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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5. 부활3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마음을 열어 무지(無知)를 깨우쳐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무지는 모든 죄악의 근본입니다. 사도들은 무지로 인해 저지른 죄악을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의 자리로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무지한 우리 마음을 열어주시어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며, 하느님 자녀다운 순결한 삶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금주간 4.19 혁명 58주년 기념일이 있고,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정부 합동영결식이 열립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일어났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합시다. 피어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바다 속으로 스러졌지만 새 시대의 문을 열었던 희생들을 기억합시다. 하느님도 한 때는 불의한 세력들로 인해 아들을 잃고 우셔야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이들답게 아물지 않은 고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부모형제들의 원통함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부활의 주님이 희생자들과 유가족, 고통 속에 살아가는 생존자와 모든 우는 이들을 보듬어 안아 주시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실 때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지금도 세상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3:12-20
  • 시편 – 4
  • 2독서 – 1요한 3:1-7
  • 복음서 – 루가 24:36-48

어느덧 4월의 한 가운데입니다. 금주간 4.19 혁명 58주년 기념일이 있고,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정부 합동영결식이 열립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일어났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합시다. 피어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바다 속으로 스러졌지만 새 시대의 문을 열었던 희생들을 기억합시다. 하느님도 한 때는 불의한 세력들로 인해 아들을 잃고 우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이들답게 아물지 않은 고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부모형제들의 원통함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부활의 주님이 희생자들과 유가족, 고통 속에 살아가는 생존자와 모든 우는 이들을 보듬어 안아 주시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 ‘무지’(無知)를 깨우쳐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1독서 도행전은 유대인들의 ‘무지’(無知)를 깨우쳐 주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오후 3시 기도시간에 맞추어 두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치유’(회복)해 줍니다(사도 3:1-8).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놀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겁쟁이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힘을 가득히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거룩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였다’고 직설적으로 선포합니다. 유대인에는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선포입니다. 능력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자신들은 그 목격자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 ‘치유’(회복)도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이 일으킨 일이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하신 일이며,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명백히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 주신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깨우침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선포해 오신 ‘성서 말씀’의 성취입니다. 유대인들은(제자들도 포함하여) 이 성서 말씀에 ‘무지’(無知)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섭리’에 ‘무지’(無知)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이 ‘배척’하고 ‘죽인’ 예수가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이사 52:13-53:12). 자신들의 행위가 성서에 기록된 예언 말씀의 성취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무지’(無知)했기에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초대합니다. 아직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용서’와 ‘위로의 때’를 맞이하리라 선포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완전한 ‘회복의 날을 예언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지’(無知)했기에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우리가 인생에서 저지르는 수많은 죄악은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누구나 지금 가는 길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온전히 안다면 돌아섭니다. 사실 우리는 뭘 좀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느님께 묻지 않습니다. 자기 경험과 지혜와 인맥으로 인생길을 족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한껏 교만을 떨다가 결국 ‘구덩이’에 빠집니다.

교우 여러분, 인생길에는 반드시 깨달아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보아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깨우치면 영원한 생명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소멸입니다. 일상의 기도는 이 진리에 ‘무지’(無知)한 삶의 자리에서 ‘앎’의 자리로, 즉 ‘어둠’에서 ‘빛’의 자리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순간들입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고, 얼마나 체험하고 있습니까?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교회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무지’(無知)했기에 하느님의 섭리를 거스른 우리의 죄악을 성령께서 깨우쳐주시거든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시편은 하느님을 향한 ‘경외’와 ‘믿음’ 위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이의 기도와 노래입니다. 그는 ‘헛일’을 좇고 ‘거짓’을 찾아 헤매는 ‘무지’(無知)한 삶, 즉 ‘불신앙’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전례독서로 선택된 이유는 1독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십자가 고난(곤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간직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한 때 고난의 삶을 살던 시인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이미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 체험이 그로 하여금 믿음을 갖고 기도를 바칠 수 있게 한 근거입니다.

시인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곤경 속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2절). 비록 고난 속에 있지만, 어떤 비방(誹謗)도 하느님을 향한 그의 ‘경외’와 ‘믿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3절). ‘하느님의 섭리’에 ‘무지’(無知)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느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라면서 불신과 분노와 원망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처럼 자신을 더럽히지 않습니다(3절). 오히려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훈계하며(2절), 하느님과의 관계를 ‘순결’하게 지켜갑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시인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임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 ‘마음의 눈이 열리어’ 시인을 향한 비방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 되면’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했고, 특히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런 ‘불신의 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그들에게 충고합니다(4절). 오히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기를 권유합니다. 그 고요의 시간은 ‘무지’(無知)했음을 겸손히 돌아보게 하는 ‘회개’로 인도합니다. 종국에는 그 시간이 주는 힘이 그들을 예배의 자리로 데려갈 것이고, 예배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과의 믿음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5절).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시인의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너무나 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깊은 ‘회의’(懷疑)를 표출합니다(6절). 고난에 압도당하여 결코 희망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곁길로 빠진 그들을 책망하기보다 ‘축복기도’로 다가갑니다. 공감의 능력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고난 속에 있던 자신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직접 나타나셨던 것처럼, 그 밝으신 얼굴을 고난 속에 있는 그들에게 비추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들도 ‘무지’(無知)로 인한 ‘회의’(懷疑)의 자리에서 ‘경외’와 ‘믿음’의 자리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이 시편이 ‘부활 3주일’에 선정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오늘 복음서는 바로 이 시편 후반부의 현실화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무지’(無知)로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빈무덤을 확인한 여성들과 예수님의 발현을 전하는 엠마오 제자들의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헛소리와 헛것을 본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누가 좋은 일을 보여줄까?”라며 절망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오셨습니다. “밝으신 얼굴”을 보여주시고, 성서를 풀어 주시자 그들은 차츰 ‘의심’에서 ‘확신’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삶을 회복해 갑니다. 무지가 앎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기쁨’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7절). ‘물질의 소유’(곡식과 포도주)에 얽매여 살던 나로부터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물질’의 풍요에서 기쁨을 찾지 않습니다. 사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자기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고등종교는 기쁨의 근거를 자기내면에서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물질의 풍요를 축복이라기보다는 ‘독’(毒)이라 가르칩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그 기쁨의 근거가 스스로의 내면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현존하고 활동하시는 성령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지’(無知)해서 여전히 자기 바깥과 물질의 풍요에서 기쁨을 찾아 헤맵니다.

이제 시인은 참 기쁨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평안히’ 잠자리에 듭니다(8절).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느님만이 자신을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경외’와 ‘믿음’ 때문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는 이가 받는 축복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와 믿음은 우리 안에 참 기쁨을 선물합니다. 그 기쁨을 가지고 우리는 이웃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이 ‘무지’(無知)에서 벗어나도록, 그들도 하느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는 ‘안내자’(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신은 지난주에 이어 요한의 첫째 편지입니다. 부활 7주일까지 전례독서 서신으로 배정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1요한 1:1-2), 다른 구원 교리를 전하는 적대자들로부터(1요한 2:18-19) 신앙공동체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적대자들은 ‘무지’(無知)보다 더 나쁜 허망한 지식, 즉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입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다소 복잡한 당대 정신사조들의 얽힘이기에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그들은 ‘영’은 선한 것이고, ‘물질과 육신’은 악하다는 철저한 ‘영육이원론’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육신 속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천상의 존재라는 ‘특별한 지식’(靈知, gnosis)을 영혼이 직관할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지식’(앎)을 통해 자신의 영적 본성을 찾아 육체적 요소를 벗고 영적인 존재로서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 보았습니다. 일종의 ‘비밀 지식 과대주의’입니다.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는 그들 눈에 ‘하느님의 아들’이신(신성)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육체성, 인간성)으로 오셨다는 ‘성육신’과 ‘몸의 부활’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1요한 4:2-3).

그렇다면 복음서에서 증언하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어떤 분으로 보았을까요? 단지 육체의 탈을 쓴 것처럼 보인 ‘환영’(phantom)이라는 입장으로 발전합니다. 신학에서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의 지상생애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은 전부 ‘환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시어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을 그들은 ‘그리스도’로 보지 않았습니다(1요한 2:22; 3:5,16,23; 4:9,14; 5:1,5-6,11-12,20). 오히려 인간의 본질이 하느님과 ‘동등하다’는 ‘비밀스런 영적 지식’을 전해 주러 온 분으로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그리스도는 단지 천사 정도의 ‘영지’(靈知, gnosis)의 전달자이지 하느님과 똑같은 분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 몸의 부활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어째서 신약성서가 그토록 성육신과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지, 그리고 부활절기 때마다 교회가 몸을 입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전례독서를 선택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더욱이 오늘의 대부분의 ‘이단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자신들만이 그리스도로부터 그 ‘천상적 지식’을 ‘비밀스럽게’ 전수받아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육신적 삶의 요구와 유혹들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양태에 도달했기에 지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했습니다(1요한 2:9-11; 3:1-18; 4:7-21). 눈을 떠서 보면,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서신 본문은 이 지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들의 ‘영지’(靈知)에 대한 반박입니다. 장차 우리를 온전케 하는 참된 ‘회복의 날’(1독서의 위로의 때,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올 것이니 방종한 생활을 살지 말고 죄로부터 떠난 ‘순결’한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먼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회상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덕택에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의 목표입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서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고, 죄를 없애시려고 성육신 하시어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분입니다(1요한 2:2; 3:5, 16; 4:10; 5:6).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알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차 나타날 ‘심판의 빛’을 명심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순결하게 살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그리스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복음서는 지난주에 이어 ‘발현사화’입니다. 발현사화의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동일한 분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사흘 전,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 위에서 무참히 ‘허물어’졌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얻어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하고 돌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은 새 양태로 사흘 만에 ‘회복’(부활)되셨습니다. 분명 제자들이 알아볼 수 있는 몸이지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새 양태로 몸을 회복하신 주님이 죽은 것 같던 제자공동체와 ‘처음’ 만나십니다. ‘마음을 열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성서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기쁨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저녁, 어떤 집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갑작스런 소식에 어리둥절했습니다(루가 24:33). 아침에는 여인들이 전해 준 소식으로, 저녁 식사가 끝났던 밤에는 엠마오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전해준 소식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허물어졌던 몸을 회복’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들 가운데 서시며 인사를 건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제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유령’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사랑의 주님을 유령취급하다니! ‘무지’(無知)입니다. 하긴 영화에도 보면, 죽은 사람이 나타나면 유령이라고들 소리치긴 합니다. 사실, 제자들의 특기는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놀란 그들에게 예수님은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유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뿔싸! 제자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놀람과 무서움, 기쁨과 의심의 감정이 뒤범벅입니다. 그들에게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람이 찾아왔으면, 밥 좀 줘!” 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저녁식사를 드시러 오셨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으니 당연히 음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구운 생선 한 토막으로 저녁식사를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몸 그 이상인데 과연 음식을 드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만일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루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부활의 ‘육체성’입니다. 좀 더 넓게는 요한복음의 ‘성육신’처럼 예수님의 인간되심의 강조입니다. 부활사건이 보여주는 그 위대한 영광(신성)에만 빠져있지 말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간되심도(인성) 늘 기억하라는 경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처럼 고난 받으신 이야기를 다시 이어갑니다.

잡숫던 일을 멈추고 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눈빛은 경계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씨익’ 웃으시며 ‘밝은’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정말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눈빛을 마주친 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회개의 눈물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따라 ‘배신’과 ‘놀람’, ‘무서움’과 ‘의심’, ‘무지’와 ‘절망’이 말갛게 씻겨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 밝으신 얼굴을 보이시면 영혼은 봄볕 아래 새싹처럼 소생합니다. 스미어든 그 분의 낯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부활의 주님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마음과 마음이 닿으면 울고 있어도 ‘기쁨’이 솟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지’(無知)해서 깊은 절망에 빠진 그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어느새 그들은 주님을 붙들고 흐느낍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 주십니다. 그런 다음,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상기시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당신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성서에는 오래도록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려온 믿음의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성서의 증거를 제시해 주십니다. 놀라운 표현을 봅니다. 마음은 자신 말고 그 누구도 강제로 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을 열어주셨다는 표현을 통해 그들에게 부활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부활이 믿어진다는 말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열어주셨다는 뜻도 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마음을 열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서가 증언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성서의 증언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이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 즉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마음을 열어주신 목적이 그들을 조종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절망의 자리에 찾아오시고, 때로는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성서가 누구를 증언하는지를 재확인합니다. 성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누구든지 죄를 용서 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복음, 이것이 성서의 주제입니다. 사도들과 교회는 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파송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픈 말을 위해 성서를 끌어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빛을 따라 성서를 읽어가야 합니다. 성서에서 다른 주제를 찾는 일도 본질에서 어긋납니다. 인문교양으로 성서를 읽는 일은 필수이지만, 단지 그 차원으로 권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철학자 ‘니체’는 구약성서의 사건이나 인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로 읽는 방식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철학자의 눈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닌 성서 읽기는 헛일이고, 논쟁만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주제들을 찾기에 앞서 겸손히 듣고자 한다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의 회개’를 선포하는 일에 주저하곤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오늘의 과학 세상에 맞지 않는다고, 어리석어 보인다고, 걸림돌(장애물)이라고,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1고린 1:18-25). 사실 십자가와 부활, 회개는 비위에 거슬리고, 무능력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세련되지 못한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증언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의 회개 말입니다.

실제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도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의도는 명백했습니다. 복음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후예가 될 것인지 아니면, 듣기 좋은 소리를 외치는 다른 이들의 종이 될 것인지를 명백히 해야 합니다. 어떤 증인이 될 것입니까?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우리 주께서 일곱 제자들과 식사하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528

교우 여러분, 오늘 전례독서들은 “마음을 열어 무지(無知)를 깨우쳐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1독서에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인 유대인들의 ‘무지’(無知)를 깨우쳐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의 자리로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시편은 헛일을 좇고 거짓을 찾아 헤매는 ‘무지’(無知)한 삶, 즉 불신앙의 삶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서신은 ‘무지’(無知)보다 더 나쁜 허망한 지식, 즉 ‘영지주의’로부터 신자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죄로부터 떠난 ‘순결’한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복음서는 무지(無知)한 ‘마음을 열어주시어’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성령으로 ‘회복’시키시어 복음의 증인으로 파송하십니다.

이 시간, 밝으신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쁨을 주시는 그 얼굴 말입니다. 배신과 놀람, 무서움과 의심, 무지와 허물을 말갛게 씻겨 주시는 그 사랑의 눈빛 말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그 따뜻한 눈빛 말입니다. 주님께서 ‘무지’(無知)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어떤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이 완전히 정복되었음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회개는 바로 이 성서의 진리를 믿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 역시 우리 가운데 임한 하느님 나라 앞에서의 ‘회개’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복음’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회개야말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문이고, 지금 여기 그러나 아직 아닌,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교회처럼 하느님 나라 실현에 우리 모든 것을 걸겠다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그 실천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참된 기쁨을 발견한 이들은 ‘증인’이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명령하신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꾸셨던 하느님 나라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남북의 화해와 협력,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304명의 희생자들의 안식과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생존자와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4.19혁명 58주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나라 모든 시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게 한 4.19혁명의 정신을 이어가도록 기도합시다.
  4.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견진성사자 서용준(베네딕트), 김석환(토마스), 정수민(세실), 오종민(어거스틴), 이미경(카타리나), 오혜민(헬레나)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4.15. 부활3주일”의 1개의 댓글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마치 산이 구름에 잠기면 잘 보이지 않듯이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만저보고 경험하고 보고를 넘어서서 구름이 벗겨지니 주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는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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