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13. 부활7주일. 승천후 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부활 7주일, 서울교구 강남교무구는 연합감사성찬례를 드립니다.
따라서 성당에서 별도의 성찬례를 드리진 않습니다.
설교 준비를 한 주 쉴수도 있지만
설교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설교문을 작성하여 올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영혼에 작은 울림이라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되신 성자 예수께서는 하늘 높이 승천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굳게세 하시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15-17,21-26
  • 시편 – 1
  • 2독서 – 1요한 5:9-13
  • 복음서 – 요한 17:6-19

전례독서의 주제는 “복되어라, 하느님이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마티아’가 11사도와 같이 ‘사도직’을 맡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사도의 후보가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제시(21절)한 다음 사도직의 가장 중요한 일(22절)을 명백히 합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풀어 말하면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 생명’입니다. 그의 진술은 ‘초대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라는 인격 그 자체에 철저히 근거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에 그리스도교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예수’에 기초했고, ‘부활하신 예수’를 선교의 근본 터전으로 삼았으며, ‘부활하신 예수’를 구원의 길로 선포했습니다.

‘성공회’(聖公會)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후예란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일이 성공회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모든 선교활동의 목표도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일을 향합니다. 교회사에는 교회를 부르는 여러 별칭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공동체, 구원공동체, 재림공동체, 성찬공동체 등입니다. 모두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소중한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회는 ‘부활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시작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을 통해 유지되어 왔으며, 종국에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 생명에 동참함으로써 지상의 교회는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절기 동안 우리가 낭독한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의 모든 행위는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에서 나왔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실이 온통 예수님이 주신 부활 생명, 영원한 생명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에 굴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에게 한번 뿐인 목숨을 걸어야할 분명한 이유를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증인’(마르티스)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본문에 증인(증거)으로 번역된 마르티스는 ‘순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그 진리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부활 생명을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신경’도 ‘심장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부활 생명 말입니다.

여기서 성찰해야 할 질문을 만납니다. 정말 우리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은 일상에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과 예수 안에서 누리는 부활 생명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제가 묵상해 본 바로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주신 ‘부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 자신 안에 꿈틀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 체험이 있었는지, 그 생명이 우리 안에 꿈틀대고 있는지는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언제부터인지 ‘죄와 죽음’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원하지도 못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자에게 예수의 부활이나 부활 생명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제 부활절기 50일의 여정을 완성하는 ‘성령강림주일’을 몇 걸음 남겨두고 있습니다. 걸어오는 동안, 과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며 더 깊이 사귀었습니까? 사도들이 증언한 부활 생명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약동(躍動)하고 있습니까? 인류에게 있어서 죄와 죽음을 정복한 예수의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는 이 복음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베드로는 사도직과 그들의 정체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이들은 ‘마티아’처럼 사도직의 한 몫을 나누어 받고 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이 교회의 기초이자 정체성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자신들 안에 꿈틀대는 예수의 부활 생명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이 증언을 하는 일에 어떤 위협과 박해와 핍박이 오더라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세상의 가치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순교’(증인)로 그들이 부활 생명에 참여한 이들임을 드러냈습니다. 교회가 그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이 세상에서 선택해 세워주신, ‘새 이스라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느님이 세상에서 선택해 세워주신 새 이스라엘이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복’이 있습니다. 부디 교회인 우리는 단지 심리적 위안을 얻는 교회생활에 만족하기보다 예수 부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그런 복된 교회로 날마다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찬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복음)이신 부활 생명(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과 밤낮으로 동행하는 사람들, 즉 교회가 복이 있다는 찬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처럼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부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교회’야말로 ‘복’이 있습니다.

서신 요한의 첫째 편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신 그 부활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 부활 생명’이 있음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복’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부활 5주일부터 묵상해 온 ‘고별설교’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흔히 ‘대사제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자세히 전해주지 않는 공관복음서에 비해 대단히 긴 기도입니다. 부활 7주일에는 요한복음 17장이 가(요한 17:1-11), 나(요한 17:6-19), 다(요한 17:20-26)해 복음서로 배분되는 데, 이 긴 기도는 고별설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모든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차원을 넘어서 요한공동체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을 견디게 하는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일까요? 복음서는 이것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대사제의 기도’에 나타난 예수님의 첫 번째 간구는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본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는 일입니다. 두 번째 간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들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왜 이런 기도가 필요했을까요?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혹은 이제 승천하실 터이니, 홀로 남겨질 제자들이 안쓰러워서 그랬다고 말하면 될까요? 성경 이야기를 그렇게 읽는 것은 비역사적, 비신학적 태도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요한공동체가 직면해 있던 역사적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역사적 상황일까요? 본문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복음은 10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1세기 후반,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심각한 위기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사회는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뿐 아니라 내부적인 분열도 겪어야했습니다. 특히 오랜 동안 유대사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사라진 성전을 대신할 ‘구심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성전 없이 살아야 하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할 필요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도한 이들이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2017년 11월 5일 연중 31주일 설교를 참고하세요).

서기 90년 ‘얌니아회의’에서 그들은 새로운 유대교를 주창합니다. ‘성전’(聖殿)이 아닌 ‘정경’(正經)이 유대인 삶의 중심이 됩니다. 각 지역의 ‘회당’(會堂)을 통해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바리사이파 주도의 유대교 시대’가 열렸습니다. 한마디로 ‘정경’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시대가 열려서 오늘에 이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실천 기준에 순응하지 않는 집단들을 구별해 ‘추방’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대상이 초대교회 공동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집단으로 규정하고, 모든 회당에서 내쫓는 박해를 이어갔습니다. 더욱이 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저주문’이 담긴 회당 기도문을 유대인들이 암송하도록 결정합니다.

나자렛파와 이단들은
순간에 망할지어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
의인과 함께 섞이지 말게 하소서.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을 파문하고 단절한 사건입니다. 이 모든 일은 재건(再建) 유대교를 장악한 바리사이파가 주도한 일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더 이상 유대인 중심의 회당에 참여할 수 없었고, 미움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 심각한 위기상황을 요한공동체는 어떤 신학(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까? 예수님과 자신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신학입니다. 그 신학이 오늘 ‘대사제의 기도’(넓게는 고별설교까지 포함하여) 속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처형을 앞둔 예수님의 위기상황과 박해받고 있는 자신들의 위기상황을 포갬으로써 예수님과 자신들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동일시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듯이 자신들 역시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통찰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아주 희망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고 불의한 로마권력자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자신들도 지금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지만 이겨낼 것입니다. 그 근거는 승천하셨지만 성령으로 그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자신들 역시 하나가 되도록 아버지께 선택받았습니다.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도록 이 적대적인 세상에 계속해 파송 받고 있습니다. 그 적대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협조자이신 성령이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에 의지해 그들은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 즉 부활의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위대한 신앙을 감행합니다. 바로 이런 역사적 위기상황과 그것을 극복하는 신학을 담고 있는 기도가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교우 여러분, 요한공동체는 ‘대사제의 기도’를 통해 자신들이 세상과 구별된 ‘구원공동체’라는 신학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만 구원받고 이 세상은 멸망 받아도 좋다는 태도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대적인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이 필요한 이웃으로 보았고, 세상 한 가운데로 들어가 그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신 부활의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요한공동체는 ‘대사제의 기도’를 통해 단지 위기상황의 극복만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이 불의한 세상에서 진리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명을 이어받아 계속 수행해 나가는 ‘부활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이 기쁜 소식을 사랑의 삶으로 전파하는 교회야말로 ‘복’이 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성령강림주일’을 앞두고 교회의 존재이유를 명백히 합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선택해 세워주신 새 이스라엘이 교회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오늘 전례독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복’의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진정 복 있는 삶은 하느님의 말씀이자,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과 일치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전파하는 삶이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 중에는 이 부활의 복음을 듣기 싫어하며, 우리를 미워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권력을, 명예를 ‘복’으로 압니다.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그런 것들을 보다 많이 갖는 것을 ‘복’이라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면 ‘선'(善)이고, ‘복’이라고 거짓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점점 개인주의가 팽배해 가는 세상에서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 ‘복’이라고 부추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복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고 저주일 뿐입니다. 오히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입니다. 자기 이름을 드높이길 좋아하고, 물질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길에서 돌아서는 일이야말로 복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이야말로 복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이야말로 복입니다. 교회는 그 일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 한 가운데 살지만 교회는 결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죄와 죽음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이고 ‘소금’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이웃이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는 친구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교회의 존재이유를 되새기고, 복 있는 삶을 길을 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교회를 교회답게 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열심히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일주일 뒤에는 우리 속에서 진리의 성령이 더욱 환하게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가 “복되어라, 하느님이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한 사람들!” 이 주제에 응답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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