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2018. 5. 6. 부활6주일/가정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 6주일이자 가정주일로 지킵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가정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혈연으로 형성된 가정이 중요하다는 차원을 넘어 ‘교회’의 본질을 되찾자는 ‘지향’(志向)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세우신 ‘새 가족’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신 사람들이 서로 삶을 나누는 진짜 가족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벗이자, 한 가족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택하시어 벗이라 불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썩지 않는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0:44-48
  • 시편 – 98
  • 2독서 – 1요한 5:1-6
  • 복음서 – 요한 15:9-17

부활 6주일이자 가정주일로 지킵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전통적으로 혼인한 부부를 중심으로 생활을 함께하는 혈연관계를 ‘가정’(家庭)이라 불렀습니다. 이제는 1인 가구의 증가 등 사회 변화와 더불어 훨씬 유연한 관점에서 가정을 정의(定義)하자는 운동도 있습니다. 혼인이나 혈연을 넘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활동반자’ 형태도 가정이라 부르자는 겁니다.

교회에서 가정주일을 정하고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회화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회화를 배우는 곳이어서만은 아닙니다. 또한 내 가정의 번성과 가족의 화목을 위해 기도하려는 차원도 넘어섭니다.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되찾자는 ‘지향’(志向)이 더 중심에 자리합니다. 교회의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계성’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 기반(基盤) 한 신자 서로의 관계성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교회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정의입니다(마태 12:48-50; 에페 2:19-22; 1요한 3:16).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세우신 ‘새 가족’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신 사람들이 서로 삶을 나누는 가족공동체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이전에는 모르던 사이더라도,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지내는 친교모임이 아니라 ‘진짜’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진짜’ 형제자매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정의 속에 서로의 관계와 소유와 시간, 심지어 목숨까지 서로를 위해 ‘사랑’으로 바칠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한 가족인 형제자매로 사는 일이 교회의 본질임을 증언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교회는 이 본질과 멀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다들 그렇게 말만하지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반성하고 교회의 본질을 되찾자는 기도를 바칩니다. 이렇게 기도지향이 정해진 만큼, 오늘은 ‘승천일’과 ‘성령강림일’을 몇 걸음 앞둔 시점에서 부활절기 동안 낭독한 전례독서 전체의 성격을 먼저 짧게 언급합니다. 그런 다음 복음서를 위주로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는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나눔을 진행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것처럼, 부활절기 동안 ‘1독서’는 구약성경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낭독합니다. 그 이유는 ‘4복음서의 부활전승’ 이야기나 부활주일 2독서로 낭독한 ‘사도 바울로의 개인적 증언’(1고린 15:1-11) 이후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 전체의 증언’이 부활절기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 특히 ‘교회’를 통해 활동하시는 성령을 깊이 묵상하도록 신자들을 이끕니다. 그동안 독서한 부분을 차례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선교내용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고르넬리오’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힘차게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10:34-43).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이 그가 선포한 복음의 정수입니다. ‘부활 2주일’은 신자들이 모든 것을 가정처럼 공동으로 사용하며 성령으로 시작한 공동생활입니다(사도 4:32-35). ‘부활 3주일’은 사도들이 유대인들을 향해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회개의 요구입니다(사도 3:12-20). ‘부활 4주일’은 사도들이 산헤드린에서 구원의 이름 예수를 전하는 설교입니다(사도 4:5-12). ‘부활 5주일’은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인 필립보가 성령의 인도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혹은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 일원인)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입니다(사도 8:26-40).

이처럼 1독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사도들의 선교와 그 전개 과정을 신자들로 하여금 숙고하게 합니다. 교회생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과월절 신비’에서 시작되어 ‘성령의 역사’로 진행됨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승천일과 성령강림주일을 앞 둔 부활절기에는 사도행전을 1독서로 낭독합니다.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함과 동시에 부활절기의 완성인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게 하는 여정인 셈입니다.

오늘 ‘부활 6주일’ 1독서도 지난주에 이어 초대교회가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선교내용입니다. 사실 ‘부활주일’ 독서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고르넬리오’ 집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차게 전합니다. 그러자 집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종,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나 직업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구원 역사를 봅니다. 그들은 지난주 우리가 묵상했던 ‘내시’처럼 이방인(가장자리 사람)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모두가 하느님께서 구원을 위해 세밀히 예비하시고 개입하신 일들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절기 동안 ‘나’해 ‘2독서’‘요한의 첫째 편지’를 차례로 낭독합니다. 그 이유는 ‘가’해의 2독서인 베드로의 첫째 편지처럼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언급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디 사순절기는 “부활절에 세례 받을 예비자들의 교육기간에서 유래한다.”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한 가족’인 신자들은 부활절기 동안 자신들이 받은 세례의 은총을 되새기며 감사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 뿐 아니라 부활의 기념이기도 한 ‘성찬례’에 꾸준히 참예(參詣)하며 하느님의 한 가족인 신자의 선한 책무(責務)를 배워갑니다. 이처럼 적대자들(특히 초대교회 시절에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오늘날에는 이단들과 그리스도교 반대자들)에 맞서 하느님의 한 가족인 교회의 일꾼으로 든든히 세워져 가는 일이 중요하기에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언급이 많은 요한의 첫째 편지는 적절한 배정입니다. 그동안 독서한 부분을 차례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 2주일’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에 있는 ‘변호자’시고, 온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이라는 부분입니다(1요한 1:1-2:2). ‘부활 3주일’은 이미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실과 ‘죄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입니다(1요한 3:1-7). ‘부활 4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다루는 부분입니다(1요한 3:16-24). ‘부활 5주일’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속속들이 밝히는 ‘사랑의 찬가’ 부분입니다(1요한 4:7-21).

오늘 ‘부활 6주일’ 2독서 전반부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교훈합니다(1요한 5:1-5). 그런데 이 ‘믿음’은 ‘사랑’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은 하느님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신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은 우리를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불러주시고, 사랑을 보여주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땅한 ‘응답’입니다. 이 사랑의 응답이 있는 곳마다 세상의 추한 욕망(2:15-17)과 악마적 삶(2:13-14)은 극복됩니다.

후반부(6절)는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영지’(靈知)를 소유했기에 구원받았고, 세상을 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거짓 교사들에 맞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세상을 이기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의미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는 가현설(假現設, Docetism)을 은밀히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참된 지식)이신 ‘성령’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인간으로 오시어(성육신)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수난의 ‘피’)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 성령의 증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고,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세상을 이깁니다.

이처럼 오늘 낭독한 2독서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말하면서, 세례와 수난의 피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고(6절), 성령이 예수님을 증언하시며(6절), 하느님이 직접 아들에 관해 증언한다(9절)는 ‘삼위일체’의 암시를 보여줍니다.

“En la Cena ecológica del Reino”, Cerezo Barredo

부활절기 동안 ‘나’해 복음서는 부활 1, 3주일을 제외하고 사순절기에 이어 ‘요한복음서’를 계속해서 낭독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지난주에 이어 십자가에 수난하시기 전 행하신 ‘고별설교’ 부분입니다. 고별설교가 선정된 이유는 교회로 하여금 금주 목요일에 있을 ‘승천일’과 곧 다가올 ‘성령강림일’을 염두에 두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지난주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 열매 맺는 삶으로의 초대”라는 주제로 말씀 나눔을 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이어지는 후반부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아가페)를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듯,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온 예수님의 사랑(아가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쓰인 ‘사랑’이라는 단어는 전부 ‘무조건적 사랑’을 가리킬 때 쓴다는 ‘아가페’입니다. 이어서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음’이 어떻게 살아가는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생명나무. 15세기 정교회 이콘

‘계명’이란(히브리어로 미츠와, 그리스어로는 엔톨레) 어떤 뜻입니까? 좁은 의미로 그 종교의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조건들, ‘하라’와 ‘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들을 ‘계명’이라 합니다. 간단히 ‘십계명’을 생각하면 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계명(613개)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기위해 ‘반드시’ 지켜야할 하느님의 명령, 즉 달리 조건을 달아서는 안 되는 하느님의 요구사항들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 정신, 의지, 마음이 담긴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어머니처럼 인류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들을 ‘계명’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진정으로 그 계명을 지킵니까? 계명이 자기 삶의 ‘억압’(抑壓)이 아니라 완덕으로 이끄는 ‘기쁨의 길’임을 깨달은 사람이 지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고귀한 삶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이 지킵니다. 쉽게 말해 계명을 주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기쁨’(그리스어로 카라)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지킵니다. 이처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이에게 계명 준수는 복종이 아니라 기쁨에의 참여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자신이 머물러 있다는 예수님의 당당한 말씀은 하느님의 뜻, 정신, 의지, 마음이 담긴 계명을 기쁨 속에서 충실히 지키고 구현하며 살아오셨다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서는 하느님의 그 뜻을 ‘하느님의 나라’로, 요한복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진정한 기쁨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계명을 지키면” 그들도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명 역시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시려는 하느님의 뜻, 정신, 의지, 마음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애’(자매애)는 예수님의 계명이며, ‘형제애’(자매애)의 실천은 제자들이 예수님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진짜 형제자매인 우리가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해야할 계명 역시 ‘서로 사랑하라’(아가페)입니다. ‘형제애’(자매애)의 실천이 주님의 참된 교회를 알아보는 유일한 ‘시금석’(試金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과 어떤 사이가 됩니까?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출애 33:11). 이 관계가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에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계명 준수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벗’(친구, 동무, 동지)이 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친구’란 본디 “뜻, 정신, 의지, 마음을 같이 하는 사이”입니다. 우리나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면서 친해져 어느 새 가족처럼 된 관계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면서 친해졌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 친구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친구를 ‘제 2의 자아’라고도 말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세월 자신과 뜻(의도), 정신, 마음을 공유하고, 같은 목적을 지향하며 친해진 사이가 바로 친구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뜻을 같이하는 사이”라고 해서 ‘동지’(同志)라고도 합니다. 과거 민주화의 두 산맥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동지인지 아닌지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에는 항상 그가 지향(의도)하는 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명하신 것을 지킬 때, 즉 당신과 뜻, 정신, 의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을 때 우의(友誼) 깊은 ‘벗’이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길가메시와 사자, 루브르박물관

인류의 기록 속에는 우의가 깊었던 친구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서사시는(기원전 3300년경)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길가메시’(길가는 ‘노인’, 메시는 ‘청년’, 즉 노인이 청년이 되었다는 뜻)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도전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이야기에 보면, 악한 폭군인 길가메시를 개과천선(改過遷善)하게 만든 친구가 바로 ‘엔키두’입니다. 그들은 ‘명성’(名聲)이라는 하나의 지향을 위해 의기투합한 사이가 됩니다.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서게 된 동기도 자신의 ‘제 2 자아’인 친구 ‘엔키두’의 죽음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다윗과 요나단’의 ‘숭고한 우정(友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 18:1-5; 20:8-17, 41-42). 저는 그들의 우정을 전해주는 대화 장면을 읽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저에게 그런 친구가 있는지, 또는 그런 친구로 살아왔는지 돌이켜 보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문화에서는 나이나 처지가 비슷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를 보면 그것을 초월합니다. 요나단은 장차 왕위를 이을 왕자였고, 다윗보다도 연장자였습니다(삼하 1:26). 사실 좀 더 멀리 내다본다면, 동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성별이나 나이를 떠나 뜻을 같이하는 인생길에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故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제일 좋은 친구를 소개하는 영상을 ‘유튜브’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보신 분이 있으실 겁니다. 2002년 11월 故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부산 국민참여운동본부 발대식에서 연설하던 장면입니다. 자신이 왜 대통령 후보로 나설 자격이 있는지를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영상 속 故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옮겨봅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9Q0gLrMAmg8)

감이 되겠나? 노무현이 감이 되겠나?” 말할 때, “저도 됩니다.”라고 말하기에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저는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감이 되겠나?” 물으면, “감이 된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은 떠듬떠듬 유창하지 않게 원고를 보면서 읽었습니다만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후보 아니겠습니까?” 이 분들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에게 눈물 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오늘도 돕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오늘도 수고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함께 사랑을 나누고 함께 노력하는 우리들의 지도자입니다.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도 저는 그 영상을 보면서 故노무현 대통령은 과연 ‘선견자’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분명 故노무현 대통령과 뜻, 정신, 의지, 마음을 같이 하는 ‘친구’(동지) 사이임을 요사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에 비긴다는 것이 어불성설일지 몰라도 저는 그 영상을 보면서 성찬례에 모인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사이여야 하는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큰 거목이자 광야의 예언자로 알려진 함석헌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인 김교신의 죽음을 추도하며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선생님의 시집 『수평선 너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어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상에서 돌아본 것처럼 친구란 결국 자신과 뜻, 정신, 의지, 마음까지도 같이 하는 사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이 빠졌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벗으로 만들어주는 “서로 사랑하라”는 그 같은 ‘형제애’(자매애) 수행의 ‘척도’(尺度)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즉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이 명하시는 “서로 사랑하라”의 ‘기준’인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벗을 사랑하기에 목숨까지도 바치는 희생”입니다. 그것이 형제애(자매애) 수행의 ‘척도’(尺度)입니다. 그러한 형제애(자매애)를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닥쳐올 십자가 수난이 사실은 같은 뜻, 정신, 마음, 지향을 간직한 친구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친구 속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도 포함됩니다(마태 12:48-50; 에페 2:19; 1요한 3:16).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뜻, 정신, 마음을 지닌, 심지어 목숨까지도 나누는 진정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그 행동이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썩지 않을 열매를 맺기 위해 서로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의 희생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서로를 위해 핍박도 환난도 견디며, 심지어 순교로써 계명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예수님의 친구임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친구라고 부르실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시오라고 말하면 되는데, 반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교회는 과연 어때야 하는 것입니까? 이 척도, 이 기준 앞에 껍데기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제자들(우리)에게서 그렇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셨던지 예수님은 자신이 택하여 내세우신 제자들(우리)을 ‘종’이 아니라 ‘벗’(친구)이라 부르겠다고 갑자기 선언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 때까지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무슨 사랑을 보여드린 것도 아닌 데 그 같은 복을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무슨 사랑을 보여드린 것도 아닌데, 이미 그렇게 불러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친구인 다윗에게 그대로 전해줍니다(삼상 19:1-3; 20:1-23). 왜 그랬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그 덕택에 다윗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삼상 20:30-42). 이렇게 요나단이 다윗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을 모두 다 알려주셨다고 하십니다. 친구라고 부르시기 전부터 ‘이미’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아버지의 뜻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사랑의 일을 널리 펼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우리)을 친히 선택하시어 당신과의 우정의 관계로 ‘이미’ 부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 크신 마음 앞에서 이제는 정말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못 베깁니다. 모두가 그 크신 사랑에 빚진 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된 우리는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사랑의 열매’, 즉 영원한 생명을 열매 맺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시오라고 말하면 되는데, 반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당신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벗’으로써 살아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친구’이십니다. 모름지기 진정한 친구는 뜻, 정신, 의지, 마음, 목숨까지도 같이 하는 사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사도 20:28). 교회는 단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주님의 몸입니다(에페 1:23). 거룩한 주님의 집(성전)입니다(에페 2:21-22).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교회는 세상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사랑’을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어린 세대들이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주님의 집인 교회에서 사랑을 배우고, 키워가지 못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종’처럼 하느님의 계명에 ‘복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 역시 종처럼 하느님(예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일에,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명하신 그 계명에 기쁘게 참여하는 삶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고귀한 사명입니다.

아무쪼록 가정주일을 맞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 안에 이 복되고 거룩한 사명이 다시금 되새겨지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저희를 한 가족으로 불러주셨으니
저희의 품은 뜻이
당신의 뜻같이 되도록
성령을 보내주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도출해 낸 결과들이 잘 이행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서울교구 설립 53주년 기념성찬례 및 성직서품식을 위해 기도합시다.
    • 일시: 5월 24일(목) 오후 2시 / 장소: 서울주교좌성당
    • 사제성직후보자: 정승구(안드레), 최성모(요한), 김은경(드보라)
    • 부제성직후보자: 정태준(프란시스), 황윤하(라파엘), 남우희(엘리사벳), 권석준(이사야), 김두승(아모스)
  7.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