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5. 연중15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옳은 길을 걸어가시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욕망성취를 위해 폭력을 사용한 헤로데에게 저항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 걸어갔습니다.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은 ‘양심’을 일깨웠으며, 예수님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해 주시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이들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신비로운 창조와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들을 채워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주님의 축복을 나누고,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아모 7:7-15
  • 시편 – 85:8-13
  • 2독서 – 에페 1:3-14
  • 복음서 – 마르 6:14-29

연중 1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옳은 길을 걸어가시오.”입니다.

지방선거가 끝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 미더운 것이 “선거철 정당이나 입후보자들이 내놓는 선거공약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메니페스토’(Manifesto) 덕택에 이전보다는 ‘이행율’이 나아졌다고 하나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후보자나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적 대안들을 좀 더 꼼꼼히 살피고 투표해야 합니다. 선거 후에는 ‘공약’(公約)을 잘 이행해 가는지 감시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다음 선거에서 냉정히 책임을 묻는 ‘책임정치’가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

선거에서의 공약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약속’들도 있습니다. 일종의 결연함(엄중함)과 신성함이 느껴지기에 ‘서약’, ‘선서’, ‘맹세’라는 말을 붙입니다. 대표적으로 대통령의 취임선서, 의사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제네바 선언), 간호사의 나이팅게일 선서, 혼인서약, 성직서약 등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신성한 맹세’였다 하더라도 나중에 보면 스스로 깨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맹세’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맹세야말로 깨졌어야 했습니다. 아니 맹세라는 ‘신성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모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지난주 설교문에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좋아하는 문학양식인 ‘샌드위치’ 구조를 설명했습니다.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은 이후 더 이상 어떤 ‘회당’에도 들어가시지 않은 것으로 마르코는 기록했습니다. 오히려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는 데, 부처님처럼 가시는 곳마다 ‘야단법석’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결단을 내리십니다. 하루해는 짧고 해야 할 하느님 나라 일은 많았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다 해낼 수 없음을 인정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동역자로 세우십니다. 그동안 교육하셨으니 이제 그들이 현장에서 직접 하느님 나라 일을 하도록 ‘둘씩’ 짝지어 파송하십니다. ‘여행하는 데’라고 번역했지만(마르 6:8), 정확히 말하면 ‘여행’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길을 떠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일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마르 6:12-13).

이제 순서적으로 하자면 파송되었던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이야기가(마르 6:30) 뒤따라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만 뜬금없이 ‘세례자 요한의 참수’가 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무엇을 의도한 ‘편집’입니까? 역시 ‘샌드위치’ 구조 속에 답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2사도를 선택’하신 이야기에(마르 3:13-19) 속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더 먼저 번 샌드위치의 맨 바깥 쪽 빵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냐면 아래와 같은 말씀 때문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 마르 1:14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시작을 “요한이 잡힌 뒤에”라고 간단히 언급합니다. 이 구절에 별로 주목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합니다만 마르코복음 전체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일종의 ‘복선’(伏線)입니다. 마르코는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지 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급하게 예수님의 전도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잔뜩 궁금증을 갖게 하더니(혹은 세례자 요한이 잡혀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게 하더니) 드디어 오늘 본문에서 그 결과를 들려줍니다.

이렇게 요한이 잡혀갔다는 이야기가 또 다른 샌드위치를 이루는 위의 빵이고, 중간에 여러 이야기가 끼어들어온 다음, 잡혀간 요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밝힘으로 샌드위치 아래 빵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마르코는 타고난 이야기 꾼 같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과거회상’ 기법을 통해 세례자 요한의 참수(斬首)로 넘어갑니다. 먼저 그 이야기부터 다루겠습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마태오와 마르코복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오는 헤로데가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도합니다. 반면에 마르코는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려 했으나 헤로데가 요한을 보호해 주었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물론 복음서는 둘 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를 ‘윤리적’ 차원에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친(親)로마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기록했습니다. 그 시대에 살지 않은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모릅니다. 이럴 경우 문학적 상상력에 의존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헤로데 왕’이 여럿 나옵니다. 검색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본문에 기록된 헤로데는 ‘안티파스’(BC 20년 ~ AD 39년)입니다. 그는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BC 73년경 ~ BC 4년)의 네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다섯 번째 아들입니다. 헤로대 대왕은 10명의 부인이 있었고, 적어도 7명 이상의 왕자들이 있었습니다. 왕자들이 많다보니 후계 구도를 두고 왕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는 정도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 대왕’ 사후 로마 황제는 ‘팔레스틴’에 왕을 따로 세우지 않고 헤로데의 세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에돔은 ‘아르켈라오’(마태 2:22), 갈릴래아와 베레아는 ‘안티파스’(마르 6:14), 갈릴래아 북동쪽은 ‘필립 2세’(루가 3:1)가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왕’이 아니라 ‘영주’로 불릴 뿐이었습니다. 영주이니까 ‘왕국’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안티파스’는 ‘베레아’와 국경이 붙은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해서 20년 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영주’로 만족하지 못하고 로마로부터 진짜 ‘왕’으로 임명 받고픈 정치적 야망이 컸습니다. 이 야망 실현을 위해 그는 20년 넘게 살아온 부인을 쫓아내고 다른 여인을 택합니다. 그녀가 바로 ‘헤로디아’(여기를 클릭하십시오)입니다.

고대에는 ‘근친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 권력을 강화하거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가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녀는 ‘헤로데 왕가’에 속한 사람들처럼, 로마 시민권이 있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왕비’로 높이고픈 숨겨진 ‘욕망’이 있었습니다. 삼촌 관계에 있는 ‘헤로데 대왕’의 자식들과 결혼합니다. 처음 결혼했던 ‘필립 1세’는 한 때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적도 있었지만 변덕스런 아버지가 번복했습니다. 나중에는 권력 다툼에서도 밀려났습니다. 그녀의 욕망 충족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바로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영주인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세력’을 확대해 가는 중에 있습니다. 헤로디아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안티파스’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욕망에 붙잡히고 보니 같이 살고 있는 지금의 남편은 자기욕망 구현의 ‘걸림돌’입니다.

‘헤로디아’와 손을 잡는 일은 ‘안티파스’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배경 때문에 그랬을까요? 로마 시민권이 있는 ‘헤로디아’는 거슬러 올라가면 ‘하스모니아 왕조’의 피가 흐릅니다. ‘하스모니아 왕조’(BC 142년 ~ BC 63년)는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BC 63년)할 때까지 ‘약 79년’간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유대의 마지막 ‘독립왕조’입니다. 이 독립왕조의 기원은 ‘마따디아’의 다섯 아들(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잘, 요나단)이 ‘그리스 관습’을 강요하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안티오쿠스 4세)와 벌인 저항에서 비롯합니다(구약 외경 마카베오상하 참고). 이름 하여 ‘마카베오 혁명’입니다(봉헌절(하누카) 축제, 요한 12:22). 이 혁명에서 승리한 후 ‘마따디아 가문’은 왕위에 오르고 왕국을 이룹니다. 그 마따디아 가문 이름이 ‘하스모니아’인데, 왕국과 왕조의 이름이 됩니다.

이후 마따디아의 아들들은 왕과 대제사장의 권력을 차지하고 세습합니다. ‘헤로디아’의 할머니이자 ‘헤로데 대왕’의 두 번째 부인인 ‘미리암 1세’는 대제사장직을 세습한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였으며, ‘마카베오 혁명’에 나섰던 ‘시몬’의 직계였습니다. 더욱이 그녀의 동생 ‘헤로데 아그리파 1세’(사도 12:1, 헤로데 대왕의 손자)는 로마의 원로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한 ‘세도가’(勢道家)였습니다. 이런 출신성분을 배경으로 가진 ‘헤로디아’와의 근친결혼은 언젠가 안티파스가 ‘진짜 왕’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넘어야할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의 동생 필립비 1세였습니다.

복음서는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이 장애물과 걸림돌을 ‘어떻게’ 치웠는지 침묵합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를 비판한 이유를 “동생의 아내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치웠는지는 묻지 않고 곧바로 윤리적 문제로 천착합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모세의 율법을 들어 그것이 왜 비판의 이유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런 구절 때문입니다.

네 형제의 아내의 부끄러운 곳을 벗겨도 안 된다.
그것은 곧 네 형제의 부끄러운 곳이다.
– 레위 18:16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이다.
그것은 제 형제의 부끄러운 곳을 벗긴 것이므로
그가 후손을 보지 못하리라.
– 레위 20:21

그러나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물론 명목상의 ‘유대인’으로 보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에돔’(이두매)을 평정하고 에돔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베풀어 ‘유대교’로 개종시킨 적이 있는데, 안티파스의 할아버지 ‘안티파트로스’(헤로데 대왕의 아버지)는 그 때 유대교로 개종한 유력가문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도 아닌 사람이 그런 비판 따위에 마음이 흔들릴 이유는 없습니다. 더욱이 고대에는 ‘근친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 권력을 강화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는 일이 흔했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질문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동생의 아내를 취했는가?

제가 읽어낸 횡간의 뜻은 “헤로데가 ‘불의한 방법’으로 취했다”입니다. 복음서가 침묵하고 있기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정황을 유추해 보면 어느 정도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 사이에는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헤로데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안티파터), 두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들(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을 권력을 넘본다면 처형했습니다.

아버지의 사후 20여년이 흘렀지만 최종 승자는 아직도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 아들’이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받았을 뿐입니다. 아버지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고 유대 땅을 물려받았던 ‘아르켈라오’는 서기 6년 이미 폐위되었습니다. 대신 그 땅을 로마의 속주로 삼아 총독이 와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영주인 ‘안티파스’(마르 6:14)와 갈릴래아 북동쪽의 영주인 ‘필립 2세’(루가 3:1)입니다. 당연히 최종 왕의 자리를 놓고 둘은 경쟁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헤로디아의 남편 ‘필립 1세’도 비록 20여 년 전에 권력경쟁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언제든 로마의 비호를 받아 권력관계에 뛰어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에서 보듯이 셋이서 권력을 두고 다툴 때는 가장 약한 쪽부터 확실히 처단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대망’을 이루어줄 요소를 상대편이 갖고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약한 경쟁자를 우선 제거해야 합니다. 물론 복음서는 ‘안티파스’와 ‘필립비 1세’ 사이에 벌어진 경쟁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쟁에서 누가 이길 지는 뻔합니다. 안티파스는 현실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현실 권력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취하는 방법은 대규모 ‘폭력’입니다. 따라서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취했다”는 말 속에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를 누차 비판한 것은 ‘윤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에 대한 것이고,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정치적 주의’를 준 셈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 같은 주의가 받아들여지면 권력가의 폭력은 그치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살고 있는 요한은 제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일은 이미 저질러졌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그들 욕망으로 가는 첫 단추를 꿰었습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를 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희생양’ 삼았고, 헤로디아는 헤로데와 재혼하기 위하여 남편을 ‘희생양’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하루하루는 행복했습니까?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헤로디아는 헤로데의 첫 번 아내를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욕망을 성취한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 때문에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입니다. 원한을 품습니다. 가만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기가 죽는 남편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약하고 물러 터져서 왕위를 차지할 수 있겠냐고 쏘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왕족이면 왕족답게 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당대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민중들이 ‘예언자’로 추앙하는 공적 인물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당대의 저명한 ‘재야인사’입니다. 헤로데는 정말로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했습니다. 불현듯 헤로디아 생각에 그가 살아있어 가지고는 남편이 ‘대망’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헤로디아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을 위한 ‘이세벨’이 되기로 합니다(1열왕 21장). 이세벨은 남편 ‘아합’을 위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욕심(욕망)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스스로의 죽음을 가져오는 법입니다(야고 1:15). 그러고 보니 오늘 본문에는 아합, 이세벨, 엘리야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헤로데, 헤로디아, 세례자 요한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암살’하자고 말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원하는 자리를 얻었지만 헤로데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지는 못한 셈입니다. 헤로디아가 꾀를 내었습니다. 혹시 요한이 민중들을 선동할지도 모르니 잠시 ‘마케루스’에 가두어 두자고 제안했습니다. 마케루스는 ‘헤로데 대왕’이 유사시를 대비해 재건해 둔 ‘요새’이자 ‘별궁’으로 ‘안티파스’가 분배받은 사해 동쪽 ‘베레아’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민중들이 소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헤로데(안티파스)는 거절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쥐도 새도 몰래 해낼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본래 ‘유대 광야’에 사는 사람이니 한동안 안보이면 다시 거기로 돌아갔을 것으로 민중들이 생각할 것이라 말합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합니다.

헤로디아는 ‘마케루스 요새’에 요한을 가두는 데까지는 겨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동생마저 축출한 헤로데가 자신보다 요한을 더 감싸는 태도를 참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나중에 드러나지만 헤로디아는 ‘원하는 것’(세례자 요한을 제거하는 일)을 얻는 데 있어서 자기 딸보다도 영향력이 적었습니다. 요한을 향한 헤로디아의 폭력 욕망, 살해 욕망은 점점 더 커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폭력’ 욕망을 충족시킬 기회를 얻었습니다. 복음서는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 알려줍니다. 그 날은 ‘헤로데의 생일’입니다. 헤로데는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 요인들을 ‘마케루스 별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제법 그럴듯한 직위의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헤로데의 불의와 폭력에 참여하면서 권력을 누려온 ‘헤로데당원’들입니다. 유황 온천에서 목욕을 끝낸 이들이 하나 둘 씩 연회장으로 모입니다. 잔치의 흥이 무르익어갈 무렵 한 ‘소녀’가(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가리킬 때와 같은 단어를 썼지만 18세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나타나 요염한 ‘춤’을 춥니다.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본문에는 딸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친(親)로마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살로메’라고 기록했습니다. 훗날 이 장면은 <살로메 – ‘일곱 베일의 춤’>으로 오페라 무대를 장식합니다.

살로메의 춤사위에 넋이 나간 ‘헤로데’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흡사 그 옛날 페르시아의 ‘아하스에로스 대왕’이 ‘에스델’ 왕후에게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에스델, 어서 소청을 말해 보오.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소.
진정 소원이라면,
나라 절반이라도 떼어주리다.
– 에스 7:2

헤로데의 맹세야말로 깨졌어야할 맹세입니다. 사실 왕국의 진짜 주인은 그가 아니라 ‘로마’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소녀는 제 어미와 상의하겠다고 나갑니다.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고 나갔다는 것은 자기의 원함, 즉 ‘욕망’(갈망)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원함’(갈망)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키워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들에게 무엇을 욕망(갈망)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소녀가 나가는 순간 ‘헤로데’는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습니다. 항상 불행한 예측은 빗나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아, 빌어먹을 맹세…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소녀는 어느 새 제 어미와 상의하고 급히 들어와 서 있었습니다.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주십시오.

딸은 제 어미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렸습니다. 더욱이 소녀의 욕망은 어느 새 더 증폭되어 있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고 시켰지만, 딸은 “지금 곧 쟁반에 담아서”라고 소녀로서는 내뱉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합니다. 이처럼 폭력에 무의식적으로 젖어들면서 어머니와 딸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딸마저도 ‘폭력’에 연루시키는 무서운 어미입니다.

소녀의 청을 들은 손님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권력을 쫓아 모인 그들이지만 그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비록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처럼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자신들을 비판해 온 것이 불쾌하고, 때로는 그들 역시 그런 요한을 제거하고 싶기도 했지만 소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헤로데의’의 얼굴도 일그러집니다. 그는 팔을 휘저었습니다. 훗날 ‘영주’ 자리에서 내쫓긴 그는 오늘을 회상하며 이렇게 후회했습니다.

실수였어, 실수.
그건 내 생애 최악의 일이었어!

그러나 그 일이 정말 실수였을까요? 심성 착한 헤로데가 헤로디아가 쳐놓은 ‘춤 덫’에 걸렸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실수한 것이 아니라 ‘줏대’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줏대’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맹세’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허탄한 맹세를 깼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실수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자기괴로움의 근거를 떨쳐내는 교묘한 기회로 ‘맹세’를 이용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 Pierre Puvis de Chavannes

그는 ‘체면’ 때문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누구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집단의 폭력 광기는 그렇게 실천되고 말았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이의 ‘소리’는 ‘들음’도 없이 ‘허탄한 맹세의 희생물’, ‘집단 폭력의 희생물’, ‘욕망의 희생물’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루가 7:28)이라 칭찬하실 정도로 위대했던 영웅은 덧없이 잔칫상의 ‘포상’(褒賞)거리로 모욕을 당하며 스러져 갔습니다.

요한의 참수 사건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의문’이 들었습니까? 오늘날 스마트폰 한 대만 있으면 세상 모든 정보를 다 섭렵할 수 있습니다. 박사 100명보다 스마트폰 한 대가 더 많은 관련 분야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 참수와 관련한 수많은 설교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절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질문하는 힘’입니다. 스마트폰은 모아둔 정보를 알려줄 뿐 질문을 하진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어째서 늘 의인들은 악인들이 품은 ‘욕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일까? 왜 그토록 허망한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일까? 어째서 악인들은 늘 주도권을 쥐고 그리도 빨리 자신들의 ‘폭력적 욕망’을 성취하는 것일까? 진정 역사의 승리자는 악인들이고, 의인들은 단지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할 뿐인 것일까? 우리는 이런 현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 지기도 했습니다. 이 우울한 질문에서 저를 건져준 한 생각이 있어서 그것을 결론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파송된 사도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러 촌락을 두루 돌아다니며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일, 즉 회개의 가르침과 마귀 추방과 병 고치는 일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에 대한 여론이 등장합니다. ‘헤로데’는 그 소문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외칩니다.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뒤에야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마르 1:14).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여러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가던 시절입니다. 이미 요한은 죽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요한에 빗대어 예수님을 말한다면 누가 더 대단하다는 뜻입니까?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만큼 ‘요한’은 거인이었습니다.

더욱이 헤로데에게는 ‘거인’ 이상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헤로데 자신에게 만큼은 ‘요한’이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그가 죽어 사라져 버렸다면 ‘헤로데’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렇게 ‘예수’라는 인물로 다시 살아나 버젓이 그의 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요한을 결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결코 그를 죽음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단어 형용의 모순이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적어도 ‘헤로데’가 살아있는 동안 세례자 요한은 그의 양심에서 결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례자 요한의 참수’ 이야기가 어느 위치에 자리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 다음에 삽입함으로써 나가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이 마주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참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위에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째서 늘 의인들은 악인들이 품은 ‘욕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일까? 어째서 악인들은 늘 주도권을 쥐고 그리도 빨리 자신들의 ‘폭력적 욕망’을 성취하는 것일까? 진정 역사의 승리자는 악인들이고, 의인들은 단지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할 뿐인 것일까? 이 우울한 질문에서 저를 건져준 한 생각을 결론으로 나누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언뜻 보기에 세례자 요한은 억울하게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헤로데의 생일 잔칫날’에 헤로디아뿐 아니라 집단의 욕망이 폭력적으로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헤로데에게 저항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간 예언자입니다. 악인들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가 폭력에 침묵할 때 저항하며,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양심의 등불’로 지금도 빛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축제일인 과월절’을 앞두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기득권 세력들과 그들에게 포섭당한 집단의 욕망이 폭력적으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은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못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 요한 10:17-18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자기 믿음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악인들의 욕망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갔습니다. 그 결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그를 결코 죽일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도 예수님을 결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발적 선택으로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살아있지만 ‘이미’ 죽어있는 이들이 있고, 죽었다고 말해지지만 ‘항상’ 살아있는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시간 차이만 있지 언젠가 죽음에게 죽임을 당하고 잊힐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죽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신앙’을 위해, ‘궁극의 가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원토록 죽지 않는 최후 승자의 길로 갑니다. 결국 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누가 최후의 승자인지를 알고 싶은가?
헤로데나 헤로디아는 결코 아니라네.
그렇다고 지금 살아있는 그대도 아니라네.
최후의 승자는 다른 이의 목숨을
폭력으로 빼앗음으로써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목숨을
‘신념’(진리, 정의, 평화, 사랑)을 위해
스스로 바치는 이에게 있다네.
나는 그대가 이 진실을 소유하길 바라네.

교우 여러분, 세상은 남을 죽이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이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상은 ‘옳은 일’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선동합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행복’은 자기 욕망을 탐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옳게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자기 욕망에 빠진 불의한 세력들이 저지르던 ‘폭력’ 앞에서 국민을 살리고자 자기 목숨을 ‘자발적으로’ 바친 이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습니까? 무모한 죽음이라고, 그래봤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고, 눈 한번만 감으면 출세가 보장된다고, 잠시만 침묵하면 된다고 유혹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신념의 길을 갔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세상은 ‘혼탁’합니다.

문득 우리는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불의 앞에서 머뭇 거릴 때마다 무엇이 진짜 살아있는 삶인지 우리 ‘양심’에 호소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버젓이 살아서 욕망에 찌든 모든 ‘헤로데’들을 지금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옳은 길’을 걷는 자들에게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그 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세례자 요한을 닮지도 않았고, 예수를 닮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성취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스승의 뜻’을 앞세우는 제자가 아니라 자기 뜻을 성취해 낸 영웅이 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형제, 자매여,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관광’하러 온 게 아닙니다. ‘여행’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자들 중에는 관광하듯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마음의 평화나 종교적 심성을 함양하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의하고 폭력적인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참여나 투신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과도 상관없이 세상에서 어떤 폭력과 불의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먼발치서 관광하듯이 지켜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일’, 즉 ‘회개의 가르침’과 ‘마귀 추방’과 ‘병 고치는 일’을 하라고 보내주셨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쳐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게’ 하는 회개의 일과 마귀(불의)에게 붙잡힌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과 사람들의 생명을 폭력을 포함한 모든 고통으로부터 온전케 하는 ‘치유의 일’을 하라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보내주신 이유는 ‘사회 정치적’입니다. 개인화하는 차원으로 성령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나는 누구를 닮았는지 성찰합니다. 요한의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욕망에 빠져 허탄한 맹세로 타인의 목숨을 폭력적으로 빼앗는 헤로데 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물어봅니다. 사도들을 파송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세상에 파송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찬례가 이 질문에 명백히 대답하는 그런 복된 시간이기를 축복합니다.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옳은 길을 걸어가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말이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무더위를 견디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KTX 해고 여승무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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