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24 성 세례요한 탄생/맥추감사주일/연중1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성 세례요한 탄생 축일이자, 연중 12주일이며,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간 숭고한 사람입니다. 그의 탄생일을 기뻐하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을 잘 걸어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더불어 오늘은 지난 상반기 동안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보살펴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하고, 하반기 동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감사를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오늘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거듭나는 교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은 한국전쟁 68주년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남북이 오랜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잘 결실을 맺어가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한국전쟁 중 순교한 분들, 마리아 클라라 수녀, 윤달용 모세 신부, 조용호 디모데 신부, 이원창 미카엘 신부, 찰스 헌트 신부, 윌리엄 리 신부님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세례 요한을 주님의 섭리 가운데 탄생하게 하시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의 가르침과 거룩한 생활을 따라 진실로 회개하여 항상 진리를 말하고 담대히 불의를 꾸짖으며 정의를 위한 모든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계절에 따라 우리에게 땅의 소출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에는 변함없는 주님의 은혜를 신뢰하게 하시고, 풍요로울 때에는 힘겨웠던 시절을 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0:1-11
  • 시편 – 85:7-13
  • 2독서 – 사도 13:14하-26
  • 복음서 – 루가 1:57-66, 80

아동문학가인 ‘이원수’(1912~1981)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동요(童謠) ‘고향의 봄’이 그 분의 ‘시’(詩)에 곡을 붙였습니다. ‘대한민국 문화훈장 금관장’이 추서(追敍)되었지만, 나중에 ‘친일행적’이 밝혀져 가족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공식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암흑기, 그 분이 선택하고 걸어간 ‘길’에 대한 평가는 냉혹합니다. 하지만 강준만 교수가 「한국근대사 산책 6: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국가와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 관점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 분이 문학가의 길을 걸으며 남긴 작품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좋아하는 그 분의 작품 중에 마음까지 따스하게 비추는 ‘햇볕’이라는 ‘동시’(童詩)가 있습니다.

햇볕은 고와요, 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잎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되어요.

햇볕은 따스해요, 맑은 햇볕은
온 세상을 골고루 안아 줍니다.
우리도 가슴에 해를 안고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되어요.

이 동시처럼 모든 동식물은 ‘태양 빛’에 생명력을 의존합니다. 과학기술로 만들어낸 현재의 ‘인공 빛’은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태양 빛’의 고마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핵 발전이나 석탄화력 발전은 각각 방사능과 미세먼지라는 부산물을 낳습니다. 땅위 생명체들에게 혜택을 주면서도 전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태양 빛의 고마움을 더욱 느끼는 요즘입니다.

며칠 전 ‘강화’에서 사목하는 후배 사제가 ‘감자’ 캐는 사진들을 서울교구 성직자 밴드에 올렸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강화 햇볕이 들어가 있는 이름 하여 ‘하지감자’입니다. 지난 ‘21일’은 절기로 ‘하지’(夏至)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자전’과 ‘공전’을 배운 바 있습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진다고 말하는 언어습관은 여전합니다. 태양이 하루 중 ‘정남쪽’에 있을 때의 고도를 ‘남중고도’(南中高度)라 합니다. 남중고도는 ‘하지’ 때 가장 높고 ‘동지’(冬至) 때 가장 낮습니다. 계절의 변화도 ‘태양의 고도 변화’에 따라 일어납니다. 앞으로 ‘동지’까지 낮이 점점 짧아지고, 밤은 점점 길어집니다. 무더위와 장마도 시작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태양의 후예’인(이것은 설교 중에 밝혀 질 것입니다) 교우들의 건강한 여름 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잠깐이라도 시원하시라고 ‘겨울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오늘부터 딱 6개월이 지나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여름의 문턱에서 웬 ‘크리스마스’ 타령이냐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상관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계절의 변화는 ‘북극’과 ‘남극’을 연결하는 가상의 ‘자전축’이 기울어져 태양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력’의 순환도 ‘성탄일’과 ‘부활주일’이라는 두 축이 주도합니다. 우선 부활주일은 ‘춘분’(春分) 후 보름달 다음에 오는 첫 주일로 해마다 이동합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반면에 성탄일은 ‘동지’(冬至) 다음에 오는 25일로 항상 고정입니다. 역사 고증에 따르면 실제 ‘성탄일’은 오늘날처럼 겨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겨울 같진 않더라도 이스라엘에도 겨울이 있습니다. 그 겨울에 ‘들’에서 양떼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참고 루가 2:8-15). 어째서 교회는 성탄일을 겨울에 지키게 된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북반구에서는 ‘동지’가 되면,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합니다. 태양도 가장 작아진 것처럼 보이고, 빛도 약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게다가 동지 이후 ‘사흘’ 간 태양은 매일 약 1도씩 남쪽으로 향하던 이동을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태양이 기운을 잃고 죽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태양 빛에 모든 것을 의존해 살아가는 그들에게 큰 재앙입니다. 따라서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바쳤습니다. 신비하게도 25일이 되면 태양이 다시 북쪽으로 약 1도씩 이동하면서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온기가 느껴집니다. 죽은 것처럼 보였던 태양이 ‘새로 태어나 자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감사 축제를 벌였습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곧 봄이 온다는 예고입니다. 이처럼 태양의 회복을 기원하는 제사와 새해를 맞게 해 준 감사의 축제를 고대인들은 ‘동지’ 무렵에 지켰습니다. 한마디로 ‘동지축제’는 태양을 신처럼 떠받들던 고대인들이 고마움을 한껏 드높여 지키던 풍습입니다.

이단들 중에 바로 이 풍습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이교도의 풍습을 끌어들인 우상숭배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종교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특별한 산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거나 극복하고, 또 자신의 본능을 조절하여 만들어낸 생활양식이 ‘문화’입니다. 종교 역시 문화의 다양한 현상 중의 하나로 본다면 필연적으로 그 지역의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종교가 전파되고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문화적 현실을 적극 포용하여 토착화하기도 합니다. 세계 어느 종교문화에서든 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동지’를 새해가 시작되는 축제일로 지킨 풍습은 고대 서양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설화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동짓달’에 천제(天祭)를 드리고 새해 첫 달로(작은설이라는 의미로 ‘아세’(亞歲)라고 불렀습니다) 지켰음을 전해줍니다.

물론 4세기경 그리스도교는 ‘동지축제’를 아기예수님의 탄생일로 선포하고 기념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밝은 빛이 ‘태양’이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지’ 절기가 갖는 ‘상징성’에 비추어 아기예수님의 성탄일로 기념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척점인 ‘하지’가 갖는 상징성에 비추어 탄생일로 기념하는 성인도 있을까요? 오늘이 그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 루가 7:28a

성모 마리아가 아닌 점이 놀랍습니다. 어머니를 높이면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한 수고를 고마워하는 찬사일까요? 여자는 이미 위대하기에 제외한 것일까요? 아무튼 세례자 요한을 가장 빛나는 인물로 칭송하신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러면 무슨 근거로 교회는 그의 탄생일을 ‘하지’ 절기로 정한 것일까요?

성공회 기도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주요축일’로 기념하도록 정했습니다. 교회력에서 ‘주요축일’은 ‘대축일’(大祝日)과 ‘재일’(齋日)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참고로 교회력의 근간을 이루는 ‘대축일’은 성탄일, 공현일, 부활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주일, 성삼위일체주일, 모든 성인의 날입니다. ‘재일’은 대재일과 소재일로 나뉘는 데, 사순절기의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은 ‘대재일’(大齋日)이며, 사순절기 중 주간 40일은 ‘소재일(小齋日)’입니다. 부활절기와 성탄절기를 제외한 ‘모든 금요일’과 ‘사계재일’(四季齋日)도 ‘소재일’입니다. 대재일은 ‘오전 금식’을 하며 소재일은 ‘육식’을 삼가고 ‘기도’와 ‘극기’를 실천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런 실천은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킵니다.

‘주요축일’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한 축일, 신약성서의 성인들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건을 기리는 축일, 그리고 대한성공회가 설정한 축일들입니다. 우선순위에 따라 가, 나, 다 군으로 나뉘는데 ‘가’군은 거룩한 이름 예수, 주의 세례, 주의 봉헌, 주의 변모, 성모수태고지, 왕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성체, 성모 방문, 성모 안식,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세례자 성 요한 탄생 축일입니다. ‘나’군은 사도들의 축일, 복음사가 축일,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 성 요셉, 성 막달라 마리아, 성 스테파노, 성 십자가 축일입니다. ‘다’군은 모든 한국의 순교자, 대한성공회 수호성인 성 니콜라, 교구 설립일, 성당축성일, 추수감사주일, 설명절, 추석명절입니다.

동서방교회가 기념하는 성인들 ‘축일’은 대부분 ‘순교일’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 날이 성인들의 ‘천국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탄생일’을 기념하는 두 분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6월 24일)과 성모 마리아(9월 8일)입니다. 탄생일을 나란히 기념하는 점만 보아도 두 분이 예수님의 구원사업에서 얼마나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성공회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을 ‘주요축일’로 지키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이제 그의 탄생일을 ‘하지’ 절기로 정한 위의 질문에 답변할 차례입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루가 1:36-37

이 수태고지 장면에 근거해 ‘성탄일’ 6개월 전인 오늘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로 지킵니다. 탄생일이 정해졌으니까 성소에서 있었던 그의 수태고지는 10달 전인 ‘추분’(秋分) 무렵임을 알 수 있습니다(루가 1:5-20). 재미있게도 성탄절이 ‘동지’ 다음에 오는 25일로 항상 고정이듯이 그의 탄생일도 항상 ‘하지’ 다음에 오는 24일로 고정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탄생이 ‘주요축일’에 속할 만큼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차례입니다. 루가복음서는 후손 없이 늙은 부부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이야기로 시작합니다(루가 1:5-25). 9월 중순 어느 날(교회사에서는 ‘추분’(秋分) 절기 다음), 성소에서 분향하던 ‘즈가리야’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수태고지’를 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터인데 ‘요한’(주는 자비로우시다)이라 이름 짓도록 알려줍니다.

‘즈가리야’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아기를 낳을 때까지 말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고 ‘할례식’ 날이 왔습니다. 모두의 기쁨입니다. 이름 정하는 일로 잠시 승강이가 벌어집니다. 이 모든 상황을 ‘즈가리야’가 정리합니다.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이름을 ‘요한’이라 합니다(루가 1:63). 그 순간 그는 회복되고 역사에 길이 남는 ‘예언의 노래’를 부릅니다(루가 1:67-79). 우리가 아침기도 때마다 화답하는 ‘즈가리야 송가’입니다. 어떻게 시작하는지 기억나시나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미 하여라!

그림: "즈가리야에게 드러난 계시", James Tissot

“즈가리야에게 드러난 계시”,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19

우리 기도서에 보면 ‘즈가리야 송가’ 옆에 Benedictus Dominus Deus(베네딕투스 도미누스 데우스)라는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라틴어 성경으로 번역된 첫 구절을 표기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즈가리야 송가’를 첫 단어를 따서 ‘베네딕투스’(Benedictus, 찬미받다)라 부르기도 합니다(참고로 성찬례에는 또 하나의 ‘베네딕투스’가 있습니다. ‘상투스’(거룩하시다)에 이어지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입니다) 흥미롭게도 자기 아기를 위한 할례 축하 송가가 아닙니다. 그는 ‘오실 구세주’를 찬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아기가 살아갈 ‘인생길’을 미리 내다보며 축복합니다. “아가야!”라고 다정스레 부르는 ‘음성’이 햇볕처럼 가슴을 따스하게 합니다. 그 음성이 우리를 부르는 말씀으로 들리는 순간, 우리 역시 또 한 사람의 요한이 됩니다. 아기에게는 위대한 ‘사명’(使命)이 주어져 있습니다.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리니,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주님의 백성에게
그 구원을 알게 하여
주님의 용서하심을 얻게 하여라.
– 루가 1:76-77
(성공회 기도서 ‘즈가리야 송가’ 번역본)

아기는 어떤 인물이 됩니까? 성령 가득한 아버지의 예언 노래를 성취합니다. 그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구세주를 알아보고 어머니에게 알려드릴 정도로 성령을 가득히 받았습니다(루가 1:15,39-45). 주님의 보살핌 속에 몸과 마음이 굳세게 자라났고(루가 1:66,80), 성인(成人)이 되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예언자’로 불렸습니다(루가 3:2-18). 그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임박한 심판 앞에서 속히 못된 행실을 끊고, 기존의 삶을 철저히 바꾸어 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즉 메시아로 증언했습니다(요한 1:29).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라” 외친 ‘광야의 소리’였습니다(루가 3:4). ‘기존의 나를 바꾸라’는 ‘경고의 소리’였습니다.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는 ‘예언자’였습니다(루가 3:16, 사도 13:25). 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구원사업을 위해 전면에 등장하신 후에는 기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불의한 권력가 ‘헤로데’를 비판하다가 옥에 갇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 얼마 전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커지고 작아진다는 그의 ‘통찰’(洞察)이 ‘하지’(夏至) 절기에 딱 어울립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을 떠오르기 시작하는(탄생한) 태양에 견주어 ‘동지’ 사흘 후인 25일을 ‘성탄일’로 지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교회력으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한 ‘성모수태고지’ 축일은 3월 25일입니다. ‘춘분’(春分, 3월 21일) 절기에 속합니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로, 이 날을 기점으로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동지’ 때 새로 태어나 자라기 시작한 ‘태양’(우리 주님)이 ‘밤’이라는 악마를 이기고 ‘완전히’ 부활했음을(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상징하는 절기가 ‘춘분’인 셈입니다. 서양에서는 춘분부터 봄으로 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부활주일을 정하는 기준점이 춘분입니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조건을 갖추게 한 춘분 절기의 상징성이 ‘부활주일’을 정하는 일에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동지와 춘분’ 절기의 상징성을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이해했습니다.

반면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 뿐 아니라 그의 일생을 그리스도교는 ‘하지’ 절기의 상징성과 관련해 이해했습니다. 실제로 ‘하지’가 지나면서부터 낮의 길이는 점점 짧아집니다. 더욱이 ‘추분’(秋分) 절기의 상징성도 그리스도교는 그와 관련해 이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구(舊) 시대 사람임을 증언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태양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점점 작아져 사라져갈 ‘지는 해’임을 통찰했습니다. 이것이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마지막 증언에 담겨 있습니다. 정말이지 그의 마지막 증언은 지고지순한 인간 이상, 즉 자기 의식적인 ‘무욕(無慾)의 화신’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시작하여, 탄생과 생의 마감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새 시대를 시작하시고 완수하신 예수님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성공회가 그의 탄생일을 ‘주요축일’로 지키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오늘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를 통해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세례 요한을
주님의 섭리 가운데 탄생하게 하시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의 가르침과 거룩한 생활을 따라
진실로 회개하여
항상 진리를 말하고
담대히 불의를 꾸짖으며
정의를 위한 모든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본기도는 세례자 요한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간 숭고한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루가복음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야할 인생길’이 정해져 있었다고 전해줍니다(루가 1:15-17). 아버지를 통해 그가 가야 할 ‘그 길’이 선포되었다고 기록합니다(루가 1:67-79).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가야할 ‘그 길’을 발견했다고 전해줍니다(루가 1:80). 종교적 상징으로 광야는 자기를 발견하고, 한 단계 더 높은 의식의 수준으로 진입하고 변화시키는 고독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길을 발견한 후에 꼿꼿이 ‘그 길’을 걸어간 영웅입니다(루가 3:2-18).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자 요한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야할 인생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까? 교회가 그의 탄생을 기념하게 하는 의도 중 하나입니다. 마태오복음의 ‘달란트 비유’(마태 25:14-30)와 루가복음의 ‘금화 비유’(루가 19:11-27)도 이 진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야할 길, 자신의 가능성, 자기 역할을 명령 받아 이 세상에  ‘아기’로 왔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야할 그 길을 모르고 있거나 벗어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일반적으로 ‘죄’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핫타트’​이고, 그리스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둘 다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녁은 일차적으로 ‘율법’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하느님의 형상’, ‘기준’, ‘목표’, ‘길’을 뜻합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하느님이 주신 자신의 가능성, 자신의 최선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자기 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 안에서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좌표(질서)에 있지 않고 벗어난 상태, 인생에서 해야 할 자기 일(사명)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결정적인 결함(瑕疵)이고,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러시아 월드컵이 한 창입니다. 가장 주목 받는 두 선수가 ‘호날두와 메시’입니다. 두 게임을 치른 현 시점에서 메시가 다소 부진하지만 이 두 선수의 플레이를 그냥 축구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칭송합니다. 심지어 동료 선수들도 그들을 “다른 행성에서 온 선수들”이라고 칭송할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열정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축구의 길 위에 있지 않고, 다른 인생길 위에서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요? 그런 삶을 ‘죄’라고 한다면 지나칠까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깨달음과 성찰의 시작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탄생일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길’을 성찰해 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저마다 ‘세례명’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야할 인생길을 발견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 아래에서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걷겠다고 나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시편 85:10-11). 지금 잘 걸어가고 있습니까? 혹시 다른 길을 엿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역사의 암흑기 속에서도 자신이 발견한 그 길을 묵묵히 걸었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윤동주’(1917~1945)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번쯤 그 분의 ‘서시’(序詩)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도 진정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까? 인생길에서 자신이 해야 할 ‘그 일’, 자신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성찰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바로 ‘그 길’을 찾고, 충실히 그 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 길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그 길에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예언을 성취한 세례자 요한처럼 새 시대의 도래를 위해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다.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리니,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주님의 백성에게
그 구원을 알게 하여
주님의 용서하심을 얻게 하여라.

세례자 요한 탄생일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해,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성찬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년 후, 5년 후, 10년 후 뿐 아니라 평생토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가야할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도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지 모릅니다.

너는 너에게만 주어진
그 유일한 사명(使命)을 알았는가?
네가 걸어야 했던 그 길을 알았고,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걸었는가?
네가 해야 할 생각과 행동을 다하면서 살았는가?

이렇게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 아래에서 자신이 발견한 인생길을 충실히 걸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늘 높이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고(루가 1:78),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며, 평화의 길로 이끄시는(루가 1:79)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찬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저희 역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게 하소서.
이웃들을 당신께로 인도하는
그 길 위에 있게 하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영혼과 군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케이티엑스 해고 여승무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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