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2018. 7.22. 연중16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측은지심으로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측은지심’으로 상처 입은 양은 싸매주시고, 아픈 양은 힘이 나도록 먹여주시며, 노략질 당할 처지의 양은 잡아먹히지 않도록 보살피시는 ‘참 목자’로 사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일깨워 주시어 교회가 이 시대의 목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 생명의 시작이며 끝이 되시나이다. 비오니,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고통 중에서 우리를 인도하시어 영원한 평화를 주시는 주님께 이르도록 지켜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23:1-6
  • 시편 – 23
  • 2독서 – 에페 2:11-22
  • 복음서 – 마르 6:30-34,53-56

연중 1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측은지심으로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민중)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측은지심’으로 그들을 보듬어 안는 ‘참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 자신이 ‘목자’로서 백성들을 보살피신다는 오랜 약속의 성취입니다(에제 34:7-31).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먼저’ 가르치시고, 먹이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먹이시는 이야기는 다음주일에 요한복음을 통해 들을 것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 ‘시편 23편’오늘 복음서의 주제인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배경이기에 배정되었습니다.

1독서 예레미야당대의 목자들, 즉 유다 왕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유다는 거짓 목자들의 부정과 부패로 멸망하고, 백성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느님은 장차 “참 목자를 세워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공평과 정의)를 펼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로마 1:3-4).

시편은 23편입니다. 참 유명한 ‘시’(詩)입니다. ‘참 목자’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누리는 ‘평화’와 ‘안정’을 묘사합니다. 올해 ‘부활 4주일’(4월 22일)에 다룬 바 있음으로 오늘은 2독서 말씀처럼 유다인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누리는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6절만 짧게 언급합니다. 본래 ‘주님 집’에서의 봉사는 제사장과 레위인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이스라엘’이 누리는 특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런 제한과 차별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덕택에 폐지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님 집’에서 마음 놓고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한 가족으로서) 말입니다. 더욱이 교회는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본받아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런 축복의 인생입니다.

The Good Shepherd – John 10:1-16

2독서 에페소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다른 전례독서와 어울려서 우리의 ‘참 목자’와 ‘평화’이신 예수님 덕택에 이루어진 은총의 일들을 잘 드러내줍니다. 본래 우리는(에페소 성도들)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이방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유다인과 이방인을 서로 원수로 갈리게 했던 ‘담’, 즉 ‘율법의 힘’을 폐지하시고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새 민족’, 즉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완전한 권리를 가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바울로는 천명합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대’ 위에 지금도 건축 중인 하느님의 신령한 ‘집’에 비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이자 ‘절정’입니다. 모든 인류가 화해하고 재결합하는 ‘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도 바울로처럼 생각과 말과 행실과 관계가 우주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Penrhyn Castle; Supplied by The Public Catalogue Foundation

복음서는 ‘사도’들이 돌아와서 그간의 사역에 대해 보고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복음서는 침묵했지만 횡간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함께 보고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참수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민심은 여전히 뒤숭숭하다고 전해드립니다. 더욱이 “선생님 이름도 널리 알려져” 위험하다고 보고합니다(마르 6:14). 널리 알려지면 좋은 일이지 어째서 위험하다는 말입니까?

지난주일 복음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사도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신 ‘권세’(능력)로 여러 촌락을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 나라의 일’을 했습니다(마르 6:12-13). ‘회개의 가르침’을 주어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마귀(불의)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일’을 하였습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일’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이 머물던 집과 고장을 변화시키는 ‘사회, 정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동안이나 그렇게 하다가 돌아왔는지 복음서는 침묵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의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다며 내침을 당한 사람들, 즉 ‘민중’(군중)들에게는 ‘기쁨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모사’(謀事)를 좀 더 서둘러야할 ‘위기의 때’였습니다. 어떤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유일신’(일신교)이라는 독특한 신앙문화를 간직해 왔습니다. 판관, 초기통일왕정, 남북분열왕국, 바빌론 포로, 페르시아, 그리스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이 신앙을 이유로 로마제국 당시도 타문화로의 동화(同化)를 거부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 골치 아픈 지역을 ‘분할 통치’하는 교묘한 정책을 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유다 땅은 로마의 ‘속주’(屬州)로 삼아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다스렸습니다. 그 외의 지역에는 ‘영주’(분봉왕 分封王, client king, 허수아비)를 두어 다스렸습니다. 그 현실 권력을 쫓아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결국 현실 권력인 로마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느냐에 따라 ‘팔레스틴’에서 활동하던 주요 당파를 5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헤로데당, 혁명당(열혈당), 에세네파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본문과 관련 있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만 언급하겠습니다. 나머지 당파들에 대해서는 2017.10.22. 연중29주일 설교를 참고하시고,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에 대한 비교는 2017.11.5. 연중31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BC 2세기에 등장한 ‘바리사이파’는 알렉산더 대왕이 주도한 ‘헬레니즘화의 물결’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민’(選民)으로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순수주의자’(이상주의자)들입니다. 유다인이 이방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준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활동의 근거지로 삼은 곳은 ‘지역의 회당’들입니다. 회당을 근거지로 엄격한 율법준수를 통해 지방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방’에서 ‘회당’을 장악하고 여론을 주도하던 ‘종교 권력’이며, 정치적 성향은 ‘반(反)로마’입니다.

‘헤로데당’은 ‘헤로데 왕가’를 중심으로 팔레스틴 전역의 지배권을 꿈꾸던 당파입니다. ‘다윗 왕가’를 중심으로 한 ‘메시아 대망’이 아닙니다. ‘헤로데 왕가’가 지배권을 갖는 왕국 건설입니다. 따라서 다른 가문 출신에서 메시아가 나오기를 대망하는 세력을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심에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BC 73년경 ~ BC 4년)의 다섯째 아들인 ‘안티파스’(BC 20년 ~ AD 39년)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후 로마 황제로부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역의 ‘영주’(領主)로 임명받았습니다. 왕이 아니라 ‘영주’입니다(루가 3:1. 루가가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영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아버지처럼 팔레스틴 전역을 통치하는 ‘왕권’을 황제로부터 얻고자 했습니다.

‘헤로데당’은 이 목적을 위해 관할 지역에서 ‘소요’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로마가 개입할 수밖에 없고, 무능하다며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왕권도 물거품이 됩니다. 따라서 사전에 위험 세력을 제거하거나 권력 유지를 위해 폭력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斬首)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이런 정치적 맥락이 깔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중앙’에서 ‘팔레스틴’ 전역의 지배권을 노리던 ‘세속 권력’이며, 정치적 성향은 ‘친(親)로마’입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은 물과 기름처럼 애초에 섞일 수 없는 당파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그들은 손을 잡습니다. 종교라는 ‘지방 권력’과 정치라는 ‘중앙 권력’이 의기투합했다고 마르코복음서는 전해줍니다(마르 3:6).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공동의 적이었을까요? 헤로데당의 ‘정치적’ 이유는 위에서 짧게 언급했으니 바리사이파의 ‘종교적’ 이유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준수’가 삶의 목적인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예수라는 인물은 ‘율법준수의 방해자’입니다. 그들이 유다인들 사이에 공고히 세워놓은 ‘안식일 법’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넘어가 버립니다. 그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공공연히 가르칩니다(마태 21:31). 특히 그들의 활동근거지인 각 촌락의 ‘회당’들이 점점 예수의 손에 넘어가는 듯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전도활동을 다니시다가도 안식일이면 꼭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회당’은 마을의 중심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던 곳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거룩한 회당’에 마귀 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이 몰려듭니다. ‘의롭다’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거룩한 회당이 더러워진다는 ‘의분’(義憤)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 이유이고, 심층적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의 인기가 점점 높아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는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았고, 그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마르 1:22). 랍비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나자렛 촌뜨기에 불과한 ‘예수’를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잇는 ‘예언자’라고 믿고 따를 태세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지방 권력이 위험합니다. 중앙은 아니더라도 지방에서만큼은 자신들이 ‘여론’을 주도해 왔습니다. 자칫 여론의 ‘주도권’이 ‘예수’에게로 넘어갈 판입니다. 생존 기반의 위기입니다. 속히 예수를 견제해야 합니다. 아니 차라리 ‘제거’하는 게 낫겠습니다. 누구와 손을 잡을지 긴 토론 끝에 결정을 내립니다. ‘헤로데당’입니다(마르 3:6).

손을 잡자는 바리사이파의 제안에 ‘헤로데’의 심복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사실 그들도 예수를 지켜봐 왔습니다. 아무래도 예수께서 그들의 관할인 갈릴래아 지역을 주로 다니시며 전도활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예수는 ‘나자렛’의 건축노동자(목수) 출신입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언변이 뛰어났고, 말로 ‘홀리는’ 능력이 있다는 정보입니다. 가끔 기적을 행한다고도 하는데, 세력을 형성하려는 이들이 흘리고 다니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직 염려할 정도의 인물은 아닙니다. 이런 인물을 두고 바리사이파가 손을 잡자고 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정보가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흘러 나왔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로 자처하며 ‘로마’에 대항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정보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물론 그들도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가 ‘하늘나라의 도래’를 외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말이 ‘복음’이니 믿으라고 사람들을 홀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코웃음을 쳤습니다. 로마 황제 덕택에 제국 내 모든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늘나라’가 도래한다니 누가 믿겠습니까? 황제만이 제국 전역에 칙령을 내려 진정한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는데, 나자렛 촌뜨기가 ‘복음’을 선포한다니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바리사이파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예수 같은 이는 사람들을 몰고 다니다 어느 순간 로마에 대항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호구 조사령(인구 조사)을 내렸을 때(루가 2:1) 저항 운동을 이끌던 ‘유다’(사도 5:37)를 예로 듭니다. 그 유다가 바로 ‘갈릴래아’ 출신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후예들이 만든 독립투사 무리가 ‘혁명당’(열혈당)입니다. 혁명당은 ‘민족국가’를 기대하며 폭력을 써서라도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려는 이들입니다.

헤로데의 심복들은 그 대목에서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결국 두 당파는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바리사이파는 ‘지방 권력’을 그대로 장악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당은 ‘소요’ 위협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적 이해관계 앞에서 두 당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선, 바리사이파는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돌아서도록 율법학자들을 동원해 그가 미쳤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로 했습니다(마르 3:21-22). 괜찮은 ‘술수’였습니다. 예수를 잡아넣기 위한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면 그 때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모사의 희생물이 될 위기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은 활발히 전도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비록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활동범위를 더욱 넓히셨습니다. 종국에는 ‘팔레스틴’ 곳곳에 사도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이 어찌나 미션을 잘 감당했든지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났고, 사람들은 ‘새 예언자’의 출현을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꼭 잘 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 잘 된 일이지 어째서 아니라는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잖아도 예수 때문에 ‘회당’에서의 영향력이 줄어든 ‘바리사이파’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확실히 잡아넣을지 감시 중입니다. 거기에 ‘헤로데당’까지 합세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의 인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올라가는 것을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더욱이 제자들까지 가세해서 예수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니 제거해야할 명분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특히 헤로데당은 6개월 전,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일로 민심이 흉흉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그들을 긴장시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전에 참수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서 활동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마르 6:14).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어 그 소문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안도했습니다. ‘예수’라면 이미 바리사이파와 더불어 손을 잡고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정보를 전해들은 헤로데의 심복 중 한 사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특별한 인물’로 여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가 낸 소문은 ‘헛일’이었습니다. “미쳤다”는 소문에 속아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유명해졌습니다. 요한이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 줄 알았는데, 또 다시 그의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엘리야’라는 특별한 칭호까지 예수에게 붙었다는 정보도 도착했습니다(마르 6:15). 이제는 민중들 사이에서 예수가 확실히 자리매김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파가 언급한 일이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요건이 갖춰지는 중입니다.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헤로데’에게 보고하기로 합니다.

그 보고를 듣는 순간 헤로데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 누구에게요? 헤로데는 이미 요한을 참수한 바 있습니다. 보고를 듣던 그가 내뱉은 말은 ‘두려움의 표현’이었지만 다른 한편 죽여야 할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제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아니, 예수님에게 헤로데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당시의 긴장감과 위험신호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보고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그동안 하느님 나라 일을 하느라 수고가 많았으니까 ‘휴가’를 주시겠다는 배려일까요? 요즘 한창 휴가철이니 그렇게 이해하고픈 욕구도 있습니다. 그런 분은 순수하게 세상을 살아오신 분이든지, 아니면 사태 파악 능력이 떨어지는 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은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그 감시의 눈초리를 생각한다면 그 말씀의 진짜 뜻은 “쉬러 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 같은 ‘외딴 곳’으로 가서 “잠시 피신해 있자”는 뜻입니다. 지금 계신 곳은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음식조차 편하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노출되는 곳입니다. 실제로 본문에 ‘한적한’ 곳으로 번역한 단어는 ‘광야’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십니다. 배는 누가 준비했고, 삯은 누가 내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여기서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니 지나가겠습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군중)은 예수님 일행이 가는 그 ‘한적한 곳’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르코(한적한 곳)와 마태오(외딴 곳)는 정확한 지명을 가르쳐주진 않고 같은 단어를 차이 나게 번역했습니다. 루가만 ‘베싸이다’(루가 9:10)라고 전해줍니다. 특히 마르코와 루가복음서는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베싸이다’로 가게 하시는데(마르 6:45) 반해, 루가복음은 ‘베싸이다’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차이점들은 읽는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육로로 해서 먼저 ‘그 한적한 곳’에 가서 기다립니다.

그림: "예수께서 배에 올라타고 설교하시다", James Tissot

“예수께서 배에 올라타고 설교하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84

예수님 일행이 탄 배가 도착합니다. ‘피신’하고자 했던 처음의 계획이 빗나갑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기다리며 이미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뱃머리를 다시 돌려야 할까요? 갈등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제 여기서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를 만납니다.

‘군중’은 그리스어 ‘오클로스’(ὄχλος)를 번역한 말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 곁에 모여든 ‘많은 사람’을 지칭할 때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자주 썼습니다(마르 2:4). 이 단어는 ‘백성’을 지칭하는 ‘라오스’(λαός)와 대조됩니다(마르 7:6). ‘라오스’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사이파처럼 ‘율법’을 지키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 불리는 이들입니다. 반면에 ‘오클로스’는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될 수 없다며 그들로부터 ‘죄인’으로 정죄당하여 추방당하고, 소외된, 변두리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당대의 부조리한 사회, 정치, 경제, 종교로부터 ‘인간다움을 박탈당하고 착취당한 이들’입니다. 평신도 신학자 안병무 선생님은 바로 이 단어에 주목하여 ‘민중신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선생님의 가르침이 여전히 빛나는 ‘어두운 시대 현실’이라는 점이 그분의 신학적 통찰에 빚지고 있는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아무튼 하느님 나라 백성에 속하면 ‘라오스’이고,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리에서 배제 당했으면 ‘오클로스’입니다. ‘중심 대 변두리’, ‘내부자들 대 가장 바깥사람들’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모두가 당대의 종교권력자들이 자신들 위주로 세워놓은 ‘율법해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예수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을 ‘라오스’가 아니고 ‘오클로스’라고 명백히 한 셈입니다. 이들은 회당이나 마을에도 들어갈 수 없기에 길거리서, 장터에서, 호숫가에서, 빈들(광야)에서, 변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오클로스)을 ‘측은지심’으로 대하십니다. ‘측은히 여기다’(긍휼히 여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이를 보고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흔히 ‘애간장이 탄다’고 합니다. 아마 꼭 맞는 은유는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를 자신처럼 여기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고난 속에 있는 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구하고자 그의 삶에 뛰어 들어가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마음으로 ‘오클로스’를 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마음을 일깨우고 키워가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반면에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사이파는 ‘오클로스’를 전혀 측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1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도 양들을 돌보지 않고 흩뜨려서 헤매게 했습니다.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했습니다(마태 11:28). 그들의 눈에는 ‘부정한 사람’, 즉 ‘죄인’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싶어 ‘회당’이나 ‘성전’에 접근하면 죄인이라면서 ‘정죄’했고, ‘추방’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눈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그들이’ 보였습니다(마태 11:28). ‘죄인’이 아니라 ‘사람’이 보였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보호받지 못하는 그들이 보였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왜 목자 없는 양 같습니까? 한 때 ‘오클로스’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의지했습니다. 지역의 회당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그들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은 그야말로 ‘빛’이고, ‘안식처’였습니다. 그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족속들”,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는 말은 할 생각도 말라”고 독설을 퍼부을 때면, 시원함을 넘어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마태 3:7-9). 하지만 그들을 비추던 빛이 꺼져버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허망하게도 ‘참수’(斬首) 되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을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 줄 ‘목자’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서신 말씀처럼 그들은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희망도 없이, 하느님(목자)도 없이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에페 2:12).

그러던 차에 ‘예수’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하고나 스스럼없이 어울린다는 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회개의 가르침과 마귀 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과,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하신다는 소문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공공연히 ‘죄인’이라 지칭하던 세리들과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며 초대까지 한다는 소문입니다. 하느님은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임을 자신의 실천을 통해 보인다는 소문입니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새 세상이 왔습니다. 새 목자가 나타났습니다. 기쁜 소식은 날개를 달고 바람처럼 모든 장벽을 넘어 점점 더 멀리까지 퍼져갔습니다. 정치와 종교 권력으로부터 내침 당한 ‘오클로스’가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다 여기까지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르코는 기적이야기들을 말하기 전에 항상 ‘가르침’을 먼저 언급합니다. 아마도 진정한 기적이란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자라나 열매 맺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영의 양식뿐 아니라 육신의 양식으로도 그들을 먹이시기로 하십니다. 그 유명한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는 다음주일에 다루게 됩니다.

"온갖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오다", James Tissot

“온갖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오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08

복음서 후반부 역시 ‘측은지심’으로 활동하시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 곁에 양들이 모여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양은 싸매주시고, 아픈 양은 힘이 나도록 먹여주시며, 노략질 당할 처지의 양은 잡아먹히지 않도록 보살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1독서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참 목자들을 세워 주신다는 그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흩뜨려지고 헤매던 그들은 참 목자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서신 말씀처럼 하느님(구원)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에페 2:13). 이제 그들은 오늘 시편처럼, 영원히 ‘주님 집’에 살면서 찬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례독서를 묵상하면서 이 시대의 ‘교회’란, ‘그리스도인’이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배웁니다. 최근 보도들을 통해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이 사실은 이 나라를 아예 ‘죽여 버린 강도’였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국민은 ‘강도만난’ 사람처럼 억압을 받았고, ‘목자 없는 양처럼’ 착취를 겪었으며, ‘지도력의 부재’를 경험했습니다. ‘지도자’(목자)라는 이들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와 고통을 싸매어주기는커녕 국민을 상대로 ‘강도짓’과 ‘국정 농단’을 자행했습니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빚은 계속 들었으며, 배타적인 집단주의는 더 팽배해졌습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바꾸었지만 거짓 뉴스는 여전히 국민들을 현혹합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고통당한 국민들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과연 복음으로 다가갔습니까?

교회는 이 세상에서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신앙의 최대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겠다는 이들이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복음서는 예수님이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가장자리’로 내몰린 군중을 ‘측은히’ 여기시어 가르치시고, 먹이시며, 치유하시는 목자의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증언합니다. 교회는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사회에서 ‘변두리’로 내몰린 ‘힘없는 이들’(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마태 25:31-46)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움이 짧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는 이유로,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가장자리’로 내몰려 신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사랑의 집’이라는 ‘교회’로부터 배척당한 이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우리 속에 있는 ‘측은지심’을 일깨워 ‘가장 자리’로 내몰린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신음에 ‘경청’하는 ‘사랑의 집’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정죄’하는 데 앞장 서는 ‘판단자의 집’이서는 안 됩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길 ‘잃어버린바’ 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교회는 먼저 손을 내밀고 잡아주어야 합니다.

 

또 ‘속도’를 중요시 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느 방향으로 가기 위해 그렇게 ‘빨라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은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존엄성’과 ‘깊은 공감’에 기여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특정한 계층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기여하는지 단단히 물어야 합니다. 한 번에 수십, 수백 명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게 된 것이 정보화의 기준일 순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 때 마음을 나누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정보화를 구현한 삶입니다. 더욱이 ‘초고령 사회’에서 돈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없는 사람도 ‘생명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장수는 축복입니다. 좀 느리게 가더라도 ‘측은지심’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가려는 ‘공감의 마음’, 생명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관계의 마음’이 우리 사회를 보다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런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에 붙들린 사람들 사이에서, 교묘히 비인간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시대의 양심인 교회는 ‘측은지심’을 실천하는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공감의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평화’와 ‘화해’의 일을 하는 신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건강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필요를 먼저 보셨습니다. ‘측은지심’으로 상처 입은 양은 싸매주시고, 아픈 양은 힘이 나도록 먹여주시며, 노략질 당할 처지의 양은 잡아먹히지 않도록 보살피시는 ‘참 목자’로 사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 성찬례에서 우리 안에 있는 ‘측은지심’과 ‘공감의 마음’을 일깨우십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에 현혹당하여 ‘공멸’(共滅)의 길로 가고 있는 세상의 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측은지심’의 빛을 뿜어내도록 파송하십니다. 경계 밖으로 내쳐져 인간다움을 빼앗긴 가난하고 소외된 이 시대의 ‘오클로스’를 자기처럼 여기고, 어엿이 ‘공감의 손’을 내밀라고 파송하십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일깨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목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무더위를 견디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7.22. 연중16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8.7.29. 연중17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