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5. 연중18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1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궁극적 갈망을 채워 주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양식”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수명’의 삶에서 ‘생명’(구원)을 사는 이들로 옮아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찾아 온 그 모든 갈망의 궁극적 해답이 있음을 눈 뜬 그리스도인답게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날마다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성자께서는 하늘의 말씀과 생명의 빵을 우리에게 주시나이다. 비오니, 살아있는 참된 양식으로 우리를 먹이시어 새 힘을 얻게 하시고, 진리를 위하여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6:2-4,9-15
  • 시편 – 78:23-29
  • 2독서 – 에페 4:1-16
  • 복음서 – 요한 6:24-35

연중 1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궁극적 갈망을 채워 주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양식”입니다.

복음서는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을 알려주시려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것을 믿고 예수께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으며,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와 ‘시편 78편’은 복음서의 주제인 ‘하늘에서 온 양식’의 배경이기에 배정되었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그 명령을 어기고 다음날 먹을 것까지 저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남겨 둔 것에서는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출애 16:20). 이 만나처럼, 이 세상의 ‘빵’은 썩어 없어지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물질적인 것으로 삶의 만족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인생은 썩어 없어질 빵을 중심으로 살기에는 물거품처럼 한 순간이고(시편 78:33),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처럼(시편 78:39) 아쉽기만 합니다.

시편 78편은 시인이 백성들에게 지혜를 들려주려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오신 구원사입니다. 각 세대는 이 구원사를 기억하고, 현재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찬미한 부분은 광야 길을 걷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느님이 그들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서 31절이 24절을 인용했기에 선정되었습니다(참고. 느헤 9:15).

2독서 에페소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계속독서이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전례독서와 주제의 일치성이 약하지만 한 가지 핵심은 서로 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즉 전혀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9절-10절).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그런 분으로 경험하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갖도록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13절). 그렇습니다. 성육신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은 완성되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교회인 우리 눈에는 이것이 진실입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시라고 칭송합니다(요한 6:14). 그러더니 예수께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메시아)으로 모시려 합니다(요한 6:15).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런 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십니다. 자신들의 ‘바람’을 외면하는 예수님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포기할 그들이 아닙니다. 아침에 다시 시도하기로 하고 그날 저녁은 물러났습니다.

이튿날 아침입니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산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밤 중에 호수 위를 걸어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요한 6:21).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 회당’에 계셨습니다(요한 6:59). 군중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라고 푸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푸념 섞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왜 왔는지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릴 정도의 ‘책망’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6

“정말 잘 들어두어라”는 말씀(원문에는 아멘, 아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은 흔히 예수님이 강조하실 때 쓰시는 관용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관심을 드러내시고 책망하십니다. 이 한 말씀 앞에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오늘 나의 ‘예수 따름’을 성찰할 수 있다면 복된 인생입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이유는 ‘빵’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배고픈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문제 해결입니다.

24시간 뉴스방송을 시청하다보면, 매시 정각이 되기 전에 광고 방송을 합니다. 점심 무렵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일에 동참해 달라는 광고 방송이 꼭 나옵니다. 그 광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세상에는 배가 너무나 고파서 하느님이 빵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겠구나…” 사실 배고픈 사람들이 빵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갈망은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먹이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욕적으로 들리는 말씀을 하시니 좀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행간의 뜻을 읽어봅시다. 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살기 위해 먹고자 하는 할 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배부름’에 집착할 때는 잘못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소유욕은 ‘배부름’입니다. 이 소유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먹거리를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그 같은 소유욕은 다른 사람의 생명에 위협적입니다. 더욱이 그 소유욕은 필연적으로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사실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소유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가지면 자기 것이 되는 것 같지만 진실은 나도 거기에 매이고 맙니다. 자신이 먹을 것을 독차지한 것 같지만 진실은 먹을 것에 자신이 지배된 삶입니다.

그들은 분명 은총으로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배부르기를 원했습니다. 소유욕이 작동한 것입니다. 그들은 먹거리를 넘어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소유욕을 위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독차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눈을 뜨기 원하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라는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그들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본문에 ‘기적’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세메이온’(σημεῖον)입니다. 이 말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표시’,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입니다.

지난주일에 요한복음에 선택된 7개의 기적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신성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고 펼쳐지고 있음을 가리키는 ‘신호’입니다. 간단히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기적 사건 속에서 이것을 보지 못하고 그 자체에 ‘몰입’(관심)한다면 허사입니다. 그들은 기적에서 그 같은 표지(표시), 신호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눈은 ‘신호’ 그 자체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에 몰두(관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일갈(一喝)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요한 6:27

썩어 없어질 양식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여러분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육체의 양식’입니다. 그렇다고 썩어 없어질 양식이니 쓸데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들에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최고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인간이 먹어야할 양식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면 부모는 젖으로, 이유식으로, 그리고 밥으로 자녀를 양육합니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육체의 양식뿐 아니라 ‘정신의 양식’도 먹도록 교육기관에 보냅니다. 교육을 통해 자녀는 지식을 습득할 뿐 아니라 짐승 같은 본능적 삶의 태도를 탈피하여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人間)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양식 말고 인간이 참으로 먹어야할 본질적 양식을 언급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얻기 위해 ‘힘써야’ 할 진정한 양식, 즉 일해야 할 ‘지고의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영’(靈)이신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결합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란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도 먹어야 합니다. 그 양식을 먹어야 만이 우리는 ‘궁극적 생명’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은 식별의 눈을 갖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이 ‘본질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양식’을 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그 양식을 줄 수 있는 권능을 당신에게 주셨다고 명백히 밝히십니다. 권능을 주셨다는 말은 원문에 “승인의 도장(인장)을 찍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양식의 ‘절대 소유권’이 오로지 예수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업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며, 절대 소유권을 가지신 예수님께 그 생명을 ‘선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풀어서 말씀드리면, 인간에게는 자기 구원의 근거가 전혀 없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종국에는 썩어 없어질 양식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그 양식을 얻도록 우리는 일해야(힘써야)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논쟁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 6:28

과연 ‘율법의 후예’다운 말이지만 대단한 오만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공동번역에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로 번역)는 말씀 중에서 그들은 ‘일’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루가복음에 기록된 율법교사의 질문과 닮았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0:25-28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일’에 대한 질문에 ‘율법 준수’로 응수하셨습니다. 율법준수가 영생을 얻는 하느님께 속한 일이라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견해였기 때문입니다(마태 19:16-30; 마르 10:17-31; 루가 18:18-30; 요한 5:39). 따라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그들이 콕 집어서 언급한 ‘하느님의 일’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영생관인 ‘율법 준수’의 다른 표현입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을 이렇게 옮길 수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 율법을 지켜야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요한 6:29

놀랍습니다. 그 당시의 영생관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대답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율법준수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유일한 하느님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양식을 선물하도록 하느님께서 절대 소유권을 주시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거든 “나를 믿어라”입니다.

그들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어떤 식으로 율법을 지켜야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그들이었습니다. 율법의 후예답게 뭔가 해야 한다고 여긴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기만 하면 된다니 맥이 빠집니다. 그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묻습니다.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그들을 먹이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요한 6:30~31

예수님은 이미 하루 전에 당신이 누구신지를 표시하는 신호로써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 빵의 기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모세 같은 예언자요 왕이라는 증거로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먹이는 기적을 계속해서 일으켜야 만이 믿을 수 있다는 요청입니다. 자신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할 조건을 갖추라는 강요입니다. 그 말로써 오병이어 기적의 ‘신호’를 알아보지 못한 이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비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어제의 일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왕’으로 모시려 한 일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오버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작 딱 한번, 그것도 겨우 오천을 먹인 기적 하나 가지고 당신을 믿으라니 말이 됩니까? 최고의 예언자 모세는 무려 40년이나 우리 조상들을 만나로 먹였습니다. 그 정도 기적들은 있어야 선생님 말을 믿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이런 태도가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문제만 해결되어도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새 다른 문제에로 눈을 돌립니다. 더욱이 그들은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느라고 자신들이 이미 받은 은총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처럼,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신(에페 4:6) 하느님을 ‘신호’(표시) 속에서 봐야한다고 콕 집어서 알려 주셨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신호’(표시) 그 자체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배경이었던 ‘하늘’을 그들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늘’을 언급했으면서도 ‘만나’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진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광야의 백성을 먹인 사건은 하늘의 하느님이 은총으로 행하신 구원의 개입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그릇된 생각에 끌려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에 붙잡힌 그들의 생각을 ‘현재’로 데려오십니다. 예수께서 강조하실 때 쓰시는 ‘관용구’(원문에는 아멘, 아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가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요한 6:32a

흥미로운 점은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그들을’ 먹인 사람은”이 아니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입니다. ‘그들’이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데 ‘너희’라고 하십니다. 왜 ‘그들’이 아니라 ‘너희’일까요? ‘현재 일’을 이야기하자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로 어제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분명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자신들’을 먹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에 아주 먼 과거의 조상들이나, ‘모세’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모세와 예수님은 전혀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먹인 일을 하지도 않은 아주 먼 ‘과거의 사람’과 그런 일을 직접 행하신 ‘오늘의 예수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들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한 6:32b-33

그들은 ‘하늘’을 언급했으면서도 ‘만나’가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어제 빵을 배불리 먹었으면서도 그 빵을 내려주신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먼 과거인 광야생활 때 뿐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도’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썩어버리는 ‘만나’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빵’을 오늘날도 그들에게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고 예수님은 당당히 밝히십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민족적으로 ‘아버지’라고 말했지,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말해오진 않았습니다.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도 몸소 진정한 빵을 내려주십니다. 이 빵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구원)을 줍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주시는 이 ‘현재의 선물’(진정한 빵, 구원, 영원한 생명) 앞에서 그들은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언급한 ‘만나’는 지금 현실로 성취되는 ‘구원’에 대한 오래 전의 예고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의 하느님이 ‘오늘날’도 구원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간청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요한 6:34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 간청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생명을 주는 빵을 ‘물질적인 수준’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썩고 없어질 보통 빵, 즉 ‘일회용 빵’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빵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항상’ 주시라고 욕심을 냈습니다. 이 요청을 들으면서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예수께서 ‘시카르’라는 동네의 우물에서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 여인 역시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물’(영원한 생명)을 ‘물질적인 수준’으로 오해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요한 4:15

예수님은 물질적 수준으로, 일회용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을 오해하는 그들을 향해 놀라운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그렇습니다. 2천년 동안 교회가 목숨을 걸고 증언한 진리입니다. 인간은 빵(밥)을 먹어야 살 수 있도록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결코 ‘자족’(自足)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이 같은 피조물의 속성(조건)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세상 속에 던져진(彼投性) 현존재이기에, 인간은 ‘물질적인 빵’(양식과 음료)을 필요로 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많이 먹고 마셨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 때마다 음식물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 식사를 반복 합니다. 더욱이 오늘은 먹고 마셨다 하더라도 내일은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위한,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한 ‘빵’까지 끌어 모으려 집착합니다. 그런 일을 거칠게 해낸 이들을 ‘부자’라고 부르고, 좀 더 세련되게 해낸 이들을 ‘재벌’이라고 부릅니다. 사회가 그런 이들을 눈감아주면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은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이 아무리 많이 끌어 모았다 하더라도, 배가 불러오도록 아무리 많이 먹고 마셨다 하더라도, 배고픔과 목마름은 매일 찾아드는 밤처럼 또 그들을 찾아듭니다. 그 많은 소유로써 ‘수명’(壽命)을 보장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을 말하면 ‘생명’(生命)을 사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게 무의미한 헛헛한 일상이 인간 실존의 모습이라면 지나친 말일까요?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발견합니까? 그 배고픔과 목마름은 단지 육체적인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물질적인 ‘빵’(음료)보다 훨씬 깊은 다른 차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 문학, 종교가 존재해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음식이나 음료가 ‘그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몰두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이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탐닉’합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음식이나 음료’가 갖는 상징은 돈, 권력, 명예, 지식, 성, 약물중독, 관계, 종교적 열광주의 등입니다. 그것들이 ‘수명’(壽命)을 사는 자신을 ‘생명’(生命)으로 살게 해 줄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럴수록 인생은 더 깊은 배고픔과 목마름의 아우성에 빠져듭니다. 그렇습니다. 인생들이 채우고 해갈하길 원하는 ‘그 깊은 배고픔(갈망)과 목마름(갈증)’은 물질적인 ‘빵’(음료)에 대한 배고픔(목마름)을 제거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그 깊은 배고픔과 목마름의 아우성을 충족시킬 ‘궁극의 빵’(밥)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부자나 재벌이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과학자나 종교인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농부나 노동자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생명’(구원)에 관한한 인간의 처지는 공평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 이 ‘궁극적 생명의 빵’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 제공해 주신 ‘생명의 빵’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인류의 ‘밥’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유’에 놓였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루가 2:12,16). 구유는 마소의 밥통입니다. 은유로 말하면, 마소(馬牛) 같은 존재로 전락한 인간이 ‘진정한 밥’이신 예수를 먹고 구원의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길이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갈망(갈증)과 외침이 향하고 있는 ‘그 궁극적 갈망’, 즉 ‘최고의 영적 갈망’(배고픔)을 채우러 오신 ‘생명의 빵’입니다. 우리의 허무한 수명이 궁극적 ‘생명의 충만함’으로 건너가도록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적인 빵입니다. ‘영’(靈)이신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목마름)을 채워주시는 ‘원천’입니다. 우리가 삶의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놓이든지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십니다. 풍요로울 때든지, 편안할 때든지, 궁핍할 때든지, 고난 속에 있을 때든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궁극적 생명의 충만감,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 선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수단은 우리 각자의 ‘믿음의 선택’으로 인격적으로 소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 믿음을 선택했고, 예수가 생명의 빵이심에 우리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일회용 빵’도 아닙니다. 먹고 나면 또 배고프고, 마시고 나면 또 목마른 그런 일회용 빵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친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단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완전한 구원(생명)을 영원히 완성하신 분입니다(히브 10:14). 그렇습니다. 오늘 2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고요히 묻습니다. 사도들과 교회가 선포해 온 이 진리가 우리 각 사람의 양식이 되었습니까? 삶에서 예수를 무엇으로 체험했습니까? 예수를 ‘생명의 빵’으로 알고 있는 것과 예수를 생명의 빵으로 먹으며 살아가는 삶은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 삶의 진정한 기쁨으로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체험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습관을 따르는 종교심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 체험을 하고 싶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믿는 것’이고(요한 6:29,40),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요한 6:35,37,44,47). 성찬례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우리에게서 응답되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의 식탁을 차리시고(요한 6:55)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와서’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빵을 먹으라 하십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부분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빵이심을 믿고 성체성사를 받으러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시시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던 그들처럼, 자기 성취나 업적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두 가지 조건에 항복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피조물임을 가장 철저하게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정말이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 성찬례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받기 위해 제단에 나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이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온전히’(감사함으로, 전인격적으로) 먹고 마시는 이는 더 이상 자기 밖에서 갈망의 해답을 찾아 헤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안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동안 배고파하고 목말라 한 그 모든 갈망의 궁극적 해답이 있다는 진실에 온전히 눈 뜨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로 만족하고, 예수로 충분한 존재들답게 이 세상을 살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무 공로 없고, 천한 우리지만
주님의 식탁에 함께 불러주셨네
죽음이 가르랴 주께 속한 이 몸
아 즐거워라, 참 삶을 얻었네.
아멘.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무더위를 견디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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