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4. 사순3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우주의 중심(새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주의 중심이신 분을 모셨으니 이제 우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자 능력인 십자가를 볼 때마다 과거와 미래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우리 마음을 지금 여기 현재로 불러 모아 중심(균형)을 잡고, 교회인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삶으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계명을 새겨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20:1-17
  • 시편 – 19
  • 2독서 – 1고린 1:18-25
  • 복음서 – 요한 2:13-22

오늘 전례독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우주의 중심(새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독서는 율법의 기초이자 ‘중심’인 ‘십계명’을 들려줍니다. 시편은 창조 세계가 한 ‘중심’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선포한다는 찬미로 시작해서(1-6절),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그 율법’에 대한 예찬과 기도로 끝이 납니다(7-14절). 2독서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인류를 ‘하나의 중심’으로 불러 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능력(지혜)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시라는 ‘자기 선언’입니다.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43

교회력으로 우리는 사순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기의 기원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기간에서 유래합니다. 한 옛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건너 ‘자유인’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과월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이 ‘오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경험한 종살이와 출애굽, 홍해를 건넘과 광야 생활, 가나안 정착 등은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본보기’입니다(1고린 10:6,11).

예비 신자들 역시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은총의 사건을 사순절기 동안 배웁니다. 먼저 ‘인류’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음을 그들은 인식해야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세례의 물’을 적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방’과 ‘자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연 ‘부활절’에 세례 받을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 사순절기에 담겨있었습니다.

우리가 요사이 주일마다 낭독하는 전례독서들도 이 목적을 반영합니다. 우선 예비 신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이란 무엇인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이것이 사순 1주일의 전례독서들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순 2주일에 그들은 ‘믿음’이란 무엇인지, 어떤 각오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를 보다 확실히 교육받습니다. 이것은 ‘제자도’를 언급한 지난주 전례독서들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사순 3주일, 예비 신자들은 ‘십자가 사건’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배웁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방된 이스라엘은 율법의 기초이자 중심인 ‘십계명’을 통해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예비 신자들도 ‘은총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영원한 계약의 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리합니다. 또한 그들은 십가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우주 안에서의 ‘독보적’ 위치에 대해 배웁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요,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이자 힘(능력)임을 배웁니다. 바로 이런 교육의 목적으로 오늘 전례독서들은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예비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자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숙고하게 하는 초대들입니다. 앞으로 남은 사순 4, 5주일도 우리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져다주신 은총의 선물들을 묵상해 나갈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각 전례독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율법의 ‘기초’이자 ‘중심’인 ‘십계명’을 들려줍니다.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열 마디 말씀’입니다. 모든 율법의 기초이자 계약 백성인 그들이 지켜야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개의 축인데, 전반부는(1-11절) 하느님과 이스라엘, 후반부는(12절-17절) 이스라엘과 이웃과의 관계를 축으로 합니다(십계명을 해설하는 다른 설교를 보고 싶은 분은 2017.10. 8 연중 27주일 설교를 참고 하세요).

우선 이스라엘 역사의 시초가 되는 사건을 상기시키는 하느님의 ‘자기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 출애 20:2

하느님은 ‘이미’ 자기 백성들을 위해 ‘구원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 ‘과거 경험’을 통해 수립된 ‘권위’가 계약의 근거이자, 이스라엘이 계약을 준수해야 할 충성의 기초입니다.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고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절대적인 독점권’을 이스라엘에게 갖습니다(3-5절). 어떤 경쟁 상대도 하느님 얼굴 앞에 허용되지 않습니다(5절, 질투하는 신). 하느님과 그들만 얼굴을 맞대고 보아야 합니다(참고 1고린 13:12). 그 사이에 놓여서 하느님과 내가 마주할 수 없게끔 가리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이러한 배타적 권한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을 해방시킨(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절대적 의무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순종과 충성은 구원의 하느님을 향한 당연한 ‘응답’이지 강요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계약 조항들을 ‘~하지 못한다.’, ‘~하여야 한다.’의 형태로 명백히 제시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했기에 어길 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묻는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습니다(5절). 그러나 준수하는 이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받습니다(6절). 고대는 개인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 중심의 사회라는 점을 알려주는 요소들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에제키엘’ 예언자 시대에 가서는 새롭게 정립됩니다(에제 18장).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에도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일은 모욕에 해당했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7절). 가령, 일상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둘러대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 개인의 목적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아서 ‘거짓 맹세’가 되게 하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기 때문입니다(레위 19:12; 민수 30:2; 신명 23:21-23; 마태 5:33-37).

더욱이 ‘이름’은 한 인생이 걸어온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생의 스승으로 ‘신영복’ 선생님이 계십니다. 선생님이 학교에 계실 때 처음 만드신 서도반 회장이 저였습니다. 자식들 이름도 지어주셨고, 2003년 두 권의 묵상집을 낼 때는 직접 ‘제자’(題字)를 써주시며 격려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벌써 2주기가 지났습니다. 그 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신영복의 이름으로’ 라고 하면, 이것은 ‘신영복이 살아온 인생길’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기도를 끝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살아온 길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길”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이름 야훼도 야훼가 살아오신 길입니다. 결국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뜻은 길이신 하느님을 따라 걷지도 않을 거면서 ‘함부로’ 부르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엉뚱한 길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허상, 망상, 공상으로 만드는 ‘죄’입니다.

‘안식일 준수’의(8-11절) 근거는 ‘창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창세 2:1-3, 출애 16:23-30, 31:12-17). 즉 안식일 준수는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일이자, 창조주의 쉼에 참여하는 일입니다(비교, 신명 5:15). 하느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하십니다. 구약성서에 ‘거룩하다’(qadash)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세속이나 부정한 것에서 ‘구별함’(분리됨)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께 속한 것을 ‘거룩하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일을 ‘쉼’(멈춤)으로써 안식일을 하느님께 속한 날로 구별한다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그 이름에 맞게 섬기는 ‘영광’이 됩니다. 이것을 지난 ‘주의변모주일’ 설교에서 ‘영광’(히브리어로 kabod)이라는 말이 가진 뜻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간의 거룩함’(시간을 구별함)이 안식일 준수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이 봉헌하는 모든 전례의 ‘초석’(礎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그 하루, 하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근본이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의 쉼은 가부장제 속에 살던 아이들, 종들과 일하는 가축이나 얻어먹던 사람들(외국인)에게까지 보장되었습니다. 더욱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제 팔일, 즉 진정한 평화인 주님 부활의 날로 안내하는 ‘문’이 됩니다.

지금까지 앞 선 4개의 계명들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큰 축, 즉 다른 신들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대해 교훈 받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이웃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큰 축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계명은 본래부터 이 계명이 성인(成人)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12절). 하지만 자주 이 계명은 초등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지켜야할 계명인 것처럼 말해져 온 것도 사실입니다(에페 6:1-3). 그러면 부모란 누구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어디일까요? 1차적으로는 육신의 부모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부모입니다. 그 부모가 있어야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 즉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들을 금지하는 계명들이 등장합니다. 살인, 간음(거짓 사랑), 도둑질(특히 타인의 생각, 이론), 거짓 증언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와 사회의 토대를 위협하는 심각한 악행들입니다(13-16절). 끝으로 ‘탐욕’(가부장적 성(性) 편견을 보이긴 합니다)을 다루는 계명이 등장합니다. 십계명 중 유일하게 행위가 아니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계명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어떻게 경외하며 살았고, 그들 서로와 어떻게 관계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볼 때 모든 율법의 중심인 십계명은 참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십계명과 예수님이 어떤 관련이 있어서 우리가 살펴본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계명(율법)을 재해석하시고, 완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태 5:17). 실제로 율법은 종종 독특한 문화적 가치 또는 관습을 포함합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 경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없애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신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기대를 성취 하시는 분이십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3:1-7; 요한 5:1-18). 겉으로 드러난 행위보다 마음, 즉 ‘숨은 의도’를 더 중요시하셨습니다(마태 5:21-22,27-28,31-37). 십계명(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마르 12:28-31). 사도 바울로도 이것을 따르고 있습니다(로마 13:9-10).

이제 시편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가’가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곡은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입니다. 이 곡은 ‘하이든’이 ‘헨델’의 사후(死後) ‘메시아’ 공연을 영국에서 관람한 후 그 영향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시편,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을 내용으로 한 대본에 곡을 붙였습니다. 전체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를 마무리하는 14번곡이 “저 하늘은 주의 영광을 속삭이네.”입니다. 바로 오늘 시편 19편을 가사로 한 유명한 합창곡입니다. 시간을 내서 전곡을 들어보시면 정신이 높이 솟아오름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창조 세계가 한(大) ‘중심’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선포한다는 찬미로 시작해서(1-6절),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그 율법’에 대한 예찬과 기도로 끝이 납니다(7-14절).

전반부(1-6절)는 창조 세계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노파심입니다만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창조 솜씨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용하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시편 기자는 비록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만물이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마음의 귀가 열리면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함께 경탄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우주를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 믿습니다. 수많은 ‘우연의 일치’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리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이지 밤하늘을 보면서 그 모든 별들이(시편 기자는 ‘해’마저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밝힙니다) 우연히 생겨났다고, 우리 몸의 그 정교한 작동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이 그 모두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이 무신론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후반부(7-14절)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그 율법’(다른 말로 법, 법도, 분부, 계명, 말씀, 법령)을 예찬하고, 기도합니다(7-14절). 율법이 예찬 받는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 예찬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반부의 창조 세계와의 대조가 재미있습니다. 전반부에서 창조의 메시지는 그 말소리가 없기에 들리지 않습니다(3절). 그래서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에 율법에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분명히 나타나 있어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7-9절). 더욱이 시인은 율법이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송이꿀’보다 더욱 달다고 찬미합니다(10절). 그 율법으로 자신이 ‘정화’되기를 기도합니다(12-13절). 이렇게 후반부는 ‘생기’를 주는 율법에 대한 예찬입니다. 그러나 참된 찬미는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교훈하며 끝맺습니다(11절, 14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엄격한’ 지시사항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1독서에서 보았듯이 본질적으로 율법은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평화롭게 영위하도록 깨우쳐주는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가르침’에 더 가깝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처럼, 율법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최고의 찬사를 받습니다(7-9절).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율법)은 순금덩이보다 더 소중히 여겨져야 합니다(10절). 율법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 의도하신 질서를 반영한 것이며, 존중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여러분도 이 시인처럼 창조 세계가 들려주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까? 창조 세계는 분명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책’(일반 계시)입니다. 창조 세계는 하느님을 알려주는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로마 1:19-23). 바라기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창조 세계를 창조주의 목적에 맞게 적합한 방법으로 읽게 하는(해석하도록 하는) 과학자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신론자들처럼 눈과 귀가 어두워져서 우주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음 없는 말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율법)에서 생기를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덕택에 ‘진실’(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까지 포함하여)을 보는 눈이 더욱 밝아졌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실만합니까? 사순절기를 지나는 우리가 고요히 성찰해 보아야할 중심 주제들입니다.

서신 고린토전서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인류를 ‘하나의 중심’으로 불러 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능력(지혜)입니다. 같은 십자가인데, 구원받을 사람들과 멸망할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이해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허튼소리) 보입니다(18절,23절). 왜 그렇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처럼 무능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숭배의 대상인 신(神)일 수는 없다고 사고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 지혜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십자가는 ‘모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이치’는 인간의 죄와 허물과 곤경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쁜 소식’(福音)입니다(21절). 이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치)이 하느님 사랑의 깊이와 능력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표현입니다(18절, 25절). 하느님은 십자가 복음에 가슴을 여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입니다(24절).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참 지혜가 알려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을 가리키는(이르는) 길입니다.

다 이루었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91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시라는 ‘자기 선언’입니다. 그 유명한 ‘성전정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단지 한차례의 ‘과월절’이 언급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서는 ‘세 차례’에 걸쳐 과월절을 언급합니다(요한 2:13, 6:4, 11:55). 이것을 근거로 교회는 예수님이 약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성전정화 이야기가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것으로 보도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서 기자는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유대인 남성은 1년에 3차례 큰 명절(과월절, 맥추절, 추수절)을 지키러 ‘하느님 앞’에 나와야 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출애 23:14-17).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명절이 다가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축제를 지키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3만 명 정도 살던 도시가 명절이 다가오면 30만 넘게 모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본래 하느님께 제사지내러 나올 때는 빈 손 이어서는 안 되고 ‘제물’(감사와 희생)을 봉헌해야 했습니다. 먼 거리의 순례자들이 집에서부터 제물을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연히 ‘헤로데’가 새로 조성한 성전 벽 주위에 ‘가축시장’이 생길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세’를 내야했습니다. 내국인은 거주지에서 징수해 갔지만,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 때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아무 돈으로나 내면 되는 것이 아니고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은화’(세겔)가 따로 있었습니다. ‘띠로’에서 주조된 동전이 성전세로 사용되던 공식화폐였습니다. 성전 벽 주위에 ‘환전소’가 생긴 이유입니다. 거기서 순례자들은 로마나 그리스화폐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축시장이나 환전소가 있던 곳을 정확히 지정할만한 성경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기에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종사자들은 이득을 남겼겠지만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습니다.

문제는 가축시장과 환전소를 통한 이득이 대단했다는 데 있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이 이 ‘사업’에 주도권을 쥐었을 것입니다. 정말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아마 대제사장의 일가들이 직접 운영하거나 아니면 장사꾼들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사장들은 제물로 쓸 가축을 예배자가 직접 가져왔을 때는 검역 과정에서 트집을 잡아 퇴짜를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소개하는 데서 제물을 사오도록 관여했을 것입니다. 민중들은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과월절 무렵이니 환전상들과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장사꾼들이 성전 뜰까지 시장판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신성한 전당인 ‘성전’(聖殿)은 이미 종교권력과 결탁한 탐욕의 소굴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성전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셨습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그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요한 2:14-16). 유대인들이 항의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 2:19

예루살렘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집’이라 믿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듣기에 ‘신성모독’입니다. 더욱이 평소답지 않게 폭력적인 모습(거룩한 분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까지 보이셨습니다. 도대체 이 성전정화 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대답은 17절, 19절, 21-22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1장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증언했습니다(1절). 그런데 지금 2장에서는 ‘성전’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21절).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선 유대인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배꼽)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천동설’이라 합니다. 천동설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 때까지의 보편적인 세계관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배꼽)에 위치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지상의 중심인 그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자리합니다. 하느님이 그들 공동체의 한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물리적 상징입니다. 한마디로 성전은 지구상에서 하느님이 계신 ‘가장 성스러운(거룩한)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속’(俗)된 곳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런 세계관에 기반 해 예루살렘을 천국, 지옥, 현실 세계가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 이야기를 재밌게 펼쳐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그 안에서 봉헌되는 일 때문에 가장 성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 즉 ‘새로운’ 성전이라 하신 말씀은 무엇을 내포한 선언입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예루살렘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과 현실세계라는 세 세계의 우주적 소통이 일어나는 ‘거룩한 몸’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공동체의 가장 중심에 머물러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새 성전인 예수님의 몸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자기 존재’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선언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며,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 삶이 그 고백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오늘 전례독서들에서 살펴 본 것처럼, ‘십계명’으로 대변되는 율법과 우주의 중심을 표상하는 ‘성전’이라는 거대한 두 종교 제도는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 면면히 하느님의 지혜(힘)와 현존을 상징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대한 종교 제도라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그 빛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지혜(힘)와 현존은 고상한 ‘교훈’(율법)이나 웅장한 돌이 아니라 깨지고 찔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오히려 완전히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전하는 서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이 선언을 어리석음이나 걸림돌로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믿음의 근거로 간주할 것인지의 여부를 발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때 사람들은 ‘십계명’에 만족했습니다. 행위로 그 계명들을 위반하지 않으면 완전하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자 행위 이전의 마음자리를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 신화는 종식(終熄)되었습니다. 한 때 사람들은 하느님이 오직 하늘에서만 산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모세와 판관들 시절에는 ‘계약궤’를 모신 성막에 하느님이 거주하신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솔로몬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느님이 그 인상 깊은 웅장한 건축물에 거주하신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로데 대왕’이 지은 성전을 보면서도 당시 사람들은 그런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incarnation)과 함께 그러한 신화들은 종식(終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 2:19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이 계신 곳을 옮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원한다면 내 몸을 파괴 할 수 있지만, 사흘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부활 후에 사도들은 비로소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22절). 나아가 성령을 받은 후에 사도들은 하느님이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 말입니다. 결국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흘 안에 새 성전, 교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세우신다.”는 뜻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그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림: 예수의 죽음, James Tissot

예수의 죽음,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92

요즘도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이 계신다는 곳을 찾아 ‘예루살렘’, ‘바티칸’, ‘산티아고’, ‘캔터베리’ 등의 성지(聖地)를 순례합니다. 그런 곳을 다녀와 더 깊은 신앙의 길을 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곳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있다면, 더 이상 성지나 건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음을 오늘 복음에서 드러내 주십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 깨달음에 근거해 ‘교회’야 말로 ‘하느님의 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교회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교회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둘 도 없는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을 때 우리는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로 모여 함께 성찬례를 바침으로써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자 하느님을 모신 성전임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상의 자리, 즉 우리가 거하는 곳으로 이 성전을 확장해 나갑니다. ‘중심의 확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이 모든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을 가져온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으로 부르심 받은 이유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전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줍니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주고, 상처 입은 사람들과 고난 받는 사람들 편에 섭니다. 그렇게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됩니다. 이 모든 일은 탐욕에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십자가의 일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세상에 증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이제 가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십계명의 참 정신인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우주의 중심이신 분을 모셨으니 이제 우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로마 황제나 원로나 대사제나 율법학자로 대표되는 정치, 종교적 기득권층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성령 받은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그대로 우주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발밑이 바로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과거와 미래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우리 마음을 지금 여기 현재로 불러 모아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으십시오. 가서 교회인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느님을 만나게 하십시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군복무자들과 소방관들과 경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6. 입학과 새학기를 맞는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금주간 시험을 치르는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3. 4. 사순3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8. 3.18. 사순5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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