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18. 사순1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몸소 구원의 관계를 개시(開始) 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사순절기는 몸소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부정하고, 부인할 것인가에 먼저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느님이 먼저 베푸신 그 은총을 더욱 깊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자비와 선하심에 적절한 행동으로 응답해가는 절기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응답으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홍수로써 이 세상 죄악을 씻어내셨듯이 세례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세례를 통하여 거듭난 우리가 마귀와 세속과 정욕을 이기며 성령의 능력 안에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9:8-17
  • 시편 – 25:1-10
  • 2독서 – 1베드 3:18-22
  • 복음서 – 마르 1:9-15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몸소 구원의 관계를 개시(開始) 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대홍수 후에 하느님께서 땅에서 ‘숨쉬는 모든 것들’과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으시는 이야기입니다. 노아로 대표되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이 계약 당사자로 포함됩니다. 계약의 내용은 다시는 물로 땅 위에 사는 피조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분노가 ‘은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모든 계약에는 당사자들이 지켜야할 의무조항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계약에는 아무런 의무조항이 없다는 사실이 돋보입니다. 그 계약의 표시로 쓰인 중요한 도구는 낭만적이게도 ‘무지개’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홍수와 무지개의 기원에 대해서, 그리고 그 표시가 종국에는 누구를 위한 ‘신호’(sign)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초의 일이나 자연현상(또는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신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세계관을 ‘신화’라고 합니다.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 인간을 둘러싸고 이 우주에서 진실로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즉 한 민족이나 집단에게 진실한 것으로, 신성한 것으로 믿어지는 이야기가 신화입니다. 신화는 그것을 공유하는 민족이나 집단을 하나로 결합시킬 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자부심에 영향을 끼치는 삶의 경험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에는 대홍수와 그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신화가 전해져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공포를 느끼게 하는 ‘홍수’는 자연재해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기후변화’마저도 신들이 벌인 전쟁의 결과라 해석했습니다. 특히 홍수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원초적 혼돈’으로의 복귀를 뜻하는 신화적 상징이었습니다(창세 1:2). 창조와 질서의 신은 혼돈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합니다. 다시 말해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는 늙은 혼돈의 신과 맞서 싸우는 젊은 질서의 신과의 우주적 전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 근동 창조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의 약속은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초적 혼돈으로의 복귀를 통제하기 위한 태고의 전쟁으로 창조신화는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태고의 전쟁이 끝났고, 질서의 신이 최종 승리했음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비가 갠 후에 하늘을 영롱하게 물들이는 ‘무지개’(rainbow, 히브리어로 qesheth)를 통해서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처럼 단지 자연현상이라 보지 않았습니다. 전사(戰士)인 신(神)이 사용한 ‘하늘의 활(bow)’이라 여겼습니다. 그것은 신의 신성한 무기입니다. 혼돈의 신과 벌인 태고의 전쟁에서 승리한 질서의 신이 이제 더 이상 그 활은 필요치 않기에 하늘에 걸어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처럼 무지개는 비폭풍의 종말과 다시 돌아온 평온함의 선포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신호’(sign)였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도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가 녹아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대홍수 후에, 창조 이후의 안식과 같이(창세 2:2-3), ‘우주 질서(창조)가 수립’되었음을 선포하시며 무지개를 우주적 계약의 신호로 사용하십니다. 하느님은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족쇄를 채우신 무시무시한 전사셨습니다. 하느님만이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그 힘을 발휘하실 수 있기 때문에 무지개는 이 신성한 힘을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무지개는 인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하느님께 ‘영원한 계약’을 ‘상기시켜드리는’ 신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계약에 담긴 보다 중요한 세 가지를 주목합니다.

첫째, 이 영원한 계약은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맺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함께 숨 쉬고 살아야 할 창조질서의 대상’으로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이것을 예표 했고, 광야의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지냈다는 이야기는 이 영원한 계약의 평화로운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을 인간중심의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먹는 일, 마시는 일, 집짓는 일 등등… 인간과 동식물이 창조의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 위에서 인간은 확실히 다르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땅과 그 위에 ‘숨 쉬는 모든 생명체’(nephesh chayah)를 당신의 계약의 대상으로 부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영원한 계약은 다가올 모든 세대를 포함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점점 더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는 지구의 신음을 듣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연 자원은 우리가 미래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의 핵과학자단체인 ‘핵과학자회’(BAS)는 핵 위기 등에 따른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 분침을 “23시 58분 00초로 조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지구 종말이 자정 2분전까지 왔다는 경고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 종말이 아니라 인류 종말입니다. 지속 가능한 인류,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운동의 중심에 무지개를 통해 표시되는 위대한 계약이 자리합니다. 모든 세대를 위한 하느님의 계약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다르게 사는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끝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홍수의 상징은 원초적 혼돈으로의 복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2독서에서 다루듯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당대에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었습니다(창세 6:8). 그가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방주를 지어 가족과 짐승들이 홍수의 징벌을 피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대홍수 이야기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친히 행하시는 ‘구원’이 자리합니다.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차례를 따라 지어진 시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하느님을 우러르고(1절), 믿고(2-3절), 기다린다(5절)”고 기도합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걸어야할 ‘하느님의 길’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4절). 그렇습니다. 이 시편은 ‘하느님의 길’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의 전통과 밀접히 관련됩니다. 정의의 길이나 악의 길처럼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 방향, 지향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특히 ‘길’이란 말이 하느님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인류가 걸어가도록 ‘가리키시는(가르치시는) 길’을 의미 합니다.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 자신의 ‘행동 방식’(성품)을 의미 합니다. 이 시에서 말씀하시는 ‘길’은 둘 다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행동 방식의 관점에서 길을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과(1-5절), ‘계약’과(6-7절), ‘바르고 어지심’에(8-10절)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우선,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일어나야할 ‘구원의 성격’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1-5절). 그가 병들었는지, 인간관계로 곤란을 겪고 있는지, 자연재해의 위협에 처했는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하느님의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렇게 구원을 갈망하는 이유는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성품을 찬미하고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기자가 사용하는 ‘계약의 언어’는 ‘자비’와 ‘한결 같으신 옛 사랑’에 강하게 나타납니다(6-7절). ‘자비’(compassion)로 변역된 히브리어는 ‘라캄’(racham)입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자궁’(womb)이라는 의미입니다. 산모와 아이처럼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애착을 ‘자비’라고 합니다. ‘한결 같으신’은 계약 의무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을 나타냅니다. 특히 계약의 지속성은, 1독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자비와 한결같으신 성품에 근거합니다(6절).

그는 계약을 지속시키는 하느님의 이 같은 성품을 생각해내고, 자신이 기억해 낸 젊은 날의 죄들을 비교합니다(7절). 나이든 지금은 하느님의 율법을 따라 살고 있지만, 젊은 날 그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걸었던 죄책감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죄책감을 하느님의 성품에 호소하고, 과오를 하느님께 회개합니다(7절).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품에 근거해 ‘기억하시고’(6절), ‘생각해주시기’를(7절) 간청합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생각해주시라는 간청입니까? 자신을 포함하여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사랑이며 진리인 ‘하느님의 길’(율법)을 가르쳐주시라는 간청입니다(8-10절). 하느님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겸손한 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에게조차 길을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1독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차별 없이, 일방적으로, ‘숨 쉬는’ 모두에게 세심하신 하느님의 바르심과 어지심, 즉 하느님의 의를 찬미합니다(10절).

그러나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비록 하느님의 구원 행동이 차별 없이 일방적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신다는 점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지칭하여 이미 구원받은 자라고 찬미하는 데,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우리의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영생의 관계로 들어갔다면, 우리가 이행해야할 의무는 무엇입니까? 이 관계 속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결심했었습니까?

 

특히 시편 기자가 호소한 “기억하시고, 생각해주시라”는 기도는 1독서의 ‘무지개’와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무지개를 보시고 영원한 계약을 기억(생각)하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 삶에 들이닥친 홍수 같은 삶의 혼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기억하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잠시 멈추고, ‘기도’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길’을 기억하고,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혼돈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우러르고, 믿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에게 하느님은 걸어야할 당신의 길, 즉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르쳐주소서.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보여주소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주소서.

서신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두 가지 조항의 모태가 됩니다. 하나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19절, 참고 4:6절)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22절)입니다. 이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짧게라도 위경 ‘에녹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밑에서 다룹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효력은 서신의 다른 의미들이 도출되는 주요 주제입니다(18절). 그리스도의 고난은 날마다 성전에서 희생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지면서 제공되는 죄사함처럼 속죄의 봉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행해지고, 또 개인의 죄책감을 만들어내는 속죄물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희생(죽음)은 모든 시대와 사람들에게 항상 유효합니다(참고, 히브 7:27).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인을 대신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종’처럼(이사 53:4-6),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죄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육체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종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 계셨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러 가셨다고 사도 베드로는 교훈합니다(19절). 죽은 후에 일어난(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유일한 언급입니다. 물론, 이 언급은 ‘종말론적 전통’에 대한 암시입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 선포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이 옥에 갇혀 있듯이 죽음 안에 간직되어 있다는 사상을 전제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쩔 도리 없이 죽음에 완전히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데 도대체 사도 베드로는 무엇을 참고한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몇 개의 다른 구절들을 모아 짜깁기한 ‘에녹서’라는 ‘위경’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고 알려진 ‘에녹’(창세 5:24)이 본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BC 1,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 불명의 이 책은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천사들의 타락, 거인의 탄생, 대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의 타락이 대홍수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창세기 7-9 장), 이 타락한 천사들은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택한 “하느님의 아들들”로 생각 되었습니다(참조, 창세 6:1-6).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대홍수를 예고하시기 전, 이미 노아의 조상인 ‘에녹’을 타락한 천사들에게 보내십니다. 에녹은 그들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임을 선언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 ‘에녹서’를 재해석합니다. ‘노아’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대신합니다. 또 타락한 ‘천사들’을 향한 정죄를 ‘죽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바꿉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이 있는 세계에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신 명백한 이유와 그곳에 있었던 영혼들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구절은 교회사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19절). 그러나 세부 사항은 이해되고, 전통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데, 심지어 이승의 한계를 넘어 죽음의 세계에까지 확장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와 ‘홍수’를 각각 ‘그리스도’와 ‘세례’의 유형으로 봅니다. 노아가 홍수의 물에서 다른 사람들을(비록 가족이지만) 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최후의 멸망에서 구원하십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는 그 ‘물’이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는 세례의 물을 예표 하는 것으로, 즉 세례 때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신실한 사랑의 예표입니다(21절).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새 창조에 들어가기 위해서 홍수를 견뎌야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양심’을 갖기 위해서는 세례의 물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례가 단지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교훈합니다. 오히려 부활이 그리스도의 변형(변모)의 체험이었던 것처럼 세례는 변화시키는 체험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음과 탐욕과 분노 속에 빠져 살아가던 우리가 시편의 찬미처럼, ‘하느님의 길’을 걷는 인생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우리가 하느님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남(새 창조), 하느님과 연결됨은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21절).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18절). 1독서와 시편과 연결 짓자면,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 겸손한 자 뿐만 아니라 죄인들까지도 세심하게 돌보시는 ‘자비’의 하느님 덕택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살리시려는 창조주의 자비 덕택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오르십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듯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는 영예를 차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죄 없으나 죽으신 그리스도의 정당성이 입증되었고, 그리스도는 지존이 되셨습니다. 다시 천사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반역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 천사와 천신들은 모두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의 찬가로 끝맺습니다.

복음서 마르코복음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설교 본문으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오늘은 12-15절에 초점을 맞춥니다. 광야에서의 유혹은 간결하지만 깊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에는 풍부한 전통이 담겨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성령은 하느님의 강력한 힘의 현현이었습니다. 성령은 판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원수로부터 구원하게 하셨습니다(판관 3:10). 성령은 다윗에게 부족들을 결속력 있는 민족으로 통합시키는 힘을 주셨습니다(1사무 16:13). 성령은 미천한 사람들을 세워서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이사 61:1).

이렇게 예언자들 통하여 활동하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광야의 의미에 관한 설교는 2017. 9. 3 연중 22주일 1독서 해설을 참고하십시오). 광야는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위험에 차 있는 곳입니다. 야생 동물들의 거주지였고, 도둑들의 피난처이자 사회로부터 버려진 곳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곳이 이스라엘의 시험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 사회가 제공했던 모든 지원을 박탈당한 채,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만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오랫동안 시험의 장소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40일’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돌 판에 새기던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했습니다(출애 34:28). 엘리야는 40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1열왕 19:8).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신 일과 단식은 이 같은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원래 ‘사탄’은 일종의 ‘법적인 적’으로 여겨졌습니다. 피의자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는 ‘고발자’(검사), 악의 선동과 묵인하려는 ‘유혹자’를 가리켰습니다. 포로기 후에는 욥기에서 보듯이(욥기 1:6-12) 하느님의 보좌 앞에서 사람들의 죄를 밝혀 아뢰는, 하늘 재판정의 고발자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점차적으로 하늘 또는 지하 세계에서 온 사악한 존재에 대한 여러 개별적인 특성들이 합쳐지면서 오늘 복음이야기 같은 사탄의 그림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악의 화신’인 사탄은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주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광야라는 시험의 장소로 내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시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타락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이(창세 2:19-20)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뜻합니다(이사 11:6-7). ‘마지막 아담’이신(1고린 15:45)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가야할 ‘하느님의 길’, 즉 사역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사역의 선포는 예수님 설교 내용의 요약이기도 합니다(14-15절).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 마르 1:15

너무나 짧은 선포이지만, 예수님 메시지의 주요한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시간'(kairos)이 다 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시간에 관한 설교는 2018. 1.21. 연중 3주일의 복음서 해설을 참고하십시오). 이 시간은 평범한 수명의 시간,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생명의 시간’,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종말론적 사고에서, 그것은 성취의 시간입니다. 선포에 이어서 이 특별한 시간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통치(다스리심)의 도래(到來)입니다. 하느님의 현현(顯現)입니다.

우리가 몇 차례 들었다시피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느님의 통치를 기다려 왔습니다. 끊임없이 더 강력한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왕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종교적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고(metdnoia), 즉 마음을 바꾸고 당신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메시지는 간단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도발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대의 주류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처럼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일은 평생의 과업처럼 지난해 보이는 데, 예수님은 그 어려운 일을 ‘당장 감행하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사순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사순절기란 우리의 필요와 욕망을 참아내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재미들을 포기하는 시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그러면 극기, 고행, 단식, 이런 단어들을 머리에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전례독서들 뿐만 아니라 사순절기에 우리가 읽는 전례독서들은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부정하고, 부인할 것인가에 먼저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느님이 먼저 베푸신 그 은총을 더욱 깊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저는 여기에 사순절기의 진정한 핵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성취하도록 의도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때가 되어 ‘일방적’으로 행동을 개시(開始)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독서). ‘일방적’으로 희생을 개시(開始)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2독서). 우리를 위해 일방적으로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복음서). 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핵심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사순절기 전체에 대한 일종의 ‘개요’(槪要)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전례독서는 ‘우리가 갈등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시편을 제외하고, 각각의 독서는 우리가 스스로 발견 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 종류의 갈등은 1독서의 ‘홍수’처럼 사회적 갈등, 전쟁, 또는 자연재해 같은 세계를 뒤흔드는 격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통제 할 수 없는 그런 갈등의 상황 속에서 때로는 희생자가 되며 숨을 곳조차 없는 처지가 됩니다. 우리는 상처 받기 쉬우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탐욕으로 수많은 동식물이 희생당하며 숨을 곳조차 없는 처지로 사라져갑니다. 하느님은 그 옛날 방주를 예비하시어 숨 쉬는 것들을 구원하셨고, 무지개로 영원한 계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무지개를 볼 때마다 교회는 이 시대의 모든 생명들을 위한 차별 없는 방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주간 설교를 준비하면서 닭의 수명을 찾아보았습니다. 누가 그런 관찰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수명은 평균 7~12년 정도이고, 양계장에서 기르지 않는 닭이라면 15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산다고 합니다. 그 정보를 읽고서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야할 닭이 불과 100일도 못 살고 우리의 고기로 희생당하는 것이지요. 앞으로도 닭을 먹긴 먹겠지만, 숨 쉬는 모든 것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과 관련해 생각해볼 때, 그야말로 생각해 볼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갈등은 2독서의 ‘깨끗한 양심’처럼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충성과 불순종 사이의 투쟁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이 투쟁의 고통 속에 있으며, 오직 하느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 할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세 번째 종류의 갈등은 복음서의 ‘광야’라는 말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유혹과 함께 고군분투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복음이야기는 정말 냉철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의 모습을 정확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때로는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전례독서들은 우리가 갈등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은 이 갈등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는 우리와 관계를 개시(開始) 하시려는 하느님을 묘사해 줍니다. 특히 1독서는 갈등하는 삶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는 우리와 일방적으로 ‘계약적 관계’를 개시(開始) 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혼돈에 빠져있는 세상을 ‘일방적’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숨 쉬는 모든 것과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계약’을 상기하시려고 하늘에 무지개까지 거십니다.

2독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그들을 삶의 혼돈으로부터 구원해 줄 ‘세례’를 제공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복음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증언합니다. 거기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승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경우에 구원의 놀라운 행동을 ‘일방적’으로 개시(開始)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즉 무지개로 표시되는 영원한 계약, 세례, 도래한 하느님 통치의 선포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은 이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계약의 좋은 소식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좋은 소식이자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하느님의 통치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와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지 회개를 선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선한 것은 하느님 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복음을 일방적으로 몸소 개시(開始)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으로 다시 나타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례는 이 영광스러운 통치에 들어서는 ‘문지방’입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우리는 이 계약 관계에 우리를 초대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찬미합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사순절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그 자비와 선하심에 적절한 행동으로 응답해가는 절기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생명의 사순절기로 만들어 갑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르쳐주소서.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보여주소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주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 안전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설연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군복무자들과 소방관들과 경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7.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일본 출장을 떠나는 류상윤(베다) 교우의 안전한 귀국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1.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2.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2.18. 사순1주일”의 3개의 댓글

  1. 핑백: 2018.3.18. 사순5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2. 핑백: 2018.3.11. 사순4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3. 핑백: 2018.3.4. 사순3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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