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26. 연중21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내 평생 주님께 충성하리. 나 약속합니다.’입니다. 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야훼만을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섬길 것을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하나 되어 영생에 이르는 십자가의 삶, 십자가의 길을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세례성사로 충성을 서약하고 주님 몸의 지체가 된 우리는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교회의 거룩한 책무를 기억합니다. 교회가 복음에 충성된 군사들로 영적 투쟁을 잘 이겨나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주님은 성령으로 온 교회를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교회를 위해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각자의 소명에 따라 진실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여호 21-1-2상, 14-18
  • 시편 – 34:15-22
  • 2독서 – 에페 6:10-20
  • 복음서 – 요한 6:56-69

연중 2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내 평생 주님께 충성하리. 나 약속합니다.입니다.

1독서 여호수아는 기원전 13세기경 사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옛날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믿음의 여정’(旅程)을 시작하게 하시면서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창세 12:1). 하나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이고(창세 12:2),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창세 12:7). 여호수아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선조들에게 하신(창세 50:24-25) 그 ‘약속의 땅’에 대한 성취 과정을 들려줍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을 정복한 12지파는 그 땅을 나누고, 하느님과 다시 ‘계약’을 맺는 이야기로 여호수아서는 막을 내립니다.

오늘 1독서가 바로 그 ‘계약’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충성 서약’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를 위한 배경 역할을 합니다. ‘여호수아’(히브리 발음으로는 예호슈아)는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모세의 ‘참모’(부관)였습니다. 모세는 그의 이름 ‘호세아’(הושֵעַ 구원)를 ‘여호수아’(יְהֹושֻׁע 주님은 구원이시다)”로 고쳐주었다고 하는 데(민수 13:16), 사실 같은 이름의 두 형태일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호세아’보다는 ‘여호수아’(야훼 יהוה + 호세아 הושֵעַ)에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예호슈아)가 그리스어 성경(70인역과 신약성경)에서는 ‘이에수스’(Ἰησοῦς)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이에수스’가 라틴어 성경(Vulgate)에서는 ‘Iesus’(예수스), 영어 성경에서는 ‘Jesus’(지저스), 중국어 성경에서는 “야소”(耶穌)를 거쳐 우리말에서는 ‘예수’로 변역되었습니다(마태 1:21). 어떤 이들은 ‘예수’라 부르면 안 되고, 반드시 ‘예슈아’라 불러야 한다는 논리를 펴지만, 그런데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예슈아’는 예수의 ‘아람어’이면서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한 이름일 뿐입니다. 단지 마음을 모아 ‘예수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여호수아’는 40세 때 가나안 땅 정탐에 나섰던 12명 중 한 사람입니다(민수 13장). 40일간의 정탐에서 돌아온 이들 중 10명은 가나안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며 부정적으로 보고합니다. 그들은 악평하며 이스라엘을 선동합니다(민수 13:31-33).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업신여기며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동에 놀아난 이집트 탈출 세대는 밤새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 못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의논합니다(민수 14:1-4). 모두가 불신앙, 불충성하는 ‘배신의 사람’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년배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차지하자며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민수 14:6-9).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충성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정적인 보고에 빠져들어 하느님을 배신한 이집트 탈출 세대는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 거기서 모두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민수 14:21-23,29-35; 신명 1:35). 또 약속의 땅을 악평함으로써 하느님을 배반하게 했던 10명의 정탐꾼들도 염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민수 14:37).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집트 탈출 세대 중에서 유일하게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민수 14:24,30; 신명 1:36,38).

하느님은 이 ‘믿음직하고 충성스런’(사실 같은 말입니다), 즉 영감(靈感) 받은 여호수아를 대우하십니다. 모세의 뒤를 잇는 지도자로 세우게 하십니다(민수 27:18-23; 신명 1:38; 31:23; 34:9). 실제로 그는 모세의 사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약속의 땅 정복에 나섭니다(여호 1:1-9). 하느님께 복을 받기는 ‘갈렙’도 마찬가지였습니다(민수 14:24; 여호 14:6-15).

어느 덧 ‘성전’(聖戰)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생(生)을 마감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세겜’ 성소로 불러 세웁니다. 그들은 자신과 함께 가나안 정복에 참여하면서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세겜은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이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창세 12:6-7). 그러니까 세겜은 약속과 성취의 자리인 셈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어떤 ‘세계관’(믿음)을 가지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연중 19주일에 언급한 ‘가르멜산’에서의 엘리야를 보는듯합니다(열왕상 18:20-40). 엘리야도 이스라엘에게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칠 것이냐면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열왕상 18:21). 그들은 머뭇거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야훼께서 하느님”이라고 결단합니다(열왕상 18:39). 그러나 여호수아 앞에 섰던 이스라엘은 ‘우상’(헛것)이 아니라 오직 ‘주 하느님’만을 섬길 것을 즉시 공적으로 약속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 갱신됩니다. 그들의 충성서약, 즉 세계관(믿음)은 끝까지 잘 지켜졌을까요? 그랬다면 구약성경이 그렇게 두꺼워지지 않았겠지요.

시편 34편은 지난주일에 이어지는 ‘감사의 찬미’입니다. 하느님께 충성서약을 하는 1독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께(하느님의 율법) ‘충성’하는 의인들과 악한 일을 일삼는 악인들의 삶을 비교합니다. 하느님은 1독서의 ‘여호수아나 갈렙 같은 의인들을 편드시고(15절),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며(15,17절), 삶을 보상해 주십니다(18-19절). 반면에 10명의 정탐꾼들이나 이집트 탈출 세대들처럼, 하느님의 율법에 불충성하는 악인들은 심판하십니다(16절).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써 스스로의 운명을 이미 결정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 행위로써 이미 죽음을 부르지만(21절), 하느님께 ‘충성’하는 의인들의 목숨은 돌보심을 받습니다(22절).

2독서 에페소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 계속독서이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하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라는 구절에서 오늘의 주제어인 ‘충성’과의 연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신 에페소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충성’을 다해 온 사도 바울로의 권면입니다. 그는 자신처럼 에페소교회의 성도들 역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기를 바랐습니다. 어디서 알 수 있느냐면 그가 본문에서 ‘군사용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도의 삶을 군사용어를 사용하여 종종 묘사하곤 했습니다(로마 13:12; 2고린 6:7; 10:4; 필립 1:30; 2:25; 1디모 1:18; 2디모 2:3,4; 필레 1:2). 믿음의 아들인 ‘디모테오’에게는 자신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군사로 살 것을 권했습니다(2디모 2:2-3). 사실 군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성품과 덕목은 ‘충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섬기기 위해, 어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충성할 것인가?” 입니다.

지난 7월, 빗나간 충성을 보인 군인들로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기무사 계엄령 문건” 보도를 접하면서 그들이 누구를 섬기고, 어떤 세상을 지키려는 군인들이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군사독재의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빛의 세상을 일구어 온 지 겨우 한 세대 남짓입니다. 그 세월과 여정을 무력으로 되돌리려 한 것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헌법 정신에 맞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빛의 세계를 향한 여정을 잘 걸어가야겠습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삶이 ‘죽음’(어둠, 악마, 속박)의 세계에서 ‘생명’(빛, 하느님, 자유)의 세계로 옮아가는 여정(旅程)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악마(어둠, 죽음, 속박)의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와 하느님(빛, 생명, 자유)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유의 땅’을 향한 여정을 출발하였습니다. 광야생활동안 ‘자유인의 삶’을 훈련한 그들은 마침내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더불어 약속의 땅에 입성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유를 향한 그 위대한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1독서에서 들었듯이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스스로의 행위로 더 이상 자신들이 ‘이집트’(우상)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유인임을 증명하라는 촉구였습니다. 그들이 자유인의 땅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정신은 여전히 이집트(우상) 세계관이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집트와 가나안이라는 이 두 세계의 틀로 이해하였습니다(에페 2:1-10). 하나는 악령이 지배하는 뒤틀리고 깨어진 이집트 같은 ‘현실 세상’이고(에페 2:2),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하늘나라’입니다(에페 2:6).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악령이 지배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구속)을 받아 하느님과 사귐(회복, 화목, 새로움) 속에 들어왔습니다. 다시 말해 악령의 지배권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하늘나라로 국적을 옮겼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현주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충성 서약을 요구받았던 이스라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새 생활의 실천’으로 확증해야 합니다(에페 4:17-5:20).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심부름꾼의 자리에서 타락하여,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령과 그 세력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에페 6:12). 그 세력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 세상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지배자들입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 자유와 생명을 억압하는 ‘악마적인 사회제도’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제도’를 만드는 데는 관련 사회세력들이(기득권이라 부르지요) 갖고 있는 ‘이해관계’와 ‘가치’라는 힘이 작용합니다.

물론 1차적으로 사회 제도는 우리가 겪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회 제도라 할지라도 그것을 악용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보완하여 제도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만들지만 인간의 내면이 바뀌지 않는 한 악순환은 반복됩니다. 따라서 자기성찰 없는 이들이 운영하는 어떤 제도든 인간의 탐욕을 부채질하는 악마적 제도로 변질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성찰을 통한 양보, 배려, 타협이 없는 기득권에게는 더욱 그런 제도로 작용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짓누르는 악마적인 사회제도들은 인간을 한 인격이 아니라 이익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비정규직’입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제를 허락지 않았던 병역법 규정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양심적 병역거부에 따른 수감자가 누적인원으로 2만 명에 육박하고, 지금도 4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옥에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인식이 성숙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지만, 비정규직을 눈물짓게 하는 악행은 여전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악행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전해줍니다. 악은 분명 인간이 저지릅니다. ‘비정규직’이나 ‘불합리한 의무복무제’ 뿐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이 그랬고, ‘세월호조사’를 온갖 구실로 방해한 세력이 그랬으며,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기망한 정치세력이 그랬습니다. 탐욕에 빠진 악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들입니다. 우리는 1600만 촛불혁명으로 새 시대를 연 자랑스러운 국민입니다. 탐욕에 빠져 악을 저지른 두 전직 대통령을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방조했던 집단은 세력만 약화되었다 뿐 여전히 건재(健在)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한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했던 몇몇 언론사들도 여전히 정론(正論)을 자처하며 활동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을 가리기 위해 진상을 호도(糊塗)하는 일을 현재도 버젓이 일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탐욕스런 악인들이 퍼뜨린 ‘황금만능주의’라는 허망한 가치관이 국민들의 심성까지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분명 악은 탐욕스런 인간들이 저지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로는 인간의 ‘탐욕’보다 더 깊이 보라고 요청합니다. 악은 인간이 저지르지만 그 ‘배후’가 있다는 통찰입니다. 그 배후란 ‘속임수’를 쓰는 악마입니다. 바울로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보았습니다. 악마가 사용하는 속임수에는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악을 저지른 사람들이나, 악마적인 제도들 그 자체만 대상으로 싸우도록 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물론 우리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권력자)에게 대항해야 하고, 악마적인 제도들을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싸워야할 대상은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한 인간(이런 의미에서 탐욕에 조종당하는 이들의 삶은 백년을 살아도 아침 안개와 같이 허망할 뿐입니다)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조종자 ‘악마’입니다. 그런 악마적인 제도를 만들어내도록 뒤에서 역사하는 ‘악령들’입니다. 더욱이 황금만능이라는 물신숭배, 권력, 출세, 성공 같은 허망한 우상의 가치관에 빠지도록 사람들을 계속해서 속이는 악령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악령들과 싸워야합니다. 이름 하여 ‘영적 투쟁’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 영적 투쟁을 위하여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 하라고 권고 합니다(에페 6:11,13-17). 이 점을 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무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수단과 힘만으로 투쟁에 나서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로의 통찰처럼 우리의 진정한 투쟁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기 위해 중무장한 로마군인(보병)의 모습에 비추어 그리스도인의 완전무장을 묘사합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군인은 무장을 잘 해야 전투에서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완전무장의 무기는 “진리, 정의, 평화(복음증거), 믿음, 구원”에 대한 소망이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가 ‘방어용’이라며 나머지 하나는 ‘공격용’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를 보병의 외모처럼, 문자적으로 딱 그 부위를 위한 것으로 고착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메시아의 복장 참고. 이사 11:5; 59:17). 급할 때는 방패가 공격 무기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기 나오는 하느님이 주시는 완전무장의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입니다(로마 13:14, 갈라 3:27).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로 차례로 완전무장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먼저 일으켜 세웁니다(에페 6:14). 이렇게 무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으켜 세운 것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영적 투쟁에 나서는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허리를 ‘진리’로 동여야 합니다. 군인이 허리를 띠로 동인다는 것은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도 힘 쓸 일이 생기거나 일하기 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띠를 조여매곤 합니다. ‘진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알레쎄이아’(ἀλήθεια)는 ‘진실성’, ‘믿음직함’, ‘진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실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진리이신’(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좀 더 풀면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알고, 진실 되게(믿음직하게) 행하는 바로 거기에 우리가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힘의 원천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진리는 악령들의 특징인 ‘거짓’의 반대이고(에페 4:25), 진실이 이긴다는 것이 부활에 나타난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그 다음, 가슴을 ‘정의’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전투에 나선 군인의 가슴(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군복에 붙인 가슴막이 장구를 호심경(護心鏡)이라 합니다. 이처럼 ‘정의’는 우리의 심장(목숨)을 보호하는 무기인 셈입니다. 정의로 번역한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공의’, ‘경건’, ‘칭의’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가슴을 정의로 무장한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써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음’을 믿는 삶입니다(로마 1:16-17; 3:24,26).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righteousness)가 아니라 하느님이 선물하신 ‘의’입니다. 이 ‘칭의’(稱義)에 대한 믿음이 사탄의 공격과 고소로부터 우리의 연약한 ‘심장’(감정)을 보호해 줍니다(로마 8:38).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자기감정’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매일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신어야 합니다. 보병이 전장(戰場)으로 행군하기 위해서, 또 멀리까지 빨리 이동하기 위해서는 발을 보호하는 신을 신어야 합니다. ‘신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히포데오’(‘~아래’라는 뜻의 히포와 + ‘묶다, 매다’라는 뜻의 데오의 합성어입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을 신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意志)로 허리를 구부리고, 신에 달린 끈을 의지적으로 단단히 묶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발은 하느님이 주신 ‘평화의 복음’이라는 신을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 신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악령이 속임수로 지배하는 이 세상 어느 곳이나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다닐 ‘마음의 준비’를 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이사 52:7; 로마 10:15). 바울로는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라고 가르칩니다(에페 2:14-16). 악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평화의 복음’을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전하러 다니지 못하도록 길 위에 장애물을 두어 방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평화의 복음’을 신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2디모 4:2).

그 다음,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 나선 로마 보병은 방어용 무기로 방패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방패로 번역한 그리스어 ‘쒸레오스’(θυρεός)는 온 몸을 감출 수 있을 만큼 긴 형태의 큰 방패를 말합니다. 얇은 판으로 된 서 너 겹의 목재를 가죽으로 감싼 길이 1미터, 폭 80센티 정도의 장방형 ‘스쿠툼’(Scutum)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이 선물하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다녀야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이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든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는 훌륭한 방어용 무기입니다.

악마는 수시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외부에서 불화살을 쏠 때도 있고, 내부에서 불화살을 쏠 때도 있습니다. 환경을 통해, 관계를 통해, 일의 실패를 통해, 우리 마음에 낙담과 절망의 불화살을 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케 하는 불화살을 쏩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그 믿음,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그 믿음은 모든 불화살을 헛되게 만들고, 어떤 상황이든 참고 견디며 종국에는 이겨내게 만듭니다.

그 다음 ‘구원’의 투구를 받아써야 합니다. 전쟁에 나선 로마 보병은 머리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썼습니다. 또한 ‘개선’(凱旋) 행진을 할 때도 투구를 썼습니다. 이사야서는 악을 심판하시고 승리를 거두신 하느님이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신 모습으로 묘사합니다(이사 59:17). 따라서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쓴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보호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처럼 우리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는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습니다. 악마는 ‘속임수’에 능합니다.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거짓 가르침’과 ‘가치관’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유혹합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오염시키려 합니다. 돈이 곧 신(神)이고,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황금만능주의를 퍼뜨립니다. 과학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빛나게 해 준다는 과학지상주의를 퍼뜨립니다. 남이야 어찌되는 나의 이기적 탐욕(출세, 성공)과 가족이나 지역사회로 대표되는 집단적 탐욕(집값 상승을 위해 특수학교나 청년임대주택 건설 반대)을 극대화하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현혹합니다. 이런 사악한 가치관을 이 세상에 퍼뜨려 우리를 공격합니다. 실제로 세상은 ‘돈’과 ‘이득’을 위해서는 전쟁도 용인되고, 기아와 기근도 방치되며,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의 희생이 최우선적으로 강요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참 진리와 영혼을 망가뜨리는 속임수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거짓 교설과 허망한 가르침과 사악한 가치관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승리의 사역에 우리의 생각과 사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과 영생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으로 생각과 사고를 지키는 이는 반드시 승리하여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물론 우리만 들어가려하기보다 사악한 가치관에 속임수를 당하고 있는 이들을 건져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방어용 무기라면, 이제 드디어 악마를 대적하는 공격용 무기가 손에 쥐어집니다. ‘성령의 칼’, 즉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히브 4:12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2디모 3:15b-17

예수님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강력한 칼로써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1-11). 사도들도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우리 손에도 ‘하느님 말씀’이라는 성령의 칼이 쥐어져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능력의 칼을 사용하여 악령과 그 세력들을 대적하기보다 피해 다니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인 “진리, 정의, 평화(복음증거), 믿음, 구원”에 대한 소망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완전무장하고 영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강력한 무기들이 이미 다 주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는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이미 있습니다(에페 1:19).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잊고서 살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강한 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에페 6:10b

우리는 그 힘을 받기 위해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합니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렇게 함께 해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게 하느님이 주신 강력한 무기가 이미 주어져 있고, 또 우리 안에는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이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무장을 단단히 하였다 하더라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지 않고는 악령과 그 세력들과의 영적 투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꾸준한’ 기도는 우리를 승리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원천입니다. 특히 우리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한 군사로 부름 받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답게 영적 투쟁에 승리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The Last Supper Jesus breaks the bread.

오늘 복음서는 연중 17주일부터 한 달 동안이나 차례로 낭독해 온 요한복음 6장의 마무리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한 주제’를 전하는 독서 속으로 한 달 동안이나 걸어 들어가게 한 의도는 나그네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만큼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여정 끝에서 우리가 하느님이 마련하신 ‘하늘 잔치’의 기쁨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6-57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무는 방법이고, 당신이 우리 안에 머무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영적인 삶과 가장 깊은 신앙의 신비로 이끄시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향기는 꽃을 집으로 삼아 그 속에 머뭅니다. 비추인 상(狀)은 거울을 집으로 삼아 그 안에 있습니다. 이렇듯 꽃과 향기, 거울과 비추인 상은 둘이지만 불가분리의 본질적 연관 속에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먹힘으로 주님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 내가 살고, 주님은 내 안에서 사십니다. 장미와 그 향기처럼, 거울과 비추인 그 상처럼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처럼 가파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표적)의 참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생명의 양식’임을 밝히셨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 여럿이 수군거렸습니다(60절). 그들 ‘귀에 거슬렸다’는 뜻인데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기에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실 때만이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예수와 생명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요한 6:43, 65)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아셨음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선재(先在)와 십자가와 부활 이후의 승천을 말씀하십니다(62절).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고,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생명을 주는 영)고 말씀하십니다(63절). 여러분이 듣기에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습니까?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그랬습니다.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전해줍니다(66절). 다른 말로 하면 예수께 등을 돌리고, 더 이상 함께 다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짜와 가짜가 걸러졌습니다. 물질과 썩는 양식을 추구하는 육적인 사람은 떠나가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쓸 사람만 남았습니다(요한 6:27).

그들이 보인 이러한 반응은 오늘날도 성찬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영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영적인 양식과 음료라고 먹고 마십니다(요한 6:53-58). 이 행동은 예수님이 살아내신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역시 살아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삶’을 우리 역시 실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하지만 성찬례에 익숙하지 않은 개신교회 신자들, 특히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비신자들은 우리의 자못 ‘신중한 태도’를 보면서 “지금 뭐하나…” 이러면서 경계심을 갖거나 의문을 제기합니다. 더욱이 진정으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봐야할 진실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살과 피를 말씀하신 예수이 가리키는 그 이상의 것을 봐야했습니다. 성찬례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는 이들은 아직도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걸어야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곁에 있는 ‘열둘’을(원문에는 제자라는 말은 없습니다) 보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요한 6:67

1독서 여호수아 앞에 섰던 이스라엘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충성’을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요한 6:68-69

공관복음서 모두가 전하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지금 여기 등장합니다(마태 16:13-20; 마르 8:27-30; 루가 9:18-21).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아직 온전한 이해와 믿음은 아니지만 그는 분명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이시고,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임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 말씀에 담긴 모든 영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꾸준히 성찬례에 ‘믿음’으로 참여하다보면 어느 순간 활연관통할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그리고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이 진리를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흡족하셨을까요?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절인 70절과 71절을 보면서 그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야훼만을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섬길 것을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하나 되어 영생에 이르는 십자가의 삶, 십자가의 길을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사도들(베드로는 사도들을 대변합니다) 모두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충성’을 약속했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그들이 그 약속을 버렸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세례를 통해 주님께 ‘충성’을 서약하고 주님 몸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을 통해 ‘죽음’(어둠, 악마, 속박)의 세계에서 ‘생명’(빛, 하느님, 자유)의 세계로 이미 옮아갔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영원한 생명을 사는 하늘나라에 속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악령과 그 세력들과 악마적 제도들이 넘실대는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영적 투쟁 속에 있다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성찬례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영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탐욕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악마는 그런 악인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악마와 이 뒤틀린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새 생활의 실천’으로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신’(돈, 권력, 쾌락)을 섬기는 목마르고 배고픈 이들이 아니라 예수로 만족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행동으로 확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기인 “진리, 정의, 평화(복음증거), 믿음, 구원”에 대한 소망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완전무장하고 영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특히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신 강력한 무기가 이미 주어져 있고, 또 우리 안에는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이미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무장을 단단히 하였다 하더라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지 않고는 악령과 그 세력들과의 영적 투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부디 이 땅의 교회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며, 영적투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 평생 주를 섬기리.
나 약속합니다.
주 나의 주인 되시며
또 친구 되시네.
주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움 없으리.
내 삶을 인도하시니 길 잃지 않겠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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