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5. 사순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은총의 계약과 최선의 응답”입니다. 사순절기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가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들입니다. 더 큰 선을 위한 ‘자기희생’을 감행하며 ‘고난’의 자리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입술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응답으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오늘은 사제 성직으로 부름받아 하느님의 교회를 섬기다 은퇴하시는 세 분의 신부님(최승철 마태, 이현우 바우로, 김영일 안토니오)들과 그 가족의 노고를 기억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주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7:1-7,15-16
  • 시편 – 22:23-31
  • 2독서 – 로마 4:13-25
  • 복음서 – 마르 8:31-38

전례독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영원한 은총의 계약과 최선의 응답”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첫 번 ‘수난 예고’와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근거한 ‘자기희생’이 그 계약의 보장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 꾸짖으십니다. 그런 다음 그 유명한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새 계약의 자녀답게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엄숙한 요구입니다.

1독서 창세기복음서의 새 계약 예고와 조화를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몸소’(일방적으로) 아브라함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는 ‘은총’의 이야기입니다(2절). 그 계약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7절). 여기서부터 후손과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복이 파생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 내외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5절, 15절). 나이 많은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가운데서 왕들이 나올 것임을 반복해서 예고하십니다(6절, 16절). 놀라운 점은 그 계약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후손들과도 대대로 맺어주시는 ‘일방적인’(자유로운, 은총의) ‘영원한 계약’이라는 점입니다(7절). 오늘 2독서 후반부에서 교훈하듯이 하느님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을 따르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은총의 ‘복음’입니다.

특히 이 대목은 마태오복음의 족보이야기에서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밝힌 부분이 참 중요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구세주’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의 구세주’도 되신다는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의 구세주, 즉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앞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써 내려가겠다는 예고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보기에 ‘이방인’일 모르지만, 하느님의 구원에서 결코 예외이지 않습니다.

시편 역시 복음서와 어울려 예수님이 수난과 죽으심으로 이루실 은총의 계약에 대한 찬미입니다. 특히 오늘 성시로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시편 22편 전반부(1-21절) 중에서 1-2절, 6-8절, 18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외치신 말씀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후반부(22-31절)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하는 찬미로 마감됩니다(24절, 29절, 31절). 한마디로 전세 역전입니다.

2독서 로마서 역시 복음서와 조화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로는 1독서에 기록된 ‘영원한 계약’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언뜻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는 교훈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오직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만’이 아브라함과 맺은 영원한 약속(구원)의 근거이자 보장이라는 교훈입니다(13절b). 다시 말해 계약의 참된 근거와 보장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차지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선행이든 율법준수든 그 어떤 것도 우리 구원의 보장일 수 없습니다(14절).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철저히 ‘무능력’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만이 구원의 궁극적 근거이자 보장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해 나갑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구원과 희망의 하느님을 믿었습니다(17절-19절).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20-21절). 그렇게 하느님을 드러냈기에 그의 믿음은 칭송을 받습니다(22절).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도 구원의 근거와 보장을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이라 굳게 믿은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이 구세주이심을 드러내는 일이 바로 믿음입니다. 바꾸어 말해 예수님이 자발적인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에게 가져다주신 은총과 구원의 계약에 대한 증언이 바로 ‘믿음’입니다(25절).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칭송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샘으로 인도하기 위한 ‘마중물’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이 행하신 은총의 사건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다리’입니다. 물론 그 물을 마시고,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그런 구원을 가져다주신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몸소 그대로 성취하신 은총의 예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 마르 8:31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십니다(마르 8:31-32, 9:31-32, 10:32-34).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신다는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고를 오직 ‘제자들’에게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첫 번’ 예고에 해당합니다. 어떤 배경에서 나왔습니까?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리스도’(마르 8:29)라는 칭호를 안겨드린 후에 따라 나오는 예고입니다. 마태오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거부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마르 8:30). 그런 다음 ‘그리스도’라는 칭호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지칭하십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감추려는 의도와 그들의 저항을 고려해서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기서는 장차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명백히’ 밝히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서 서두입니다.

첫 번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마치 다른 동료들의 대변자라도 되는 냥 나섭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 수난 예고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전말(顚末)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당시에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예수님의 예고는 당신이 ‘범죄자’ 취급을 받을 것이란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대에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최고 법원’(또는 의회) 격인 ‘산헤드린’ 구성원입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도층이고, 명성이 자자한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 죽어야 할 정도라면, 예수님께 큰 죄목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Get Thee Behind Me, Satan)”,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31

베드로는 ‘항의’합니다. “펄쩍 뛰었다”는 그 뜻입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틀린 말을 할 만한 가장 정확한 순간을 붙잡아내는 아주 기발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속내를 드러내면 이렇습니다.

선생님, 그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이 만일 범죄자 취급을 받고
생을 끝내버리신다면
당신을 따라다닌 우리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지금 잘못하시는 겁니다.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을 위태롭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뜻입니다. 더 깊은 속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자신이 붙여드린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맞게 정치, 군사적인 왕이 되어주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매몰차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마르 8:33하

베드로를 ‘사탄’이라 책망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가 악마적인 영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본래 그리스어로 ‘사탄’은 재판정에서 검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검사의 책무는 무엇입니까? 피고인에게 잘못(죄)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한 것은 ‘검사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마치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처럼, 뭔가 ‘잘못’하고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다는 뜻도 됩니다. 전례독서 주제와 연결하면,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일이 잘못됐다는 뜻입니다.

또 “물러가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은 “가! 내 뒤로”(Hypage opiso mu)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마르 1:17, 20; 8:34 참조)는 주님의 부르심을 다시 듣고 있는 장면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를 따르라”도 원문에는 “내 뒤로!”(opiso mu)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가 ‘펄쩍 뛰었다’고 할 때의 그 기세(氣勢)를 능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그 유명한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마르 8:34하

‘자기희생’, ‘자기 죽음’을 요청하시는 ‘제자도’의 말씀 앞에서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를 오염시켜온 ‘번영과 성공의 신앙’은 이 말씀 앞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축복과 평안만을 간구하는 입술은 이 말씀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1945년)라는 분이 있습니다. 독일 루터교회 목사요, 신학자며, 히틀러 암살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옥살이를 하다 순교하신 분입니다. 그는 악에 저항하지 않고 ‘나치당’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히틀러를 구원자로 숭배하던 독일 제국교회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나치당’에 영합(迎合)했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했습니다. 고난의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 신앙, 신학, 삶은 ‘값싼 은혜’이자 교회를 죽이는 일이라며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순교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 전두환과 손잡고 이 땅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침묵하며 교세 성장에 앞장섰던 한국교회의 ‘자칭’(일부) 원로들과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이명박, 박근혜를 칭송하는 조찬기도회에 초대받기 위해 줄을 대던 거짓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과 ‘삶’을 일치시킨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고, 20세기 인물 중 예수님의 삶을 가장 닮은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서 본문으로 시작하는 그의 책 「The Cost of Discipleship」(국내 출판: 나를 따르라) 제 1장, 4절 Discipleship and the Cross(제자도와 십자가)’에서 ‘제자도’를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우리 앞에 놓인 너무나 힘든 길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시니, 그분을 굳게 붙들라는 것이다.
To deny oneself is to be aware only of Christ and no more of self, to see only him who goes before and no more the road which is too hard for us. Once more, all that self-denial can say is: “He leads the way, keep close to him.” 「The Cost of Discipleship」 – 4 Discipleship and the Cross – p43.

그 분에 따르면 “자기를 버린다.”(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탐욕에 물든 ‘옛 사람’과 ‘세상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오직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로 알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고, 어떻게 사셨기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당시의 권력과 영합(迎合)하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그들의 삶은 위선이며,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르 12:38-40; 마태 23:2-36; 루가 11:37-52, 45-47).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병자와 장애인, 여성과 이방인, 과부와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지는 정죄와 편견, 차별과 멸시에 저항하셨습니다. 더 큰 ‘선’(하느님 나라)이 통치하는 세상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란 앞서 가신 스승처럼 ‘행동’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불의한 사회 속에서 고난당하는 약자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신 예수님을 입술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기화’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행동으로 봉헌’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지금도 고난당하는 이들 속에 함께 계시며 거기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안락’(安樂)을 버리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는 일, 그 ‘좁은 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라는 본회퍼 목사의 고백입니다.

더욱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요구는 더욱 극명하게 ‘자기희생(고난)’과 ‘자기 죽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에 반역한 ‘정치범’(국사범)을 처형하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처형 장소까지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습니다(요한 19:17). 당시 권력이 예수님께 걸어 넘긴 ‘죄목’도 ‘국사범’과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로마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 했다는 고발은 그들에게 골칫거리였습니다.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걷는 그 길 끝에 그러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미 그 길로 가고 있기에 제자로 따르려는 사람은 ‘심사숙고’하라고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계속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이지 양자택일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르 8:35-38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란 말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목숨’만큼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그 ‘절대적’ 목숨을 당신께 ‘봉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목숨을 ‘옛 사람’의 완성과 ‘세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봉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봉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도’는 ‘옛 사람’과 ‘세상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 ‘자기희생’입니다.

이제, 이 ‘제자도’를 들으신 여러분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자기’가 무엇인지 한번 성찰해 보십시오.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으로 초대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버려야 될 자기는 어떤 모습의 ‘나’입니까? 꼭 큰 이상(理想)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부인해야 될 자기는 어떤 ‘나’입니까? 가정에서, 부부 관계에서, 직장에서, 교회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버려야 할 자기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짊어지고 따라야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지 한번 성찰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옳은 일’을 하다 불의한 권력으로부터 받는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남들이 자기 성공과 번영의 길을 갈 때 오롯이 이 땅의 해방과 민주화, 평화와 인권을 위해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짊어진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와 일소하지 못한 적폐로 인해 그 분들의 자기희생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제자도’를 감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십자가는 항상 개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다고 깨달은 이가 짊어집니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큰 진리(眞)’, ‘큰 선(善)’, ‘큰 아름다움(美)’이라 부릅니다. 아마 이 모두를 수용하는 말이 ‘큰 생명’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나’, ‘복음’, ‘말씀’이라 합니다(35절, 38절). 큰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 ‘제자도’를 감행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 덕택에 ‘나로부터의 자유’라는 빛을 발견한 이들이 ‘제자도’를 감행합니다. 큰 진,선,미(眞,善,美)를 향한 이타적 ‘자기희생’으로의 부르심을 온전히 깨달은 이들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 ‘절대적인 목숨’을 ‘당신’과 ‘복음’을 위해 봉헌하라고 당당히 선언하실 수 있었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마르 8:38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목숨’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을 이루어야할 생명입니다. 장차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시어 ‘준엄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 날 우리의 ‘목숨’이 완성에 동참하느냐 아니냐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를 실천했느냐에 따라 판결날 것입니다(참고 마태 25:31-46).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믿음의 실천’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판결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 목사는 옳았습니다. 그 분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역사 속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목숨은 완성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 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당대에 지도층이고, 명성이 자자한 높은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칭 옳다는 사람들입니다. 그 옳은 사람들이 어째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로들은 살아있는 ‘전통’을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들은 ‘특권’, ‘자기 주도성’을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지식)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랍비’(선생)라 불리던 이들로 ‘가르침’(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깥으로 나가지 말고 내면으로 가져와 묵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자아(ego)’입니다. 내면의 ‘원로’란 나의 오래된 ‘습’(習)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는 과거로부터 형성된 오래된 자기 인식(생각), 습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뿌리가 깊습니다. 내면의 ‘대사제’는 ‘자기 주도성’(특권)을 상징합니다. 대사제가 제사의 우두머리, 대장 노릇하듯이 우리 내면에는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대사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면의 ‘율법학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특히 ‘과거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이 참 많습니다. 그 지식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안다고 하는 그 지식이 나 뿐만 아니라 관계를 죽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재단(裁斷)합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에 맞지 않는 그리스도를 만날 경우에는 여지없이 처형해 버립니다. 이렇듯 원로, 대사제, 율법학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내 안의 ‘옛 자아’입니다.

‘율법’과 관련하여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 23:2-3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행동이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율법’은 우리가 실행하고 지켜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쉽게 말해 ‘하기 싫어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순절기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입니다.

“세리와 바리사이”,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32

어째서 기도가 하기 싫어하는 일입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는 일이 즐겁습니까? 성가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했는데(성가 2015. 430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제 경우에는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려면 일단 시간을 내야합니다.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물었으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들어야 하는 데 그 일이 싫습니다. 그렇게 묻고 듣고 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냥 자기 말만하고 빨리 끝내버립니다. 자기가 다 알아서 결론도 내립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기도를 해왔지만, 기도가 아닌 ‘빈말만’ 되풀이 해 온 역사입니다.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일종의 ‘규칙들’이고, 기도처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데 ‘완성의 길’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하기 싫은 기도를 하기 위해 앉아 있으면 우리 안에서 ‘예언자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때의 ‘예언자’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내 안의 나만이 아는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내 마음의 감정들, 시끄러운 소리들입니다. 애완(반려) 동물들과 함께 사시는 분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기도 속에서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으면, 개처럼, 돼지처럼, 뱀처럼, 원숭이처럼, 여우처럼, 사자처럼, 하이에나처럼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들짐승’처럼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이 나옵니다. 기도하느라 앉아 있으면 “내가 꼭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라고 불편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사실, 어려워서 기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해서 기도를 안 하려고 합니다. 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 보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이 자꾸만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엉망으로 살아왔는지 그것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기도하는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하기 싫어도 기도하느라 앉아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나를 완성해 가십니다. 나의 ‘의식’과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 가십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묻고, 묻고, 또 물어서 주님께 듣는 기도라는 그 율법의 길을 통해서 말입니다. 본래 묻고 듣고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자 ‘사랑의 본질’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묻고 들어서 실천하는 그 사랑의 길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완성되어 갑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로마 13:10).

그러나 이런 묻고 듣는 기도가 우리에게서 희미해져 갈 때, 우리는 주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내 안의 오래된 습(習), 내 맘대로 하려는 ‘자기주도성’,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지식’이 주님을 죽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베드로 역시 원로나 대사제나 율법학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오래된 성격적 습관, 자기 맘대로 주님을 주도하려 드는 교만, 자기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태도를 가진, 한마디로 사탄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군중과 제자’를 한 자리에 불러놓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군중’은 자기 이득을 따라 주님을 따라 다닌 이들입니다. 언제든 주님을 떠날 수 있는 이들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들입니다. ‘제자’는 배우겠다는 이들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부터 배워서 살겠다는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주님은 이 둘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둘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군중’으로 살고 있는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스승에게 배우는 ‘제자’가 되려면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자기를 버려야합니다. 이 전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기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가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들입니다. 더 큰 선을 위한 ‘자기희생’을 감행하며, ‘고난’의 자리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탐욕스런 사람들처럼 자신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이들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자신의 기대와 꿈만을 위해 살아가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으로 돌아선 이들입니다. 본회퍼 목사의 묵상처럼, 그리스도인은 진정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입술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우리는 금주간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어떻게 적절히 응답할 것입니까? 우리의 목숨을 어디에 봉헌할 것입니까? 본회퍼 목사는 자기의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자기희생’을 응답할 것입니까? 물론 희생적인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기본 원칙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십자가에 도달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실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군복무자들과 소방관들과 경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6.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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