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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29. 부활5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5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 열매 맺는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에 제자도란 가지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열매 맺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나는 둘도 없는 하나입니다. 우리 서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교회로 성령을 통해 잘 가꾸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변화 많은 세상에서 주님을 떠나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8:26-40
  • 시편 – 22:25-31
  • 2독서 – 1요한 4:7-21
  • 복음서 – 요한 15:1-8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 열매 맺는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 즉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으로(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에티오피아는 가장 먼 나라, 곧 세상 끝으로 통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인 ‘필립보’가 등장합니다. 그는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입니다(사도 6:5). 어느 날 그는 ‘가자’(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통치 지역으로 이스라엘이 봉쇄해 버린 그 가자지구를 말합니다)로 내려가라는 ‘성령’(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하느님께서 예비하시고 개입하신 은총의 결과임을 명백히 합니다.

필립보는 길을 가다가 마차를 타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에티아오피아 여왕(간다케)의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는 ‘불구’(不具)여서 ‘야훼의 대회’에 참여할 수 없는 ‘내시’입니다(신명 23:2). 하지만 그런 장애가 그의 거룩을 향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늘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을 찾고(시편 22:26),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필립보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세부적인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 그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성경을 읽는 그의 모습에서 ‘구도자(求道者)’의 풍미가 느껴집니다. “고난 받는 종의 넷째 노래”라고 불리는 대목입니다(이사 52:13-53:12). 여기서 ‘부활 5주일’ 전례독서로 이 만남의 사건이 선정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대목은 장차 오실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하는 구약 중 하나입니다. 특히 그 종의 고난과 부활을 믿는 ‘후손들’을 많이 나타나게 하시겠다(이사 53:11)는 예언이 둘의 만남을 통해 성취되고 있기에 선정되었습니다.

필립보는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 즉 부활의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소개받자 그에게 결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십자가에 수난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종의 ‘후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물 있는 곳으로 내려가 세례를 받습니다.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도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물하는 ‘영원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39절). ‘이방인’으로서(또는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 일원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습니다(시편 68:31). ‘구도자(求道者)’의 삶을 끝내고 ‘전도자(傳道者)’의 길을 갔다는 것이 그에 대한 교회의 전승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인종과 민족(유대인과 이방인), 국가와 사회제도(자유인과 식민지인), 신분과 종교의 장벽(신명 23:2 참고)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을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로 만든 기쁨의 사건입니다(갈라 3:28). 교회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차별도 통용될 수 없는 하느님 안의 한 가족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항상 인간의 노력이나 믿음의 고백보다 우선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들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이 사건은 교훈합니다.

시편 22편은 우리가 성주간 전례에서 교송(交誦)한 찬미입니다. 성목요일 성찬제정 예식 후반 ‘제대보를 걷는 순서’에서 그리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의 수난이야기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 시편 탄원(歎願)의 첫 마디를 기도로 인용하십니다(마태 27:46; 마르 15:34). 다른 구절들도 복음서의 수난이야기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 마무리에서 언급하는 ‘구원’(부활)도 성취하셨습니다(26절, 참고 히브 2:10-12; 5:7-8). 이처럼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예언한 시편입니다.

오늘 노래한 단락은 시편 150편 전체에서 탄원에 이은 ‘감사시(感謝詩)’가 나오는 유일한 부분입니다. 시인은 구원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와 아울러 자신이 곤경에서 서원(誓願)한 것을 이행하는 ‘감사 제사’를 드립니다.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의 위대한 행위와 그 이름을 겨레들 앞에서, 즉 예배에 모인 ‘큰 회중’ 앞에서 선포합니다.

이 단락이 ‘부활 5주일’ 전례독서로 선정된 이유는 1독서 사도행전과의 연관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이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라. – 시편 22:27

이 예언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방인 ‘내시’를 시작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시편 끝에서 언급된 ‘후손’과 그가 읽던 “고난 받는 종의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의 10절에 기록된 ‘후손’이 같습니다. 그 후손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한마디로 “온 세상, 만백성, 오고 오는 후손(세대)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받은 오늘의 교회인 우리 자신을 예고했습니다.

서신은 지난주에 이어 요한의 첫째 편지입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받은 이는 “서로 사랑하며 산다”는 교훈입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기록 배경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적대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위한 ‘특별한 지식’(靈知)을 소유한 양 은밀히 사람들을 포섭하고 다녔습니다. 일종의 ‘비밀지식 과대주의’입니다. 오늘날 이단들이 하는 행태들입니다. 특히 ‘성육신’을 부인하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지상의 예수님은 다른 분이라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세례 받던 순간 인간 예수 위에 영적으로 내려와 앉았고, 인간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앞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떠나갔다고 주장한 적대자들입니다. 한마디로 ‘가현설(假現說 Docetism)’, 즉 하느님의 아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는 거짓 가르침 말입니다.

서신의 저자는 이런 ‘영지주의’에 물든 적대자들을 반박합니다. ‘비밀지식 과대주의’에 현혹당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의 본질, 즉 구원에 필요한 지식의 정수(精髓)는 더 이상 특정 집단에게 비밀로 맡겨지거나 전수(傳授)되지 않다고 교훈합니다. 누구도 그것을 비밀스럽게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본질을 선물처럼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8절, 16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 분을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영접)하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에서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진실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위해 행해진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말고, 구원을 위해 인간이 깨달아야하거나 획득해야할 비밀지식 같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로(은총으로) 받아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까?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구도 이 사랑의 의무로부터 예외이지 않습니다. 영지주의 적대자들처럼 하느님(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획득했다고 하면서도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리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는 오늘 여기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는 절대적 근거는 현재 우리에게서 실천되고 있는 사랑 말고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행하는 현재의 사랑 말고 달리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복음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시기 전 행하신 ‘고별설교’입니다. 부활 5주일에 이 본문이 선정된 이유는 교회로 하여금 이제 곧 다가올 ‘승천일’과 ‘성령강림일’을 염두에 두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비유에는 간단명료한 ‘표상’(表象)들이 등장합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농부이신 아버지, 많은 열매를 맺도록 명령받은 가지인 제자들(우리들)입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은 이유는 ‘덩굴’이나 ‘이파리’를 감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열매들’을 바라서입니다. 그것이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포도나무의 존재 의미와 가치는 ‘많은’ 열매들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역시 많은 열매들을 맺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농부이신 아버지는 많은 열매를 바라시어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시편 80:8).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사건에 대한 시적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그 땅에 심으신 이유는 열매를 풍성히 맺어 세상에 기쁨을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 세상의 구원에 기여하도록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들포도’를 맺고(이사 5:2), ‘악한 가지’가 되어서 하느님을 실망시켰습니다(예레 2:21). 그들이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악행을 일삼았다는 뜻입니다(호세 10:1).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그 포도나무를 그 땅에서 뽑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이사 5:1-7; 에제 17:9).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려던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언자 이사야는 대반전을 예언합니다(이사 27:2-6). 하느님께서 열매가 가득히 맺힐 포도원을 다시 일구실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이전에 심은 포도나무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심으실 포도나무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기대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포도나무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 누구나 알고 있던 포도나무의 표상을 통해, 이사야가 예언한 그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자신(교회)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열매가 가득히 맺힐 포도원의 꿈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전에 들포도나 맺었던 그런 거짓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입니다. 여러분은 나로부터 수액(樹液)을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을 건강한 가지들입니다. 여러분과 나, 모두가
전체로 아버지께서 심으신 참 포도나무이고, 오직 아버지만이 이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께 연합한 우리가 하느님이 심으신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던 ‘선민’으로서의 지위와 특권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참 포도나무를 통해 그 계획이 성취되는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더욱이 이어서 말씀드릴 ‘교회’를 통해 그 계획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로 영접하고 새 이스라엘이 된 교회에게,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새 포도원이 된 교회에게 세상에 기쁨을 전해주는 특권과 지위와 책임이 옮겨졌습니다. 알렐루야!

다음으로 예수님은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특별하게 묘사하십니다. 지난주에는 “착한 목자와 양”으로, 이번 주에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한 주 만에 둘 사이의 거리가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당신과 우리가 둘도 아닌 ‘하나’라는 묘사입니다. 우리 서로도 별개(別個)가 아니라 연결된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언뜻 바다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들은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해저 깊이 내려가면 섬들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각각의 손가락들이 한 손의 갈래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의 비유는 예수님과 우리, 우리 서로가 물질적 차원에서는 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 즉 본질적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가르치십니다. 삶의 지혜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 진실에 눈을 떴다는 뜻입니다. 근원의 한 조각, 전체의 작은 일면에 집착하던 삶에서 보다 큰 전체, 하나로 연결된 삶을 보는 눈으로 성장하는 일이 지혜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이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다 영혼이 병든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서 뻗어난 가지처럼 서로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질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차원에서도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줄기로부터 전해진 수액(樹液)을 가지들이 서로에게 전해주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통로요, 전달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가 병들면 다른 가지도 영향을 받듯이 서로의 삶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 진실을 빨리 마주하는 만큼 우리의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도 어리석습니다.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곧 인간들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생명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자연에게 가하는 폭력은 반드시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서로 하나로 연결된 생명의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신학적 개념으로 하느님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현실에서 사랑의 하느님은 결코 그렇게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항상 대상을 필요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필요하듯, 하느님도 우리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열매’라는 표상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과 지위와 특권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심지어 이 열매라는 표상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우리를 통해 드러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참 포도나무인지, 거짓 포도나무인지를 판별하는 근거는 가지가 맺는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거짓’ 포도나무를 염두에 두시고서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라 하셨으니, 그 말씀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가지인 우리(교회)를 통해 드러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성장 역시 당신에게 ‘붙어 있어야’(함께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시고, 우리 모든 행동의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입니다(5절).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되어있는 한 성령의 권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성장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끊어지면, 우리는 시들고 죽습니다. 아무 것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처럼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를 존재케 하는 ‘상호공속적 관계’이고, ‘상호내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교회인 우리의 존재 가치와 지위(특권)를 높여주시고, 그 책임도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사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데 있어서 이파리와 가지와 줄기와 뿌리는 모두가 서로를 위해서 필요한 관계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특권을 가능케 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영접한 삶입니다(요한 1:12; 3:16). 성찬례에 참여하여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하는 삶입니다(요한 6:54,56).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요한 8:31; 15:9-10). 저는 이 모든 것을 농부이신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 즉 ‘예수 사건’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 사건은 ‘말씀’이라 할 수도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 예수의 삶에 대한 ‘기억’을 실어 나르는 ‘복음’(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입니다. 그 말씀, 그 정신이 우리 속에 진정으로 살아 활동하는 실재가 될 때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그 정신이 우리를 차지하여 자신의 의지가 되어 작동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그 정신인 “서로 사랑하라”는(요한 15:12,17; 1요한 4:7,11) 계명이 나무의 수액(樹液)처럼, 우리 몸에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신에서 교훈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의 수액’이 자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형제들에게 흘러가도록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요, 전달자들입니다. 그 말씀, 그 정신, 그 ‘사랑의 수액’이 우리 속에서 흐르고 있을 때,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열매 맺음의 전제이자 기도 응답의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자아와 그리스도의 의지가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 때 교회가 갖는 소원 역시 예수님의 소원처럼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것입니다. 그런 소원은 다 이루어질 것이고, 아버지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포도나무의 생존과 성장은 전적으로 농부의 손에 달렸습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날 수 없듯이 나무 역시 농부의 손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농부이신 하느님 손에서 자라는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둘도 없는 하나입니다. 우리 서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가지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기대를 받고 있는 한 몸의 식구들입니다. 제자도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열매 맺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가꾸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따라 우리는 지금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풍성한 결실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 세상 어두운 곳에까지 우리의 가지를 뻗어 구원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자신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빗나갈 때 우리의 삶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목적과 뜻을 성취하려는 교회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느님이 가꾸실 것입니다.

이런 희망과 체험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정신),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계명이 우리 속에 수액(樹液)처럼 살아 흐를 때 우리의 기도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부합하기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자리마다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공급된 그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가지에게로 흘러가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함께 참 포도나무에 붙은 건강한 가지로 살아가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지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필립보처럼 더 많은 이들이 참 포도나무에 연합하도록 복음을 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구원을 열매 맺게 하는 일에 우리 자신이 가지로서 소중한 한 부분을 맡고 있음을 명심합시다. 모쪼록 하느님의 구원과 뜻을 성취해 가는 참 포도나무의 교회로 농부이신 하느님이 잘 가꾸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도출해 낸 결과들이 잘 이행되도록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류니콜라, 허베네딕트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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