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8. 연중1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너 사람아, 마음을 굳세게 하고 복음전파에 나서라”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 받은 믿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몸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라고 주님이 세우신 ‘복음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머무르도록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는 ‘자비의 공동체’입니다. 성찬례는 주님이 우리를 짝지어 주시고, ‘성령’을 내리어 주시며,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파송하시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오해와 배척에도 굴하지 않은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시고, 하느님 나라 일꾼으로 힘차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것을 베풀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내리시어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2:1-5
  • 시편 – 123
  • 2독서 – 2고린 12:2-10
  • 복음서 – 마르 6:1-13

연중 1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너 사람아, 마음을 굳세게 하고 복음전파에 나서라”입니다.

복음서는 고향방문과 제자파송 이야기입니다. 전반부는 고향사람들이 ‘출신성분을 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야기입니다. 후반부는 예수님이 12제자에게 악령을 지배하는 ‘능력’(힘, 권세, 자유, 특권)을 주시어 하느님 나라 일을 하도록 파송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배척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파송될 세상이 어떤 현실인지를 교육하십니다. 제자들은 영광을 꿈꿀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마음을 굳세게 하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보다 앞서 하느님이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1독서 ‘에제키엘’‘시편’은 복음서의 배경 역할이기에 배정되었습니다. 1독서는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파송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듣든 안 듣든’ 굳세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 가운데 하느님의 예언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와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이 포개집니다.

시편은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모든 ‘희망’을 걸고 결연한 ‘각오’(覺悟)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멸시와 비웃음 소리, 모멸은 고향사람들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당하신 예수님을 보는 듯합니다. 또한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만으로 복음 전파에 나선 ‘사도’들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은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이 희망의 근거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기도하는(바라보는) 종들을 구원하시는 최고의 권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약한 소릴랑 집어치우고 마음을 굳세게 하여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영적체험’을 언급합니다. 바울로의 사도됨을 부인하는 ‘적대자’들을 향한 말입니다. 자신에게도 ‘신비체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끌어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추켜세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체험이 ‘사도직’을 인증해주는 기준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난과 약함(가시, 병, 사탄의 하수인)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하느님을 드러내겠다고 선언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도입니다. 그에게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을 놓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하느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답변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직면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는 그 자리가 자신의 ‘능력’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체험하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철저히 약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자신에게 머무르도록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해지는 신비를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역설의 진리를 깨우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옛말에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신 이야기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방문했으니 금의환향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아닙니다. 오히려 배척을 받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배척 받으실 것을 아셨음에도 방문하셨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연중 10주일 나누었던 설교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마르 3:20-35).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대 종교지도자들은(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 ‘미쳤다’는 소문(가짜뉴스)을 냈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 자신들이 세워놓은 체제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론의 주도권을 예수님이 가져갈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들이 근원지인 ‘가짜뉴스’는 날개를 달고 ‘나자렛’까지 날아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성지(聖地) 예루살렘에 사는 ‘율법학자’들이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을 데려오려고 서둘러 나섰습니다.

집 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논박하고) 계실 때 가족들이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내 가족은 혈연관계에 있지 않다”고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매몰찰 수 있단 말입니까? 가짜뉴스에 속아서 자신을 의심한 가족들에게 화가 나서 그런 것일까요? 어머니와 형제들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어째서 그들과 ‘갈등관계’를 형성하신 것일까요? 그냥 만나서 ‘가짜뉴스’에 속지 말라고 ‘해명’이라도 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복음서는 다음 이야기를 침묵하기에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만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고향사람들이 배척한 이유에 더 부합해 보입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친척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고향사람들은 속이 상했습니다. 먼 길에 지친 ‘마리아’의 손을 잡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자식은 없는 셈 치라고, 가족을 등지고 얼마나 잘 되는지 두고 보자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리들 말라고 나무라면서 마리아는 쓸쓸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시기 전까지의 배경입니다. 분명 상황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가족뿐 아니라 고향사람들한테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다 틀렸습니다. 모름지기 큰일을 하려면 고향사람들의 입소문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이틀’을 쉬었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향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을 그렇게 돌려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요? 며칠 전 “내 가족은 혈연관계에 있지 않다”고 단단히 말씀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 고향에 가자니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시려면 혼자 가시지 그들까지 함께 가자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이 ‘나자렛’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지명’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또는 ‘나자렛 예수’라 강조해서 부릅니다(마태 2:23; 21:11; 26:71; 마르 1:9, 24; 10:47; 14:67; 16:6; 루가 1:26; 2:39,51; 4:16,34; 18:37; 24:19; 요한 1:45-46; 18:5,7; 19:19). 복음서에 여러 번 등장하니까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 꽤 유명한 동네인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나자렛’이라는 지명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정말 보잘 것 없는(중요하지 않은) 작은 동네였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나자렛’의 어원을 찾을 수 없는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론을 주장합니다. 하나는 ‘봉헌된 자’라는 뜻인 히브리어 ‘나지르’(나지르인)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판관 13:5, 민수 6장). 다른 하나는 ‘햇순’(가지, 메시아의 상징)을 뜻하는 히브리어 ‘내체르’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이사 11:1). 우리 귀에는 ‘내체르’보다는 ‘나지르’라는 발음이 나자렛과 더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 단어에 근거해 복음서가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 강조해서 부른 이유를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별’(聖別)되어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으로 예수님을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지명을 통해 예수님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햇순(가지), 즉 ‘메시아’임을 알리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하루 앞 둔 해질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자렛’에 나타났습니다. 조용하던 ‘촌 동네’에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가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듭니다. 그들도 갈릴래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온통 못 믿을 소문들뿐이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를 ‘예언자’로 따른다고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삶의 태도를 바꾸어라”고 외친다고 했습니다(마르 1:14-15). “자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 일을 하자”며 사람들을 모은다고 했습니다(마르 1:16-20). 그 선동에 넘어가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알기로 예수는 지난 봄, 집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 오더니 이상해졌습니다(마르 1:9). 친척들이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렸는데도 냉정히 집을 떠나 ‘광야’로 가버렸습니다(마르 1:12). 그런데 ‘예언자’가 되어 나타났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광야 땡볕에 정신이 이상해져서 예언자 행세를 하고 다니나 보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가 ‘열혈당원’(독립투사)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열혈당원들은 로마제국에 맞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꾀하던 무력투사들입니다. 다른 소문이라면 몰라도 사실이라면 고향사람들에게 정말 큰일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연고지인 ‘나자렛’을 찾아와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소문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율법교사’라 부른다고도 했습니다(마르 1:22). 자신들이 알기로 예수는 ‘랍비학교’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목수’였으니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지혜를 말하는 ‘율법교사’라 불린다니 턱도 없는 소리라고 여겼습니다. 더 못 미더운 소문도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가 악령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치유자’라는 소문이었습니다(마르 1:34). 어디서 그런 능력을 받은 것인지 의아했는데, 누군가 마귀 왕초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란 말을 해 주었습니다(마르 3:22). 비로소 납득이 갔습니다. 그것이 얼마 전 친척들이 예수를 잡으러 갔다 온 이유였습니다(마르 3:21,31-35).

더욱이 빈손으로 돌아온 친척들은 더 못 믿을 소문을 달고 왔습니다. 예수가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잔잔하게 했을 뿐 아니라(마르 4:35-41) 죽었던 회당장의 딸도 살렸다는 소문입니다(마르 5:35-43). 이 소문을 들었을 때 고향 사람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하나 같이 ‘목수’로 잔뼈가 굵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문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문의 주인공인 예수가 고향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떠날 때는 혼자였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몸에서 뭔가 다른 기운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들이닥친 손님들 저녁 식사를 위해 분주히 들락날락합니다. 보다 못해 몇 사람이 거듭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동네 ‘원로’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친하게 지내던 어른으로 친척뻘이었습니다. 그 역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만, 걸러들을 수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 전 상의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마음을 위로하며 말렸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섰던 마리아는 얼굴이라도 보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물리고 어머니와 셋이서 대화를 나눕니다. 어린 시절과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점차 ‘하느님 나라’ 이야기로 옮겨갔습니다. 마치 생의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냥 원로와 마리아는 구도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나누는 대화는 밤 깊도록 그칠 줄을 모릅니다.

문밖을 나서던 원로는 안식일에 ‘회당’에 올 수 있는지 조용히 물었습니다. 고작 100여 가구 남짓 사는 작은 동네였기에 회당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끼리 돌아가며 순서를 주관했습니다.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성경’(토라, 율법)도 읽고, 해석해 달라는 초대였습니다. 유대 남자라면 누구나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기도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원로를 배웅한 예수님은 초대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원로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올려다본 달빛은 다정하기만 합니다.

안식일 아침,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예수님 일행은 ‘회당’으로 향합니다. 수 천 번도 넘게 이 길을 걸어 친구들과 장난치며 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도착하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계단 앞에까지 줄지어 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 것 같습니다. 병자 몇 사람이 “예수, 예수”하면서 계단을 오르는 예수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눈동자를 바라봐 주십니다. 표정이 밝아집니다.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할렐루야’라고 환호합니다.

환호 소리에 그 ‘원로’가 밖으로 나와 예수님 일행을 맞이합니다. 회당 정면은(회중이 일어나서 바라보게 되는 곳) 예루살렘을 향해있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바빌론 포로기에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 기도하던 전통 때문입니다(다니 6:11). 거기에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던 율법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책장’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메노라’(Menora, 일곱 촛대)가 있습니다. 오늘도 ‘메노라’ 불빛은 오시는 주님을 고요히 맞이합니다. 정면 오른편에는 ‘모세의 자리’가 있는데, 원로가 예수님을 데리고 그리로 향합니다. 왼편에는 율법을 낭독하는 ‘독경대’가 있는데 오늘은 예수님이 그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원로는 예수가 고향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회중에게 알립니다. 이어서 모두 일어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함께 ‘쉐마’(שמע, Shema)를 바칩니다(신명 6:4-9; 11:13-21; 민수 15:37-41). ‘쉐마’(들어라)는 우리식으로 하면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쉐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야훼는 우리 하느님이시다)
아도나이 에하드(야훼는 한 분이시다)

구약성경은 하느님(보통명사)의 이름을 ‘야훼’(יהוה, 뒤에서부터 ‘요드(y), 헤(h), 와우(바브 w, v), 헤(h)’라고 읽으며 YHWH(YHVH, JHWH로도 표기) 4개의 자음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빌로 포로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서’ 두루마리에서 이 ‘거룩한 4글자’(tetragrammaton이라 하며, 히브리어 성경은 자음만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정확한 발음은 모릅니다)가 나오면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십계명의 제3계명, 출애 20:7; 레위 24:11) ‘아도나이’(Adonay, 나의 주님)나 ‘하쉠’(haShem, 그 이름)으로 바꾸어 발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는YHWH의 정확한 발음을 잊어버렸습니다(개역성경에 ‘여호와’(Jehovah)로 번역한 말은 후대에 ‘마소라 학자’들이 자음으로만 기록된 구약성경에 모음을 표기할 때 ‘거룩한 4글자’인 YHWHAdonay의 모음 A(아), O(오), A(아)를 합쳐서 YaHoWaH라는 얼토당토 않은 새 이름을 만들어 낸 것에서 유래합니다. 더욱이 원래 히브리어 문법에서 3개의 모음이 한 단어에 들어있을 경우 첫 모음은 짧아져서 ‘아’가 ‘에’로 바뀝니다(학자들에 따라서는 Ya이 ‘야’ 발음(거룩하신 이름 ‘야훼’의 첫발음)임으로 금기에 해당하기에 ‘아’를 ‘에’로 바꾼다는 이론을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YaHoWaH는 YeHoWaH로 표기됩니다. 이것이 라틴어 ‘Iehoua’를 거쳐 영어의 ‘Jehovah’(여호와)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정확한 발음은 우리 공동번역 성서에 나오는 ‘야훼’가 아니라 ‘야웨’(Yahweh)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모음은 a와 e입니다. 특히 히브리어 알파벳 ‘헤'(영어식 음가는 h)는 모음 뒤에서는 묵음(무성셰와), 장음표시이기 때문에 ‘야훼’가 아니라 ‘야-웨’가 됩니다. 아무튼 성경에 ‘야훼’가 나올 때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존중하여 ‘주님’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쉐마가 끝나고, 원로가 ‘쉬모네 에스레'(18개의 기도문: 후대에는 1개를 추가해 19개의 기도문이 됩니다)라는 ‘기도’(트필라, Tefilla)를 인도합니다.

찬양받으소서, 주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기도문의 마지막 음성과 함께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드디어 ‘율법’(토라, 모세오경)을 낭독하는 순서입니다. 모두의 눈이 예수께 쏠렸습니다. 책장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오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어디를 읽었는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참고로 오늘 복음과 평행본문인 루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가르침을 주셨다고 전해줍니다(루가 4:16-19).

‘율법서’ 두루마리 중 하나를 펼치신(아마 70인역이었겠지요) 예수님은 리듬감 있게 ‘헬라어 본문’을 읽어나가십니다. 그런 다음 회중을 바라보시면서 그들 공용어인 ‘아람어’로 통역하면서 그 뜻을 천천히 깨우쳐주십니다. ‘가파르나움’(위로의 마을) 회당의 사람들처럼(마르 1:22,27), 그들 역시 그 교훈에 감탄합니다.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그 교훈이 자신들이 알고 지내던 예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감탄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던 ‘가파르나움’과 비교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온갖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마르 1:31,34). 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권위’ 있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고향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도 감탄하긴 합니다. 그 교훈이 새로운 것임을 인정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권위’까지 인정하진 않습니다. 예수는 ‘랍비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해외유학을 다녀온 ‘박사’가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0리 떨어진 도시 ‘세포리스’를 오가며 ‘목수’(건축노동자)일로 잔뼈가 굵은 보통 사람일뿐입니다. 그런 그가 이토록 달라져 나타나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감탄은 어느새 ‘의혹’으로 변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속에 있던 ‘불신’의 말이 차례로 튀어나옵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기껏해야 ‘목수’라고 얕잡아보면서 ‘인간됨’을 나열합니다.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좀 이상합니다. 고향사람들이니 다들 예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런데도 ‘그 아버지는 요셉’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록된 다른 복음서들은 마르코의 이 표현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 목수의 아들’(마태 13:5), ‘요셉의 아들’(루가 4:22)이라 수정합니다.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은 아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라 하지 사라의 아들이라 하지 않습니다(창세 15:19). 신약성경의 첫 장인 마태오복음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이렇게 시작합니다(마태 1:1). 마르코복음에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라 소개합니다(마르 1:19). 유대인의 소개법입니다. ‘가부장제의 폐해’라고 불편해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아버지는 누구신고?”라고 하지 어지간해서는 “어머니는 누구신고?”라고 먼저 묻진 않습니다.

이렇게 ‘가부장제 문화’에서 누군가를 소개하면서 ‘어머니 이름’을 갖다 붙인다면, 그를 ‘아비 없는 자식’, ‘아비를 알 수 없는 자식’이라고 깔보고 조롱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생자’라고 모욕한 것입니다. 더욱이 마르코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정확히 기록했습니다. 예수님 평판을 나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인데도 버젓이 그렇게 썼습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마르코는 응당 써야할 것을 썼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반(半)은 옳았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마르 1:1).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마태오나 루가복음처럼 ‘수태고지’로 시작하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성령잉태’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원어: 요세),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불신’을 더욱 확고히 해 줄 명백한 근거를 댑니다. 그 교훈은 탁월하고 놀랍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자신들이 예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선입견’(고정관념)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자신들에 비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예수가 돌아와 ‘선생 노릇’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꼴을 더 이상 놔두고 볼 수 없습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해석하자면, 하느님이 사람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사실 그들은 예수가 불편했습니다. 친척들이 예수를 데리러 가기 얼마 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이 보냈다는 사람 둘이 동네 사람들을 회당으로 한사람씩 불러들이더니 예수의 뒷조사를 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사람들을 끌고 다니며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정말 큰일입니다. 총독이 그것을 알면 고향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얼마 전에도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와 친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탐문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와 잘 지냈다가는 재미없을 줄 알라고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요사이 예수 때문에 마을이 여러모로 어수선하고 의심받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더욱이 이런 민감한 시기에 예수가 고향을 방문하고 회당에서 가르치기까지 한 것을 알면 또 어떤 대가를 치러야할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 생각을 하니 예수 때문에 마을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으로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들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선’을 허락받지 못해 구원의 기회를 놓친 그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정당화’처럼 들리는 씁쓸함이 느껴집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립니다. 아직 원로의 축복기도가 남았는데도 “역시 미쳤구만!” 이러면서 무시하고 불쾌하다며 나가버립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원로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둘러쌉니다.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할 지 난감하고 민망한 순간입니다. 그들에게는 ‘가파르나움’에서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들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다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여기서 복음서 전반부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고향방문은 오히려 갈등만 더 일으키고 막을 내렸습니다. 이 무슨 좋은 꼴이라고 예수님은 제자들까지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를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이야기 구조’(문학적 특징) 사이에 숨겨놓았습니다. 그 구조를 찾아내면 고향방문 사건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구조란 무엇입니까?

마르코복음서의 문학적 특징은 ‘샌드위치’ 구조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중 10주일 복음서와(마르 3:20-35) 13주일 복음서(마르 5:21-43)를 다루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 3장부터 6장에 담긴 복음의 진리를 잘 깨우치기 위해서는 이 ‘샌드위치 구조’를 파악해내야 합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는 ‘12사도를 선택’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3:13-19). 이 이야기가 샌드위치의 가장 바깥쪽 ‘맨 위에 있는 빵’입니다. 이어서 ‘미쳤다’는 소문을 논박하시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붙잡아가려던 친척과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가족들 이야기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마르 3:20-35). 한마디로 친족들의 ‘오해’(배척)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큰 샌드위치(12사도 선택) 속에 또 하나의 작은 샌드위치(찾아온 가족과 논박이야기)가 들어 있는 셈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샌드위치의 가장 바깥쪽 ‘맨 아래에 있는 빵’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서부터 시작입니다. 전반부(6:1-6a)는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이야기입니다. 연중 10주일에는 친척과 가족들로부터 ‘오해’(배척)를 받았는데, 여기서는 ‘고향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습니다. 큰 샌드위치 속에 있던 작은 샌드위치와 하나의 쌍입니다(마르 3:20-35).

이제 아래에서 다룰 후반부(6:6b-13)는 예수님이 여러 촌락으로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야기입니다. 12사도를 선택하신 이야기의 목적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습니다(마르 3:13-19). 이어서 ‘연중 15주일’ 복음서로 배정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샌드위치 가장 바깥쪽 ‘맨 아래에 있는 빵’과 상관없는 뜬금없는 등장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주일에 가서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중 16주일’ 복음서는 ‘파송된 제자들의 귀환보고와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마르 6:30-34,53-56)이고, 그 사이에 있는 ‘오병이어’ 이야기는 ‘연중 17주일’ 복음서로 배정되었습니다.(요한 6:1-21). 드디어 샌드위치의 가장 바깥쪽 ‘맨 아래에 있는 빵’이 온전히 제시됨으로써 혼자 먹기에는 너무나 큰 덩어리의 샌드위치 구조가 완성됩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 6장은 풍성한 ‘빵 잔치’이야기로 끝납니다.

이렇게 ‘샌드위치’ 구조로 정리하고 보면, 오늘 복음이야기의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보입니다. 일종의 미리 보여주기 교육입니다. 어떤 교육입니까? ‘마음을 굳세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12사도를(우리를) 선택하셨고, 교육해 오셨으며, 이제 그들을 당신의 동역자로 세상에 파송하실 참입니다. 사실 사도(使徒)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뒤를 위해 준비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나갈 세상은 결코 녹녹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교육으로 미리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라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마르 6:14-15). 더욱이 사도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과 고향’으로부터도 오해와 배척을 받았습니다. 사도들도(초대교회 신자들) 씨 뿌리는 사람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나갈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 있기에 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4:1-7).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그들을 가족들이 오해하고, 고향에서조차도 고정관념 때문에 푸대접할 것입니다. 심지어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를 죽이는 세상입니다(마르 6:14-29). 그것이 그들이 파송되는 세상의 현실이라며, 그들의 운명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 말씀처럼 “낯가죽이 두껍고, 고집이 세고, 반항만 일삼으며, 듣지도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포기해야만 합니까? 아닙니다.

외면하는 세상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그 길을 단단히 ‘각오’(覺悟)하고 쉼 없이 가야만 합니다. 세상은 ‘참된 양식’(그래서 오병이어로 끝나는 겁니다)에 굶주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 ‘옥토’(沃土) 같은 마음 밭을 만나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르 4:8). 더욱이 오늘 시편말씀처럼 하느님 나라 일을 하는 이들을 도우시는 ‘최고의 권위자’인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향에서의 배척은 예수님이 제자(마르코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마음을 굳세게 갖도록’ 교육하는 차원이었음이 샌드위치 구조를 통해 메시지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복음서 후반부는 이런 교육 과정을 거쳐 드디어 열두 제자가 파송 받는 이야기입니다.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은 보란 듯이 활동범위를 더 확장하여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고민이 생겼습니다. 하루해는 짧고 하느님 나라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결단을 내리십니다. 혼자서 다 해낼 수 없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제자들을 ‘둘씩’ 짝지으십니다. 더러운 악령을 지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둘씩 짝지으신 이유는 서로 도우라는 뜻도 있고, 둘 이상의 사람이 증언해야 증거로써 신빙성을 갖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신명 19:15). 그렇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을 대신할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가르쳐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게 하는 ‘회개의 일’과 마귀에게 붙잡힌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과 사람들의 생명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일’을 여러 촌락(땅 끝까지)에서 행하게 될 것입니다.

후반부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는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떠나는 그들의 소유는 그 시대의 가장 밑바닥 인생들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이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겉보기에 그들은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만 지녔습니다. 그렇게 초라한 행색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느냐며 무시하고 배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시해도 괜찮은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지닌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뒤에는 항상 하느님이 배경처럼 계셨습니다. 그들의 가난과 약함은 오늘 서신말씀처럼 오히려 하느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우리가 보아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오늘의 일’이 아니라 여분의 먹을 것, 자루, 돈이라는 ‘내일의 것’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빼앗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공급하심에 의지한 채 ‘오늘’을 살아야 했던 사도들처럼, 우리도 땅이나, 통장잔고나, 재력가가 아니라 하느님만 신뢰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 등 뒤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까?

더욱이 하느님은 사도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환영할 사람을 예비해주십니다. 그 때에 그들은 그 집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 뿐 아니라 거점으로 삼아 그 지역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어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집에 영원토록 머물러 살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이 다른 곳을 향해 떠나라 하면 미련 없이 떠나야 합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을 거부하는 지역이 있다면, 받아달라고 ‘굴종’(屈從)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경고하는 표로 ‘발에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합니다.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으로 여겼습니다. 이방인 지역으로 여행 갔다가 이스라엘 경계로 들어오면, ‘부정한 것들’을 거룩한 땅에 묻혀 오지 않으려고 발에서 먼지를 털곤 했습니다. 따라서 이 동작은 이방인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몸짓이었고,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거부한 그들을 하느님의 심판에 맡긴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머묾과 떠남’을 이어받은 복음전도자들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 받은 믿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라고 주님이 세우신 ‘복음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머무르도록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는 ‘자비의 공동체’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례로 모인 교회입니다. 이 성찬례는 주님이 우리를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짝지어’ 주시는(코이노니아)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흩어져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서로와 교감하며 자리마다에서 우리가 한 몸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한 이 성찬례는 주님이 사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사제는 성찬기도 ‘성령임재 기원문’(축성문. 에피클레시스)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이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빵과 포도주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를 위하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신비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후 ‘제정사’(그리스도께서는 수난하신 전날 밤에 ~ 이 예를 행하라)와 ‘기념환호송’(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선포합니다)이 이어지고, ‘기념과 봉헌사’(아남네시스, 그러므로 우리는 ~ 감사와 찬양의 제물로 드리나이다.) 후 ‘청원기도’에서 재차 ‘성령 임재’를 간구합니다.

간절히 구하오니…
또한 이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받는
모든 이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축성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성령을 내리어주시라”는 청원입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하느님 나라 일을 하도록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가르치며,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회개’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에게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일’을 이 지역 안에서 이어가야 합니다. 이 ‘복음’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마음을 굳세게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친척과 고향으로부터 오해와 배척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 일을 하다보면 오해와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잘 안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그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어야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은 오해와 배척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인내하며 꿋꿋이 가셨습니다. ‘옥토’(沃土)를 만나 결실하게 해 주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자신의 길을 올곧게 가셨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이 “듣든 안 듣든” 굴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봅시다. 최고의 권위자께서 위임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삶의 자리마다에서 힘차게 실천해가는 우리교회이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장마와 무더위를 견디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케이티엑스 해고 여승무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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