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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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며 자기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본받아 방종하게 되고, 그들 때문에 진리의 가르침이 오히려 비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은 탐욕을 채우려고 감언이설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흙에 뿌려진 모든 씨앗에서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한껏 기대를 받았던 씨앗은 땅 속에서 썩어 잊혀져가고, 돋아난 새싹은 가꾸는 이의 정성을 독차지하며 마침내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경탄이 절로 납니다.

드러난 꽃의 자태에 빠져 땅속 씨앗을 잊은 사람은 밖으로 향한 눈만을 의지한 채 내면으로 향한 눈은 감고 사는 사람입니다. 꽃을 만끽하고, 열매의 단 맛을 즐기려면 ‘자기 죽음’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겪어내야 합니다. ‘씨앗과 열매’, ‘번데기와 나비’, ‘십자가와 부활’, 이렇게 하나의 생명체 안에서 죽음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아 모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초대에 응답해 가까이가보면, 역설적이게도 그 빛은 어둠보다 더한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좁은 문’만을 열어두고 모든 내부 통로를 닫아버립니다. 마치 용기 있게 그 문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에게만 ‘참 자아’를 비추어 주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수많은 ‘선생’들이 자신이야 말로 그 문으로 들어가 ‘빛의 조명’을 받은 ‘스승’이라며 가르침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려왔습니다. 뿌려진 씨앗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저절로 돋아나 자라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의 자연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선생의 가르침이 참 생명으로 피어날 씨앗인가를 처음부터 ‘분별’해야 할 몫을 떠맡습니다. 만일 그 씨앗이 독초로 피어날 씨앗이었다면 큰 낭패를 봅니다. 언제나 하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늘 자기 생명을 담보(擔保)한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거짓 선생을 처음부터 분별해 낼 기준은 없을까요? 진리와 함께 생명의 춤을 추었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의 대변혁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는 점을 기억해 두십시오. 그 이후 시대의 가르침은 기껏해야 그 영적 스승들의 자궁에 살고 있는 태아의 발버둥이거나, 유아기적 재롱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선생은 자신의 앎이 그 영적 스승들의 자궁에 빚지고 있음을 있지 않고, ‘자기 한계’를 겸허히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앎이란, 늘 스승의 탯줄에 빚지고 있는 자기 한계에 대한 겸허한 수용입니다.

우리의 분별 기준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풀꽃, 나무로 자라날 도토리, 꽃 사이 춤추는 꿀벌, 평생 집을 떠나지 않는 달팽이, 여름밤을 합창하는 개구리,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초원의 키다리 기린, 바다를 누비는 큰고래, 하늘 한 조각을 머금은 옹달샘과 개울물, 장엄한 폭포수와 큰 강물, 짠맛을 간직한 바다, 한 겨울 내리는 눈송이,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촘촘히 빛나는 저 별, 밤하늘 은은한 저 달빛에 이르기까지 ‘자기 죽음’, ‘자기 한계’를 알고 있지만, 유독 인간만이 이것을 잊고 날뛰다가 재앙을 초래합니다.

자기 죽음과 자기 한계에 대한 인정 없이 자기 가르침이야말로 최고라고 떠드는 이들은 다 거짓 선생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도들의 편지 2017] 오정열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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