보아온 우주에 대한 모든 다큐멘터리와 영화 장면이 총 동원됩니다. 하느님이 창조 이전의 혼돈과 어둠 속에다 대고 빛(질서), 생명, 사랑, 희망을 명령하시는 부분을 상상하면 신비감이 몰려옵니다. 그 속에서 인간뿐 아니라 137억년 전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함께 ‘빅뱅’을 통해 탄생했다는 팽창하는 우주마저도 한낱 피조물임을 배웁니다. 무한한 창조주 앞에서 우리는 겸손히 옷깃을 여밉니다. 실제로 이야기 자체도 신비롭지만 우리가 연중시기를 지나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듣게 될 일련의 사건들을 예고하는 일종의 ‘위대한 은유’가 창세기 1장에 담겨있습니다.

인생은 어찌 보면 뒤죽박죽 무질서하고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과학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와해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 중 일부는 난데없이 들이닥칩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비극이 들이 닥칩니다. 실직, 구조조정,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감기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는데 암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합니다. 산불로 집을 잃기도 하고, 태풍과 돌풍으로 농사를 망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에는 예측 가능한 시기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생애 주기를 거칩니다. 안전했던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탄생과 이유기를 거쳐 기고, 걷고, 뛰고, 춤추는 존재로 성장해 갑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갑니다. 십대로 성장하면서 주변에 긴급한 메시지들을 내보냅니다. 친구가 좋고, 부모에게 벗어나 점점 더 독립적으로 되려 합니다. 세상도 그 시절의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어느 날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됩니다. 인생을 함께 나눌 사람을 찾고, 결혼하여 자신의 가족을 갖거나 독신을 즐기기로 결심하기도 합니다. 이제 어른으로서 우리는 소위 자신의 인맥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취미를 공유할 동아리와 신앙공동체를 선택하기도 하면서 관계를 넓혀갑니다.

이렇게 각각의 생의 새로운 주기(週期)로 전환할 때 잘 적응하고 아무 탈 없이 다음 생의 주기로 넘어간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예외 없이 생의 주기마다 마주하는 변화 속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삶이 온통 뒤죽박죽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삶의 전환점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와 관계들을 돌아보고 재설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뿐 아니라 성서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조들도 생의 주기와 삶의 전환점들에 직면했습니다. 우리는 연중시기를 지나는 앞으로 10주 동안 1독서로 창세기를 볼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이 경험했던 생의 뒤죽박죽 한 순간들과 혼돈에 빠져 씨름하는 순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장면들처럼, 그들에게 선포되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말씀(복음)도 듣게 될 것입니다.

다음주일 1독서인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예고하는 장면을 듣게 될 것입니다(이 장면은 삼위일체 그림으로도 많이 쓰이지요). 창세기 21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과 아내 하갈에게 애증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지켜볼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는 외아들 이사악과의 작별에 직면했던 부모를 목격할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에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여행에 나서는 10대 시절의 리브가를 지켜볼 것입니다. 이 연속된 이야기들과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들도 삶의 혼란과 혼돈스러움, 뒤죽박죽 한 순간들 속에서 고심한 이들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삶의 혼돈 속에 있던 그들에게 ‘질서’를 가져오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빛과 생명, 사랑과 희망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혼돈을 ‘질서’로 바꿉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둠에 ‘빛’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 ‘위로’를 가져옵니다. 그런가하면 가끔 하느님은 우리를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요청과 질문을 해 오실 때도 있습니다. 결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우리 신앙의 본질과 관련한 ‘곤란한’(혼돈스런) 요청입니다. 마치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처럼 말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역사가 가장 근본적으로 일어날 때는 바로 그런 곤혹스럽고 혼란스런 순간에서입니다. 인생이 뒤죽박죽 엉망인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하느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 뒤죽박죽 한 신앙 선조들의 삶 속에 우리 하느님이 변함없이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함께 계십니다. 순풍에 돛단 듯 인생항해가 평안할 때든지, 아니면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있든지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성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정체성이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삼위일체 교리가 ‘생명의 원리’를 교회에게 교훈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 교회 역시 이러한 하느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선교, 즉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작동합니다. 하느님의 독특한 부르심과 목적을 따라 살아가도록 서로를 준비시키고 지원합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는 고유의 독특성을 간직한 독립적인 인격체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전체에 속한 유기체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자기 고유성만을 내세우면서 서로 경쟁하고 배타한다면 몸은 병듭니다. 서로가 아무 관련 없는 존재처럼 멀찍이 떨어져 홀로 존재하려 든다면 몸은 결국 죽고 맙니다.

교회는 삶의 모든 성가신 변화 과정을 포함하여 서로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특히 우리는 세례식에서 세례성사를 받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도록 서로 힘을 다하여 도와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기도와 모범된 생활로써 서로를 양육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적인 결함 때문에 하느님의 공동체성을 교회 안에서 살아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 시간,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체성을 삶으로 살아내겠다고 결심하기 바랍니다. 먼저는 자신을 건강히 세우는 노력을 하십시오. 그런 자신을 서로를 향해 겸손히 내어주십시오. 서로의 다름을 비판하거나 평가하느라 시간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한 몸에 참여하십시오. 이런 ‘사귐’(κοινωνία)을 통해 교회는 생명 활동을 이어가며 구원 목표를 성취해 갑니다. 물론, 이런 인격적 ‘교제’(κοινωνία)가 우리 교회에 실현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꿈꿉니다. 우리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지체이기에 삶을 더 깊이 나눌 수 있기를 꿈꿉니다. 슬픔도, 아픔도, 눈물도,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함께 느끼고 나누는 살아있는 공동체이기를 꿈꿉니다. 이러한 우리의 교제가 세상으로 더욱 확대되어 삼위일체 하느님을 드러내는 건강한 공동체이기를 꿈꿉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혼란한 이 세상에 ‘질서’를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주는 ‘평화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말씀하시고 친히 참 빛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주는 ‘희망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뒤죽박죽 혼돈스런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춤’의 교제를 ‘체험’해 가는 ‘전례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미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교제를 ‘실현’해 가는 ‘사랑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죽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의 교제를 ‘실천’하는 ‘생명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탐욕에 빠진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기비허’(자기비움)의 교제를 ‘수행’하는 ‘선교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기도하는 ‘구원공동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통해 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더 깊이 알아갑니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해야 이 진리를 체험, 실현, 실천, 수행할 수 있습니까? 요한 1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이 말씀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체성, 즉 존재방식과 관계방식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이 증언은 우리를 대단히 중요한 통찰로 이끕니다. 하느님은 그 밖의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기원을 의지하지 않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은 본래부터 ‘관계’(κοινωνία) 속에 계신 공동체입니다. 고독한 유일신이 아니라 이미 다른 위격(인격)들과의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공동체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서로의 협동(κοινωνία)을 통해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랑이 순환’하는 공동체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사랑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이라는 관계를 전제합니다. 그 사랑의 순환 관계 속에서 상대방도 자신도 빛납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본래부터 둘 이상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사랑공동체’라는 통찰을 요한의 증언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을 본질로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빛’이 드러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짓입니다. 이 점이 이 삼위일체주일에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초점 중의 핵심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사랑’이 아니라 ‘미움’ 속에 살아갑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일치’(κοινωνία)가 아니라 ‘분열’ 속에 살아갑니까? 세상살이는 어렵기만 하고, 남북의 대치상황은 뒤죽박죽 좀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서 보았듯이 일부 야당은 대다수 국민정서를 반영하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여전히 호도하는 대중매체들도 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청소년과 학교교육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신음하는 자연 생태계와 가난한 이웃들은 또 올 여름을 어떻게 견디어야 할지 걱정입니다.

이런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가장 시급한 일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서로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공동체적인 ‘사랑의 친교’(κοινωνί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협력’(κοινωνία)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실천되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에 가장 시급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삼위일체대축일은 하느님의 존재방식과 관계방식을 마음에 새기고 더욱 사랑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주일입니다. 한 처음, 삼위일체 하느님이 이 뒤죽박죽 혼돈스럽고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있으라” 한 ‘말씀’하시어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은, 회복과 창조(구원)를 필요로 합니다. 먼저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명령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뒤죽박죽과 혼란과 어둠에서 벗어나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회복과 창조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예수의 말씀’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월호 미수습자들과 가족들, 작업자들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 선원들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3.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4. 남북의 화해와 협력 평화정착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이 주님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섬기도록 기도합시다.
  6. 실직자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교우 가정과 자녀양육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오종민(어거스틴) 교우와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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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7. 연중 27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

    […] ‘문서가설’(J.E.D.P설)에 따르면, 창세기에는 비슷하지만 특징 있게 다른 형식으로 전해지는 두 개의 창조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사문서’라 전해지는 1:1-2:4a까지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야훼문서’라 전해지는 2:4b-25까지입니다. 이야기들은 각각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 1:1, 2:4a),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창세 2:4b)을 만드시던 때였다”로 시작합니다. 하느님, 하늘과 땅, 야훼 하느님, 땅과 하늘. 이렇게 언뜻 차이가 없는 단어들의 나열 같지만 분명히 다르게 기록된 첫머리의 이 단어들이 두 개의 창조이야기가 비슷하지만 특징 있게 다르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물론 인간을 하느님 창조사업의 절정이자 중심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제한적이니 두 이야기 중에서 창조질서의 정점인 ‘인간’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하겠습니다(창조이야기가 나왔으니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설교 글을 보실 분은 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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