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0. 연중10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예수님의 한 가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고, 생명을 되찾아 주신 분이며, 지금도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고 보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하느님을 따라 살겠다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오늘은 6.10민주항쟁 31주년 기념일입니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이들과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금주간 있을 북미회담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다함께 기도하고, 지방 선거를 통해 시민의 삶이 진일보 하도록 기도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을 견고히 붙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3:8-15
  • 시편 – 130
  • 2독서 – 2고린 4:13-5:1
  • 복음서 – 마르 3:20-35

연중 1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예수님의 한 가족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이 금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인간이 따먹은 뒤의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타락 이야기’는 세상의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한 일종의 기원 설명입니다. 고생스런 노동과 고통스런 해산의 기원, 죄와 죽음의 기원, 뱀의 이상스런 움직임이 그것입니다.

‘타락 이야기’가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복음서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배경입니까? ‘가짜뉴스’, 즉(소문)입니다.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슬기로운) ‘뱀’은 하느님을 비방하는 가짜뉴스를 퍼뜨립니다(창세 3:1,5).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가짜뉴스를 통해 ‘인간’을 유혹합니다(창세 3:1,4-5). 부부는 죄를 짓는 데 한 몸이 됩니다(창세 3:6). 그 일로 뱀은 저주를 받아 인류와 영원한 적대관계에 놓입니다(창세 3:14-15). 가짜뉴스를 퍼뜨린 이 뱀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거역하는, 당대의 지혜 있다는 자들과 대비됩니다(마르 3:22).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가짜뉴스의 진원지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여자의 후손’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죄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되찾아 주시는 구원의 복음이 최초로 제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타락 이야기’를 더 발전시킨 신학을 복음서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입니까? 오늘날은 여러 형태의 가족관계가 시도되고 있으나 여전히 ‘혈연’은 가족관계의 근본입니다. 복음서는 혈연을 근본으로 하는 가족관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새 가족관계를 제시합니다(마르 3:35). 그 새 가족관계는 생명을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선물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피와 살을 나눈 가족관계에 대한 헌신을 경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한 헌신이 가족에 대한 충실함보다 더 위대한 의무임을 강조하십니다.

타락 이야기를 통해 성찰해야할 주제를 좀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하느님이 직접 세우신 두 개의 공동체를 가정과 교회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직접 부부로 짝지어 주셨습니다. 사회집단의 기초인 가정의 탄생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풍부한 ‘에덴동산’(에덴은 기쁨, 풍요의 뜻입니다)에 살면서 그 곳을 돌보는 책무를 맡았습니다(창세 2:15). 어느 날 그들은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창세기는 뱀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창세 3:1). 하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뱀을 영생과 풍요, 지혜의 신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대 근동의 문화가 이스라엘의 신앙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창세기 첫머리서부터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케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뱀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신성을 왜곡해서 알려 준 최초의 신학자입니다. 그렇지만 유혹의 진짜 원인은 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자유의지) 욕심이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금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합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행동을 위해서도 좋은 일처럼 들리는 데 어째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일까요?

흔히 타락 이야기를 읽는 이들은 ‘선과 악’에 지나치게 집중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식 표현법을 모르기에 초점에서 빗나갔습니다. 일상에서 쓰는 말 중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자’, ‘동서양인’이 있습니다. 서로 대립되는 두 개념들을 나란히 써서 ‘인간 전체’를 나타내고자하는 우리식 표현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 역시 윤리적 가치보다는 ‘우주와 인간 삶의 모든 것’, 즉 ‘전체’를 나타내고자하는 히브리식 표현법입니다. 집중할 단어는 선과 악이 아니라 오히려 ‘알게 하는’입니다. 즉 ‘전체를 꿰뚫는 지식’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느님이 금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말은 ‘모든 것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로부터 그 ‘열매’를 따먹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상징은 두 차원의 지식에 관계된 은유입니다. 하나는 ‘우주의 기원과 질서’를 꿰뚫는 ‘지식’입니다. 간단히 하늘의 운영원리를 아는 지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부의 성(性)처럼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생로병사 하는 인간 삶의 모든 것을 꿰뚫는 ‘지식’입니다. 간단히 땅의 운영원리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렇지만 ‘우주와 인간 삶의 모든 것’, 즉 ‘전체’를 아는 지식은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만 가질 수 있는 완전한 지식입니다. 하느님은 그 지식의 열매를 따먹는 날, 즉 하느님처럼 ‘우주와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명백히 일러주셨습니다(창세 2:17). 하느님처럼 ‘전체’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불행으로 끝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물론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력은 문명발달의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언젠가 하느님이 ‘모든 것’의 원리를 알게 해 주시겠지만 순리대로 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는 그 순리의 때가 아니라 뱀에 유혹에 빠져 하느님의 영역에 도전했습니다.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지식이 담긴 나무의 열매를 제 멋대로 따먹고 말았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존재자체가 하느님처럼 되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을 아는 지식에서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주 하느님께 달려 있는데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피조물답게 창조주 하느님이 설정하신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반역했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불순종으로 행사했습니다. 부부란 서로의 향상을 위해 ‘건강하게’ 돕는 짝이어야 합니다(창세 2:18). 하지만 그들은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의 향상을 돕고자 했습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하면서까지 서로를 향상시키려 했던 그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에도 서로의 마음을 맞추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란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지만, 때로는 그 공동체가 죄를 저지르는 터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냉철히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두 사람은 ‘눈이 밝아졌습니다.’(창세 3:7) 눈이 열려 이전과는 다른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좀 거창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뱀의 말이 맞았으나 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처럼 되기는커녕 기껏해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는 ‘앎’이었습니다(창세 3:7). 어떤 이는 ‘치마’, 즉 ‘옷’을 만들어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이 구절에 주목해 ‘문명의 시작’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들의 앎은 ‘우주와 인간 삶의 모든 것’, 즉 ‘전체’를 아는 창조주 하느님 같은 앎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눈이 아무리 밝아진다 하더라도(오늘날은 과학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과학발전이나 정치제도나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진보를 위해 그 나름의 가치는 있으나 세상 모든 문제의 해답일 순 없습니다.

그들의 앎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곧 드러났습니다. 날이 저물어 선들 바람이 불 때 하느님 눈에 띄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음성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신 첫 질문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좀 이상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어째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일까요? 더욱이 “너는 왜 그런 죄를 저질렀느냐?” 하지 않고,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일까요?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마음에 켕기는 게 있어서 하느님을 피해 숨은 자신에게 뭐라고 물으시면 좋겠습니까? 사실 ‘너’라는 질문의 대상은 에덴동산의 아담만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대상인 우리 자신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가 모든 인류의 삶을 반영하듯이 이 질문 역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합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가 그 질문의 대답을 찾도록 지금도 귀를 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여러 갈래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우선, 내가 있는 ‘지금 여기서’ 시작해 ‘있어야할 그 곳’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있어야할 ‘그 곳’을 압니까? 있어야 할 ‘그 곳’에 있습니까? 내가 있는 곳, 자주 가는 장소가 나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의학뿐 아니라 뇌과학에서 주장하는 “육체와 정신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표어는 이제 고전이 되었을 정도로 자명합니다. 초월심리학이나 자기계발을 가르치는 강사들도 육체와 정신은 자신이 자주 가는 장소(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입니다. 그 만큼 환경(상황)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 장소가 집이나 사무실처럼 꼭 물리적 공간만을 가리키진 않습니다. 자주 만나는 친구나 이웃, 관심 분야의 책들, 자주 보는 영화나 드라마도 해당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존재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는 말은 영성신학의 차원에서도 진실입니다.

특히 “너 어디 있느냐?”는 음성은 하느님의 질문이기에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 어디’를 성찰해야 합니다. 풀어 말씀 드리면, ‘그 어디’는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 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서 수용되고 인정받으며 사랑받을 수 있는 자기만의 장소입니다. 또한 ‘그 어디’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이루어가고 있는 자신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목적대로 빚어져 가고 있는 스스로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나는 그 숭고한 장소를 찾았습니까? 나는 그 신성한 장소에 있는 자신을 만나고 있습니까? 나는 그 신성한 장소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언젠가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목적대로 성령 안에서 빚어져 가고 있습니까?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기에 모든 곳, 즉 일상이 하느님 앞이고, 그래서 신성하다는 깨달음이 우리 속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질문을 대하는 아담의 태도는 실망스럽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 앞에서 아담은 피할 길을 찾습니다. ‘핑계’입니다. 불순종의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합니다. 하느님이 짝 지어 주신 부부의 유대 관계가 깨집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고생스런 노동과 해산시의 고통과 죽음입니다. 일종의 기원 설명입니다. 뱀은 어찌 되었습니까? 저주를 받습니다. 죽기까지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도 뱀이 기어 다니게 된 기원 설명입니다. 이제 더 이상 뱀은 고대 근동에서 섬기던 영생과 풍요와 지혜의 상징이 아닙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뱀같이 슬기로울 것”을 요청하셨어도(마태 10:16) 근본에 있어서 뱀은 패배와 모욕의 표상으로 전락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뱀의 머리를 밟아 이겼다고 선포합니다. 죄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되찾아 주시려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시편은 ‘참회시’입니다. 시편에는 7개의 대표적인 ‘참회시’가 있는데(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그 중 하나입니다. 전반부는(1-4절) 시인이 죽음과도 같은 죄의 고통을 겪었을 때 하느님께 바쳤던 회개의 기도를 되풀이 합니다. 후반부는(5-8절)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회중들 앞에 선 시인이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기다림이 어떻게 자신에게 성취되었는지를 들려주는 희망의 찬미입니다.

이 시편이 1독서의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현재형으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마치 깊은 구렁 속에 빠진 사람처럼 구원을 갈망합니다(1절). 뱀의 유혹에 속아 죽음의 곤경에 처했으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던 아담과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시인은 아담처럼 숨지도 않고, 핑계대거나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용서하심을 간청합니다(2절). 시인은 ‘전체의 지식’을 탐하는 데 정신을 빼앗기기보다 인간이 진정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식’과 하느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로운 주님이시라는 ‘지식’입니다(3-4절). 이것은 그의 체험을 통해 획득된 지식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자신이 이미 체험했던 용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회중들 앞에서 진솔한 고백을 합니다. 용서를 선포해 주실 주님의 ‘한 말씀’을 자신이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며 기다렸는지를 먼저 회상합니다(5절-6절). 그는 자신의 탄원에 하느님이 더디 응답하시는 것만 같아 마음을 졸였다고 고백합니다(6절). 솔직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희망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림 언어로 선명하게 들려줍니다. 밤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결국 새벽이 온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 파수꾼처럼,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희망하며 기다리라고 초대합니다(7절). 그 희망의 근거는 자신과 백성에게 용서받을만한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자하시고 구원하시는 분, 즉 생명을 되찾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진짜뉴스)에 근거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회중들에게 주님을 향한 믿음을 요청하는 것으로 참회시를 마감합니다(8절).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이 찬미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통해 온 인류에게 성취되었습니다.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상관관계가 약합니다. 그러나 전례독서를 배정한 이들이 어떻게든 그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노력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18절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마음이 몹시 상해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강요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가짜뉴스)에 물들어 고린토교우들이 자신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 오해하는 교우들을 향해 바울로가 자신을 변호하려고 ‘에페소’에서 쓴 첫 번째 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린다고 선포합니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쳐다본 그들은 보이는 것에 현혹당합니다(창세 3:6).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오감이 현혹당합니다.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럽습니다. 여기까지는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하느님이 금지하신 나무 열매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장면입니다(창세 2:9).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창세 3:6)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이것은 나무 열매를 보이는 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관적 생각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새 사물의 객관성은 사라지고 ‘이기적’으로, 즉 ‘주관적’으로 해석될 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욕망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의 금지하신 일을 넘어서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을 이용해 세상은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더 영리하게(행복하게) 해 줄 것만 같은 ‘열매’들을 취하라고 유혹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 바울로는 교훈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합니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우리 마음이 향하고 있습니까?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복음서는 재미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샌드위치’처럼 생겼습니다. 사실 이 샌드위치 구조는 마르코복음서의 문학적 특징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후에도 이 구조는 또 나옵니다(마르 5:21-43; 마르 6:6a-30). 위와 아래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라는 빵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을 공격하는 율법학자들을 논박하는 예수님의 비유와 해설이 끼어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를 갖게 된 이유는 ‘소문’이라는 가짜뉴스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소문과 오해입니까?

예수님은 당시로서는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분이셨습니다.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나 창녀, 죄 값을 받는 것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병자들, 장애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습니다. 정결법 같은 것은 무시하셨습니다. 베드로 같은 남성뿐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성도 자신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무 문제 꺼리도 안 된다는 듯 온갖 병자들을 손쉽게 고쳐주셨습니다. 특히 사나운 악령들을 쫓아내신 사건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착한 일을 하시던 예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쳤다.” 세상에나!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겠지만, 소문(가짜뉴스)은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근거가 없을 경우에는 대개 금방 잦아들지만, 권위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개입하면 소문은 부풀려지고 재생산됩니다. 지난 시절 정권들과 일부 보수 언론들이 그런 작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소문의 진원지는 어디였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유대교 권력자들이 소문(가짜뉴스)의 진원지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권위자들이기에 그들이 내린 평가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악령’(이방신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 마귀 두목인 사탄)에 사로잡힌 것이라 ‘소문’을 냈습니다. 한마디로 ‘미친 사람’으로 매도했습니다. 분명 가짜뉴스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강력한 상대로 여겼음이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구마’(驅魔) 기적을 행하신 특별한 분임이 그들의 소문(가짜뉴스) 덕택에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그런 가짜뉴스를 지어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 자신들의 삶의 노선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체제를 위협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에게서 시작된 소문(가짜뉴스)은 날개를 달고 나자렛에 살던 친족과 가족들에게까지 퍼졌습니다. 혈연에 근거한 가족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비 맞은 새의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오해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 왔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미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짧은 비유 한 개와 해설을 통해 그들을 ‘논박’하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십니다. 하나는 같은 편인 사탄끼리 싸울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보다 강해야만 사탄을 제압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이 악령을 처단할 수 있는 ‘절대 권위와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증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행사하시는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논박하신 후 예수님은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 마르 3:28~29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과 성령의 역사가 하나임을 밝혀주십니다. 어째서 하나 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므온과 안나’에게 아기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심을 알려주신 분도 성령이십니다. 세례 때에도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광야의 시험도 성령의 인도로 통과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당에 들어가 이렇게 기록된 이사야 예언서 대목을 읽으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가 4:18-19

루가복음의 이 대목을 ‘메시아 취임사’라고 칭합니다.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자신의 임기동안 어떤 일을 해 나갈 것인지를 선포합니다. 예수님도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시는 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미리 선포하십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하도록 인도하는 분이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분이 누구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내리시어 메시아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그 메시아 사역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니케아신경’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받으신 분이었기에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인권 회복과 자유) 안식일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 다 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마디로 ‘하느님의 일’이라 부르고, 그 생명의 일들로 충만한 세상을 복음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이사야 예언서 대목을 읽으신 예수님은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실제로 복음서는 ‘메시아 취임사’가 어떻게 성취되어 갔는지를 증언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진 책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내용 전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 나라 일을 행하신 구세주이시다.

이 진실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독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당시 종교권력자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진실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가짜뉴스인 소문과 계략이 꾸며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주 설교(연중 9주일 설교본문을 보실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에서 들었습니다.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림: "손이 오그라든 사람", James Tissot

“손이 오그라든 사람”,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88

마르코복음 3장 첫머리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으로 발전합니다. 이 논쟁에서 가장 큰 쟁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째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생명을 살리는 착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었습니까? 어째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일을 예수님이 ‘안식일’에 행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까? 하루쯤 늦췄다가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치유해 준대도 고마운 일입니다. 하루쯤 늦게 치유해 줘도 그 장애인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란 듯이 안식일에 그 장애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기에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어긴 셈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음은 “내일이면 늦는다.”였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잃고 ‘오늘’ 고통 속에 있는 이들 앞에서 한가하게 안식일 규정이나 따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행동은 ‘오늘’ 사람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기준에서 행해져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께 화가 났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고의로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 소문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 사화에서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착한 일, 사람을 살리는 일은 안식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일, 사람을 살리는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이었다는 것이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행해야할 ‘하느님의 뜻’으로 삼았습니다. 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문자적 ‘율법준수’를 ‘지상명령’으로 삼았습니다. 원래 율법은 생명을 구하는 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그 율법이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에게서처럼 ‘절대화’되면, 즉 ‘율법주의가’ 되면 생명을 죽이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성령 모독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방해하는 행동은(예수님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는 일 등)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됩니다. 그렇지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속뜻을 알아듣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강조’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 우리를 두렵게 하려는 말씀은 아닙니다.

Trust Hand Teamwork Keep Cooperation Unity

예수님의 ‘논박’이 끝나자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 집에 당도했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로 찾아오진 않았습니다. 가짜뉴스의 폐해입니다. 어찌나 ‘그 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던지 가족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찾는다고 군중들이 예수님께 알려드립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당신께 속한 가족은 혈연관계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살리라는 하느님의 뜻’에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사람이 당신께 속한 가족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가짜뉴스에 속아 서로를 탓하고 핑계 대며 죽음의 길로 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라’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서로에 대한 존경과 기쁨을 간직한 이들이 예수님 안의 한 가족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 즉 하느님의 뜻에 헌신하시는 예수님께 속한 한 가족으로 초대하는 이야기로 복음서는 마무리됩니다.

교우 여러분,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피조물로서 지켜야할 한계를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와 세상의 생명을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날마다의 삶에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간청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떠야할 눈을 뜬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고, 생명을 되찾아 주신 분이며, 지금도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고 보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하느님을 따라 살겠다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성찬례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생명을 되찾아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바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해 주신 성령을 찬미합니다. 우리에게 선물된 생명의 시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반(反)생명적인 일들을 분별하고, 생명력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서로의 손을 맞잡습니다.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오해도 받겠지만, 반드시 예수님이 꿈꾸신 생명력 넘치는 새 날, 새 세상이라는 ‘새벽’은 오고야 맙니다. 이렇게 생명을 살리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부디 우리가 그 말씀에 응답하기를 축복합니다.

생명의 하느님
제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생명의 일을 하도록
힘을 주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정착과 번영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2.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영혼과 군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4. 고용 불안 속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케이티엑스 해고 여승무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일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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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7.8. 연중 14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

    […] 연중 10주일 나누었던 설교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마르 3:20-35).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대 종교지도자들은(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 ‘미쳤다’는 소문(가짜뉴스)을 냈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 자신들이 세워놓은 체제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론의 주도권을 예수님이 가져갈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들이 근원지인 ‘가짜뉴스’는 날개를 달고 ‘나자렛’까지 날아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성지(聖地) 예루살렘에 사는 ‘율법학자’들이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을 데려오려고 서둘러 나섰습니다. […]

    2 년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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