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 연중1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샬롬, 온전한 삶(생명)을 선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고생해 온 여인이 ‘온전한 삶’을 선물 받습니다.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12살 소녀가 다시 ‘생명’을 선물 받습니다. 예수님이 ‘샬롬’이 없는 인류에게 ‘온전한 삶’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며, 죽음을 정복하신 ‘메시아’이심을 들려주는 치유 이적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진정한 ‘샬롬’으로 이끌어주시고, 이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는 거룩한 도구로 살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그리스도여, 주님은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를 보살펴주시나이다. 비오니, 어떤 처지에서든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기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지혜 1:13-15, 2:23-24
  • 시편 – 30
  • 2독서 – 2고린 8:7-15
  • 복음서 – 마르 5:21-43

연중 1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샬롬, 온전한 삶(생명)을 선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들 속에서 인류가 치열하게 씨름해 온 ‘근본 문제’를 발견합니다. ‘고통(그 최종적 형태로서의 죽음)과 악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유한하기에 아무리 강한 권력을 으스대는 이라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치유가 불가능한 질병,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악인의 번성과 착한 사람의 고통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난제(難題)입니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세상에는 왜 죽음이 존재하는가?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지금도 삶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문제를 가장 깊게 통찰해 온 분야가 ‘종교’입니다. 종교(宗敎)라는 말은 ‘으뜸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으뜸 가르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숭고한 가치(價値)’들입니다. 생명, 평화, 정의, 사랑, 자유 말입니다. 꼭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도 어느 종교나 그 시원적(始原的) 가르침은 높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종교인은 강자의 종교가 되기 위해 그 본래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이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욕망을 폭력으로 구현해 왔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생명을 위한다면서 전쟁을 지원하기도 했고, 자기 종교를 위한다면서 타종교를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신자들 역시 자신의 ‘탐욕’을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종교가 설파하는 으뜸 가르침 속에는 ‘근본 문제’도 포함됩니다. 특히 종교는 고통을 악의 결과로 이해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고통과 악에서 출발하여, 그 기원, 그리고 미래에 관한 모든 물음과 대답이 종교에는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한 이들은 하나같이 종교에 빚지고 있습니다. 특히 유일신 종교전통(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 서 있는 그리스도교는 ‘신정론’으로 고통과 악의 난제(難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해 왔습니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신’(theos)과 ‘정의’(dike)의 합성어로 고통과 악이 현존하는 현실에서 신의 정의로움을 변호하려는 시도입니다.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하고, 정의로운 신이 어떻게 악과 고통이 넘쳐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지, 창조주가 악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은 무력한 것이 아닌지와 같은 물음에 답변하려는 시도입니다. 한마디로 “전지전능전선하고, 정의로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고통과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답변은 신자들에게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여전히 속 시원한 답변이 아니라는 것이 제가 공부해 본 솔직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신을 변호하는 데 더 경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통과 악은 철학자, 예술가, 문학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현실이니 여러분도 가끔은 이 문제들을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애찬후 ‘신앙잡담회’ 시간에는 이 신정론의 다섯 가지 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눠보려고 하니 ‘잡담’을 나누실 분들은 예배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고생해 온 여인이 ‘온전한 삶’을 선물 받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12살 소녀에게 예수님이 다시 ‘생명’을 선물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민망하게도 우리가 지금까지 질문해 온 ‘고통과 악’의 이유를 논리로 답변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듯합니다. 마치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이에게 해독제를 투여해서 살리는 일이 급선무이지 언제, 어디서, 왜 독화살을 맞았느냐고 물어보는 일은 어리석다는 불교식 답변을 듣는 기분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인류가 던지고 있는 ‘고통과 악’의 질문에 예수님이 해답임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겠습니다.

1독서 ‘지혜서’와 ‘시편’은 복음서의 주제인 ‘온전한 삶과 생명’의 배경 역할이기에 배정되었습니다. 1독서에는 고통과 악이라는 근본문제에 답변하는 지혜자의 지혜가 고요히 빛나고 있습니다. 시편에는 고통과 악이라는 근본문제에 대한 기도자의 물음과 대답이 역동적인 춤으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2독서는 연중시기 계속독서입니다. ‘고난’(대기근과 박해) 중에 있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자는 헌금 독려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마케도니아에서 기록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헌금 모금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모아진 헌금의 전달 결과는 바울로의 서신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연구자들은 바울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긴 했으나 체포, 구금, 로마로 이송 당하던 당시 정황상 실패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말씀 나눔을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좋아하는 ‘샌드위치’기법으로 기록 되었습니니다. 야이로와 그의 딸의 이야기가 빵이라면 하혈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그 사이에 들어있는 내용물입니다. ‘야이로’(뜻: 그가 살리신다)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은 율법 교육과 예배(시편 기도)를 위한 마을의 중요한 공간입니다. 회당장이니 율법을 가르치고 기도를 주관하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위치의 사람입니다.

그는 최근 ‘예수’라는 예언자 소문을 들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치유자’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바리사이파)과 헤로데 당원들은 민중을 선동하고 다니는 ‘위험천만한 인물’이라고 공공연히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어울리는 사람들은 각오하라는 식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그런 경고보다도 ‘치유자’라는 소문에 더 끌렸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중병에 걸린 12살 어린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12살은 성인식을 치르고 ‘율법의 아들’(딸)로 축복을 받는 나이입니다(2017.7.9. 연중14주일 설교 참조). 이 영예로운 축복의 날을 앞두고 불행이 닥쳤습니다. 백방으로 용하다는 의사를 수소문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런 불행(고통)이 닥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림: 예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다, James Tissot

예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18

오늘 아침에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안타까운 고비를 넘겨야했습니다. 자식을 앞세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이것은 불행(고통) 중의 불행일 뿐 아니라 회당장인 자신의 명예와도 관련 있습니다. 중병에 시달리는 자식 앞에서 명예를 말한다는 것이 속물 같지만 고대는 종교적 세계관이 삶의 전부를 지배하던 시절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겪는 불행(고통)을 고대인은 하느님의 저주로 여겼습니다. 예배를 주관하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에 대해 가르친다는 사람인데 자기 집에 우환(憂患)이 닥쳤으니 체면(體面)이 말이 아닙니다. 딸이 나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장면은 마르코가 가지고 있는 고도의 신학적 장치입니다. 율법 교육과 예배를 주관하는 회당장의 딸이 죽을병에 걸린 상황은 유대교에는 더 이상 생명의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부에 가서 예수님이 회당장의 딸을 고쳐주신 일은 새로운 생명의 희망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복선으로 깔고 있는 고도의 신학적 장치입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그가 살던 마을에서 가까운 ‘가파르나움’으로 다시 오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내가 어서 가보라며 옷을 챙겨줍니다. 그는 황급히 길을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 둘러싸인 채 호숫가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는 값진 옷자락을 끌면서 허둥지둥 군중들을 뚫고 나갑니다. 다른 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땅 바닥에 무릎을 대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무릎을 꿇어야할 분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한다는 믿음의 표현이지만 제자들은 영문을 모릅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애원합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 주십시오.

아버지의 애원에 마음이 움직이신 예수님이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많은 사람도 예수님을 둘러싸고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마음이 급한 그가 저만치 앞서가다 뒤돌아보기를 몇 번이나 합니다. 좀 더 서둘러 달라는 몸짓을 예수님 일행에게 보냅니다. 몇 걸음을 더 떼던 그가 갑자기 뒤에서 들린 큰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을 때, 아예 예수님 일행은 멈추어 있었습니다. 다급한 그가 뛰어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님이 걸음을 멈춘 이유였습니다. 그의 속이 타들어갑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데 걸음을 멈춘 이유가 고작 그것이라는 사실에 좀 화가 났습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군중들이 밀고 밀치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지 허락도 없이 ‘일부러’ 손을 댈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빨리요!”라고 한마디 하는 순간,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그를 막으시며 누군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는 데도 한 여인만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나 고향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통해 몹시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병이 오랜 경우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바침으로써 의사이신 하느님께 치유를 간구하곤 했습니다(출애 15:26). 여인은 그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출혈’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월경중이거나 ‘하혈’하는 여인은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레위 15:19,25). 이 여인은 무려 12년 동안이나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 부정한 몸으로는 성전 경내인 ‘여인의 뜰’ 조차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멈추지 않는 출혈은 자신을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만들뿐 아니라 성전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게 했습니다.

게다가 육체의 질병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슬픔이 여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질병은 잘못을 저지른 이가 받는 죄의 결과라는 통념(通念)이 있습니다. 먼저 이야기에서 ‘야이로’가 근심했던 것처럼, 유대인은 질병을 하느님이 죄지은 사람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정죄하곤 했습니다. 무려 12년간 고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죄가 몹시 크다는 뜻입니다. 외부로 알려지면 ‘죄인’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병자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고, 다른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가족과 이웃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소외’당하는 ‘서러움’입니다. 한마디로 공동체로부터 영원히 단절될 지도 모른다는 고통과 슬픔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죄하고, 차별하고, 죽이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차에 많은 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낭패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의사’(전문 교육을 받은 의사들이거나 민간요법 치료자들)를 찾아다녔지만 고생만하고 가산마저 탕진했습니다.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또 다시 소문만 듣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까지 얼마나 고뇌가 깊었을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치료비로 소비해 온 돈보다 더 많은 것을 예수님께 쏟아 부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선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을 것인지 부터 결정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놓고 이러저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큰 권위를 가진 율법교사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마태 7:28-29).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돌아온 예언자들 중 한 분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마태 16:14). 심지어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요한 6:14-15). 그러나 질병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병자들 입장에서는 다른 소문은 필요 없고 오직 한 가지만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치유자’시라는 소문 말입니다.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를 치유해주셨다는 소문까지 있었습니다(루가 8:2).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온갖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셨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마르 1:34). 따라서 병자들은 치유자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빛’을 찾은 것 같습니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예수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솟아올랐습니다. ‘옷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우스웠습니다. 아마도 무의식이 찾아낸 나름의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무의식이 그 같은 선택을 하게 한 이유는 곧 밝혀집니다. 주석가들은 여인의 무의식이 찾아낸 그 ‘옷’이 ‘겉옷’(히브리어로는 ‘탈릿’, תלית)에 달고 다니던 ‘술’(히브리어로 ‘찌찌트’, ציצית)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남성)에게 일러
대대손손 옷자락에 술을 달고
그 옷자락 술에 자줏빛(청색) 끈을 달게 하여라.
이렇게 술을 만들어 달고
그것을 볼 때마다 야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전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눈에 드는 대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민수 15:38-39,

네가 걸치는 옷자락
네 귀퉁이에는 술을 만들어 붙여야 한다.
– 신명 22:12

이 같은 율법 규정 때문에 이스라엘 남성들은 걸치는 겉옷에 ‘술’(찌찌트)을 달았습니다. 이 ‘술’을 볼 때마다 그들이 순종할 의무가 있는 하느님의 ‘율법’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방문해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탈릿’(기도용 쇼올)은 이러한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전해줍니다. 한 귀퉁이마다 달린 ‘8’가닥의 실, 그 실에 묶은 ‘5’마디 겹매듭, 그리고 ‘술’(찌찌트)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음가(히브리어 알파벳은 각각 숫자의 상징을 갖습니다)인 ‘600’을 전부 합치면 ‘613’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게 살기 위해 지켜야할 모든 율법조항의 숫자입니다.

이처럼 ‘옷 술’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계약 관계, 즉 ‘사랑’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옷 술’이 그 사람의 사회적 권위나 정체성를 나타내는 표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옷단에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23:5). 더욱이 민간에서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걸친 ‘옷 술’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무슨 미신 같은 믿음이냐고 핀잔을 놓을 일이 아닙니다. 랍비문헌에도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의 ‘찌찌트’에 손을 대면 온전해 진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림: "The Sick Awaiting the Passage of Jesus", James Tissot

“The Sick Awaiting the Passage of Jesus”,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0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치유의 화신’입니다. 그 몸에 손만 대도 기적의 힘이 나와 사람들은 치유되었다고 보도합니다(마르 3:10, 루가 6:19).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앞을 다투어 밀려들었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아니지만 신체접촉이 병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로 예수님은 온전하고 특별한 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입으신 옷에서도 기적의 능력이 나왔다고 전해줍니다.

마을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어디든지
예수께서 가시기만 하면
사람들은 병자들을 장터에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 마르 6:56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도 ‘술’(찌찌트)이 달린 겉옷을 입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옷 술’은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만질 수 없습니다. 다른 옷과 달리 그 사람의 권위와 능력, 심지어 ‘인격’(정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과 그 사람 사이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규범을 어기고 가족이 아닌 사람이 ‘옷 술’을 만지는 행위는 그 사람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이기에 사회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훔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이 여인에게는 고민거리였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그분이 특별한 분임을 나타내주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옷’도 분명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 같은 사람이 ‘옷’(사랑)을 만지는 일을 예수님이 허락해 주실 것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른 병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부정할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만지면 그 역시 부정하게 된다고 율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낫고 싶다는 마음과 예수님께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무의식이 찾아준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믿음으로 기적(사랑)을 훔칠 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모릅니다.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니 위치 추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갈릴래아 지역을 주로 다니신다는 소문과 사시는 집이 가파르나움 근처에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사실 찾아 나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일을 처리할 참이지만, 만일 부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치유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습니다. 며칠 만에 운 좋게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는 표시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약간 비탈진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데 어떤 사람이 군중들을 헤집고 허둥지둥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 앞에 무릎을 꿇더니 간청하는 몸짓을 했습니다. ‘저분이 예수님이구나…’ 잠시 후에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근처 마을 ‘회당장’이었습니다. 중병에 걸린 자기 딸의 치료를 간청하기 위해 예수님께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이 이동하십니다. 먼지가 일고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드디어 이 여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군중들을 뚫고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일’을 해낼 참이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전부임을 믿었습니다. 이제 몇 사람만 더 뚫으면 됩니다. 주변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옷 술’이 마치 슬로오비디오처럼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기까지 그녀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엄청난 압박과 싸워야 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 자신 역시 ‘계약의 백성’입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마음으로 몸을 구부려 손을 뻗습니다. 지옥에서 천국을 향해 손을 뻗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옷 술’을 붙잡았습니다. 그 찰라가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계획을 성취했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그녀가 대열에서 빠져나오려던 순간 앞서 가시던 예수님이 사람들을 멈춰 세웠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님은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녀의 계획이 들통 났을까요? 허락도 없이 ‘옷 술’을 만지는 것은 큰 실례인데, 예수님이 화가 나셨을까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일부러’ 손을 댈 사람은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허락도 없이 일부러 ‘옷 술’을 만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기적의 힘’, 즉 사랑을 도둑맞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민감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계속해서 둘러보시면서 누가 그랬는지 찾으십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빨리요!”라고 한마디 하는 순간,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그를 막으시며 한 여인에게로 다가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는 데도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여인이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왜 그러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자신은 저주를 받은 몸이고, 더욱이 자신이 접촉한 사람은 부정하다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자신과 몸이 닿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큰일 났습니다. 여인은 그대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용서를 청합니다.

지난 12년간의 고통스런 삶에 대해 말씀드리기 시작합니다. 옷을 만지기로(사랑을 훔치기로) 계획을 세운 이야기가 나올 무렵 주위 사람들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비판자가 그런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이런 소리가 들린 듯합니다. “뭐야? 그 몸으로 예수님을 만졌단 말이야? 아니, 어쩌려고 그랬데!” 이야기를 잠시 멈춘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올려다봅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핏기 없던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대십니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입니다.

여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옷 술에 손을 대는 순간
뭔가 느낌이 왔어요.
출혈이 멈추었다는 느낌이요.

기쁨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군중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쏠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대노하실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시더니 두 팔로 여인의 어깨를 안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여인과 눈을 마주치시며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놀라운 선언입니다. 처벌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에는 “여인아,”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딸’(θυγατέρ, 튀가테르)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딸’이라고 부르신 경우는 이 여인이 유일합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무시해도 좋은 병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아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가족이기에, 사랑스런 딸이기에, 아버지의 ‘옷 술’을 허락 없이 만질 수 있습니다. 12년간이나 출혈로 고통 받아온 여인을 ‘딸’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이 여인도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에서는 ‘딸’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모든 장애를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이 해야 할 딱 그 일을 알고 전부를 건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 자신 역시 하느님의 ‘계약 백성’임을 붙잡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용기를 가지고 자비를 간청하며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여인의 믿음은 행동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돌려보내십니다.

안심하고 가거라.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헤어질 때 나누는 ‘축복의 인사’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는 ‘인사’도 없이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본문에 ‘안심’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에이레네’(Εἰρήνη)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에이레네’는 일종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상태일까요? 지중해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끊임없이 ‘전쟁’(그리스 신화에서는 아레스 Άρης)을 치러야했습니다. 전쟁은 개인뿐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아는 이들은 ‘전쟁 없는 상태’를 갈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이레네’, 즉 ‘평화’입니다.

본래 ‘에이레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신의 딸인 ‘봄의 여신’입니다. 봄의 따스함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새싹이 돋아나게 하며, 온갖 꽃들을 아름답게 피워냅니다. 한마디로 봄은 계절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때입니다. 이름 하여 ‘에이레네’가 선물하는 ‘평화의 계절’입니다. ‘에이레네’에게는 ‘에우노미아’(Εὐνομία)와 ‘디케’(Δίκη)라는 두 자매가 있습니다. 에우노미아는 ‘질서의 여신’이고, 디케는 ‘정의의 여신’입니다. 에이레네는 언제나 이 두 자매와 함께 했습니다. 이것은 ‘평화’가 항상 ‘질서’와 ‘정의’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에이레네’는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는 이미지로 묘사되는 데, 그 아기가 ‘부(富)의 신’을 상징하는 ‘플루토스’(Πλοῦτος)입니다. 땅에 평화가 찾아들면 그 산물인 ‘부’(富)도 넘칠 것이란 의미입니다. 실제로 평화로운 질서가 땅에 보장되어야 만이 농사도 짓고 풍요로운 수확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평화의 때(상태)는 전쟁이 없어야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동맹’과(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스파르타를 중심으로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등) 다자간 ‘조약’(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스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정치, 윤리적 의무 의식입니다. 여기에는 보편적 합리성을 추구했던 철학자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처럼 동맹과 조약을 통해 적대관계(전쟁)를 그치고 서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상생(相生)하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 상태가 평화입니다. 한마디로 조약을 통한 평화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그 같은 동맹과 협정은 강력한 국가를 세우려는 야망에 불타오른 ‘아테네’나 ‘스파르타’에 의해 깨지고(펠로폰네소스 전쟁) 종국에는 마케도니아에 점령당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에이레네’(평화)는 풍요로운 삶을 위한 여신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조약을 통해 전쟁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질서와 정의, 풍요와 번영, 서로의 상생을 꿈꿨던 그리스인의 염원이 담긴 말입니다. 그들은 ‘에이레네’를 ‘인사’나 ‘신의 축복을 기원’할 때 사용하기까지 했습니다.

70인역 성경은 이 ‘에이레네’를 히브리어의 ‘샬롬’(שָׁלוֹם)의 번역어로 사용했습니다(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도 70인역을 따라 ‘샬롬’을 쓸 자리에 ‘에이레네’를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 최고의 ‘인사’와 ‘기원’으로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평안’, ‘평화’라고 주로 번역하기에 단지 개인이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순간순간 경험하는 ‘심리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차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질서 속에서 순간순간 다스려지기를 원합니다. 순간순간 제 멋대로 일어나는 생각에 시달리지 않고, 감정도 혼란스럽지 않은 그런 조화로운 상태(고요, 안식, 안정, 믿음직함, 걱정 없음)를 원합니다. 실제로 명상이나 마음수련을 통해 이런 차원을 경험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샬롬’은 순간순간 경험하는 개인의 내면의 상태(평안, 고요, 안식) 그 이상입니다. 구약성경은 ‘샬롬’을 ‘온전함(부분이 아닌 전체성, 조화, 질서), 건강의 결핍이 없는 안녕과 치유, 번영(축복, 풍요, 부(富), 복지, 형통, 성공), 전쟁(갈등, 폭력)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안전, 우호적인 관계, 우정, 언약, 화목, 화해, 화합, 공감), 기쁨(만족, 행복), 정의, 선(善), 사랑, 구원(해방, 구속), 새로운 창조 등’ 개인의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 샬롬을 사용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내적 고요의 상태를 진정한 의미의 ‘샬롬’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샬롬’은 불완전한 역사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던진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공동체적인’ 대답입니다. 그들이 희망하던 ‘하느님 구원의 상징’이 ‘샬롬’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스라엘이 충실히 지킬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즉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에 ‘샬롬’(평화)이 완전히 실현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으며, 종말론적인 희망을 담은 총체적인 말이 ‘샬롬’입니다. 개인의 실존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구원의 상태입니다.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포괄하는 완벽히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말로 바꾸면 ‘생태계의 평화’인데(이사 11:6-16), 인간과 동물과 모든 피조물이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처럼, 해함과 위험과 착취와 다툼 없이 자신의 생명력대로 온전히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모든 창조 세계를 포괄하는 하나인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바로 ‘샬롬’입니다.

우리는 ‘샬롬’을 선물 받은 여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봅니다. “안심하고 가라.”는 말씀은 이 모든 의미를 담은 ‘샬롬’(평화)을 예수님이 여인에게 선물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여인에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샬롬’(평화)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질병 속에 있던 여인만이 아니라 ‘인간 실존’이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평화’(구원)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다른 병자들은 예수님의 몸과 옷에 손을 댐으로써 육체의 치유가 일어났을지 모르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진정한 ‘샬롬’(치유)을 선사하시고 파송합니다.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공동체적)인 샬롬입니다. 개인적이라는 말씀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온전한 삶’입니다. 죄인이라는 정죄나 질병의 억압 없이 온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건강의 결핍이 없는 샬롬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딸의 자리로 다시 회복된 삶입니다.

또한 사회적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계약의 백성의 자리로 다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질병은 이 여인을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아닙니다. 아마 몸이 치유되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감사의 예물을 드림으로써 공동체로 복귀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원했던 삶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 여인은 출혈이 멈추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더 원했던 것은 공동체로의 복귀였습니다. 성전에서 감사 예물을 바치며 하느님으로부터 “딸아!”라는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질병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을 병으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한 생명이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존귀함을 회복하고 온전한 삶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시다”, 1885 (oil on canvas) by Jacomb-Hood, George Percy (1857-1930)

예수님이 주시는 ‘샬롬’(온전한 삶)은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신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에는 야이로가 처음부터 죽은 딸을 살려주시기를 간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옷 술’을 만진 여인을 찾는 일로 지체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마음이 더 불안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따님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은 “다 끝장났습니다. 절망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예수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죽음은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삶의 ‘근본 문제’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문제 상황에 직면합니다. 기도의 끈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지만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다 소용없어, 이제는 안 돼. 하느님도 어쩔 수 없어…” 많은 사람들이 정말 거기서 포기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부정적인 말은 들은 채도 안하시고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은 흔들리는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야이로’는 어떤 말을 선택할지 기로에 섰습니다. “다 끝장났으니, 예수님 됐습니다. 돌아가세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친 그는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의 집’으로 모시고 가기로 선택합니다. 그 믿음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이제부터 보게 됩니다.

집에 당도하니 울며불며 곡하는 소리로 어지럽습니다.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사람들은 코웃음만 쳤습니다. 제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음’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때 아이의 엄마가 뛰어나왔습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최후의 기대를 담은 눈길로 예수님을 부여잡습니다.

그럼요, 제 아이가 죽다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서 깨워주세요.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아이의 엄마마저 실성했다고 여겼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을 때는 자식들은 아비를 장사 지낸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아비들이 자식들을 장사 지낸다.” 지금은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자식을 앞세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그 코웃음 치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죽은 소녀가 누운 방으로 들어가십니다. ‘죽음의 방’, ‘어둠의 방’, ‘절망의 방’으로 들어가십니다. 새벽을 알리는 햇빛이 어둠의 방으로 들어간 셈입니다. 생명이신 분이 죽음의 방에 들어갔으니 결과는 ‘생명’일 것입니다. 빛이신 분이 어둠의 방에 들어갔으니 낮처럼 환해질 것입니다. 희망이신 분이 절망의 방에 들어갔으니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과 어둠과 절망으로 내쫓기는 사람이 있고, 생명과 빛과 희망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 속에 있든지 믿음으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방에 예수님과 함께 기도로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소녀의 침상으로 다가가십니다. 목숨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죽은 소녀를 향해, 이번에는 예수님이 손을 뻗으십니다. 하혈하던 여인처럼 은밀히 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잠든 아이를 깨우듯이 당당하게 그 아이의 가녀린 ‘손’을 잡습니다.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부정하다는 율법도 개의치 않으십니다(민수 19:11). 다정하게 불러주십니다. ‘탈리타 쿰’(아람어로 ‘탈리타’는 소녀, ‘쿰’은 일어나라). “아가야, 일어나라”입니다. 순간 소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납니다. 방안에 있는 낯선 사람들을 보고 놀랐지만, 이내 부모의 얼굴을 보고 겸연쩍은 듯 웃더니 방에서 걸어 나갑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생명의 창조’입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예수님께 순종한 ‘야이로’는 그날 통곡하던 슬픔이 춤으로 바뀌고, 베옷을 입어야할 처지에서 잔치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온 동네사람과 함께 메시아를 만난 샬롬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고생해 온 여인이 ‘온전한 삶’을 선물 받았습니다.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12살 소녀가 다시 ‘생명’을 선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샬롬’이 없는 인류에게 ‘온전한 삶’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며, 죽음을 정복하신 ‘메시아’이심을 들려주는 치유 이적들입니다. 공교롭게도 ‘12’라는 숫자가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12’는 유대 전통뿐 아니라 동서양 모든 곳에서 중요한 상징을 갖습니다. 완성된 조화로움, 즉 ‘온전함’, ‘우주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1년은 12개월입니다. 하루는 오전 12시간, 오후 12시간으로 이루어진 24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이고, 예수님의 제자 역시 12명입니다. 요한묵시록에 기록된 새 예루살렘의 기본 단위도 12입니다. 심지어 부처님의 제자 역시 12명이고,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 산’에도 12신이 삽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12간지로 띠를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키보드의 ‘기능 키’도 F12까지 있습니다. 이처럼 질병에서 치유, 아이에서 성인, 미숙에서 성숙, 무질서에서 질서, 부조화에서 조화, 결핍에서 온전함이라는 새 단계로 진입했음을 상징하는 ‘생명’의 수가 ‘12’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삶’(생명과 조화)인 ‘샬롬’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이 ‘샬롬’은 우리가 성찬례를 봉헌하기 위해 모일 때마다 하느님의 선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이 식탁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샬롬’을 얻기 위해 더 이상 ‘은밀히’ 옷 술을 만지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이 모습 이대로 나오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위한 더 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뭐라고 평가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고통스럽고,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하느님께 믿음을 담아 기도로, 찬미로 내어드리면 됩니다.

이 시간, ‘탈리타 쿰’하고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의 다정한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그 음성이 우리를 절망과 죽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우리의 영혼이 치유되고 새 힘을 얻어 더 깊은 부활의 단계로 진입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슬픔을,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억눌림을, 우리의 죽음을, 기쁨과 치유와 자유와 생명으로 바꾸어 춤추게 해 주시는 ‘샬롬’의 근원이십니다.

부디 이 성찬례를 통해 모두가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사랑을 가득히 선물 받아 이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는 거룩한 도구로 파송받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케이티엑스 해고 여승무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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