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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4. 성령강림대축일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부활절기 50일을 마감하는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이날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에 강림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지속하는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이 내주하시는 하늘 공동체답게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더욱 널리 퍼뜨리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다짐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이웃에게 증거하며, 세상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주일 감사성찬례 본문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21
  • 시편 – 104:24-34,35하
  • 2독서 – 1고린 12:4-13
  • 복음서 – 요한 20:19-23

 

여러분 혹시 ‘십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저는 중학생 때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 궁금했습니다. 여러분이 감독이라면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겠습니까? 하느님을 상징하는 이글거리는 큰 불기둥이 바위 계곡 사이에 솟구쳐 있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불길이 갈라져 나오면서 돌 판에 계명을 새깁니다. 모세는 그 모습을 두려움 속에 지켜볼 뿐입니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도 생동감 넘치는 한편의 영화를 본 느낌입니다. 루가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인 성령 강림을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자신의 책을 읽는 이들이 오래도록 그 사건을 기억하도록 최대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그 사건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런 의도를 갖고 도움이 될 만한 이전의 전승을 수집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통일성 있는 전승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전승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바로 오늘 들은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십니다. 물론, 이 행위는 아담(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숨을 불어넣어주신 것처럼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구약성서의 이 표상을 의미 깊게 활용하여 루가보다는 훨씬 고요히, 평화롭게 성령 강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루가복음과 달리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에 모두 일어난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루가가 요한의 이 전승을 따르면 될 것 같지만, 어딘지 밋밋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요한복음은 사도행전(루가복음)보다 후대에 저술된 복음서입니다. 결국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하여 루가가 참고할만한 초기 그리스도교에 형성된 고대 전승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루가는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갔을까요?

일단 루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전승을 받아들입니다. 4복음서 저자 중에서 오로지 루가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자주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시기가 요한복음처럼 당일이 아니라 부활 후 최대 40일 뒤로 늦춰지는 셈입니다. 그 40일이 지난 뒤에 제일 먼저 맞이하는 유다인의 명절이 바로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입니다.

‘오순절’은 구약의 ‘추수절’(공동번역은 ‘맥추절’, 개역성경은 맥추절, 칠칠절로 번역)이 훗날 개명(改名)된 절기입니다. 과월절 후 7일(한 주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날 오는 명절입니다.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구약의 3대 명절입니다(레위 23:15-16, 신명 16:9-10,16).

출애굽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 출애 19:1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여라.
옷을 빨고
셋째 날을 맞을 준비를 갖추게 하여라.
셋째 날 야훼는
온 백성이 보는 가운데
이 시나인 산에 내리리라.”
– 출애 19:11-12

여기 “석 달 째 되는 초하룻날”이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의 과월절(정월 14일)을 지키고, 다음날(정월 15일, 민수 33:3) 이집트를 탈출하여 나온 지 47일(한 달 30일 기준)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시나이 광야에 이른 후 3일째(셋째 날) 되는 날, 즉 이집트를 탈출한 지 50일이 되는 날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받고 ‘계약 공동체’로 출발 했습니다(출애 20장).

이런 포개어짐 때문에 언제든 ‘추수절’은 그들이 시나이 산에서의 ‘율법 수여’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선택된 민족’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날로 발전할 내부적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추측하건데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고, 그들이 포로로 끌려갔던 시절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에 과월절 후에 오는 ‘추수절’은 시나이 산에서의 ‘율법 수여’와 ‘계약 공동체’로 출발했음을 기념하는 명절로 강조점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이후 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가 칙령을 통해 포로귀환을 명령하여 즈루빠벨이 제 2성전을 건축한 후에는 ‘추수절’이 흩어진 유다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를 회상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례 절기’의 성격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약중간기를 거치면서 ‘추수절’을 ‘오순절’로 개명(改名)했을 텐데 근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신약시대에는 로마제국 내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다인들이 ‘헤로데’가 증축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큰 명절로 정착했습니다(신명 16:16).

이처럼 ‘오순절’은 로마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다인들에게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고, 하나의 공동체성을 갖게 하는 큰 명절이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오순절이 갖는 이런 발전된 의미에 주목하면서 루가가 성령 강림 사건을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연결한 이유를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령 강림을 통해 구약의 율법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입장입니다(갈라 3:2-5, 23-25). 아브라함 혈통의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탄생한 교회가 하느님이 선택하신 진정한 새 이스라엘임을 가르치고 싶어서 성령 강림 사건을 오순절에 연결했다고 말입니다. 성령을 통해 탄생한 교회야 말로 영적 ‘새 이스라엘’이며,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라는 주장입니다.

아무튼 루가는 예수님과의 고별 이후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인 성령 강림을 오순절 전승에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교회 안에 현존해 계시고 다스리며 이끌어 가시는 성령이 인간의 내면(지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하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이 성령을 보내주신 분이 예수님임을 명백히 전하고 싶었습니다. 성령은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초월하는 분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참고할만한 전승을 수집하지 못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고심하던 루가가 ‘드디어’ 구약에서 찾아낸 사건과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과 바벨탑 사건(창세 10:21-32, 11:1-9), 시나이 산 십계명 수여 사건(출애 19, 20, 24, 32장), 승천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2열왕 2장), 다니엘의 꿈 이야기(다니 7:13- 14)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는 이 사건과 이야기들을 오늘 본문에 은밀히 스며들게 했는데 여러분 눈에는 보이십니까?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 같이 성령 강림의 생동감을 전해줄 만한 사건과 이야기이며 루가의 의도에 딱 맞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시나이 산 십계명 수여’ 사건과만 연결하여 말씀드립니다.

우선, 그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루가는 지금 대단히 ‘감각적’으로 성령을 묘사합니다. 물론,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에 우리의 ‘오감’으로 파악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한 인간의 행실을 보아 그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영(πνεύμα)’과 ‘바람(πνοή)’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루가는 성령이 강림하는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몰아치는 ‘바람 소리’로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확히는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입니다. 주어는 ‘바람’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임을 강조합니다. 이리하여 성령이 ‘하늘로부터'(위에서) 왔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남았습니다. 바람은 언제든 집안에 갑자기 불어 올수도 있고, 목적도 없이 아무 사람에게나 불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루가는 그 “바람 소리가 하늘로부터 의도를 가지고 내려왔다”는 점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 소리, 즉 성령이 기도하던 지상의 신도들(교회) 각 사람을 지향해 내려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구약의 자료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구약의 ‘오순절 전승’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구약의 봄 ‘추수절'(훗날 오순절)이 시나이 산에서의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절기로 발전해 갔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오순절 전승에 사용되고 있는 강력한 이미지가 바로 ‘불’입니다(출애 19:18). 제가 처음 영화 ‘십계’에서 언급한 바로 그 ‘불길’입니다. 이 ‘불길’을 루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라고 은밀히 사용합니다. 영화 십계에서도 큰 불기둥에서 바람처럼 갈라져 나온 ‘불길’이 돌 판에 닿자 ‘언어’ 즉 십계명으로 새겨집니다. 루가에게서도 ‘바람 속’에서 나타난 이 ‘불길’이 ‘혀’(언어, 여러 가지 외국어)로 바뀌어 각 사람 위에 내렸습니다(새겨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살아있는 돌 판, 즉 ‘계명’(계약)이 된 셈입니다.

이렇게 오순절 전승에 힘입어 루가는 그 ‘바람 소리’가 지향하는 대상, 즉 성령이 기도하던 신도들 각자에게 의도적으로 임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성령 강림 사건의 날짜를 오순절로 잡음으로써 루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단지 사람이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낳으신 공동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인간이 아니라 ‘신적 기원'(紀元)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의도로 교회의 복음 선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말씀으로 시작됐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부터 복음이 마치 ‘불길’처럼 ‘전파’된다는 상징입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언어 이적’에 놀란 사람들의 ‘이중적인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5-13절). 그들은 세계 도처 민족들 가운데서 살다 온 유다인들을 대표합니다. 한 무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을 그들 자신의 모국어로 들으며 놀라워합니다. 또 한 무리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이러면서 빈정거리고 비방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아의 후손’과 ‘바벨탑 사건'(창세 10:21-32, 11:1-9)을 발견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 ‘언어 이적’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바벨탑 사건에서 유래한 언어 혼란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제거됐다고 주장합니다. 각 민족이 ‘새로운 하나의 언어’를 종말론적 선물로 제공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언어로써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을 모든 민족이 한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바벨탑의 언어 혼란 사건을 극복하고, 분열된 인류를 하나로 통일시켰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 ‘언어 이적’ 속에 녹아있는 ‘노아의 후손과 바벨탑 사건’을 발견하고서 그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가가 처한 당시 교회 현실을 꼼꼼히 되짚어 본다면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루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은 신도들에게만 일어난 일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더욱이 다른 유다인이나 이방인들은 아직 성령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바벨탑의 언어 혼란 사건을 극복하였다거나, 분열된 인류를 하나로 통일시켰다는 그런 멋진 일은 ‘아직’ 아니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선교는 먼저 유다인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증언입니다. 세월이 얼마동안 흐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은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사도행전 10, 11, 15장에서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예루살렘에서의 첫 번째 오순절은 오로지 신도들(교회)에게만 성령의 세례, 성령의 권능을 부으신 사건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부분은 성경 인증을 통해 오순절 사건의 의의를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14-40절). 전례독서는 21절까지만 읽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을 향해 “술에 취했군!” 이러면서 빈정거리며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마주섭니다. 그렇지만 ‘언어 이적’에 대해 설명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성경 인증으로 넘어갑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을 삶으로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구약 예언자 요엘의 약속이(요엘 3:1-5상; 사도 2:16-21) 성취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설교의 초점 역시 성령 강림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부활하신 주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온 천하의 주님과 그리스도로 즉위시키신 ‘부활하신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신도들, 즉 교회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부활하신 주님의 첫 증인으로 힘차게 나서게 됨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새 계약의 백성,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탄생일입니다. 협조자이신 성령의 권능을 통해 무기력에 빠져 있던 교회가 힘차게 일어난 날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 전 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히 사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던 배신자였고 겁쟁이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그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받고 구원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았습니다. ‘진리의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분으로 깨달았습니다. ‘진리의 성령’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주님의 가르침의 진정한 차원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히 증언하는 교회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을 통해 새 생명을 맛보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향해 일어섰습니다(부활했습니다). 자신들만 일어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 포로 되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일어서게 했습니다. 자신들처럼 하느님의 집인 교회가 되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만들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땅의 힘’에 붙잡혀 살아가던 인생에서 ‘하늘의 힘’에 붙잡힌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종국에는 성령을 통해 성령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 없이 교회는 교회일 수 없다는 것이 사도행전과 서신의 증언입니다. 성령이 교회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에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한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이란,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그 성령은 어느 한 때만 역사하시고 그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당신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을 도와주시고자 하십니다.

성령은 구약시대에도 역사하셨고, 초대교회 시절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각 사람에게 강림하시어 권능을 주시고,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을 환영하며, 성령이 우리 속에 권능으로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의탁합시다. 성령은 ‘협조자’이시고(요한 14:16),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한 16:13). 하지만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의 후예인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축복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찬례에서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깨끗이 정화되어 평화 속에서 서로 일치하고, 진리의 삶을 향해 나서게 되는 것도 모두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극복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에 참여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일도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날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삶의 충일감을 맛보게 하는 일도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실이 변화되어 생명의 일을, 사람을 살리는 일을, 자연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도 모두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자라게 하는 성화의 힘도 모두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경축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성찰합니다. 나는 진정 성령을 사모합니까?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성령의 도구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은사(재능)가 있다면 그 은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일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뻐합니다. 기도합니다. 감사와 찬미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꽃은 돌아다니며 향기를 뿜지 않습니다. 향기를 전하는 것은 언제나 바람의 몫입니다. 꽃은 그저 제자리에서 좋은 향기를 머금은 제 모습을 피우면 그만입니다. 바로 이 성찬례의 축복을 통해 우리 모두가 성령의 권능 안에 푹 잠기어 몸과 마음이 정화되고, 자기 삶의 자리마다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단에 바쳐진 이 꽃들은 서로 어울려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다름마저도 조화롭게 하시어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자녀삼아 주신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을 통해 ‘부활 생명'(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답게 죄와 죽음 속에 헤매는 이웃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거룩한 사도직을 잘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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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백: 2017.6.11. 성삼위일체대축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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