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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22. 부활4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입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받고 있는 교회답게 서로 사랑하며, 구원의 이름을 전하는 생명의 공동체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금주 4월 27일(금)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입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유의미한 결과들이 도출되고 실천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은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한 무리로 모아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양 무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4:5-12
  • 시편 – 23
  • 2독서 – 1요한 3:16-24
  • 복음서 – 요한 10:11-18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지난주에 이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산헤드린’(최고의회, 법정)에 서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불과 몇 주 전 예수님을 ‘신성모독자’와 ‘국사범’으로 단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총독에게 넘겼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예수가 살아있고, 계속 착한 일을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도 잘 알고 있는 태생 장애인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그 일을 했다는 제자들을 잡아오게 했습니다. 한 때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스승을 버리고 숨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대 최고 권력자들 앞에 서 있는 베드로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 있게 증언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루가 12:11-12). 그는 그 자리에 있던 치유된 장애인을 가리키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합니다(14절).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버렸지만(죽였지만), 하느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높이신(부활시키신) 분이라 증언합니다(시편 118:22). 제가 참고한 주석에 따르면, ‘머릿돌’은 토대를 이루는 큰 돌들 가운데 하나나 둥근 천장(아치)을 지탱하도록 그 정수리 부분에 놓는 쐐깃돌입니다. 나아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예수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완전히 눈이 열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 죽음을 넘어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입니다. 태생 장애인은 인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 위에 있지 않은 우리들 말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와 허물 속에 처한 우리들 말입니다. 자기 의지로는 완덕에 이를 수 없는 가련한 우리들 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영혼의 병자인 우리를 치유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래 누구에게 속해 있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진짜 갈망과 해야 할 일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착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불의한 세력은 붙잡아다 죽였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에 도전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을 보였다며 득의양양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그 분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삶을 따르는 이들은 죽음마저도 넘어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 궁극적 생명, 예수의 부활 생명을 선물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받은 선물입니다. 이 전에는 우리가 길 잃은 양이었지만 이제는 영혼의 참 목자요, 보호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분과의 교제 안에 있습니다(1베드 2:25). 교회라는 ‘양 무리’ 말입니다.

시편은 그 유명한 다윗의 시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예수님의 ‘착한 목자 상'(像)과 우리가 함께 모인 ‘성찬례의 소중함’을 보여주기에 전례독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 그가 이 시를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시에 담긴 깨달음으로 볼 때, 인생의 풍파를 지나 온 후반기라고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어느 덧 그는 생의 후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운은 예전 같지 않지만 내면에는 지혜가 영글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인생을 더 높은 차원, 즉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한 깨달음이 고요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의 눈으로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고요히 회상해 봅니다. 인생과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을 목자로, 자신은 주인의 사랑받는 양임을 들려줍니다(1-2절). 자신의 인생이 하느님의 이름(뜻)을 드러내는 여정으로 쓰임 받았음을 들려줍니다(3-4절). 그러다 예배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회상할 때는 격정에 사로잡힙니다(5절). 그 격정을 하느님의 환대를 받은 명예로운 손님 같은 삶으로 풀어냅니다.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상(床)과 기름과 포도주잔을 언급하며 인생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너그러움을 전합니다. 이제 회상을 마치며 자신의 생애 전부가 은총과 복이었노라고 찬미합니다(6절). 언젠가 떠나야 하는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그 집의 일원으로서 주님과 영원히 동행하며 살겠다고 찬미합니다.

The Good Shepherd – John 10:1-16

이제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고요히 회상하던 그의 입에서 맨 먼저 터져 나온 고백은 무엇입니까?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느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깨달은 이가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내놓은 첫 고백은 “아쉬울 것이 없어라”, 즉 ‘감사’입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과 위기의 순간들 속에서 하느님을 인도자요, 피난처요, 위로자로 ‘체험’한 이의 고백입니다. 그 체험이 하느님을 착한 목자로 신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인생 전체에 대해 그같이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명백히 깨달은 이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 관계를 인생 전체로 가져가 관조할 수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실, 신앙의 길이란 나의 지금 여기뿐 아니라 인생 전체가 하느님 덕택에 “아쉬울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그런 눈, 그런 경지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물론 원한다거나, 결심했다고 저절로 뜨게 되거나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심’보다 ‘상황(환경)의 힘’이 강할 때가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그 상황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주위에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물건들을 두십시오. 하느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더 자주 친교 하십시오. 특히 성당과 성찬례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눈을 뜨게 하고, 감사를 키우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자리’(상황과 환경)입니다. 성화나 성물들 앞에 머물러 잠시 묵상하다보면 마음이 고양(高揚)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찬례 속에서 부르는 성가나 기도, 전례독서와 설교, 봉헌과 영성체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일 때마다 우리가 서로에게 메시지이고, 세상을 향한 메시지임을 자각시킵니다. 이 성찬례 속에서 인생 전체의 눈으로 지금 여기의 자신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생 전체의 눈으로 지금 여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난의 현실에 매몰되어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갈증’과 ‘갈망’을 식별하지 못한 채 닥치는 대로 ‘탐닉’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지금 갖지 못해 아쉬워하고, 간절히 원하는 그것을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의 나도 과연 간절히 원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인생살이의 눈을 더 미래로 확장해서 ‘현인'(賢人)이 된 자신이 지금 여기의 ‘나’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그 ‘나’와 연결될 수 있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을까요? 그 ‘나’는 현인(賢人)이 가장 잘 아는 ‘나’ 아닙니까? 극장에 앉아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영화처럼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하느님이 특별한 은총을 허락하셔서 그 영화 속 한 순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살게 해 주신다면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그 때의 나, 즉 현실(현재)의 나에게 현인(賢人)은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해 주고 싶은 그 조언, 그 일을 그저 상상 속에만 두지 않고 지금 여기 현실에서 실천합니다.

좀 우스운 상상이지만, 우리는 이런 식으로라도 좀 더 넓은 관점으로 현실의 나를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현실이 푸른 풀밭과 물가가 아니라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한계 때문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영'(靈)이시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나누어 인식합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나누임도 경계도 없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하느님이 지금 여기 나를 보신다면,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나도 모두 한 장(場)에서 펼쳐지고 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볼 뿐이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까지도 이미 다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이미 다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해석한 과거의 기억(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때문에 현재 아파합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다가올 미래(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때문에 현재 불안합니다. 미래가 자신의 기대대로(푸른 풀밭, 물가) 선한 결과일지 알 수 없어서 현재 불안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까지도 다 아십니다. 특히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우리의 미래가 ‘선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로마 8:28). 이 하느님의 관점을 소유하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볼 때 우리는 시인처럼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는 ‘믿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시인처럼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왜 그렇게 애달파 하고, 숨죽여 했는지 오늘을 바라보면서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를 맛본다면 시인처럼 일상을 전혀 다르게 볼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그것이 성공이든(푸른 풀밭, 물가), 실패이든(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위기이든, 고난이든, 그 순간순간이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는 길이요, 그 순간순간이 언제나 곧은길임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순간이 하느님의 은총과 복으로 펼쳐지고 있는 시간임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 전체에 걸친 하느님의 동행하심을 알아차렸기에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 전체가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손길(막대기와 지팡이) 속에 있음을 이미 보았기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국에는 자신의 인생을 통합하여 “아쉬울 것이 없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그런 눈을 뜨는 시간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 이들, 즉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온 이들이 인생 전체를 회상하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이 한마디 찬미를 바치는 시간입니다. 현실의 눈이 아니라 인생 전체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지금 여기의 나와 상황을 바라보는 거룩한 눈 뜸의 시간입니다. 인생 전체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지금 여기의 나를 바라보며 자신에게서 버려야 할 것, 덜어내야 할 것, 비워야할 것을 찾고, 진정으로 채워야 할 것을 발견하는 거룩한 ‘통합의 시간’이 ‘성찬례’입니다.

시인도 그랬습니다. 그가 ‘생의 통합’으로 나아간 자리는 하느님께 ‘제사'(예배)가 바쳐진 자리였습니다. 그는 회상 속에서 제사에 참석한 자신을 봅니다. 제사 후에 ‘회중’들과 함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음식상'(床)이 마련되어 있는 자리로 나아갔던 자신을 봅니다. 원수들이 근처에서 보고 있지만, 거기서 자신을 명예로운 손님처럼 환대해주셨던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음식상'(床)과 ‘기름’과 ‘포도주잔’을 상징으로 사용해 제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너그러움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많은 제사에서도 자신은 그런 대우를 받았는데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초대로 누린 기쁨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우리 생애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과 복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 삶에 많은 것을 이미 베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감사’하기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복’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시인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은총’과 ‘복’이었다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그 집을 떠나야 하는 ‘손님’이 아니라 집의 ‘일원’으로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겠다고 자신의 미래를 노래합니다. 우리의 성찬례가 그런 ‘통합’과 ‘기쁨의 미래’를 노래하게 하는 자리이기를 축복합니다.

서신 요한의 첫째 편지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분명 ‘아멘’할 수 있는 증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권면이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1요한 3:16하

차라리 이 구절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우리를 고민스럽게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해서 교회에 나왔더니만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니 고민스럽습니다.

우리가 충격 받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다른 사랑의 실천을 권면합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갖고 있는 ‘재물’로라도 ‘가난한 형제'(자매)를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말과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권면은 지난주에 언급한 헛된 구원 교리를 전하는 적대자들(1요한 2:18-19), 즉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을 향한 반박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육신적 삶의 요구와 유혹들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양태에 도달했기에 지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했습니다(1요한 2:9-11; 3:1-18; 4:7-21). 특히 ‘형제(자매) 사랑의 계명’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갖고 있는 ‘재물’로라도 가난한 형제(자매)를 도울 수 있습니까? 말과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 권면이 우리를 더 고민스럽게 합니다.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은 ‘박해시절 순교한 성인들’에게나 해당됐던 권면이라면서 지금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갖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형제(자매)를 돕는 일은 어느 시절에나 해당하고, 하려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이 일도 쉽지 않습니다. 성찰해 보면 가지고 있는 ‘돈'(재물)도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간 ‘목숨’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재물’로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돕는 일이나 그 의미로는 ‘자신을 내놓는다’는 차원에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어떤 식의 형제(자매) 사랑의 실천이든지 그 일은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형제(자매) 사랑의 실천으로써 우리는 허망한 지식인 ‘영지주의’에(1요한 2:18-19; 4:2-3) 물든 이들이 아니라 ‘진리’에 속해 있음을 증명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증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착한 목자가 이끄시는 ‘양 무리’ 속에 살고 있음을 형제(자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Nikola Sarić, http://www.nikolasaric.de

복음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처럼 죄에 빠진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교회)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교회와 함께 계시며 목자의 직분을 완성해 가십니다. 위로와 격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1세기 그리스도교의 삶의 자리가 녹아있습니다. 1세기 말 요한공동체는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이 새로 재건한 유대교 회당에서 추방당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면 2017. 11.5 연중 31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아직 유대교와의 결별로 인한 혼란은 남아 있지만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던 시절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이 태생 장애인을 고쳐준 후에 이어지는 설교인 것처럼, 복음서도 태생 장애인을 고쳐준 후에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아마 자신을 사목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전부 가슴이 철렁할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의 기준은 단 한가지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님처럼 이리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행동입니다. 양들을 책임지지 않고 자기 목숨부터 챙긴다거나 양들을 통해 이득을 누리려 한다면 그는 ‘삯군’인 동시에 ‘악한 목자’일 뿐입니다. 사람은 속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목자라고 존중한다면 제 사명에 충실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예수님의 양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예수님의 양들인지 아닌지의 기준은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압니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이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고대 근동에서 목자들은 집을 나서면 며칠씩 양떼를 몰고 다녔습니다. 식량으로 빵, 말린 무화과, 치즈 같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대부분은 항상 혼자였기에 외로웠고, 피리나 단순한 악기를 만들어 갖고 다니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항상 양들과 같이 지내고 돌보면서 맹수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양들을 골짜기 아래로 데려가거나 비바람을 막아 줄 동굴을 찾아 밤을 지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입구를 지키는 문 역할도 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근처 마을로 양떼를 몰고 내려와 ‘공동 우리’에 넣어둔 다음, 여관에 들러 먹을 것을 보충하거나, 밤을 쉬었습니다. 다음날 일찍 목자가 오면, 문지기는 어제 밤에 양을 맡긴 사람인지 확인하고 문을 열어줍니다. 몇 마리를 데려왔는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를 알고 자기 목자만 좇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피리를 불거나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소리를 내면 각각의 양들은 그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고 밖으로 나와 뒤따라갔습니다. 자기 양인데 따라 나오지 않으면 목자는 다시 가서 소리를 냈습니다. 양들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양들의 생명은 자신을 “찾아온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데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데려가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이 아닌 이들에게는 찾아가시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 이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정하신 때에 그 계획을 완벽히 이루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이사 43:1~7, 요한 6:37).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우리는 과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까? 아는 양들인지 아닌지는 딱 하나를 통해 증명됩니다. ‘행동’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는 양이 아닙니다. 아는 이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오늘 전례독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아는 이는 1독서의 사도들처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그 이름’을 증언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이들이 의지하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 이름’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시편처럼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봅니다. 더 갖지 못해서 혈안인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도 “아쉬울 것 없어라”고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비우며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처럼 그 무엇도 아쉽지 않은, 주님이 ‘생의 전부’가 되어주시는 참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필립 1:21).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아는 이는 서신처럼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며 살아갑니다.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형제(자매)를 도우며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아쉬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으며”, “걱정할 것이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공동체와 형제(자매)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내주고도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복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찬미합니다. 재물로는 살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이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이미 구원 얻은 자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양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구나.”라고 인정할 만합니까? 착한 목자이신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까? “아쉬울 것이 없는 삶”이 아니라 아쉬운 것이 너무나 많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욕심은 얼마나 내려놓았습니까? 무엇에 ‘갈증’을 느낍니까? 아니 얼마나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까? 내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아쉬움(부족함)은 ‘갈증’입니까? ‘갈망’입니까? 갈증은 말 그대로 육체적(물질적)이고, 정서적이며, 일회적입니다. 반면에 갈망은 단지 정서적인 것 같지만,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하는 ‘영적 씨앗’과도 같습니다. 다른 말로 참된 ‘희망의 씨앗’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사슴’이 아니라 ‘양들’을 이끌고 다니십니다. 사슴이 갈증이라면 갈망은 양들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는 갈증이 많습니까? 갈망이 많습니까?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갈증인지, 아니면 갈망인지부터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이것을 식별하고, 또 그 갈망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참된 희망으로 인도함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신자들 중에는 그저 갈증이나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입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을 통해 그 갈증을 풀 수 있다면, 더 이상 예수님을 목자로 따르려하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인생에는 예수님을 만나야 풀리는 ‘갈망’이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이 먹어야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할 것인지를 잘 압니다. 어디에 푸른 초장과 시냇물이 있는지 잘 압니다. 언제 이동해야 하고, 어디에 피난처가 있는지 잘 압니다. 식별입니다. 만일 양들이 먹지 말아야할 것을 먹으러들거나 가지 말아야할 곳에 가려고 하면 말립니다. 이리가 양들에게 접근하려고 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생겨난 그 많은 갈망들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를 식별토록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갈망들이 ‘참된 희망’으로 향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참된 희망이 아닌 곳에 머물러 있을 때 소리쳐 불러주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단박에 참된 희망으로 가는 경우가 드물기에 예수님은 일단 ‘갈망들’이라는 일종의 ‘떡밥’을 사용하십니다. 착한 목자를 만나서 그 떡밥이라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참된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 참된 희망을 간직한 이는 비로소 그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는 자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며칠 전, 주교님 순방을 앞두고 교우들이 성당 사무실 정면에 화단을 만들고 여러 꽃들을 심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꽃 따라 밝아집니다. 모두가 성당 분위기를 예쁘게 하려는 ‘갈망’에서 나온 수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갈망의 최종 종착지가 단지 거기였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내면을 아름답게 돌보는 일”로 인도하고 싶어서 주님이 ‘화단 가꾸기’라는 떡밥으로 부르셨던 게지요. 이 일을 시도하지 않고 단지 거기서 멈춘다면, 화단을 만들고 형형색색의 꽃들을 심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직무 사제들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가장 앞에서 본 받아야할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비상시에는 양 무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목숨을 바칠 자세를 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직무 사제들은 신자들이 갈증과 갈망을 식별하는 일을 돕는 ‘교사’입니다. 그 식별을 위해 성서를 가르치고, 기도로 초대하며, 성찬례를 인도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갈망들이 참된 희망을 향해 나아가도록 식별하고, 이끌어주기 위해 파송된 이들입니다. 이것이 성공회기도서에 적시하고 있는 관할사제의 직무입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날마다 기도해 주셔야할 이유입니다.

부디 주님의 양 무리에 속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합시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그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는 참 생명의 교제를 영원토록 나누어 갑시다. 우리를 통해 가족과 이웃이 주님의 양 무리에 속하는 구원으로 초대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4월 27일(금)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나서도록 기도합시다.
  3.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대한성공회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견진성사자 서용준(베네딕트), 김석환(토마스), 정수민(세실), 오종민(어거스틴), 이미경(카타리나), 오혜민(헬레나) 교우를 위하여기도합시다.
  7. 가정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4.22. 부활4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8. 7.22. 연중 16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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