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9. 연중2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복음이야기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차별 받던 약자와 장애인들을 만나주시고 고쳐주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도 이 성찬례에서 힘을 얻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의 삶으로 다가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느님 나라의 소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35:4-7
  • 시편 – 146
  • 2독서 – 야고 2:1-10,14-17
  • 복음서 – 마르 7:24-37

연중 2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1독서 이사야는 ‘하느님이 몸소 오시어 성취하실 새 세상’을 예언합니다(참고 이사 11장, 61장). 전부 10절인데, 오늘은 4절부터 7절까지만 낭독했습니다. 10절부터 거꾸로 내려오면서 한 절씩 살피면 ‘바빌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귀환하는 기쁨’이 흘러넘칩니다. 하지만 본문의(33-35장) 역사적 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제 1이사야(1-39장) 안에서도 장(章)들의 순서가 역사 사건의 순서와 한 결 같이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1독서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서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봅니다.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742-701/700)는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적극적으로 ‘서진’(西進) 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1-6, 24~41).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이르렀습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남왕국 유다도 이 서진(西進) 정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비록 원수처럼 지내긴 했지만 한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방패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는 아시리아와 직접 국경을 마주하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朝貢)을 바치는 조건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열왕하 16:7-8).

아시리아가 서진(西進) 정책을 펼 때 이집트에서는 제25왕조가 일어납니다(기원전 716/5-663년). 25왕조는 에토피안 왕조(Ethopian Kush)로서, 영향력을 ‘시리아-팔레스틴’(Syria-Palestine) 지역으로 확장시키려 했습니다. 따라서 유다는 두 거대한 제국 사이에 낀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던 혼란시기였습니다. 마치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현재 처지와 비슷합니다.

이사야는 이 혼란의 시기에 초지일관 유다와 예루살렘이 구원 받는 길은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 달려있다”고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이사 7:1-9; 28:16; 30:15; 31:4-5).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고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는 것을 책망했습니다(이사 1:10-17).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당시 사회상을 공격했습니다(이사 3:13-15; 5:8-24; 10:1-2). 이사야의 이 책망은 빈부 양극화로 심각한 갈등을 겪는 오늘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하느님이 아시리아를 채찍으로 사용하시어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셨다는 통찰을 전했습니다. 아시리아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쓰신 ‘심판의 도구’라는 통찰이었습니다(이사 10:5-6). 유다는 외세에 의지해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동맹 정책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몸소 돌보신다는 약속을 신뢰하면서 하느님이 행동하시게 의탁해야 했습니다. 이사야의 책망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유다는 망하고 그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벌거벗은 차림’으로써 이것을 예고해 주기까지 했습니다(이사 20:1-6).

유다의 왕과 귀족들이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까? 유다의 왕 아하즈는 이사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이사 7-8장).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아시리아의 패권을 인정함으로써 살아남으려 했습니다(열왕하 16:5-9). 이미 그 때 이사야는 아시리아가 유다를 도와주러 오는 것이 아님을 예견했습니다. 아하즈의 뒤를 이은 ‘히즈키야’ 왕은 어땠습니까? 그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많이 한 ‘선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세를 의지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이집트를 믿고 반(反) 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했습니다(이사 30:1-7). 결국 이 일로 유다는 침공을 당합니다(이사 36장).

이사야의 활동이 끝나갈 무렵인 기원전 701년, 유다는 아시리아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사야 36장에 따르면, 아시리아는 18만 5천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히즈키야에게는 하느님의 도우심 외에 길이 없었습니다. 히즈키야는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그 기도에 하느님은 응답하십니다. 단 하룻밤 사이 아시리아 군대는 몰살당하고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습니다(이사 36-37장, 열왕하 18-20장 참고). 학자들은 쥐가 옮기는 ‘흑사병’일 것으로 추정합니다(열왕하 19:35). 또 하느님은 중병에 걸린 히즈키야를 치유하시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었습니다(이사 38장). 그러나 그는 바빌론 사신들에게 경솔함을 보입니다. 제 1이사야는 히즈키야의 그 경솔한 행동 때문에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란 예언으로 끝이 납니다(이사 39장). 이처럼 히즈키야가 유다 멸망의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돌이킬 순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돌아설 줄 모르던 유다를 불과 1세기만에 ‘바빌론 제국’이 멸망시킵니다. 이사야를 통해 히즈키야에게 하신 예언대로 유다인들은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선조들을 기억하신 것처럼, 그 가련하고 불쌍한 포로들, 즉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귀향시켜주실 것이라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1독서 본문입니다. 이사야는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오는 유다의 기쁨을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포로생활 하던 유다인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1독서 묵상을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와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들은 70년에 이르는 포로생활 동안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기(氣)가 죽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 약 2세기 전에 살았던 제 1이사야의 ‘희망의 외침’을 누군가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사 35:4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행동하십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약자들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시러 오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자면 ‘메시아’(구세주)가 오시어 불의를 몰아내시고 이루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선조들의 경우처럼, 하느님은 그들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시어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임금이시자 모든 민족들의 주인이심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2의 출애굽이 예고된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행동하시면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마치 겨울 들판에 봄꽃이 피어오르듯, 흑백 세상이 천연색으로 빛나며 온 세상은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복음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보러가기 위해 노인들은 다시 힘을 내고, 겁먹은 젊은이들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들이 힘을 내고, 용기를 내야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꿈에 그리던 고국, 즉 ‘시온 산’(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몸소 오시는 날 ‘몸의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 조차도 온전하게 치유될 것입니다. 이 치유는 메시아가 오시어 이루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실질적인 표징입니다(루가 7:22). 그러나 몸의 장애를 신체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포로는 행동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걷는 것과 말하는 것이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몸의 장애가 온전히 치유되는 일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모든 세력들로부터 자유를 얻는 삶이 일어난다고 이해하여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치유되고 해방된 그들은 ‘시온 산’(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시온 산’(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 길의 주변 환경마저도 원래부터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새로워집니다. 메마른 땅(광야), 사막, 황무지라는 죽음의 땅에 샘이 터지고 냇물이 흐르는 생명의 땅으로 변합니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입니다. 더 이상 포로로 끌려올 때의 고달프고 좁다란 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까지 대로가 훤하게 트인 안전한 길입니다. 순례자들이 걷는 길처럼, 그 길은 ‘거룩한 길’로 불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마련하신 그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없습니다. 오직 건짐(구속함) 받은 사람만이, 즉 거룩해진 하느님의 백성만이 걸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그 감격을 노래할 것입니다. 아픔과 한숨은 가시고 끝없는 행복과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위로’와 ‘희망’이라는 제 2이사야서의(40-55장)의 주제가 ‘미리’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 1이사야는 그 옛날 ‘출애굽’에 상응하는 ‘새 출애굽’(하느님 나라)을 기대했습니다. 새 출애굽,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노력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또한 그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타나심으로써 다윗 왕권이 마지막 때에 새로워지고 완전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이사 9:2-7; 11:1-10). 더욱이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 2:2-4;11-6-9;19:19-25). 이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복음서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시편 146편은 몸소 오시어 새 세상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의 ‘신의’(信義)를 찬미합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이사야는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라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였습니다(이사 1:17). 그러나 유다의 왕과 귀족들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러한 사회적 의무를 무시했습니다(이사 1:23).

이사야는 왕들에게 외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의지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권력가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인생은 아무리 위세를 부려도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허망한 존재입니다(전도 12:7; 창세 2:7; 3:19). 오히려 인생은 참된 임금이시자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돌보아주시는 신의(信義) 가득한 분이십니다(시편 146:7-9). 특히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억눌리고 가난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시인이 찬미하는 약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信義)는 오늘 복음서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행동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행동 속에서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습니다(루가 4:17-19).

2독서 야고보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이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오늘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야고 2:1, 9

서신 후반부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지난 주일에 야고보서를 다루면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늘 다루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 잠깐 언급했듯이 바울로와 야고보(예수님의 동생)는 분명 신학적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두 분이 사목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계 그리스도교회의 대표자로 유대교인들을 전도하고 개종자들을 사목해야 했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로는 이방계 그리스도교회의 선구자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사목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만나는 대상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무시하고 인간의 행위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면서 바울의 칭의론을 손들어 준다면 자칫 ’행위 배척주의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야고보는 ‘율법주의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를 따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로서의 칭의만 강조하는 바울로는 ‘행위 배척주의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쌍벽을 이루는 두 분이 자기 신학의 근거로 내세운 인물이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바울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로마 4:3)라는 논거를 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야고 2:21)라는 논거를 폅니다. 저는 두 분이 일치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 안에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해 ‘수행’(修行)처럼 자기 믿음을 완성해 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믿음이 수행이었고, 수행이 믿음이었던 셈입니다. 시간 관계상 더 다룰 수는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으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대신합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마태 7:16-20

Christ and the woman of Canaan, by Pieter Lastman, 1617

복음서는 두 개의 치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둘 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모든 민족의 구세주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성취해 가시는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전반부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방인의 땅에 가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유다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장 ‘거룩한 곳’(우주의 중심, 배꼽)으로 여겼습니다. 거기서부터 멀어질수록 거룩함의 정도가 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선 이방인의 땅은 아예 부정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거기 사는 이방인들이 부정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방인 지역으로 여행하고 이스라엘 경계로 들어오면 발에서 먼지를 털어야할 정도였습니다(마르 6:11). ‘부정한 것’들을 거룩한 땅에 묻혀 오지 않으려는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몸짓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정한 땅인 ‘띠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띠로’는 복음서 후반부의 ‘시돈’과 함께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사 23:1,4). 따라서 예수님이 그런 곳으로 가셨다는 말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의도일까요?

지난 주일에 우리는 유대교가 고수해 온 ‘정결규정’(조상의 전통과 음식규정)을 폐기하신 예수님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진짜 지켜야할 ‘정결’(순수, 순결)의 대상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마음 수행’의 필요성을 교훈하셨습니다. 참된 정결은 마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는 외부 행동이 아니라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현재 상태와 내적 태도(동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은 항상 바깥세상이 아니라 내면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해야 할 세상은 예수님 말씀처럼, 바깥이 아니라 내면(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사람의 견해일 뿐인 정결규정을 지키는 유다인이라서, 혹은 예루살렘이나 유다 땅에 살기에 저절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정결규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서, 혹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있는 땅이라서 저절로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민족과 성별과 지역에 상관없이 마음이 정결함의 기준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느님을 뵐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마태 5:8). 예수님은 이러한 진실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 부정하다고 불리는 이방인의 땅 깊숙이 들어가셨습니다. 사실 이방인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차별적입니다. 그냥 사람이 사는 땅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한 여인과 마주칩니다. 그 여인은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그리스인)입니다. ‘시로페니키아’는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그녀에게는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가정적으로 불행했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땅, 이방인, 여성. 아픈 딸. 이 단어들은 오늘날 “사회적 약자”로 바꾸어 볼 수 있는 명칭들입니다. 사실 띠로와 시돈은 저주 받은 땅으로 불렸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도, 로마제국으로 고대근동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털리고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 지역에 사는 ‘약자’들, 특히 여인들의 처지는 우리의 상상 이상일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가정사 역시 불행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녀는 자신을 ‘강아지’(개)에 비유하는 데 이러한 사회상과 가정사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바빌론 포로들처럼 절망적 처지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딸을 치유해야 한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한 단어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녀와의 대화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어린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실 그 대화가 ‘기도’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주님”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에는 유창한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 담긴 믿음의 한 마디로도 충분합니다. 형식이나 격식도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자존심도 체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하신 반응을 얻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가보시지도 않고 원격(遠隔)으로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한 능력입니다. 이리하여 구원의 대상이 유다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까지 ‘차별 없이’ 확장되었습니다. 민족, 종교, 성별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모든 차별을 넘어서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근본적 이유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이방 땅으로의 전도를 성령강림사건 이후로 미루어 둡니다(마태 28:18-20). 하지만 마르코는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돌보심과 먹이심이 유다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차별 없이 포함한다는 점을 명백히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대전환의 기점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 사건은 유다인이 대상이었습니다(마르 6:35-44). 반면에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인 사건은 이방인이 대상입니다(마르 8:1-10). 하느님 나라는 차별 없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진실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로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후반부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한 여정 보고로 시작합니다.

그 뒤 예수께서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마르 7:31

‘시돈’은 ‘띠로’ 지방보다 더 북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더 멀리 가신 셈입니다. 정결규정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 곳에 들르셨다가 동남쪽으로 내려와 요르단강 동편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 즉 이스라엘 경내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재미있게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던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마르 6:11)는 언급이 없습니다.

복음서 후반부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 장애인을 특별히 데려왔는지는 마르코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볼 수는 있습니다. 복음서 전반부의 그 여인의 딸은 악령이 들려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습니다. 귀먹고 반벙어리인 그 장애인도 의사소통이 ‘불능’입니다. 동시에 그 사람은 유다민족을 상징합니다. 거룩한 땅에 사는 거룩한 백성이라 자처하는 그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이 몸소 오셔서 돌보고, 먹여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시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귀먹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과 의사소통이 불능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진리의 소식을 바르게 알아듣고, 바르게 고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의사소통이 신앙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좀 독특한 행동을 하십니다. 그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일대일로 대면하십니다. 그만큼 그를 한 인격으로 존중하시고 배려하신다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습니다.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십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보도 가운데 가장 세밀한 장면 묘사입니다. 마치 진흙을 오밀조밀하게 빚으시어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창세 2:7). 이 장면이 새 창조를 뜻한다면, 그 다음 순서는 ‘입김’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실제로 ‘숨’이 언급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십니다.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한숨’을 내쉰 것은 여기 딱 한번 뿐입니다. 그만큼 ‘연민’(憐愍)에 찬 예수님의 마음이 치유를 위한 행동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에파타’(열려라)는 명령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1독서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런 열림의 은총은 오늘의 우리도 체험합니다.

얼마 전 새로 증축한 <강촌 요한 피정의 집>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일이지만,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면, 하루하루 지나는 사이, 주님의 손이 우리의 귀와 혀를 만져주시는 체험을 합니다. 세파(世波)에 시달려 닫혔던 눈과 귀와 마음이 새롭게 열리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들리며, 느껴집니다. 마치 1독서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창조주의 영광을 보는 듯합니다. 바람에 팔랑거리는 나뭇잎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그 곳에서 며칠을 지내다 보면,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어집니다. 다투었던 사람과도 화해하고 싶어지고, 얼른 일상으로 돌아와 자신이 체험한 은총들을 가족이나 이웃에게 말해주고 싶어집니다. 한마디로 열린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으로 돌아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마음을 차지합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던 남편이나 아내를 향한 짜증이 늘어갑니다. 이웃에게서도 긍정적인 면보다는 실수와 허물을 더 많이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랑과 격려의 말보다는 가시 돋친 비판의 말과 정죄의 말이 툭툭 튀어나와 스스로도 놀라게 됩니다. 이런 상태의 마음을 우리는 ‘닫혀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비극적인 것은 그런 닫힘의 상태가 지속될수록 몸은 병들고, 관계는 파괴되어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체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섬’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열림’을 경험하기 위해 다시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야만 합니까? 물론 때로는 그런 시간도 하지만 꼭 그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눈과 귀와 입술과 마음은 어떤 장소나 공간, 사람이 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환경은 부차적입니다. “성령께서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면, 견고한 성벽처럼 쌓아올린 마음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면, ‘열림’과 ‘변화’가 일어나야 할 대상은 나 밖의 타인이나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고, 내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면, 남편이나 아내나 다른 교우의 마음이 열리고 정화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들과 마주하는 나의 눈과 귀와 입술과 마음의 정화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저 기적이나 행하러 오신 분으로 오해받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하지만 누르려 해도 다시 솟아오르는 물 속 비치볼처럼 함구령도 소용없었습니다. 사람들의 경탄하는 말을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로의 초대입니다. 복음서 전반부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차별과 저주의 땅으로 가셔서 한 여인을 만나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딸을 치유해 낸 그 여인의 믿음은 과연 예수님이 찾아 가실만 했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만한 그런 믿음이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기 위해 나를 ‘특별히’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믿음이 있는지 성찰합니다. 사실 주님은 자신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를 열어 우리와 ‘소통’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 무한하신 자비로 당신과 우리 사이의 엄청난 질적 ‘차이를 건너’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차별 없이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한 친교를 나누도록 스스로 ‘다리’(大橋)가 되어 찾아와 주신 분입니다.

복음서 후반부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하신 이야기입니다. ‘에파타’(열려라)는 우리에게 도전입니다. 이 말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나는 지금 ‘닫힌’ 인생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열린’ 인생으로 살고 있는가를 성찰합니다. 종종 우리는 안으로부터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섬’으로 만들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도 마음을 닫아걸고 소통하려 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 상태가 편하다는 착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이런 닫힌 상태가 오늘의 사회와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닫힌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초래했습니다. 이런 삶은 죄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귀도 잘 들리고, 말도 잘 하는데, 무슨 에파타?”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실천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전도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반벙어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낼 용기가 없다면, 나는 반벙어리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열린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열린 삶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열린 삶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과 온전히 소통하며 살도록 ‘자유’(열림)를 주러 오셨습니다. 이 거룩한 시간, 주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일대일로 만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귀먹은 반벙어리처럼 살고 있지만, 성찬례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에 눈과 귀와 입술과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풀리기를 기도합니다. 창조의 손가락을 귓속에 넣어 꽉 닫힌 귀를 뚫어주시고, 은총의 침을 치유의 손가락에 발라 혀를 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후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고, 다정한 목소리로 ‘열려라’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구세주를 보내주신 하느님의 ‘신의’(信義)를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진짜로 열린 삶, 진짜로 사랑하는 인생으로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미 받으실 주 예수님,
모든 이를 감싸 안고
하느님의 은총을 나눠주셨나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로 구성될 교회위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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