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11. 사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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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십자가, 하느님의 은총 가득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복음서는 하느님의 독생자시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에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 결정된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으로 나온 진리의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답게 우리를 선한 행실로 날마다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 행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삶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민수 21:4-9
  • 시편 – 107:1-3,17-22
  • 2독서 – 에페 2:1-10
  • 복음서 – 요한 3:14-21

사순절기의 기원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기간에서 유래한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 교육은 예비 신자들뿐만 아니라 신자 모두를 포함합니다. 전례독서도 이 목적을 반영합니다. 남은 사순주일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절대성과 십자가가 가져다준 은총의 선물을(특히 영원한 생명) 전례독서를 통해 묵상해 나갈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십자가, 하느님의 은총 가득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1독서 민수기하느님이 치유의 길로 마련하신 ‘구리뱀’을 쳐다본 이들이 얻은 구원이야기입니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높이 들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의(秘義, 숨은 뜻)를 ‘원형’(原型, Archetype)으로 하고, 그 원형을 암시하는 예형(豫型, Type)으로 선택된 전례독서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대형) 성취될 ‘긍극적이고, 완전한 구원의 계시’를 미리 보여주는 ‘약속’(예형)입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쌍으로 하여 약속과 성취, 예형(豫型, Type)과 대형(對型, anti-type)의 관계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을 ‘예형론’(Typology)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기록된 사건을 예수님과 교회를 암시하는 예표(豫表)나 전조(前兆)로 해석함으로써 성서 전체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전례독서가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선정원칙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형론’은 구약성서의 복합성이나 그 자체의 의미를 지나치게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환원, 축소, 평가절하 하는 일명 “제 눈의 안경”이라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특히 유대교 입장에서 그렇지요. 전례독서 전통을 유지하는 교회는 이런 정도의 비판은 유념하고 설교를 준비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편은 1독서와 어울립니다. 광야에서 저승에 문턱에 다다른 이들이 고통 중에서 울부짖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그들을 사경(死境)에서 건져주셨다고 찬미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신 기적들을 노래로 엮어 찬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명령합니다. 그 찬미는 입술에 그쳐서는 안 되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2독서 에페소서 역시 복음서의 십자가 비의(秘義, 숨은 뜻)를 원형(原型, Archetype)으로 하고, 그 원형에 담긴 풍부한 뜻을 신자들에게 풀이해 줍니다. 물론 1독서를 배경으로 깔고 선택된 전례독서입니다. 이렇게 2독서는 복음서의 확장된 ‘대형’인 셈인데,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교훈입니다.

복음서는 십자가 비의(秘義, 숨은 뜻)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독생자시요(요한 3:16), 생명의 빛이시라 밝혀줍니다(요한 3:19).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요한 3:17)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요한 1:29). 그 일을 위해 예수님도 구리뱀처럼 십자가에서 ‘높이 들려야’ 합니다. 그 들리심으로 ‘대속적 죽음’을 완성하십니다. 이 십자가의 비의를 믿는(바라보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참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습니다.

오늘은 전례독서 전체의 예형인 1독서와 원형인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합니다.

1독서 민수기 하느님이 치유의 길로 마련하신 ‘구리뱀’을 쳐다본 이들이 얻은 구원이야기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의 여정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서신말씀처럼 그들은 식욕(식욕)이라는 ‘본능적인 욕망’과 여섯 가지 감정인 희(喜) · 노 ·애(哀)· 낙 · 애(愛)· 오(惡)라는 ‘육정’에 끌려 살 뿐이었습니다(에페 2:3). 시나이 산이 있던 광야를 출발한 그들은 연이은 음식타령과 불평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민수 11장). 결정적으로 ‘오아시스’가 있는 ‘카데스바르네아’(민수 32:8)에 머물던 그들은 가나안 정탐꾼들에게 선동당해 하느님께 ‘불신앙’을 보입니다. 그 일로 40년 동안 광야를 전전(轉轉)하는 심판을 받습니다(민수 13,14장). 이후로도 출애굽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을 때까지 그들은 본능적 욕망과 육정에 끌려 살면서 불신앙과 불평과 반역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본문도 그 여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출애굽 한 지 40년이 되던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에돔 지방을 피해 가려고 ‘호르산’을 떠나 홍해 쪽으로 돌아갑니다. 광야길이 길어지자 그들은 또 음식과 물 투정을 합니다.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지만 ‘진저리’가 난다며 불평합니다. 그 불평은 종국에는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하심을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더욱이 ‘출애굽’도 잘못이라는 식으로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듭니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가 자유인의 삶보다 더 좋다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이처럼 베풀어진 은총에 감사하기보다 불신앙과 불평과 반역으로 사는 일이 그들의 주특기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불뱀’(독사)을 보내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에 담긴 하느님의 목적을 모독한 단죄처럼 보입니다. 백성들은 겁에 질려 대든 것은 잘못이라며 뱀이 물러가도록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치료책’(治療策)을 내려주십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물린 사람들로 하여금 쳐다보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한 말씀’입니다(시편 107:20). 그 말씀을 순종하여 의지적으로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의 힘’은 구리뱀이라는 도구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치료책을 제시하신 하느님께 돌아서는 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든 그들을 향한 ‘심판’이 있었고, 하느님이 은총으로 마련하신 치료(구원)의 ‘수단’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성찰합니까? 본능적인 욕망과 육정에 끌려 살던 이스라엘의 태도는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선하신 일들’에 감사하기보다 더 큰 욕심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찬미하기보다 불평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하느님의 치료와 구원이 일어나야 한다는 식으로 통제하려 들 때도 있습니다. 가령 “불뱀에게 물렸으면 ‘해독제’나 ‘진통제’를 구해주어야지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쳐다보게 한다고 낫겠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똑같은 환경 속에 있었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방식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우리도 자신 안에 있는 이스라엘 같은 삶의 태도를 사순절기 동안 참회(懺悔)해 나갑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빛 아래 자신을 놓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그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의 본능적 욕망과 육정이 정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맑은 생각과 맑은 말과 맑은 행실로 부활을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구리뱀이라는 ‘상징물’과 쳐다보는 ‘방법’이 어째서 그런 치료(구원)의 효과를 가져왔습니까? 본문에는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상징물과 방법(수단)이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마련하신 한 말씀, 즉 ‘약속’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우선 ‘구리뱀’은 그들이 지은 죄를 단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뱀의 상징물입니다. 불뱀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구리뱀을 쳐다봄으로써 자신들의 ‘불신앙’, 즉 뿌리 깊은 ‘죄성’(sinfulness)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단지 ‘음식투정’하는 본능적 욕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말과 행동은 인간의 타락한 ‘죄성’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참고, 로마 5:19).

그들의 이런 행동은 창세기에 기록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 닿아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성’은 인간이 하느님과 이어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주인이나 동산의 주인이 아니라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이 금하신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 행동의 출발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한 마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불순종’입니다. 자기 존재의 주인도, 에덴동산의 주인(主, Lord)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주인이 금지하신 지식의 열매를 제 멋대로 따먹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피조성’(창조)이 하느님과 이어져 있음이라면, ‘타락’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감, 즉 ‘죄성’(sinfulness)의 출발입니다. 실존철학에서는 ‘소외’(estrangement)라고 합니다.

이런 해석은 사도 바울로에게 기인합니다. 로마서에서 그는 ‘아담의 타락’이라는 죄를 모든 인간에게 연결시켜서 선천적 경향, 즉 ‘죄성’(sinfulness)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나중에 성 ‘어거스틴’을 필두(筆頭)로 하여 ‘루터’, ‘칼빈’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원죄론’의 교리로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죄성’에 물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하느님의 ‘전적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이 흐름은 ‘칼 바르트’라는 현대 신학자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아무튼 구리뱀은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 육정에 끌려 사는 그들 안의 뿌리 깊은 ‘죄성’, 즉 반역만 일삼는 불신앙을 직면시키는 ‘상징’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구리뱀을 ‘직시’(直視)한다는 것은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는 의미입니다. 죄성에 의해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있어야할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한 그들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상실에서 자기자리로의 회복, 자기구축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투신’, 즉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단지 지적(知的)으로 수용하거나 동의하는 차원만은 아닙니다. 믿음은 교리적 진술에 관한 머리의 동의나 수용 차원에 갇히지 않습니다. 만일 믿음이 그렇게 지적 동의와 이해에 관한 것이기만 하다면, 아직 두뇌 발달이 덜 된 어린이들과 상대적으로 지적 능력이 감퇴한 노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 머리의 일이라기보다는 ‘전인적 투신’을 동반하는 하느님과의 친밀함임을 요한복음서는 증언합니다.

더욱이 믿음이라는 전인적 투신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입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자기 의지’로 구리뱀을 ‘쳐다보는 행위’, 즉 ‘믿음의 투신’은 오로지 ‘개인의 몫’ 입니다. 이 개인의 믿음은 오늘 복음서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차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라고 불신앙을 ‘집단으로’ 고백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집단으로 행하는 그런 죄의 고백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은 ‘개인의 책임’입니다. 다시 말해 구리뱀을 ‘쳐다봄’(투신)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약속’을 자신에게 ‘성취시키는 일’, 즉 ‘구원’을 가져오는 일은 오로지 각 ‘개인의 믿음의 행위’에 달려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인격적 응답인 ‘믿음’(쳐다봄)은 정말이지 생존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사순절기는 바로 이 인격적 믿음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 영성학교에 입학해 보내는 나날들입니다. 집단이나 남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성찰합니다. 머리의 믿음을 넘어 가슴의 믿음, 행동의 믿음을 훈련합니다.

그러면, 이 ‘구리뱀’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약 700년이(출애굽을 ‘전기연대설’인 B.C 15세기라고 가정한다면) 지난 후, 남왕국 유다의 왕은 ‘히즈키야’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도 구리뱀을 만들어 ‘느후스탄’이라 부르며, 예루살렘 성전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기념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구리뱀’이 병 고치는 힘이 있다고 믿고 제물을 살라 바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구리뱀은 우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구원의 도구가 본래 목적에서 이탈하여 그 자체로 힘을 가진 양 사람들을 현혹하거나 독자적으로 쓰이는 순간 우상이 됩니다. 히즈키야는 광야생활에 기원을 두고 있는 그 구리뱀을 산산조각 내었습니다(2열왕 18:1-8).

이 광야 사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주는 기록들이 성서 자체에 존재합니다. 제 2경전(외경)인 ‘지혜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잠시 동안 고생시키신 것은
그들을 경고하여
당신 율법의 명령을 일깨워주는 구원의 표였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그 자비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일깨워주시기 위함이었다.
– 지혜 16:6,11

신약에도 이 광야 사건을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예형론’(Typology)으로 해석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떠보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주님을 떠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 1고린 10:9

보다 직접적으로는 오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예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구리뱀이 들려진 사건은 예형으로서 그 대형(對型, anti-type)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 효력, 즉 ‘구속 사건의 비의(秘義)’를 미리 암시한다고 해석합니다(14,15절).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예형),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대형). 그 들리어진 구리뱀을 개인적으로 ‘쳐다본’ 사람들은 ‘독’으로부터 구원받아 죽지 않았습니다(예형).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바라봄) 사람은 죄의 권세인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대형).

다 이루었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91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사람들 눈에 모두 똑같이 보였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죽을 죄인이나 저주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신명 21:22-23; 갈라 3:13; 1베드 2:24). 우리가 지난주일 서신말씀에서 들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였습니다(1고린 1:23). 그러나 구원받을 우리, 즉 믿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4). 이것이 십자가의 비의(秘義)입니다. 이 모든 일은 믿음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느님이 작정하신 일입니다(1고린 1:21).

교우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향해 반드시 ‘믿음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단지 지적(知的)으로 수용하거나 동의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기상실에서 자기자리로의 회복, 자기구축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투신’을 동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는 행위는 예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투신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올라가신(요한 3:13,31; 16:28) 하느님의 독생자이십니다(요한 3:16).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중재자이십니다(요한 3:15-16).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이런 예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이들은 무엇을 선물 받습니까?

오늘 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 요한 3: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사순 1주일, 1독서 창세기에서 들은 ‘무지개 뜨는 새 계약의 세상’입니다(사순 1주일 설교를 보실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즉 땅과 그 위에 ‘숨 쉬는 모든 생명체’(nephesh chayah, 네페쉬 하야)와 하느님이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 세상입니다(창세 9:12). 하느님은 이 세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 방식이란 종국에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은총 가득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1독서 말씀처럼, 자신이 불신앙의 ‘광야’에서 죽어 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기는’ 사람은 구원(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습니다(에페 2:8). 정말이지 십자가는 ‘숨 쉬는 모든 생명체’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몸소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시’입니다(에페 2:7).

그러나 이 내맡김(투신), 즉 믿음의 태도를 거부하는 이들은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요한 3:18, 36). 더욱이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은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증거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그 자체로 결말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 부활과 승천에까지 이어지는 ‘들리어짐’의 시작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투신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독’이고, 투신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영원한 생명(구원)이 ‘현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복음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바로 지금 여기서 결정됩니다. 지금 여기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과 만나고(요한 1:3-4; 8:12; 9:5; 12:35-36, 46),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영원한 생명)을 삽니다. 하지만 내맡기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습니다(요한 3:18-19). 그 판결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지금 여기서 내리는 중입니다. 최후심판에서는 단지 그 판결이 확인될 따름입니다(마태 10:32-33, 25:31-46).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월요일 1교시에 영어시험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 시작해 9시 50분에 시험이 끝났습니다. 답안지를 걷은 영어교사가 다른 수업을 끝낸 후 오후 4시에 교무실에서 채점을 시작했습니다. 1번 김철수 80점, 2번 이영민 70점… 10번 황기영 75점. 여기까지 채점하고 교사가 커피를 한 잔 마셨습니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채점을 계속했습니다. 11번 나승주 100점, 12번 박준형 95점… 16번 서용화 75점… 20번 양정수 85점… 23번 송경주 90점… 25번 최현범 85점. 이렇게 채점을 끝내고 보니 저녁 6시가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나승주가 1등임이 언제 결정 났습니까? 저녁 6시였습니까? 아니죠. 오전 9시 50분 시험이 끝났을 때 나승주가 1등임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저녁 6시는 나승주가 1등임을 선생님이 확인해 준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와 같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 그 빛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복음에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구원(영원한 생명)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인 구원과 궁극적 죽음인 심판은,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 준 구속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그 태도(투신) 속에서 이미 현재적입니다.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여 하느님 품으로 들어갔을 때는 지금 여기서 판결난 우리의 구원을 단지 확인 받을 뿐입니다. 하지만 시편 찬미처럼(107:17), 어떤 미련한 인생들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가볍게 봅니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멸망하려고 작정한 것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를 단죄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여러 번 자신을 단죄해 왔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온 인생길을 돌이켜보면 썩 그렇게 현명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절이 그랬고, 청소년 시절이 그랬으며, 성인과 노년이 된 지금도 그렇게 지혜롭게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능적 욕망과 욕정에 끌려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며, 인색하게 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들은 빛에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영원한 생명은 빛 속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하느님은 세상(우리)을 단죄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요한 3:17).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를 그 빛 속으로 다시금 부드럽게 밀어 넣어주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원한 생명’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 ‘생명’으로 번역된 ‘조에’(zoe)라는 그리스어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에(참고 요한 1:4) 굳이 ‘영원한’(아이오니스)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끝이 있는 자연적 생명, 즉 ‘수명’에 해당하는 말은 ‘비오스’(bios)입니다. 또 ‘영원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아이오니스’(aionis)는 ‘우주적인’, ‘신적인’, ‘종말적인’이라는 다차원적인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우주적입니다. 질적으로 하느님 차원이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적 ‘수명’(壽命)과는 완전히 다른 ‘거듭난 생명’(生命)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종말론적 삶입니다. 하루하루 눈앞의 일에 급급한 삶에서 인생 전체로 시야가 넓어진 삶입니다. 속 좁은 자기중심적 삶에서 타자에게까지, 다음 세대에게까지 나를 확장시킨 삶입니다. 인간중심적 삶에서 우주 만물에게까지 나를 확장시킨 삶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나로 여기는 삶입니다. 한번뿐인 목숨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 삶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깊이에 도달한 삶입니다. 죄성, 즉 본능적 욕망과 육정을 따르던 자기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충만함에 도달한 삶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생명이 구현된 삶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폭이 영원까지 넓어지고, 공간의 폭이 우주까지 펼쳐지며, 한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조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의식과 존재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바른 행동의 결단과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는 영원한 생명의 사람이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을 아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생활입니다. 이 친밀한 교제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계시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삶입니다. 둘 도 없는 하나, 사랑 속에 거하는 공동체입니다. 심지어 요한복음에서 ‘죄’란 하느님을 아는 친밀한 지식의 ‘결핍’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로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요즘 무엇을 가까이하며 살고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 사랑을 믿고 투신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더 이상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 살지 않으며, 육정에 끌려 다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바라보며) 살며, 자신이 어둠이 아니라 빛 속에 살고 있음을 일상에서 증명해 갑니다(요한 3:21). 선한 생활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의 ‘걸작품’을 증명해 갑니다(에페 2:10). 자기 공로를 세우려는 의도에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영원한 생명’(구원)으로 불러주신 은총의 하느님을 향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에페 2:9).

사순절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런 적절한 응답이 날마다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이 우리가 실천할 선한 생활인지 기도 속에서 물으면 하느님은 우리 마음마다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듣고자 하는 귀가 있다면 말입니다.

어둠에서 참 빛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밀어 넣어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군복무자들과 소방관들과 경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6. 입학과 새학기를 맞는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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