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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19. 연중20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성찬례, 지혜의 주님이 온 몸으로 베푸신 영원한 생명의 잔치”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주님과 둘도 없는 하나가 됩니다. 그 친교를 통해 우리는 물질의 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는 부활의 사람임을 드러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부활생명의 사람으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성체를 나눌 때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며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잠언 9:1-6
  • 시편 – 34:9-14
  • 2독서 – 에페 5:15-20
  • 복음서 – 요한 6:51-58

연중 2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성찬례, 지혜의 주님이 온 몸으로 베푸신 영원한 생명의 잔치”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잔치’에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요즘에는 잔치를 하면, 특정 장소를 빌려서 뷔페를 제공합니다. 예전에는 잔치를 하면 집에서 손수 음식을 장만하곤 했습니다. 제 고향 사람들은 식탁에 ‘홍어’가 올라왔어야지 잔치에 먹을 게 있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다른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별식(別食)이 아니더라도 잔치에는 항상 맛있는 음식과 술이 그득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즐겁습니다.

1독서 잠언도 잔치 초대 이야기입니다. 천지창조 때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신비로운 존재인 ‘지혜’(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가 한 여성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기둥이 일곱 개나 될 정도로 웅장한 집짓기를 마친 지혜는 잔치를 베풉니다. 지혜가 베푸는 잔치는 겨우 끼니를 잇는 보잘것없는 식사가 아닙니다.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풉니다. 맛있는 음식과 심장을 기쁘게 하는 술이 풍성한 잔치입니다.

특히 지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잔치로 초대합니다. 자신이 차려낸 잔치가 무척 훌륭했던지 시녀들을 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잔치 음식을 먹일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까지 합니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마셔라.” 여기서 말하는 음식과 술은 문자 그대로의 음식과 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선물 받은 이가 누리는 ‘만족’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지혜가 베푸는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하느님의 구원과 구원받은 이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에 대한 상징입니다. 한마디로 성찬례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적절한 상징입니다.

 

시편 34편은 지난주일에 이어지는 ‘감사의 찬미’입니다. 오늘과 다음주일까지 시편 34편을 찬미하도록 배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치 지혜의 스승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듯이 예배 회중에게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9절,11절). 어째서 다른 것이 아니라 ‘지혜’를 먼저 가르친 것일까요? 그것은 지혜가 복 있는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잘 분별하는 정신적인 능력을 ‘지혜’(智慧)라고 말합니다. 흔히 ‘무지’(無知, 어리석음)의 반대로 쓰입니다. 일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달인’(達人)처럼, 어떤 분야의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기까지는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정신적인 노력과 그 원리를 몸에 습관으로 붙이기 위한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인’이란 그의 행동을 통해 몸에 담긴 정신적인 정보(지식)와 습관이 ‘지혜’로 흘러나오고 있는 셈입니다.

지혜는 달인으로 불리는 이에게서만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 속에서도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인생살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크게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만일 먼저 자신이 상대방의 ‘긍정적인 의도’(욕구)와 ‘마음’(감정)을 헤아리고 반응해 줄 수 있다면 ‘관계’는 개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이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른 바 ‘관계의 달인’입니다. 지혜가 그의 말솜씨와 눈빛과 표정과 몸짓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그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인간관계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정신적인 노력(황금률처럼, 아무래도 종교가 큰 도움이 되겠지요)과 그 깨달음에 어울리게 육체의 ‘이기심’을 조정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관계를 지혜롭게 가져가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 중입니다. 우리도 몸에서 지혜가 흘러나오는 그런 인간관계의 ‘달인’으로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터득하고 몸에서 흘러나와야할 진정한 지혜가 있습니다. “삶의 질서와 삼라만상의 원칙을 전체적으로 터득하는 일”입니다(욥기 38:3~39:30). 다른 말로 하면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파악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언젠가 이것을 ‘믿음’과 관련지어서 말씀드린 바 있는 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이란,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이다”라고 했던 정의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과 지혜’는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질서와 원칙을 터득하고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언젠가 찾아올 죽음과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을 터득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단편선 <세 가지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삶의 질서와 삼라만상의 원칙에 대한 깨달음을 모아 전한 책이 ‘욥기’, ‘시편’, ‘잠언’으로 대표되는 ‘성문서’(케투빔)입니다. 그들이 성문서 작업을 하면서 확인했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모든 지혜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알고’, ‘경외’하는 삶이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원(근본, 시작)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 지혜자의 삶이라 가르칩니다(욥기 28:28; 시편 111:10; 잠언 1:7; 9:10; 전도 12:13, 참고 집회 1:14). 지혜로운 사람, 즉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출발점은 하느님을 아는 것, 즉 내적으로 하느님과 연결되는 삶입니다(시편 1; 잠언 2:5-8). 성경은 특히 ‘안다’는 말을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부부처럼,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교제 상태에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인격적 교제 속에 있어야 비로소 하느님을 아는 삶입니다.

더욱이 ‘경외’(敬畏)란 말은 어떻습니까? ‘경외’ 또는 ‘외경’(畏敬)이라는 말은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의 본질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입니다(1요한 4:16-19). 겸손과 신뢰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사랑)하는 사람인지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말씀)을 지키는 데서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사랑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며, ‘지혜’를 선물 받은 삶입니다(잠언 2:4-6). 이처럼 오늘 시편도 지혜를 예찬하는 1독서 잠언의 연장입니다.

 

2독서 에페소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기에 그 주일에 낭독하는 구약, 시편, 복음서와 주제의 일치성이 약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외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전례독서 주제인 ‘지혜’와 연결됩니다.

…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에페 5:15,17

지난주일 독서에서 에페소서 기자는 세례를 받고 성령 안의 새 사람으로 거듭난 우리가 “사랑의 생활”을 할 것을 교훈했습니다(에페 5:2).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서 에페소서 기자는 빛이신 주님을 믿고 “빛의 자녀”(에페 5:8)가 되었으니 지혜로운 사람처럼 살라고 교훈합니다(15절).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처럼’ 살아가는 일, 즉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에페소서 기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은(사랑받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와 총명(통찰)을 특권처럼 나누어 받았다고 이미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에페 1:3-14).

이제 ‘성도’들이 깊이 생각해서 현재를 ‘지혜롭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종말의 시대를 성도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박한 종말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로뿐 아니라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1고린 7:26-31, 갈라 1:4). 그들이 보기에 세상은 이미 악에 기울어져 있고, 극도로 퇴폐적입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우면 그런 일들이 만연한다고 했는데 성취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이런 역사의 시기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악이 지배하는 이 종말의 때, 즉 ‘남은 기간’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결단해야 합니다(16절). 퇴폐적 삶에 빠진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에 유의하여 이 시대를 지혜로운 사람처럼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16-17절, 참고 갈라 6:10). 이렇게 에페소서 기자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로운 삶과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삶을 대비합니다.

그런 다음 종말의 때를 살아야 하는 교회 공동체의 참된 ‘친교’에 대해 보다 실제적인 교훈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친교는 ‘술’로 맺는 관계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에서 생겨납니다(18절). 사실 성령을 가득히 받으면 우리는 지혜롭게 삽니다. 그 옛날 천사의 방문을 받았던 ‘성모 마리아’처럼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19절).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우리는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20절). 모두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소유한 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행동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빛의 자녀처럼’, 주님의 뜻을 잘 식별하여 행동하는 복 있는 인생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갑자기 ‘지혜’가 등장하고, 그 지혜가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야기가 1독서로 선정되었을까? 다른 시편도 많은데 굳이 예배 회중에게 ‘지혜’를 배우라는 본문이 선정되었을까?”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지혜’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잠언과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지혜’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잠언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에 앞서 지혜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습니다(잠언 8:22-23. 참고: 외경 지혜서 8:2-3; 집회 24:1-4). 하느님은 지혜로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잠언 3:19-20).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은 지혜 덕분에 존재하며, 형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지혜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고, 사람들을 불러 올바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잠언 1:20-33; 8:1-2,32-36; 9:1-6).

그러면 잠언에서 간간히 인격체로 등장하는 지혜가 본격적으로 ‘인격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누구의 통찰 때문일까요? 그것은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철학자 ‘필로’의 활약 때문입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지혜’와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를 의도적으로 종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한 말로 “우주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인 원리”를 뜻합니다. ‘필로’는 이 로고스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하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적 존재, 즉 ‘하느님의 맏아들’로 인격화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의 이 지혜 전통과 유대교 철학자 ‘필로’의 로고스 개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발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육신 하시어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신성’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문서가 지난주일에 언급한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이며(요한 1:1-18), 골로사이서(1:15-18)와 히브리서(1:1-3)에서도 하느님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찬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인격으로 나타나셨음(마태 11:19, 28-30; 루가 7:35; 11:49; 1고린1:18-25)을 잠언과 시편 본문이 미리 보여주기에 전례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지혜가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야기가 1독서로 배정된 이유를 볼 차례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야기의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요한 6:54

이 말씀과 1독서 잠언의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보시오.”가 서로 짝으로 어울립니다. 또 시편의 “맹수들은 먹이 찾아 배고플지 모르나 야훼를 찾는 사람은 온갖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으리라”도 복음서의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와 어울립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 지혜이신 분이 당신의 ‘살’과 ‘피’로 지금 잔치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먹이시려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오늘 서신 말씀처럼,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음으로 영(領)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에 요한복음 6장이 요한식의 ‘성찬제정’이야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주님이 당신의 살과 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마련한 ‘천상의 잔치’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풍요롭고 영원한 ‘천상의 잔치’를 미리 체험하고, 갈망하게 하는 일종의 ‘맛보기’입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세상의 맛보기 그 이상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마치 엘리야를 회복시키신 것처럼, 이 천상의 잔치에서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찬례에서 변함없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領)하며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전적으로’ 먹고 마심으로써 시들었던 우리의 삶은 생기를 되찾고, 영양을 공급받아 자라나며, 건강해집니다. 봄볕아래 꽃들처럼, 가문 날에 빗줄기에 젖어드는 식물들처럼 우리의 영혼은 소생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천상의 잔치인 성찬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성찬례는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천상의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모든 논쟁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유래합니다. 지난주일 마지막에 읽은 말씀과 오늘 처음에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재차 자기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더니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당신이 살아있는 빵인데, 당신이 줄 빵이 ‘살’이고, 그것을 먹어야 영원히 산다니 유대인들이 듣기에 정말 끔찍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간성’, 즉 ‘전인격’과 ‘십자가 희생’을 뜻한다고 지난주일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느냐?”며 서로 논란을 벌였습니다. 마치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에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던 니고데모를 생각나게 합니다(요한 3:3-4). 게다가 ‘살’을 먹으라는 말씀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예수님은 일종의 폭탄 같은 발언을 하나 덧붙이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요한 6:53

피까지 마셔야 한다는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피는 곧 생명 자체이기에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먹는 것도 엄격히 금했습니다(창세 9:4).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원히 산다고 굳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먹어야할 “생명의 빵”에서 시작하여 “살아있는 빵”을 거쳐 이제 “나의 살과 피”로 구체화되면서 그 빵이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특히 ‘살’이 성육신하신 주님의 인간적인 본성을 가리킨다면, ‘피’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살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과 인간성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피를 마신다는 것은 주님이 피 흘리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그 죽음을 자신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먹고 마실 때 생명을 간직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성찬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를 성찰합니다. 배운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신 성찬대로 살아가는 삶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본문에 네 번에 걸쳐(요한 6:54, 56, 57, 58) ‘먹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트로고’는 맹수가 사냥한 먹이를 으드득으드득 깨물어 먹고, 아작아작 씹어서 완전히 삼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으로’ 먹는다는 뜻입니다. 풀어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인간적 삶과 십자가 죽음을 깊이 되새기며 성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시고, 인간의 삶을 몸소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모두가 성육신하신 그 몸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 몸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맹수가 먹잇감의 뼈를 바스러지도록 깨물어 씹고 삼켜서 완전히 소화시키듯이, 성체와 보혈에 담긴 그 사랑과 구속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일이 성찬례에 참여한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먹다’란 말 속에 담고자하신 의미이고, 제가 ‘전적으로’라는 말 속에 담고자 했던 의미입니다.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먹히시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 심장을 떨리게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연중 17주일부터 21주일까지 교회는 복음서 전례독서를 요한복음서 6장에서 차례로 배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한 주제’를 전하는 독서 속으로 한 달 동안이나 걸어 들어가게 한 의도는 나그네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만큼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오병이어 기적이야기’를 공관복음서와 달리 ‘과월절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어째서 다른 날도 아니고 오병이어 기적이야기가 ‘과월절’ 무렵에 일어났다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기록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과 그 후에 진행된 예수님의 말씀이 과월절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과월절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아야 그 뜻이 잘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우선 ‘과월절’이 어떤 날입니까?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하느님의 지시를 따라 ‘흠이 없는’ 어린양(흠이 없는 1년 된 수컷이면 양이나 염소나 상관없습니다)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고, 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었습니다(출애 12:3-13). 그들이 집안에서 음식을 먹는 동안 죽음의 사자는 집에 ‘피’가 묻어 있으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과월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그 한 번의 순종이 그들의 ‘생명’을 죽음의 사자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요한은 이 ‘과월절’이 예수님의 위격(位格)과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기에 좋은 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과월절에 등장하는 이야기 소재들이 예수님의 정체성과 성육신의 목적, 그리고 성찬례를 너무나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병이어 기적(표적)과 그 후에 진행된 예수님의 말씀을 ‘과월절’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명백히 밝힙니다. 그러니까 “얼마 남지 않은 때”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월절’을 명기(明記)한 것이 중요한 해석이자 편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과월절과 예수님이 어떻게 관련된다고 보았습니까? 이스라엘은 과월절에 흠이 없는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랐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잡은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그 날의 식사는 대대로 기념해야할 특별한 식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며, 당신의 몸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특별한 식사(잔치)인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은 성찬제정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이 아니라 공생애 첫 해에 일어났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그 자체로 성찬의 연속이었던 셈입니다. 특히 과월절이 노예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옮겨가는 여정의 시작이었듯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그 믿음이 죽음(어둠)에서 생명(빛)으로 옮겨가게 합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표적이었다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그 빵은 나의 살이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과월절’과 ‘출애굽’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자신들에게 재해석해 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지혜의 예수님이 오늘도 온 몸으로 천상의 잔치를 베풀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이 약속은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성찬례를 로마제국이 ‘식인’을 하는 사교(邪敎)집단이라며 박해하는 속에서도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냈습니다. 성찬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형식이 아닙니다. 2천 년 동안 교회는 우리가 먹는 빵이 예수님의 몸이고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베푸신 잔치에 와서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기만 하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선언하셨고, 그 초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까지 연장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나와서, 주님이 건네시는 참된 양식인 그 살과 참된 음료인 그 피를 감사함으로 먹고 마시십시오. 그 살이, 그 피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사는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 친교를 통해 우리가 결국은 썩어 없어질 물질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힘, 영원한 생명의 힘(영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부활의 사람임을 드러내십시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새로운 인간 본성에 참여한 이들임을 보여주십시오. 우리 자신이 부활 생명을 소유한 사람임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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