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11. 주의변모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공현후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주일이자, 주의변모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주님입니다.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당신의 빛을 은혜로이 비추어주시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영광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빛의 자녀인 우리가 사랑의 삶을 힘차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널리 전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하 2:1-12
  • 시편 – 50:1-6
  • 2독서 – 2고린 4:3-6
  • 복음서 – 마르 9:2-9

성공회 십자가 (초록)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력은 ‘부활절’과 ‘성탄절’이라는 두 대축일을 기준으로 설정됩니다. ‘성탄절’은 해마다 12월 25일로 고정이지만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변합니다. 즉 ‘춘분’(春分) 후 음력 보름이 지나 오는 첫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준으로 주일을 제외한 평일 40일 전 수요일부터 시작입니다. 그 첫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지킵니다. 금주 수요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 시작되기 3일전인 오늘은 ‘주의 세례주일’ 이래로 계속되어온 ‘공현 후 연중시기’가 마감되는 주일입니다. 하지만 마감된 줄 알았던 연중시기가 3개월여 후에 성삼위일체주일로 다시 이어집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현일’ 이후에 맞이하는 주일을 현재처럼 ‘연중(年中) 주일’로 부르기보다 ‘공현(公顯) 후(後) 주일’로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씀드려왔습니다. 즉 ‘연중시기’(年中時期)에 속하는 밋밋한 주일이 아니라 주제가 선명한 ‘공현절기’(公顯, Epiphany)에 속하는 주일로 지키자는 주장입니다. 사실 연중시기(年中時期)는 ‘절기(節氣)가 아닌 때’라는 뜻으로, 작은 부활절이기도 한 매주일의 기쁨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더욱이 ‘공현 후 연중시기’ 복음서 주제는 ‘공현’(예수님이 세상의 구세주, 빛으로 드러나심)에 명확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성경(1독서)도 복음서에 걸맞은 본문이 배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서신(2독서)은 <복음서>와 무관하게 해당되는 책의 처음부터(복음서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도록 배정되어 있기는 합니다. 다른 말로 ‘준(准)계속 병행’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서신을 ‘공현’(公顯, Epiphany) 주제에 무리하게 결부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교우들이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지켜온 ‘공현 후 연중시기’(이하 공현절기라고 씀)를 마감하는 주일이자 ‘주의변모주일’로 지킵니다. 물론 ‘재의 수요일’이 시작되기 전인 화요일까지가 공현절기에 해당합니다. 교회는 ‘주의 세례’, ‘주의변모’, ‘십자가 수난’, ‘부활’, ‘승천’을 예수님의 ‘5대 공생애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주의변모축일’(The Feast of the Transfiguration)은 해마다 8월 6일로 고정입니다. 8월 6일이 주일과 겹칠 경우에는 다른 주일보다 우선하여 기념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성공회는 사순절기 시작을 앞둔 오늘, 즉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오늘을 ‘주의변모주일’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니까 연중시기(성삼위일체후 주일) 평일에 오는 ‘주의변모축일’과 공현절기 마감에 오는 ‘주의변모주일’이 교회력의 어느 시점에 기념되느냐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다소 구분되는 셈입니다.

요즘은 일상에서 ‘변모’(變貌)보다 ‘변화’(變化)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굳이 ‘변모’라는 말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포함한다면, ‘변모’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외양의 변화에 좀 더 치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變容, transformation)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주의변모’ 사건을 우리가 그동안 지켜온 공현절기 마감과 사순절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을 몇 걸음 앞두고 기념하는 것입니까? 왜 이 두 절기를 연결 짓는 자리에 주의변모 사건이 위치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도 체험했다시피 ‘인상’(印象) 깊은 ‘마감’은 인상 깊은 ‘출발’을 가져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지속해 온 일이라도 좀 ‘특별하게 끝내면’, 그 ‘인상’이 오래 남고, 다른 ‘시작’에도 영향을 줍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공현절기 마감 주일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좀 ‘특별한 마감’을 ‘전례독서’에서 기대합니다. 설교 머리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수난의 십자가를 거쳐 부활절을 향해 나가는, 즉 부활절의 준비인 사순절기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점을 내다보는 위치에 있는 주일이 오늘입니다. 따라서 공현절기 ‘마감’과 사순절기 ‘시작’을 시야(視野)에 넣고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주일이 오늘이고, ‘주의변모’라는 대단히 인상적인 사건이 ‘복음서’에서 채택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주의변모사건이 예수님 공생애의 정확히 절반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갈릴래아 지방으로부터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십자가, 부활로 전개됩니다. 이처럼 ‘주의변모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을 기념해 왔던 공현절기를 마감하고 후반 부분을 기념하는 사순절기로 들어가는 일종의 ‘중첩점’(重疊點)입니다. 물론 ‘사순 2주일’을 주의변모주일로 지키는 세계성공회도 있습니다(로마가톨릭도 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새로 수정되어 나오는 기도서의 사순 2주일 전례독서도 ‘주의변모사건’을 복음서로 읽도록 옵션으로 배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력으로 ‘나해’이고, 나해 동안은 ‘마르코복음’(간혹 요한복음이 배정되기도 합니다)이 복음서로 주로 봉독됩니다.

교회력에서 주의변모사건이 갖는 위상에 대한 이런 배경이해를 갖고 말씀 나눔을 진행합니다.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주님입니다.

1독서 열왕기하하느님께서 빛나는 불말과 불수레당신의 사람인엘리야하늘로 불러올리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엘리사’가 지켜보았습니다. 이 신비로운 사라짐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엘리야에 관한 수많은 추측을 낳았습니다.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했다는 확신은 그가 메시아가 오시는 종말 사건들이 있기 전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낳았습니다(말라 4:5-6; 마태 11:14; 17:10; 마르 9:11-13; 요한 1:21)

엘리사는 스승을 호위 무사처럼 끝까지 따랐기에 종국에는 영검을 두 몫이나 받았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스승의 승천을 보던 엘리사의 외침이 인상적입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로부터 자신이 죽어갈 때 이 외침을 그대로 돌려받습니다(2열왕 13:14). 이 외침은 이스라엘에서 예언자가 갖는 ‘상징성’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들려주고 있습니다. 병거와 기병은 당대의 ‘막강한 군사력’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좀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핵무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계약)을 기억하며 살게 만드는 ‘영적 스승인 예언자’ 한 사람의 가치가 그렇게 엄청난 힘과 권위와 위로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 외침 앞에서 사제로 살고 있는 제 자신의 삶의 ‘무게’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이 땅의 예언자임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정말 국민들에게 그런 힘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 성찰하게 하는 인상 깊은 구절입니다.

ㅇGiuseppe Angeli (Italian, 1712 – 1798 ), Elijah Taken Up in a Chariot of Fire, c. 1740/1755, oil on canvas, Samuel H. Kress Collection

시편하느님이 받으실 진정한 예배교훈하는 찬미입니다. 전체 23절이지만 시간관계상 6절까지만 배정했습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 형식이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특이점을 보입니다. 우선 하느님을 온 세상과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선언합니다(1-6절). 하느님은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행차 하십니다(2-3절). 자기 백성을 법정으로 소환하십니다(4절). 이유는 그들의 예배가 거짓되었기 때문이며(7-15절), 말씀(율법)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16-21절). 만일 그들이 진정한 예배와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온다면, 하느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보여주신다는 찬미입니다(22-23절).

1독서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계약)을 기억나게 하는 존재는 예언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편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진정한 예배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상기시키는 찬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여러분이 오늘 바치는 이 성찬례가 ‘영광의 하느님이’ 받으실만한 진정한 예배인지 성찰하라는 의미입니다.

서신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전하기 위해 자신을 종으로 바친 사도 바울로의 열정보여줍니다. 그 열정이 무색하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3절).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4절). 오히려 그는 복음의 빛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로 자신의 눈을 향합니다(5절).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당신의 빛을 은혜로이 비추어주시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영광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6절). 질그릇 같은 여러분과 제가 그런 축복된 인생이니 어깨를 펴고 힘을 내라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이 땅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영광임을 온전히 깨달아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삶으로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서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예수님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호위 무사처럼 따랐듯이, 세 제자가 예수님을 호위하고 산에 오른 이야기입니다.

공현절기(연중시기) 동안 우리는 ‘마르코복음서’를 통해 예수님 공생애의 전반기를 따라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번 사역지로 선택하신 지역은 ‘갈릴래아’였습니다(마르 1:14-15). 이것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이사 9:1-2, 마태 4:15-16). 그 지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 첫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악령들을 쫓아내셨습니다(마르 1:39).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도래(到來)한 하느님 나라의 성취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공생애 전반기 동안 계속되어온 갈릴래아 지방에서의 사역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조만간 예수님은 공생애 후반기를 보내시러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것입니다(마르 10:1). 거기로 가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길을 첫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예고가 있은 지 엿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어디인지는 정확한 언급이 없습니다)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들은 ‘선별’되었습니다. 선별의 이유는 예수님만 아시겠지요. 거기서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 마르 9:3

가히 ‘공현절기’를 마감하기에 손색이 없는 묘사입니다. 본문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천상적 존재로의 ‘변모’입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공현이라는 말처럼 감추어진 채로 주어져 있던 본 모습이 드러나셨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실제로 변화된 것은 제자들, 즉 그들의 ‘눈’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줄곧 당신 자신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정체성은 한 번도 변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변모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방식입니다. 다른 방식도 찾자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마술램프에 감추어져 있다가 나오는 알라딘의 ‘지니’처럼 예수께서 ‘거인’이 되셨다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빛나는 모습’으로 묘사한 이유는 뭘까요? 무엇을 전해주려는 묘사일까요?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하느님’이라고 증언하는 경우가 드뭅니다(참고 요한 20:28).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우레와 번개, 나팔소리, 연기, 구름, 불, 바람, 지진 등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임재’(臨齋),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묘사하는 여러 물리적 현상들이 있습니다(출애 16:10; 19:16-18; 20:18, 24:15-18; 40:34-38; 레위 9:6,23; 1열왕 8:10-11; 18:38; 19:11-12; 역대하 7:1-3; 이사 4:5-6). 이렇게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거룩하신 임재, 현존, 현재, 권위, 능력, 이름, 속성을 실제로 경험한 ‘인간 인식의 총체’를 하느님의 ‘영광’(靈光, 히브리어로 카보드, glory)이라 부릅니다(榮光보다는 靈光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맞아 보입니다).

위에서 예로든 본문들에 ‘영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보드’(kabod)입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무거움’, ‘무게’, ‘가치 있음’을 뜻합니다. 그만큼 창조주 하느님을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경홀히 관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무겁게, 존귀하게, 가치 있게, 합당하게 섬기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하느님께 사용될 때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임재나 성품을 사람이 볼 수 있게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수반합니다. 가령, ‘야훼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었다.’처럼 말입니다(출애 16:10). 특히 그 거룩하신 임재는 ‘불’처럼 인간이 다가가 만지거나 눈을 뜨고 대면할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광채’, 반짝이는 ‘밝은 빛’을 수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야훼의 영광이
마치 그 산봉우리를 태우는 ‘불’처럼 보였다.
– 출애 24:17

문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부정한’ 존재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얼굴, 찬란한 광채)을 직접 마주하면 죽는다는 점입니다(출애 33:18-23). 하느님은 부정한 것과는 공존할 수 없는 ‘삼키는(소멸하는) 불길’이시기 때문입니다(신명 4:24).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 출애 33:20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 이사 6:5

물론, 에제키엘 예언자의 경우처럼 환상 속에서 그 영광을 보았지만 죽지 않은 예외도 있습니다(에제 1:27-28). 이런 구약성경 이야기를 참고해 보면, ‘찬란한 광채’, 즉 ‘세상에서 제일가는 빛’(영광)으로 묘사한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이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임을 ‘간접적’으로 증언한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즉 하느님의 ‘영광’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감추어진 채로 주어져 있던 본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공현(公顯, Epiphany)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제자들은 이사야나 에제키엘의 경우처럼 이 ‘영광’(광채)을 보고도 죽음을 면했습니다. ‘자비’와 ‘은총’입니다. 사실 이 자비와 은총은 그들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 하느님의 영광(임재)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던 동안에 이미 그분에게서 알아볼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마태 4:16; 루가 1:79; 2:32; 요한 1:4, 9, 14, 18, 2:11, 3:19, 8:12, 9:5, 12:35-36, 46).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 요한 1:14

히브리서 기자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 히브 1:3

더욱이 성령을 통하여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영광의 하느님이 ‘거하시는’(임재란 뜻) ‘성전’이 됨으로써 그 영광에 참여한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1고린 3:16-18; 12:27; 2고린 6:16-18, 에페 2:20-22).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 1고린 3:16…12:27

하느님께서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그처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런 은총, 즉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총’을 받았습니다(마태 5:14-16; 요한 8:12, 12:36,46) 오늘 서신말씀도 그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성찰해야 합니다.

Iconography Metamorphosis Transfiguration Church

복음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 마르 9:4

어째서 그 많은 구약의 인물 중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요? 마르코복음은 루가복음과 달리 이야기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전해주지 않습니다(루가복음의 내용을 보시려면 2017. 8. 6. 주의변모(연중 18주일) 축일 설교를 참고하세요). 다만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구약성경에서 갖는 위상을 통해 그들 출현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우선 모세는 출애굽의 주역이자 율법수여자로 ‘율법의 대표’입니다. 더욱이 그는 하느님의 영광스런 뒷모습을 본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가지고(영광의 하느님과 대화하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너무 밝아서 이스라엘 백성은 눈을 가려야 했습니다(출애 34:29-35). 그는 40년 광야여정의 끝에서 ‘가나안’을 목전에 둔 후세대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 지켜야할 하느님의 율법을 ‘거듭 명령’합니다. 특히 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미래에 세워주실 것이라 예언합니다(2018. 1. 28 연중 4주일 설교를 참고하세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 신명 18:15

따라서 그의 출현은 그의 모범을 따라 나타나리라고 예언된 ‘그 예언자’가 예수님임을 증언합니다. 한마디로 모세처럼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구세주’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표’입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승천’한 예언자입니다.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했다는 확신은 그가 메시아가 오시는 종말 사건들이 있기 전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낳았습니다(말라 4:5-6). 또한 오늘 복음이야기에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마르 9:11-13), 당시 ‘묵시문학’에 심취해 있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 ‘종말 사건들’과 관련해 하늘로 올라간 이 ‘엘리야의 재림’을 기대했습니다(마태 11:14; 17:10; 요한 1:21). 결국 여기 엘리야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장차 있을 예수님의 죽음이 이 종말 사건들과 결정적으로 관련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더욱이 그의 출현은 예수님이 곧 이 ‘지상에서 하늘로’ 오르실 분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순절기를 몇 걸음 앞두고,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주의변모사건’의 중첩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둠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구세주’, 즉 ‘참 빛’이심을 드러냅니다. 또한 사순절기를 지내는 동안 십자가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부활과 승천까지도 바라보며 ‘용기를 내라’는 의미입니다. 첫 번 수난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낙심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도 분명히 언급하셨지만, 제자들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드러날 당신의 위대하신 참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어 그들이 용기를 갖도록 ‘변모의 표징’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순절기의 용기에 동참하라는 또 하나의 초대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겁에 질린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끼어듭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
– 마르 9:5

그는 그곳에 ‘초막’을 지어서 영광스러운 임재를 영원히 누리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체험을 구체화하고,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 합니다. 즉 그 체험을 ‘종말’의 영원한 축복으로 가져가고 싶어 합니다. 쉽게 말해 “이것으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 산 아래 땅에서 일어나는 세상만사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마 우리라도 그랬겠지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첫 번 수난 예고(마르 8:31)에 대한 그의 ‘몰이해’를 보여줍니다.

그가 자기 체험을 구체화하고 싶어 했던 ‘초막’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인 ‘초막절’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 34:22; 신명 16:16). 초막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매년 가을, 수확이 완료 될 때 1주간 지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 초막절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라는 점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이 ‘주의변모’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새 언약은 거기다 짓는 ‘초막’이 아니라 ‘골고타 산의 십자가’로 상징됩니다.

베드로가 그런 말을 하는 사이 ‘구름’이 일어나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느님 임재, 하느님 현현의 물리적 표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출애 24:18; 40:34; 1열왕 8:10).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 마르 9:7

그림: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다”, Nikola Sarić,http://www.nikolasaric.de/portfolio/cycle-of-life/

공현후 1주일인 ‘주님의 세례 때’는 예수님 혼자만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마르 1:11).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음성을 제자들도 듣습니다. 아직 좌충우돌하는 상태지만 그들도 그만큼 성장해 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인 예수님의 지시를 잘 경청하고 순종하는 삶입니다(신명 18:15).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실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입증합니다.

그런 다음 일순간 사건이 끝나버렸습니다. 구름도 사라지고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홀로’ 남았습니다. 율법이나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예비적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오신 지금은 그들의 역할이 모두 끝났다는 뜻입니다. 1독서의 엘리사가 자기 스승 엘리야를 마치 호위 무사처럼 철저히 따르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제자들의 몰이해와 그릇된 희망이 온전히 정화되기까지는 그 체험에 관해 비밀로 간직해야 합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는 이 체험을 나중에야 발설합니다(2베드 1:17-18). 특히 하느님의 영광이신 예수님이 ‘높은 산에 계속 계시지 않았다’는 점이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들의 반대자들 속에서, 세상 한 가운데서, 당신이 주신 빛을 발하도록 데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빛의 축제인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주의변모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가 된 이들도 ‘빛’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4-16; 요한 8:12, 12:36,46). 그리고 그 ‘빛’이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창조

교우 여러분, 창세기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 창세 1:26-27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창세 2:7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를 숨 쉬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광(현존, 임재, 얼굴, 형상)은 우리 각 사람의 내면에서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우리 서로는 이것을 늘 볼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내면이 온통 ‘자기’(생각)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보름달이 떠 있을 때는 별에서 오는 빛을 선명하게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온통 자기(생각)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 곁에 있는 교우가 빛을 발해도 그들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첫 번 수난 예고에 이어 가르치신 것처럼(마르 8:34), 우리가 ‘자기'(옛 자아와 세상적 가치)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자기 죽음)를 진다면, 우리 서로는 빛을 늘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보름달처럼 커져 있는 자기가 그믐달처럼 좀 더 줄어든다면, 우리 곁에 있는 교우의 내면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현재, 즉 하느님의 영광(광채)을 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겸손해 진다면 우리 내면에서 지금도 장엄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하느님의 현재, 즉 하느님의 빛(영광, 형상)을 다른 교우들이 항상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우리가 겸손하면 할수록 우리 모두는 더 장엄하게 빛납니다.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것이 자신의 빛을 내도록 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더 빛나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데도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2고린 4:3) 즉 하느님의 진정한 형상이신(2고린 4:4; 골로 1:15; 히브 1:3)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왜 입니까? 그것은 오늘 서신 말씀처럼, 그들의 내면이 성령의 기운이 아니라 악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2고린 4:4). 즉 사단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로의 통찰이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창세 1:3).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빛을 가지고 바울로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사도 9:3; 갈라 1:15-16).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포 속에서 이 빛이 계속 전달됩니다. 이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현재(임재, 영광)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 빛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낙심하기보다 우리에게 귀를 기울일 사람들을 희망하면서 용기 있게 착한 행실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그랬듯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듯이, 사도 바울로가 그랬듯이 스승을 향한 사랑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그것이 사순절기를 몇 걸음 앞둔 오늘, 빛의 축제인 공현절기를 마감하면서 우리 안에서 다시 힘차게 타올라야할 진실입니다.

그대는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바울로처럼,
참 빛이신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그대는 이미 빛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교우들의 가정과 새신자가 전도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 안전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설연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군복무자들과 소방관들과 경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7.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1. 교회학교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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