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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20. 성령강림대축일

오늘의 기도지향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오소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 부활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입니다. 성령이야말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현존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성육해 계십니다. 교회가 진리이자 사랑이신 성령을 따라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사도들의 후예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의 빛과 생명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 마음을 성령의 한없는 은혜로 채우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21
  • 시편 – 104:24-34, 35하
  • 2독서 – 로마 8:22-27
  • 복음서 – 요한 15:26-27, 16:4하-15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오소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 부활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입니다.

복음서들은 교회를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가 ‘예수님의 행적(行蹟)과 가르침’을 ‘자신의 신학’으로 ‘걸러서’ ‘교회를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과, 처한 상황, 다루던 문제의 응답에 따라 복음서들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같은 사건이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어떤 부분은 추가하거나 대폭 생략합니다. 심지어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 차이점과 다양성은 복음서들의 통일성 못지않게 저자의 ‘신학’(해석)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들입니다.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한 묶음으로 구상된 책입니다. ‘루가’라는 인물이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루가복음을 1부로, 사도행전을 2부로 기록했습니다. 1부인 루가복음은 ‘갈릴래아’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사도 1:1) 다른 복음서 저자들처럼 ‘자신의 신학’(루가 1:3)으로 걸러서 기록했습니다. 흔히 ‘예수의 길’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2부인 사도행전 역시 ‘루가 자신의 신학’(사도 1:1)으로 걸러서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행적(行蹟)입니다. 흔히 ‘교회의 길’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걸으신 길의 ‘도착점’이자 교회가 땅 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사도 1:4, 8). 그러나 객관적인 초대교회의 역사도 아니고 사도들 모두의 행적을 기록한 책도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로를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뉠 정도로 다른 사도들의 행적은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분명 다른 사도들의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도 많았을 텐데도 말입니다. 루가는 수집한 자료 중에서 자신의 ‘신학’에 필요한 부분만 간추려 ‘역사서’처럼 ‘문학적’으로 기술했습니다.

“성령강림”,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 성당 벽화

특히 ‘사도행전’은 그 보잘 것 없던 제자들이 ‘어떻게’(언제) 결정적으로 사도들로 ‘변화’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갔는지를 밝히는 루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어떻게’(언제) 교회가 생겨났고, ‘무엇’이 그 작은 공동체로 하여금 세상의 박해와 미움에도 굴하지 않고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성장’하게 했는지를 밝히는 루가의 ‘신학적 설명’입니다. 이 ‘변화’와 ‘성장’의 중심에 ‘성령’이 자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간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날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사도행전을 부활절기와 그 완성인 성령강림주일에 낭독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세상 모든 교회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강림 장면을 읽었을 것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생생한 묘사에 감동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사실’ 기록이라기보다는 ‘루가의 신학’이 반영된 ‘문학적’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학적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알맹이(속뜻), 즉 루가가 그것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신학’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루가를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며, 문자 그대로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져 각 사람 위에 내렸고”,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문자주의(근본주의, 반지성주의)에 빠지면 성경은 생명을 살리는 책이 아니라 죽이는 책이 되고 맙니다. 가령,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이 있는데, 집에서 개를 기르는 분이 이 속담을 듣고서 ‘아, 개똥도 약으로 쓰는구나! 다음부터는 개똥을 버리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알아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어울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담은 ‘평소에 흔하던 것도 막상 긴하게 쓰려고 구하면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문학적 표현을 통해 루가가 자신이 속한 교회에게 신학적으로 응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전례독서로 배정된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성령을 통해 다시 ‘소생’(甦生)하게 된 이들이 펼치는 생명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부활의 증인’인 삶 말입니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의 장면 묘사이고, 후반부는 사람들의 반응과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전반부 성령 강림 장면에 담긴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루가는 이 사건이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만큼 오순절이 갖는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오순절 날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입니다. 이 표현은 드디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와 기한이 완전히 채워져서’ 결정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강조입니다. 한마디로 오순절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하신 때’이고, 성령 강림은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자연적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저절로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인간의 원함이나 의지, 시간 계획이 일으킨 사건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모든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시간표’ 속에서, 하느님이 직접 행하신 사건임을 신학적으로 강조합니다(사도 1:7).

물론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교우’(신도, 신자)는 함께 모여 기도에 힘썼고(사도 1:14), 사도직을 충원하며 조직도 정비했습니다(사도 1:26). 성령을 받기 위한 나름대로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의 이런 준비와 노력 덕택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령 강림의 때와 시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어났다는 점을 “오순절 날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루가는 처음부터 명백히 합니다.

그러면 성령 강림을 다른 절기나 시간이 아니고 ‘오순절’로 설정한 루가의 신학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고로 요한복음은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에 모두 일어난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요한 20:17, 19-23). 루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정보를 이용합니다. 그것은 훗날 ‘오순절’로 개명(改名)된 ‘추수절’입니다. 봄에 보리와 밀의 추수를 끝내고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인 ‘추수절’(공동번역은 ‘맥추절’, 개역성경은 맥추절, 칠칠절로 번역)은 ‘과월절’이 지난 다음날부터 50일째 되는 날 지키는 명절입니다.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구약의 3대 명절입니다(레위 23:15-16, 신명 16:9-10,16).

‘추수절’의 유래는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하신 명령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 봄철 곡식 수확이 끝나는 때 ‘추수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애 23:16; 34:22, 민수 28:26). 그런데 이 날은 공교롭게도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최초의 ‘과월절’(정월 14일)을 지키고, 다음날(정월 15일, 민수 33:3) 그 땅을 탈출하여 나왔던 50일째 되는 날과도 겹칩니다. 그 날 야곱의 후손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던 떠돌이들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율법)을 받고(출애 20장), ‘계약 공동체’로 함께 출발했습니다.

이런 포개어짐 때문에 언제든 ‘추수절’은 그들이 시나이 산에서의 ‘율법 수여’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선택된 민족’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날로 발전할 내부적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추측하건데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고, 그들이 포로로 끌려갔던 시절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에 과월절 후에 오는 ‘추수절’은 시나이 산에서의 ‘율법 수여’와 ‘계약 공동체’로 출발했음을 기념하는 명절로 강조점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이후 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가 칙령을 통해 포로귀환을 명령하여 즈루빠벨이 제 2성전을 건축한 후에는 ‘추수절’이 흩어진 유다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를 회상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례 절기’의 성격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약중간기를 거치면서 ‘추수절’을 ‘오순절’로 개명(改名)했을 텐데 근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신약시대에는 로마제국 내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다인들이 ‘헤로데’가 증축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큰 명절로 정착했습니다(신명 16:16). 이처럼 ‘오순절’은 로마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다인들에게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고, 하나의 공동체성을 갖게 하는 큰 명절이었습니다.

루가는 이런 역사성을 갖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을 분명히 합니다. ‘옛’ 오순절에는 ‘율법 수여’로 하느님과 계약 관계를 갖는 ‘이스라엘’이 탄생했습니다(출애 19:6). 그러나 ‘새’ 오순절에는 율법의 요구를 대신하는 성령이 120명의 교우에게 강림하십니다. ‘성령의 수여’,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 관계를 갖는 ‘새 이스라엘’, 즉 ‘교회’가 탄생합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 강림 장면에는 ‘시나이 산 율법 수여’ 때 묘사된 이미지들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소리’(2절), ‘불길’(3절), ‘외국어’(4절)는 ‘나팔 소리’, ‘불’, ‘말씀’(출애 19:14-25)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루가의 신학에 있어서 율법의 기능을 넘어 설 뿐 아니라 이방인 선교의 걸림돌이자 장애물인 율법을 대체하는 효력을 발생합니다.

이제, 성령이 강림한 장면을 묘사하는 루가의 ‘문학적’ 표현에 주목할 때입니다. 루가는 성령 강림의 이유가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향하는지 맞혀 보라는 듯, 마치 ‘수수께끼’처럼, ‘스무고개’ 하듯이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가 첫 번째로 사용한 ‘문학적’ 표현은 ‘청각’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다시 환기시킵니다.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문학적 표현’임을 기억하십시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루가는 교회를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탄생시키는 성령이 인간의 내면(지상)에서 생겨난 ‘힘’(영)이 아니라 하느님(하늘)으로부터 내려온 초자연적인 ‘영’(힘)임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성령을 보내신 분이 승천하신 예수님임을 명백히 전하고 싶었습니다. 문장의 주어는 ‘바람’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성령’임을 알려주기 위해 ‘바람’이라는 이미지를 덧붙입니다. 그 ‘소리’는 예루살렘에 순례 온 사람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컸습니다(6절).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 강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영’(πνεύμα)과 ‘바람’(πνοή)은 관련이 깊습니다(참고로 영, 바람, 숨,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의미할 때 ‘바람’이라는 상징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루가는 성령 강림의 양상(樣相)을 ‘바람’이 아니라 ‘소리’가 들려왔다고 청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왜 이런 문학적 표현을 썼을까요? 이어지는 ‘혀’(3절), ‘외국어’(4절), ‘하느님의 큰 일들을 전함’(11절)에서 밝혀집니다. 이 문학적 표현에 루가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사도 1:8

그렇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장면을 ‘소리’, ‘혀’, ‘외국어 말하기’라는 청각적 현상으로 묘사한 루가의 신학은 “하느님의 큰 일들을 전하는” 사람의 언어, 즉 ‘증인’의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실현됩니다. 한마디로 ‘복음 전도’입니다.

그들을 장차 ‘증인’으로 살게 할 그 ‘소리’는 신도들이 기도하러 모인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가득 채웠다’는 말은 압도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들이 있던 ‘집’입니다. 여기에도 루가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되던 1세기 말(80-90년)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입니다. 따라서 루가는 예배 장소의 ‘합법성’에 대한 고민을 신도들이 모인 곳으로 해결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자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신자공동체’ 안에 현존하시기에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 터를 순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든, 유다이든, 사마리아든, 로마든, 땅 끝이든, 어느 곳에서든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느님의 성령이 현존하시는 ‘성전’입니다(사도 4:23,31; 8:17; 10:44). 루가는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드리는 ‘예배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예배를 위한 합법적인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 무엇도 성령의 현존보다 상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심을 ‘온 집안’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사용한 문학적 표현은 ‘시각’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신도들은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성령의 역동적인 모습을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혀’입니다. 그 ‘혀’가 성령임을 알려주기 위해 ‘불길’이라는 역동적인 이미지를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불’은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현(顯現)이기 때문입니다(출애 19:18). 그러나 여전히 문장의 주어는 ‘불’이 아니고 ‘혀’입니다. ‘혀’를 강조합니다. 왜 성령이 강림하신 장면을 ‘혀’로 표현한 것일까요? ‘소리’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증인’의 삶, 즉 ‘전도’를 강조하려는 루가의 신학입니다. 이제부터 ‘복음’이 마치 ‘불길’처럼 ‘전파’된다는 ‘문학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다만 ‘혀’는 ‘소리’보다는 ‘언어 능력’에 상대적으로 더 ‘직접적’입니다.

이어지는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는 표현은 ‘신자공동체’(온 집안)에게 강림한 성령이 ‘개인의 체험’으로 구체화된 모습의 강조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 안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시고 살아가는 동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요한 14:16-17). 더욱이 신자공동체에게 강림한 성령이 개인의 체험으로 구체화한 모습 속에서 ‘공동체’를 염려하는 루가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가는 신자공동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개인의 성령 체험을 정당화합니다. 공동체와 개인의 유기적 연결입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의 질서와 일치가 유지된다는 신학입니다. 실제로 루가는 사도행전 곳곳에서 신자공동체에서 파송된 권위자들이 성령 안수를 행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 8:14-17; 9:10-18; 10:17-48; 19:1-7). 루가에게 있어서 ‘신자공동체’는 개인의 성령 체험이 정당성을 갖는 기준이자 악령과 성령을 분별하는 권위의 근원입니다.

성령 강림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온 몸으로’ 성령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치고, 내 잔이 넘치옵니다.”라고 고백한 다윗처럼(시편 23) 그들은 완전히 되살아났습니다. 듣고, 보았으며, 이제 증인이 될 특별한 ‘힘’(영)까지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말로 ‘언어 능력’입니다. 그들은 ‘귀’와 ‘눈’뿐 아니라 ‘입술’도 성령에 압도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듣고’, ‘보고’, ‘말하기’라는 ‘전인적 체험’을 거쳐 그들은 ‘증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작은 예수로 변화되었습니다. 궁금한 점은 성령 강림의 결과로 그들이 갖게 된 능력이 다른 것도 많을 텐데 굳이 ‘언어 능력’이라 내세운 이유입니다. 여기에도 루가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루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는 ‘꿈’, ‘희망’,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루가 3:6; 24:47; 사도 1:8). ‘증인’의 삶이 ‘교회의 길’임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큰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민족들이 쓰는 언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땅 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는 데 있어서 해결되어야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루가는 바로 그런 고민을 하는 교회에게 이 ‘언어 능력’ 이야기를 상징으로 들려주며 용기를 줍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인 ‘바벨탑 언어의 혼란’을 성령께서 ‘소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목적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모든 민족이 듣게 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증인의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성령이 강림한 현현 양태가 ‘언어 능력’을 향해 점점 구체화되도록 문학적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소리’에서 ‘혀’로, ‘혀’에서 ‘입술’로 옮겨지는 ‘외국어 말하기’의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사도들과 신도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쓰신 것처럼, 루가가 속해 있는 교회를 도와주실 것이니 땅 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으러 나가자고 첫 부분부터 교회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땅 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으려는 교회의 길, 즉 선교가 성령을 통해 펼쳐지고 있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령 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사도 2:5-13) 성령 강림 사건의 의의를 구약의 요엘서를 통해 인증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사도 2:14-36). 전례독서는 21절까지만 읽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놀랍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경험하고 있지만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한쪽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 즉 ‘복음’으로 알아듣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술에 취했군” 이러면서 빈정댑니다. 성령은 조금도 지체치 않고 당신이 강림하신 목적을 베드로를 통해 성취하십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사도 2:14-36).

베드로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담대히 자신의 ‘모국어’로(이 때부터는 외국어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큰 일들을” 다시 말해 ‘하느님의 구원사’를 조리 있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구약 ‘요엘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고, 몇 마디를 첨가해서(18절)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설교합니다. 요엘의 예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부름 받은 예언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모세가 바랐듯이(민수 11:25-29), 그 날은 이스라엘이 예언자 백성이 되는 날입니다. 아들딸이라는 성별에 상관없이, 노소라는 나이에 상관없이, 자유인과 종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하느님은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을 하고 ‘계시의 영상’을 보며, ‘꿈을 꿀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며, 어디서 살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요엘 3:5). 한마디로 왕이나 예언자 없이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게 될 것이고, 그 계획에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요엘의 예언이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설교했습니다. 물론 요엘이 언급한 그 ‘마지막 날’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처럼,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역시 개인의 ‘종생’(終生)을 빗겨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직 호흡이 있을 때, 이 자비의 시간 서둘러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에 동참할 일입니다(21절).

이렇게 루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교회, 성령을 통해 다시 소생(甦生)하고 변화된 이들이 펼치는 생명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지난번에 교회의 다른 이름을 하느님의 한 가족공동체, 구원공동체, 재림공동체, 성찬공동체, 부활공동체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성령공동체, 생명공동체가 추가됩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이름이 아니라 우리교회가 지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천지창조

오늘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을 기리는 찬미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돌보심에 철저히 의존합니다(27절). 특히 하느님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피조물은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30절). 여기 ‘입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 바람, 숨, 마음으로도 번역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죽어가는 모든 피조물을 다시 살게 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오늘 전례독서 찬미로 선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죽어가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갖습니까? 친절과 배려, 경청과 공감 같은 자비로운 행동들을 만날 때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어선 이들을 볼 때입니다. 사랑과 진실을 지향하는 현명한 통찰들을 내릴 때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공동체를 살리려는 숭고한 용기들을 마주할 때입니다. 이 모든 생명의 일들은 죽어가는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무엇도 성령의 이 같은 부드러운 터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같은 성령의 역사를 더 깊이 알아차리고 도구가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2독서 ‘로마서’는 아담의 타락이 결과한 피조물의 ‘신음과 진통’으로 시작합니다. 자연, 즉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언젠가 ‘죽음’을 맞고 ‘먼지’로 돌아갑니다(시편 104:29).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의인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만물은 자기 존재의 죽음이라는 탄식과 고통 속에 있습니다. 특히 동물들은 탐욕스런 인간의 착취의 대상에서 벗어나 창조의 목적대로 자기 생명을 누리기를 ‘갈망’합니다.

자연뿐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도 ‘신음’(탄식, 갈망) 속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서 분명 구원 받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몸의 행동에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으며,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합니다(1요한 2:16-17). 하늘에 속한 존재이면서도 땅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썩어 없어질 일들에 휘둘리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삶 속에서 ‘신음’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합니다. 우리를 죄의 노예로 만드는 ‘육적인 몸’을 벗고 ‘불멸하는 몸’으로 변화되어(필립 3:21)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을 희망합니다. 한마디로 ‘몸의 부활’, 즉 완전한 ‘구원’을 희망합니다.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 ‘희망’은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바울로가 교훈한 이 같은 희망을 복음서에 기대어 말씀드리자면,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신음과 진통의 속박에서 해방(구원)되어 창조의 본래 목적인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그 완성의 날을 고대하며 참고 기다립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제대로 초점이 맞추어진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도와주신다는 이 진실을 온전히 믿는 이들만이 희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참아내며, ‘몸의 부활’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몸의 부활’을 참고 기다리는 우리, 즉 교회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언어’로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교회와 하느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주시고,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덕택에 교회는 ‘신음’하던 자리에서 ‘소생’하는 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복음서’는 ‘고별설교’ 중에 있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지난주 복음서인 ‘대사제의 기도’를 통해 요한복음서의 기록배경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특히 1세기 요한공동체가 속한 역사적 상황과 그 역사적 상황을 견디어내는 ‘요한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한 운명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본문이 ‘고별설교’와 ‘대사제의 기도’라고 언급했습니다.

오늘 복음서 역시 ‘고별설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며, 박해 시절을 살아갈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6:1-4).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이 말씀대로 1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성령이 강림하시자 사도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으로 변화됩니다(요한 15:27). 성령은 ‘협조자’이시고(요한 14:16),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한 16:13). 하지만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다 해주시는 협조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인 삶을 살고자 할 때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런 마음을 일으켜주시는 협조자가 성령이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설교 말씀을 마칩니다. 루가는 성령 강림의 목적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심에 있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탄생한 교회의 사명(길)은 ‘예수의 길’을 땅 끝까지 이어놓는 데 있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베드로나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구세주’로 부르게 하는 일만이 중요하다고 교회를 일깨웁니다. 시편은 주님의 ‘입김’이신 성령이 죽어가는 모든 피조물을 다시 살게 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라고 찬미합니다. 로마서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니 용기를 내라고 교훈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 완성될 ‘몸의 부활’을 희망하며, 썩어 없어질 일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진리)을 추구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실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고, 사도들의 후예인 오늘의 우리도 그 사명의 길을 같이 가자고 ‘루가’는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그 초대에 온전히 응답하는 이들로 변화해 가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말과 행동에서 강하게 활동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성령만이 우리를 살게 하시고 활동하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우리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천 년 전뿐 아니라 오늘날도 성령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현존’입니다. 미국 성공회 뉴왁 교구의 주교였던 ‘스퐁’은 그의 책 「예수를 해방시켜라」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였는데,
그 똑같은 하느님이
이제는 믿는 자들의 몸,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언제나 성육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세례 받은 우리 각 사람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현존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현존해 계신 그리스도의 몸인지 아닌지는 ‘사랑의 삶’을 통해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이실 뿐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삶’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성찬례는 ‘성령’으로 축성된 성체를 받아 모시며,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서 있으면, 기쁨도, 평화도, 인내도, 친절도, 선행도, 진실도, 온유도, 절제도 따라오게 됩니다. 부디 성령공동체인 교회가 진리이시고 사랑이신 성령을 따라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사도들의 후예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도출해 낸 결과들이 잘 이행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서울교구 설립 53주년 기념성찬례 및 성직서품식을 위해 기도합시다.
    • 일시: 5월 24일(목) 오후 2시 / 장소: 서울주교좌성당
    • 사제성직후보자: 정승구(안드레), 최성모(요한), 김은경(드보라)
    • 부제성직후보자: 정태준(프란시스), 황윤하(라파엘), 남우희(엘리사벳), 권석준(이사야), 김두승(아모스)
  7.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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