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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18. 사순5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새 계약을 성취할 수난 때의 도래”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바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쳐진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 앞에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잘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나이다. 비오니, 연약한 우리를 성령으로 도우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쳐진 씨앗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31:31-34
  • 시편 – 51:1-12
  • 2독서 – 히브 5:5-10
  • 복음서 – 요한 12:20-33

사순절기의 기원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기간에서 유래한다고 말씀드려 왔습니다.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절대성과 십자가가 가져다준 은총의 선물을(특히 영원한 생명) 함께 묵상해 왔습니다. 오늘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할 예비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자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새 계약의 성취인 십자가 수난, 새 이스라엘인 교회,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서 감당해야 할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전례독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새 계약을 성취할 수난 때의 도래”입니다.

1독서는 하느님께서 새 계약을 세워 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맹세입니다(33절). 신약성서는 십자가 수난을 통해 그 계약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마태 26:28; 마르 14:24; 루가 22:20; 로마 11:27; 1고린 11:25; 2고린 3:6; 히브 8:6-13; 9:15). 시편 역시 새 계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1-2절, 7절).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실 수 있습니다(10절). 2독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원과 대사제로 임명받으셨다는 증언입니다. 즉 새 계약을 성취하셨다는 증언입니다. 복음서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새 계약을 성취하실 ‘수난의 때’가 도래했음을 증언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전례독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주일마다 ‘계약’을 언급하는 구약본문들을 독서해 왔습니다. 사순 1주일 ‘노아 계약’(창세 9:8-17), 사순 2주일 ‘아브라함 계약’(창세 17:1-7), 사순 3주일 ‘십계명 계약’(출애 20:1-7), 사순 4주일 ‘구리뱀 계약’입니다. 오늘은 ‘새 계약’입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항상 먼저 하느님께서 ‘계약’으로 초대하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하여 ‘계약’이 성사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새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창세 32:29).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한 민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뿐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사회의 하층민, 가난한 사람, 그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자격이 없는 ‘떠돌이’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물론 이집트에 내려가 살게 된 야곱의 후손들도 ‘히브리’에 속했습니다(참고, 창세 39:14; 47:9)

그러면 같은 혈연관계가 아닌 히브리들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야곱의 후손’으로 이집트 땅에 내려가 살게 된 70명은 430년 후 무섭게 불어났습니다(출애 1:1-7; 12:40).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계약의 성취 중 ‘하나’였습니다(창세 12:1-9; 26:1-5; 28:10-15; 46:3). 이집트 왕은 강제 노동과 사내아이 살해로 그들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출애 1:8-22). 그 때 태어난 인물이 모세입니다(출애 2:2).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고역(苦役)에 시달리던 그 히브리들이 울부짖자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또 하나’의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출애 2:23-25; 6:1-9).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세우시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출애 3:10; 7:14-30). 그들뿐 아니라 그 땅의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역사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많은 ‘잡식구들’(여러 민족), 즉 수많은 히브리들도 따라 나섰습니다(출애 12:38). 홍해를 건넌 그들과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출애 19:1-8; 24:1-11; 34:10-27). 그들은 ‘야훼’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로 약속합니다(출애 24:7). ‘이스라엘’이라는 ‘계약 공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신앙으로 응답한 ‘계약 백성’을 가리킵니다. ‘계약’은 히브리 출신인 그들을 하나로 묶는 줄이었습니다. ‘히브리’라는 사회적 약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울부짖음에 역사적 체험으로 응답하신 하느님의 역사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거였습니다. 계약에 대한 순종으로 그들 공동체는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특별한 백성이 된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조건으로 제시하셨습니다(출애 19:4-6; 20:1-17). 이제부터는 뭇 민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제의 직분’을 맡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조건이자 당부입니다. ‘계약 공동체’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의 삶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자주 계약을 파기합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착, 지파동맹체였던 판관 시대, 왕정국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왕정시대 이후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의 살마네셀 5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2열왕 17:1-6). 불과 100여년이 못되어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 제국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의 등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독서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가 위기에 처했던 40년 기간 동안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유다의 기득권자들은 북쪽의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교술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약 백성이라 할지라도(참고, 무조건적인 다윗계약(2사무 7:1-17)으로 더 공고히 됨) ‘율법’, 즉 ‘하느님의 계약 말씀’을 무시하는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죄를 들춘다는 것은 큰 용기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의 몰락을 정치나 외교술에서 찾지 않고 ‘시나이산 계약’의 위배에서 찾는 역사관을 가졌던 셈입니다. 사실 이런 역사관은 포로기 이후에 형성됩니다. 그것을 ‘신명기 역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위기의 시기에 다가올 새 계약의 날, 즉 ‘희망과 위로와 변화의 날’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31절). 하느님께서 새 계약을 세워 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맹세입니다(33절). 새 계약을 통해 탄생할 하느님 백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새 계약은 그들 조상이 시나이 산에서 받은 옛 계약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본문은 이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서 히브리인들과 ‘옛 계약’을 맺으시면서 ‘율법’을 조건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 그들이 살아야할 법을 ‘돌 판’에 새겨 모세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출애 19:4-6; 20:1-17). 율법은 그들 ‘외부’에 존재하면서 외적 행위를 규정했습니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진지하게 대하셨고, 이스라엘 역시 그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긴밀하고 동등한 관계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32절). 구약성서에서 보듯이, 율법은 겉에서 맴돌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뜻을 권고하고 가르쳐주어도(신명 6:3-4,6-7,12) 그들은 불충실했고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계획을 세우십니다(31절). 이스라엘에 재난을 내리시어 소수만 남기실 것입니다. 이른바 ‘남은 자’ 사상입니다(이사 4:3). 그들을 상대로 하느님은 새 계약을 세우실 것입니다(31절, 이사 54:9-10). 하느님은 그들에게도 ‘법’(토라)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법은 ‘외부’가 아니라 각 사람의 ‘내면’, 즉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33절). 여기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브’(leb)는 1차적으로 ‘심장’이라는 말이지만, ‘마음’, ‘의지’, ‘선한 뜻’,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의 ‘사랑’(의지) 속에 하느님의 율법, 말씀의 진리를 심어 준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은 인간을 움직여 ‘야훼의 심정’을 깨우쳐 줍니다. 내면에서부터 각 사람을 인도하여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변화의 힘이 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33절, 레위 26:12) 새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옛 계약의 백성들처럼, 새 계약의 백성도 하느님 앞에서 ‘독특성’과 ‘배타성’을 갖습니다. 과거에는 그 ‘선언’이 이스라엘의 계약 파기로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음에 새겨진 법을 따르는 이들로 인해 어김없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34절). 더욱이 이 선언은 미덥지 못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실행력’을 가집니다. 하느님이 선언하시고 보증하시는 계약이기에 그대로 ‘효력’을 미칩니다.

그러면 1독서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 계약의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독서는 ‘십자가 수난과 부활’, ‘교회’를 앞서 보여주는 ‘착상’(着想)이기에 중요합니다(이것을 우리는 지난 사순4주일 설교 중 ‘예형론’이라는 성서해석법을 통해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신약’이라는 말도 ‘새 계약’에서 유래합니다(2고린 3:6,14; 히브 9:15-1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느님과 인류의 관계를 갱신(회복)하고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약속의 성취라고 그리스도교는 선포합니다. 인류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약속은(34절)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이사 52:13-53:12; 1고린 11:25; 히브 8장; 9:15; 10:14-18).

또한 새 계약 백성으로 탄생할 새로운 공동체의 약속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탄생한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교회가 ‘새 이스라엘’입니다. 교회는 옛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새 계약 공동체’입니다. 지금도 교회인 우리 안에, 각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이 현존하시고 강하게 활동하십니다(로마 8장; 2고린 3:5-18; 에페 1:19). 성령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교회)를 대신해서 지금도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로마 8:27). 교회야말로 하느님이 당신의 법을 ‘마음’에 새겨주시어 창조하고자 하셨던 새 이스라엘입니다. 교회는 영원토록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이 시간도 우리 ‘심장’에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돌아온 탕자”, Rembrandt

시편 역시 새 계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 150편 중에서 ‘일곱 편’의 참회시(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가 있는데, 본문은 ‘네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참회’하며 묵상해 왔습니다. 악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풀어주시는 ‘은총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까지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계약의 자녀’로 ‘창조’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찬미이기에 전례독서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계약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1-2절, 7절). 하느님만이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창조하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실 수 있습니다(10절).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하느님의 계약을 바라보며 용서를 간청합니다(1-2절). 간청할 수 있는 근거는 하느님이 한없이 자비하신 분이라는 ‘신뢰’에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죄의 고백과 몸과 마음의 정화에 대한 간청입니다(3-13절). 시인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행한 죄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죄를 지었음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행위이며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파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창조하시고), 꿋꿋한 뜻(새롭고 충성된 영)을 새로 세워주시기를 간청합니다(10절). 1독서에서 언급하듯이 ‘하느님의 법’을 ‘회개하는 마음’에 새겨달라는 간청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야 비로소 하느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태도와 의지의 사람으로 새로 빚어주시라는 간청입니다. 그릇된 욕망과 덧없는 일에서 돌아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인생길을 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스스로를 하느님께서 받으실만한 합당한 제물로 드리겠다는 약속입니다(14-17절). 마지막은 예루살렘을 위한 간청입니다(18-19절).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무엇을 묵상하고 배웁니까? 하느님을 향한 궁극적 ‘신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 창조세계를 향한 의무를 자주 저버리고, 허물 많은 존재로 살아갑니다. 때때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분노합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낙심, 불안과 공포, 우울과 깊은 죄책감에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자신과의 관계마저 어긋나 자유를 상실하고 죽음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그 어두운 순간마다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파기될 수 없는 하느님의 새 계약의 자녀임을 마음에 속삭여 주십니다. 마음의 정화와 용서를 가져다주는 ‘은총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참회할 마음을 품게 됩니다(즈가 12:10). 하느님은 우리의 부서지고 고장 난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해 주십니다.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창조하시고), 꿋꿋한 뜻(새롭고 충성된 영)을 새로 세워주십니다. 의식과 존재의 변화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서 우리는 악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풀려난 새 계약의 자녀로 다시금 일어섭니다. 하느님과 이웃, 창조세계와 조화롭게 사는 한 가족으로 회복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신앙하는 덕분에 부활의 기쁨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2독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원’과  ‘대사제’(大司祭)로 임명받으셨다는 증언입니다. 독특하게도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증언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돌아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마음의 게쎄마니에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며 살아가기를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계신지도 모를 일입니다.

놀라운 증언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처럼 고난을 겪으심으로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본능적 욕망과 육정을 따르려는 ‘이기적 자아’는 고난을 통해 정화되어야 합니다. 사순절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고난이 유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 주시는 증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죽음’을 경험하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 ‘성육신’과 ‘수난’의 일들로 인해 그 분의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덕택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대사제’(大司祭)적인 섬김을 통해 새 계약의 원천, 즉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서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새 계약을 성취하실 ‘수난의 때’가 도래했음을 증언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이방인들)이 과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순례 왔습니다. 어디에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다리를 놓아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제자들 중에 그리스식 이름을(필립보와 안드레아) 가진 이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뻤습니다. 연줄이 닿은 사람은 ‘필립보’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이 ‘가르침’을 청한다는 소식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식을 일종의 ‘전조’(前兆)로 알아차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조냐면 당신의 참 본성(참 하느님, 참 인간)과 사명을 완성할 시간의 도래입니다. 1독서와 연결하자면 새 계약을 완성할 시간의 도래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 요한 12:23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번번이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참 본성이 드러나고, 사명이 완성되는 시간을 말합니다(요한 2:4; 7:6,8,30; 8:20; 12:23,27; 13:1; 17:1).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당신이 큰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참 본성과 사명이 완성되는 영광의 시간입니다. 그 영광은 무엇을 통해 성취됩니까? 역설적이게도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고난이냐면 “십자가에 높이 들리는 일”입니다. 그 일은 결코 허무한 죽음이 아닙니다. 비유를 들어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 12:24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시기 위해 발설하신 공관복음서의 ‘씨 뿌리는 자’의(마태 13:1-9,18-23) 비유와 비슷합니다(2017년 7월 16일 연중 15주일 설교를 참고하세요). 다만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수난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발설하십니다. 수난을 통해 성취할 새 계약의 풍요로움을 비유하신 셈입니다. 고난과 시련 없는 편안한 삶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다른 한편 이 비유에 나오는 ‘많은 열매’를 꼭 새 계약의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이라 성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밀알에 대한 비유를 들을 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흔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썩으면)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밀알을 살펴보면 안에는 유정란의 흰점처럼 씨의 알, 즉 ‘씨눈’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생명’이라서 죽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뿌리내리고 싹이 나려면 일단 ‘씨눈’이 제 몸둥이가 가지고 있는 영양분을 다 먹어야 합니다. 씨눈이 씨를 다 먹는 셈입니다. 그래야 이듬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씨눈, 즉 ‘진정한 생명’ 하나 살리기 위해서 우리 육신 전부를 버릴 각오를 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진정한 생명을 더 사랑하고, 우리 육신을 덜 사랑할 각오를 하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 진정한 생명과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이 명상이고,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묵상도 추가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좀 더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25절).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첫 번째 수난예고 뒤의 ‘제자도’(마르 8:34하)와 어울립니다(관련 설교를 보시려면 사순 2주일을 보세요). 그 ‘그리스인들’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제자(종)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단단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새 삶은(진정한 생명) 오직 옛 삶이 죽어야만 가능하고, 새 삶은(진정한 생명) 옛 삶을 미워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살려는 이는 진정한 생명을 열매 맺는 그분의 ‘죽음’까지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죽음을 통과한 이들은 예수님이 계신 그 ‘하늘’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예수님처럼 누리게 될 것입니다(26절).

그러나 아무리 참 본성과 사명을 완성할 ‘영광의 때’를 기다리고 굳게 결심했다 하더라도 십자가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이렇게 정직하게 토로하십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 요한 12:27

이 장면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를 대신합니다. 공관복음서는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마르 14:32-42). 세상의 죄를 대속하는 ‘새 계약의 잔’을 피하고픈 인간적 고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낍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신 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독특하게 게쎄마니가 아니라 여기에 그 고뇌의 장면을 편집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 즉 성육신의 이유를 ‘흔들림’ 속에서도 ‘굳건히’ 하셨다고 보도합니다. 마르코나 마태오복음서의 기록보다도 신속히 결론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잔을 마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새 계약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환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당당히 청원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 요한 12:28상

원문에는 “아버지, 당신의 ‘이름’(onoma)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의기도 첫 머리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듣는 듯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지만, 이름이 그 존재를 지칭하기에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마무리하며 바치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와(마르 14:36하) 같은 청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 청원은 수난이 가져올 새 계약의 풍요로움을 이미 내다보셨음을 알려줍니다. 그 고난의 때(시간)를 온 몸을 바쳐 완수하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성취됩니다. 진실로 하느님이 계약에 충실하신 분임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서도, 죽음을 통해서도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사랑 넘치는 분이신가를 드러내길 원하셨습니다. 이 목표에 붙잡혀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모본이 됩니다. 우리 역시 그런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그 청원에 하느님마저 감동하십니다. 그 감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 요한 12:28

하늘에서 들려온 이 음성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생애가 어땠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과 부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에 대한 반응은 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둥이 울렸다”고, 어떤 이들은 “천사가 말했다”고 반응했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들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 요한 12:30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려고 들려온 음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의 청원을 들으시는 분임을 확인해 주기 위해 들려온 음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 수난을 통해 앞으로 드러나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 명백히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 요한 12:31-32

그렇습니다. 십자가 수난의 때는 세상이 심판을 받는 때입니다. 반대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심판받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십자가 수난은 세상의 통치자가 사탄임을 증명해 주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해 온 사탄이 쫓겨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사탄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겠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죄악과 죽음의 세력 속에서 시달리던 인생을 해방하여 새 세상으로 옮겨주시는 때입니다. 종국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에게 비쳐질 부활의 빛이 준비되는 때입니다. 한마디로 지상생애 동안 예수님이 선포하신 ‘영생과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효력을 미치는 궁극적인 때가 완전히 도래했습니다(요한 3:14-19,36; 5:24; 9:39; 16:8-11).

그림: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고자 입맞춤하다, James Tissot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고자 입맞춤하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55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영원한 새 계약의 성취인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과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사도들이 맺는 새로운 관계, 즉 새 계약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새 계약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효력을 발휘합니다. 새 계약의 근원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고, 영원한(온전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 계약 공동체’에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교회인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승리를 나눌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다운 삶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응답은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사순절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는 많은 열매(진정한 생명)를 맺습니다. 우리는 이 밀알이 새 계약을 성취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하느님 나라)을 위해 또 하나의 밀알로 부르시는 그 ‘제자도’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어떤 행실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나눌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에 평화를 열매 맺기 위해 죽어야할 내 안의 그 하나는 무엇입니까?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지금도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그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또한 새 세상을 가져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밀알로 바치며 수난한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장에 새기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의 응답을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군복무자들과 소방관들과 경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6. 입학과 새학기를 맞는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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