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28. 승천 후 주일 / 부활 7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 7주일(승천후 주일)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시어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하늘로 오르시기 전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모인 우리에게도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어 부활의 충실한 증인으로 살게 하시며, 이 세상 여정을 마치는 날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하늘로 들어 올려 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능력으로 온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나타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주일 감사성찬례 본문

정과 본문은 여기

  • 1독서: 사도 1:6-14
  • 시편: 68:1-10,32-35
  • 2독서: 1베드 4:12-14,5:6-11
  • 복음서: 요한 17:1-11

1독서 사도행전은 지난 승천일에 낭독된 부분을 다시 읽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11사도와 부인들,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루살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게 하려고 교회는 1독서로 이 본문을 채택한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강림주일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동체는 지금 무엇보다도 ‘안전’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짧지만 이미 한 번 그들은 주님의 부재를 경험했습니다. 십자가 수난입니다. 이제 그들은 또 한 번의 부재를 앞두고 있습니다. 승천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떠난다는 것은 이 작은 공동체에게는 불안과 위협이었습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올리브산 중턱에 있는 ‘베다니아’ 근처로 나가십니다(루가 19:29, 24:50).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사도들이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인 다윗 왕국의 회복을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요즘 한 참 인사청문회로 바쁜 문재인 정부처럼 드디어 자신들이 한자리씩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런 다음 언젠가 첫 번째 부재를 앞두고 하셨던 말씀을 또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대답을 들은 사도들의 마음은 당황스럽고 더 불안해졌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들이 태어나 살아온 그 작은 나라를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땅 끝까지 가서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이 세상에 침입해 들어온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전도(傳道)’입니다. 그들에게 새 왕국에서 한 자리씩 보장해 준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안전한 피난처를 보장하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라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도’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전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분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전도하다가 괜히 조롱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전도를 혐오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부 신자들이 보여주는 모습 때문입니다.

작년 11월 촛불 혁명 때 광화문에 갔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피켓을 몸에 차고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가끔은 전도한다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참 믿음이 좋구나” 라는 생각보다는 ‘연민’의 마음이 올라옵니다. 아무리 전도가 중요해도 공공장소에서 지켜야할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모습은 비신자들 사이에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전도’의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해외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나라입니다. 10년 전쯤,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와 봉사활동을 하러 출국했던 분당샘물교회 교인들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탈레반에게 납치된 일행 중 2명이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으로 해외 위험지역에 선교하러 가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심장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선교하다 목숨을 잃는 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몇 가지 이유들(조롱, 혐오, 두려움, 박해) 때문에 신자들은 직접 전도 방식보다는 간접 전도 방식인 ‘봉사’를 선호합니다.

내일은 저의 사제서품 기념일입니다. 첫 미사를 2003년 서울주교좌 세례자요한 성당에서 집전했습니다. 제가 맡은 부서 중에 ‘복음화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복음화위원회라고 하니까 엄청 전도를 많이 하는 위원회 같지만 꼭 이름대로 만사가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새신자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또 ‘희망터’라는 일도 제 업무영역 중 하나였는데, 당시 희망터는 서울역 주변의 노숙인을 대상으로 매주 화요일 무료급식을 했습니다. 가끔은 봉사자들이 부족해서 당황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무난했습니다. 직접 전도하러 다니진 못해도 그런 봉사에 참여해 예수님 사랑을 전하고픈 마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간접 전도 경향은 대성당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포함해 대다수 교회가 내부 행사 계획이나 교회 내 지체들을 섬기는 봉사활동에 더 치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한 직접 전도는 너무 힘들고, 위험하며, 또 별 효과도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간접 전도이기도 한 외부 봉사나 교우들을 섬기는 일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직접 전도는 결코 폐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될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사는 ‘안전지대’를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일을 자신의 ‘안전’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삼을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어떤 분은 전도하다가 조롱당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전도를 강조하여 말하는 사제에게 감정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신앙(종교)은 그 특성상 결코 적당히 예의바르게 나눌 수 있는 그런 대화의 주제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궁극적 관심, 즉 영생에 관해 말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의 전인적 참여를 늘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사도들에게 천사들이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하늘만 쳐다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신자들 중에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예언하는 일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습니다. 1992년에는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휴거 소동을 벌였습니다. 2014년인가에는 홍혜선이라는 사람이 12월 전쟁설을 퍼뜨려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자칭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이들이 우리나라에는 참 많습니다. 다 빗나간 사람들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며, 그리스도교를 무당짓거리로 만드는 일을 지금 ‘루가’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언한다는 이들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폐해는 이루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아마 가장 큰 폐해는 신자들을 미혹해서 하느님 나라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쓰며, 소외된 관계들을 화해시키고,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하느님 나라 일을 못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빼앗아 버린다는 점입니다.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1세기 교회에도 종말에 대한 심취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는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무려 세 번이나 이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루가 17:20-37; 21:7-19). 이렇게 종말을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루가는 천사들의 입을 빌어 가르칩니다.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터이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 일을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열심히 하신 예수님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명령을 중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중 하나입니다. 본문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고, 문체도 왔다 갔다 하며, 연결도 자주 끊기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느님의 구원행적에 대한 전례 공동체의 응답을 담은 시(詩)라는 점입니다. 즉 자신들에게 임재 하시어 구원을 이루어 가신 하느님의 구원행적에 대한 경축과 기억입니다. 동시에 그 축복을 미래에도 자신들의 공동체에 계속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찬미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들이 공동체 전례를 바칠 때 가장 중요하게 기억했던 문제가 바로 ‘정의’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이십니다(5절).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 받고, 고난 받는 이들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은 갇힌 자들에게는 행복의 문을 터주시는 분입니다(6절). 하느님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는 분입니다(10절). 여기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한 때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자신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동체 전례에서 이 정의의 주제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행적을 찬미하기 위해 오늘도 성찬례(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모였습니다. 이 성찬례에서 우리는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중요한 주제로 기억합니다.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을 편드시는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 성찬례에서 기도한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은 성찬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성찰하게 하는 그 힘은 성찬례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하느님이 행하신 구원행적에 대한 기억이며, 이 성찬례에서 되살아난 기억은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이러 저런 선택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의의 정신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찬례는 거짓입니다. 더욱이 성찬례는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에게 하느님의 영양이 전달되는 통로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시편 마지막 구절처럼,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인 교회에게 “크신 힘을 주시는 통로”가 바로 성찬례, 즉 전례입니다. 이 성찬례는 교회 자신의 생명을 위한 영양입니다. 이 성찬례에 참석함으로써 우리 영혼은 더욱 건강해지며 성장해 가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제 2독서(사도서) 베드로전서는 신앙에 대한 본질적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인 제자 훈련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서신의 대상인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는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시련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은 행복하다는 권면입니다.

특히 후반부는(5:6-11)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연대를 보여주는 진심어린 권면입니다. 악마는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우리를 굴복시키려 시도합니다. 악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저버리길 원합니다. 악마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무감각하게, 무신경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삶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끊임없는 시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이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방법은 복음에 대립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지키는 삶은 많은 힘을 필요로 합니다.

서신의 마지막 권면은 오늘의 우리에게 설득력 있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주어진 성령의 권능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10절). 이 말씀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고난과 시련을 잊게 하려는 사탕발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그것을 견디어 내도록 주님이 분명히 도와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악마는 승리할 힘이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십니다(7절, 10절).

이 시간 우리의 인생을 한번 돌이켜봅시다. 초대교회 역시 고난을 통해 성숙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 역시 고난을 통해 성숙해 갈 것입니다. 시편의 고아와 과부들처럼 고난 속에 있던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강력하게 체험했던 순간은 언제 어디서였습니까?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 하느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셨는지 떠올려보십시오. 분명히 하느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도와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은 결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서로를 지지하고, 서로의 믿음을 견고히 세워주며,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기회를 더 자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이 택하여 불러주신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서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우리는 더욱 강해집니다. 이 연대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고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로 다가갑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세월호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웃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부활 5주일부터 이어져 온 고별설교(대화)가 끝난 뒤의 기도입니다. 이른 바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장엄기도입니다. 성서정과에는 이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가, 나, 다 해로 배분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는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지켜주시라고(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사도들처럼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켜 달라고 아버지께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기도하신 ‘하느님의 보호’는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다른 ‘무엇(누구)’을 간청하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대신해 제자들을 보호하고 활력을 주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성령은 무엇(누구)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었기에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았고, 또한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도 창세기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의 기운, 즉 성령은 물 위에 휘돌고 있다가 창조에 협력하십니다. 그들은 바로 이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니케아신경에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성부와 일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그렇습니다. 이제 다음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할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창조에 참여하셨다고 믿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부활 5주일 이래로 오늘까지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수난하시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버지께로 간다고 알려주시자 이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몹시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시자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창조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참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창조”에 협력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이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다음 주에 일어날게 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들의 모든 것을 바꿀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승천 후 주일’입니다. 교회력과 성서정과에 따르면, 오순절까지 가려면 사도들은 아직 7일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했던 그 성령, 복음을 전하도록 사도들을 세상 속으로 투신하게 했던 그 성령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인생들을 변화시키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전하게 하시는 성령은 아직 강림하시기 전입니다.

‘안전’과 ‘보호’가 필요했던 그 사도들은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력을 따라 지금까지 복음을 묵상해 왔습니다. 때로는 배반한 베드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의심하는 토마가 되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그 때 그 제자들의 불안을 공유하며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이 작은 하느님의 나라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금주간 주님이 약속하신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시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11사도와 부인들처럼,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처럼 서로 하나가 되어 기도에만 힘쓰기 위해 이 성찬례에 모여 있습니다.

올해 성령강림주일에는 어떤 변화가 우리 교회에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이전과 달리 어떤 차이가 우리 삶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우리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시기를 요청하던 사도들처럼 여전히 엉뚱한 바람으로 우리 기도를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예수님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느님이 교회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는 우리 자신에게 익숙한 땅, 즉 ‘안전지대’를 뜻합니다. 우리는 그냥 이 익숙한 땅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마치 간접 전도에 만족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땅 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지금 들어야 합니다.

물론 영성적 의미에서 보자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은 우리 외부의 어떤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 세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른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왕국을 예수님이 완전히 차지하시는 삶이 바로 ‘복음화’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제자들은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잡혀가서 고난을 당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다가 조롱받을까봐 두렵습니다. 전도하다가 무시를 당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사도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없애주신 분은 성령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겠다던 세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용기를 우리 마음에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저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우리 교회와 연결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너무너무 필요한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회적 약자인 그들 곁에 자신들과 마음을 같이 나누려는 착한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이제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위대한 권능의 시간이 우리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주간 어떤 기도 속에서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 두려움 없이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산 타워에 올라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가 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리는 무능한 제자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성찬례에서 얻은 힘으로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며, 삶의 자리마다에서 성령을 사모하는 간절한 기도로 한 주간을 채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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