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4. 연중5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주님 같은 분(복음)은 없어라’입니다. 특히 고난 속에 있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그 ‘열정’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는 인생들, 용기를 잃고 좌절한 인생들, 마음에 상처 난 인생들, 병으로 고통 하는 인생들, 악령에 포로 된 인생들, 걱정과 자기 욕망에 시달리는 인생들 곁으로 다가가 ‘구원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을 닮아 ‘복음’의 열정으로 사는 이들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치시어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한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0:21-31
  • 시편 – 147:1-11
  • 2독서 – 1고린 9:16-23
  • 복음서 – 마르 1:29-39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주님 같은 분(복음)은 없어라’입니다. 특히 고난 속에 있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그 ‘열정’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는 인생들, 용기를 잃고 좌절한 인생들, 마음에 상처 난 인생들, 병으로 고통 하는 인생들, 악령에 포로 된 인생들, 걱정과 자기 욕망에 시달리는 인생들 곁으로 다가가 ‘구원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서와 조화를 이루어 1독서는 ‘이사야’배정되었습니다(이사야에 대한 배경이해는 2017.12.10. 나해 대림 2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느님과 비교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21-22절, 25절). 홀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피조세계를 유지하는 분이시며, 지상의 민족과 나라와 통치자들을 몰락시키는 ‘운명의 주관자이’십니다(23-24절). 그 강력한 ‘권능’ 앞에서는 하늘의 별들, 즉 바벨론 사람들이 운명을 결정짓는 신들이라 믿던 그 별들마저도 꼼짝 못합니다(26절). 그러니 바벨론 통치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묘사가 이스라엘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들은 지금 바벨론 ‘포로생활’ 중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하느님이라면 어째서 자신들이 포로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한 하느님의 징벌이었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은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려 행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40:1-4). 전에 이집트에 살던 선조들에게 하셨듯이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해방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40:9-11). ‘위로’와 ‘희망’의 소식입니다. 그들은 입술에서 원망과 불신앙을 버리고, 권능과 지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27-28절).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느님, 새 힘이 솟게 하시는 ‘열정’ 가득한 하느님을 믿고 바라야합니다(29-31절).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유인 같으나 때로는 세상 걱정과 자기욕망의 ‘포로’로 살아갑니다. 좋은 신자 같으나 때로는 미움과 원망, 절망과 불신앙의 구렁텅이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가만 두고 보지 못하고 손 내미시는 ‘열정’ 가득한 분이십니다. 그 손을 잡으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희망할 수 있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이 솟습니다. 독수리처럼 삶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복음입니다. 오롯이 하느님을 믿고 바란다면 말입니다.

 

시편 역시 ‘하느님 같은 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찬미입니다. 특히 복음서와 조화를 이루어 하느님을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 ‘치유의 주님’으로 찬미합니다(3절). 하느님은 별들의 ‘창조주’이시고, 슬기가 한없으신 분입니다(4-5절). 낮은 자를 들어 올리시고, 악인들은 땅에까지 낮추시는 ‘운명의 주관자’이십니다(6절). 비를 내려 풀과 곡식이 나게 하시고 까마귀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먹이고 돌보는 ‘전능한 분’이십니다(8-9절). 인간은 자기 생각과 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포로로 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10절). 그렇습니다. 이 ‘열정’ 가득한 하느님을 알아 모시는 이들의 찬미를 하느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11절).

서신 고린토전서는 복음서와 조화를 이루어 ‘복음전도 사역’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도 바울로의 ‘열정’의 기록입니다. 그의 열정은 ‘예수님을 닮은’ 마음과 행동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마치 종처럼 사역하신 예수님처럼, 그 역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자신을 바쳤습니다(16-18절). 심지어 그는 모든 사람의 종되었습니다(19절).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인간과는 전혀 다른 ‘높으신 관점’(지혜)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돌보시듯,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이 되었습니다(20-22절). 그의 관점이(의식, 지혜) 한없이 커졌다뜻입니다. 좁아터진 내 생각을 고집하며 이웃을 판단하고 평가하던 삶에서 더 큰 관점, 더 큰 눈으로 세상을 보는 ‘통합의 사람’이 되었다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율법과 자기욕망(생각)의 포로로 살고 있는 이들을 ‘복음’으로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열정적인 사도’(使徒)가 되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복음전도 사역의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주님 같은 ‘마음’(긍휼)을 지니신 분은 없습니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어떤 ‘집’에 들어가십니다(29절). 그 집에는 ‘열병’으로 기력이 소진된 한 여인이 누워 있었습니다(30절). 시몬의 장모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의 손’을 내밀어 그 여인의 마음을 만지십니다. 여인은 치유되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듭니다(31절).

이 치유 사건을 통해 그 집은 ‘복음전도의 거점’(교회)으로 변화됩니다(32-33절). 예수님의 힘이 소진(消盡)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역하실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기도’, 즉 고요 속에서 하느님과 보내신 ‘영적 교제’에 있었습니다(35절). 기도로 새 힘을 충전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십니다. 세상 걱정과 자기욕망의 포로, 병과 악령의 포로로 살고 있는 이들을 해방하는 복음전도와 치유사역의 ‘열정’을 불태우십니다(37-39절). 그렇습니다. 이 열정의 주님이 계신 곳에는 치유와 해방, 기쁨과 생명이 회복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복음’은 없습니다.

전례독서들 간의 이런 주제 연결을 가지고 이제 복음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심”, John Bridges

고대에 가난한 처지의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 정도였습니다. 첫째는 ‘의사’를 찾아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가난한 병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둘째는 ‘민간요법’입니다. 의사를 찾아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지만 아무래도 치료 효과는 떨어집니다. 세 번째는 ‘제의’(祭儀)를 통한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고대에 ‘사제’(司祭)들은 병을 치료하는 일까지 겸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제물’(祭物, 희생물)이 필요하기에 가난한 병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이처럼 고대에는 가난한 병자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더욱이 ‘병’(장애 포함)은 신이 죄인에게 내린 벌, 또는 악령에 들린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병자들(장애인들)은 ‘부정한’ 존재로 취급되었고, 가난한 병자들은 사회적으로 더 위축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랬습니다. 흔히 예수님의 3대 사역을 ‘제자훈련’(가르침), ‘복음전도’, ‘치유’라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치유사역을 통해 병자들(장애인들)에게 ‘주홍글씨’처럼 찍힌 당대의 ‘종교적 낙인’(烙印)과도 싸우셔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병(病, 장애)을 하느님께서 내리신 저주이거나 악령에 들린 것이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던 당대의 그릇된 믿음을 바로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한 인생을 돌이키시기 위해 ‘징계 수단’으로 ‘병’을 사용하시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민수 12:9-10; 신명 20:20-22,27-28). 또한 사탄(악령)에 의한 것으로 보도하는 장면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욥기 2:7; 루가 13:11-13).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시편에서 찬미하듯이 본질적으로 하느님은 ‘치유하시는 분’(야훼 라파)입니다(시편 147:3; 출애 15:22-26). 우리는 병자들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치료를 돕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복음서는 질병의 치유나 악령의 추방이 예수님을 통해 도래(到來)한 ‘하느님 나라’ 의 성취라고 합니다(루가 7:18-22).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증거가 ‘치유사역’이라고 합니다(요한 21:30-31). 사도 요한은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다시는 질병이 없을 것이라는 ‘묵시'(默示)에 도달했습니다(묵시 21:4).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이처럼 복음전도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불가결한 ‘실천’입니다. 종교권력과 당대의 잘못된 믿음에 대한 ‘저항운동’입니다.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병자들이(장애인포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여 공동체로 복귀하도록 돕는 ‘통합운동’입니다. 치유사역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사건이 아니라 병자들(장애인들)로 대표되는 그 시대 ‘소외된’ 사람들의 삶 속에 ‘현재의 사건’으로 ‘현실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당시 종교기득권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안식일 법’과 ‘정결법’ 논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병자들(장애인들)을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키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새로운 공동체)를 방해하는 ‘법해석’과 ‘세력들’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로워질 줄 아셨지만, 기꺼이 치유사역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림: "예수께서 배에 올라타고 설교하시다", James Tissot

“예수께서 배에 올라타고 설교하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84

올해는 교회력으로 ‘나해’입니다. 나해 전례독서 중 복음서는 주로 ‘마르코복음’을 읽도록 배정되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빠르게’ 행동하는 긴박감이 특징입니다. ‘곧’(즉시)이라는 단어를 복음서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그 예를 ‘연중 3주일’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 원문에도 29절과 30절에 2번이나 ‘곧’(즉시)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공동번역에는 옮기지 않았습니다(개역성경은 “회당에서 나와 곧”(29절),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30절)라고 옮겼습니다). 그만큼 이 단어를 통해 ‘행동하시는 예수님’(종으로서 섬기시는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는 마태오나 루가에 있는 ‘성탄축하 방문객’이나 ‘족보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 일이 종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르코는 자기를 비우고 종처럼 쉬지 않고 일하시며, 신속히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복음서를 이렇게 ‘서둘러’ 곧바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 마르 1:1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복음전도 사역의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소의 차이도 나지만 치유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티베리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라고도 불리며, 바다라고도 불림) 서북쪽 해안에 위치한 제법 큰 도시였습니다. ‘회당’을 나오신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 심방(尋訪)을 가십니다. 누구 ‘집’으로 가십니까? 공관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시몬(베드로)의 집’이라 하고, 마르코복음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이라 합니다.

요즘 “다스가 누구 겁니까?”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그 집은 도대체 누구 소유일까요? 본래 그들의 고향은 ‘베싸이다’(요한 1:44)입니다. 어째서 가파르나움에 또 그들의 집이 있는지 의아합니다. 부자여서 그랬을까요? 복음서 어디를 봐도 이유가 나오지 않으니 ‘상상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향이 베싸이다라는 점에 착안해서 시몬이나 안드레아가 아니라 ‘시몬의 장모의 집’이라 보고 설교를 진행하겠습니다.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 Raphael, 1515-1516

우리 옛 속담에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는 말이 있습니다. ‘처가살이’는 할 것이 못 된다는 ‘가부장 사회’의 상징어이고, 차별적인 말입니다. 시몬은 ‘처가살이’ 중입니다. 어떻게 해서 처가살이가 시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고향 베싸이다 집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이사’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고향인 ‘나자렛’을 떠나와 거주하시던 곳입니다(마태 4:13; 9:1). 예수님이 무슨 큰돈이 있어서 그 도시에다 살 집을 마련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이 다 이사 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만 온 것인지, 친구 집이었는지, 친척집이었는지, 월세였는지, 전세였는지 복음서는 침묵합니다. 회당은 여관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예수님은 가파르나움 여기 저기 있던 회당들을 전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마태오는 예수님이 가파르나움으로 ‘이주’한 사건의 중요성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기록할 정도입니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 4:14-16

복음서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때까지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된 땅의 대명사였던 ‘갈릴래아’(2018. 1.14. 연중 2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와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그곳으로 이주해 오심으로써 ‘복음전도의 중심지’가 됩니다(마태 8:5-13; 14-15; 9:1-9; 마르 2:1-12; 9:33-50; 요한 4:46-54).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므로 나중에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받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 마태 11:23-24

아무튼 예수님의 예언대로 6세기경 ‘가파르나움’은 폐허가 됩니다. 나중에야 그렇게 되었지만, 그 도시는 예수님이 거주하시고, 복음전도를 시작하신 곳이며, 제자들을 부르러 나서신 곳입니다. ‘베싸이다’ 출신의 시몬은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는 곳을 방문해 보니 마침 그곳은 처가가 있던 ‘가파르나움’이었습니다. 잘 됐다 싶어 아내를 설득합니다. 아내는 반대했지만, 생각하기보다 행동하기를 빨리 하는 남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의 ‘처가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이주로 시몬의 아내뿐만 아니라 ‘장모’의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딸네 식구만 온 것이 아니라 ‘혹’을 달고 왔습니다. 동생 ‘안드레아’도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없는 살림에 입이 늘었습니다. 게다가 사위는 더 이상 ‘고기잡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라는 무면허 ‘율법학자’를 따라다니느라 생업은 뒷전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집 떠나 지내는 날이 길어집니다. 사위가 미쳤나 싶을 정도입니다. 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은 그동안 ‘어부’로 잔뼈가 굵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에다 일종의 자영업자입니다. 생계는 누가 책임지란 말입니까? 기가 찰 노릇입니다. 딸이 불행해 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라는 ‘예언자’ 탓입니다. 넉넉하진 않더라도 그럭저럭 어부로 잘 살던 사위를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예수라는 사람을 찾아가 “내 사위를 내놓으라.” 단판을 지을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에는 사위와 딸이 돈 때문에 말다툼 하는 것을 들은 뒤로는 너무 속상해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습니다. 마침 입맛도 없던 차에 그렇게 아픈 체를 하면 사위가 마음을 돌이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4, 5일 전부터는 열이 나더니, 좀체 떨어질 줄 모릅니다.

“사도 성 야고보와 성 요한을 부르심”,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60

한편, 갈등하기는 시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이나 야고보 형제처럼 온전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일꾼들도, 배에 남겨둔 채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르 1:20). 하지만 자신은 부양해야 할 가족 때문에 ‘반쯤’ 발을 걸쳐놓았습니다(마르 1:18). 여차하면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이런 태도가 마뜩찮습니다.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라가자니 가족이 걸리고, 그렇다고 성격상 ‘반쯤’ 참여하자니 내키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돈 때문에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장모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참을 걸 그랬습니다. 그일 후로 장모가 드러누웠습니다. 며칠 째 열병에 시달리시는 데 큰일 났습니다.

‘열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주석가들은 ‘말라리아’ 같은 일종의 ‘풍토병’일 것이라 추정합니다. 오늘날은 ‘해열제’가 발달해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열병’을 단지 ‘몸’(육체)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열병, 즉 최근에 일어난 일 때문에 생긴 ‘울화병’(鬱火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몸이 고통스러운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고통은 언제나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슴)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다쳐서(혹은 닫혀서) 고통스러운 입니다. 그 고통이 몸의 증세로 나타납니다. 가슴에서 ‘열불’이 나고 답답한 상태인데 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열병’(fever)은 다른 말로 ‘흥분 상태’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러다 정말 사람이 죽게 생겼습니다. 이상도 좋고, 꿈도 좋지만 예수님 때문에 한 가정에 불행이 찾아들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오늘은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장모 걱정에 ‘회당’에 조차 가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시몬을 만날 줄 알았지만, 웬일인지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당 예배가 끝나면 예수님은 일행과 함께 그가 산다는 ‘집’으로 가실 참이었습니다. 이번에 만나면, 제자로 따라나서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꾸 주저하고 있는 시몬과 단판을 지을 작정이셨습니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곧’ 심방을 가십니다. 그런데 집 앞에 가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그 집에 들어갔던 요한이 시몬을 데리고 나옵니다. 머쓱해 하는 시몬을 대신해 요한이 상황을 전달해줍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데, 지금은 잠시 의식이 돌아왔다고 말입니다. 곁에 서있던 시몬이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 1:31

 

별로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했다는 말도, 민간요법을 썼다는 말도 없습니다. 단지 ‘곁으로’ 갔습니다….(이 부분에 주목 하십시오). 잠시 후에 ‘손’을 내밀어 부인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일으키십니다.’ 그러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시중’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급속도로 상황이 변화된 것일까요?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그 집에 일어난 일, 즉 시몬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일을 두고 상담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가십니다. 시몬의 아내와 눈인사를 나누며, 그 부인이 누워 있는 방으로 다가갑니다. 딸로부터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어머니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연합니다. 평안했던 집에 분란을 일으킨 분의 방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가만히 계십니다. 부인이 말할 때까지 잠자코 계십니다. 민망해 하는 시몬의 아내의 눈과 예수님의 눈길이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십니다. 이윽고 그녀의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속상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그 부인의 화나고 속상한 감정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십니다. 아마도 부인은 자신의 말을 그렇게 경청해 주고, 존중해 주는 예수님께 처음에는 다소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 대접은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이야기가 잦아들자 예수님은 가만 손을 대십니다.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시는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그런 다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어째서 예수님께 시몬이 필요한지, 무슨 꿈을 갖고 계시고,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인지, 시몬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찬찬히, 그렇지만 ‘열정적’으로 이야기 해 주십니다. 이야기를 듣던 그들의 마음에 평화가 솟아납니다. 예수님의 눈빛을 보며 상담을 하다 보니 어느 새 막힌 기가 확 뚫린 기분입니다. 이런 분은 살아생전 처음 만나봅니다. 그간의 의구심과 궁금증이 싹 풀립니다. 이제 일어나 보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이 ‘손’에 힘을 주시는데 그 손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잡은 손에서 뭔가 ‘특별한 기운’이 전해져 옵니다. 언제 열이 났느냐 싶게 부인의 열이 내립니다.

‘열이 내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가슴의 세계’를 경험했다뜻입니다.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 증거입니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라고 나름대로의 내적 경험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부인의 마음이 편안해졌다뜻입니다. 물론 그것은 ‘한번’이고, ‘시작’일 뿐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한번만으로도 부인은 ‘일어설 힘’이 났습니다. 일어서고 보니, 이제 예수님은 ‘내 집’에 오신 귀한 ‘손님’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주인으로서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는 게 맞습니다.

이제 그 부인은 ‘분노’의 포로에서, ‘걱정’의 포로에서 풀려났습니다. 더 이상 ‘열불 난 병자’가 아닙니다. ‘섬기는 사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열병으로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이것도 ‘부활’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사람이 용서와 섬김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도 ‘부활입니다. 본문에 ‘시중들다’(diakoneo, 섬기다, 돌보다, 봉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의 명사형이 바로 ‘섬김’(diakonia, 돌봄, 봉사), ‘종’(diakonos, 일꾼, 복음전파자)입니다. 결국 그녀의 ‘정체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으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존엄과 삶의 목적을 찾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중을 들었다’는 말은 그 부인 역시 ‘제자’가 되었다상징적 표현입니다. 사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관점(의식)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던 삶에서 더 큰 관점, 더 큰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이 치유 사건으로 가장 ‘수지’(收支)맞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시몬 베드로’입니다. 장모와 아내의 ‘시중’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도 좋다는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몬도, 그의 아내도, 장모도 살린 셈입니다. 이제 시몬은 자신을 가둔 환경적 ‘제약’에서 풀려나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가 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치유가 마을 전체로 번집니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으며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마르 1:32-34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다”는 표현은 “안식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쳐주거나 운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시작되었기에 안식일 법에 저촉(抵觸)되지 않습니다.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이 갑자기 밀려오는 이유입니다. 집이 어느새 ‘병원’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문 앞에 모여듭니다. 물론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많이’ 모였다는 뜻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시고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오로지 그 일만 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하느님,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마르코는 벌써부터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현절기’(公顯, Epiphany)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병과 마귀 들림이라는 어둠 속을 사는 이들이 ‘참 빛’을 보았습니다. 열불 났던 ‘그 집’이 예수님을 세상의 ‘참 빛’으로 드러내는 ‘거룩한 집’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의 ‘활동 거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정 교회’의 시초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의 치유와 삶의 변화가 가져온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일으켜짐’(부활)과 ‘섬김’이 어둠 속을 살던 수많은 인생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교회의 설립에는 시몬의 장모 같은 수많은 여인들의 ‘시중’(섬김)이 작용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의 변화, 즉 삶의 부활을 경험한 여인들 말입니다(마르 15:41). 훗날 시몬의 부인도 이 위대한 퍼즐의 한 조각이 됩니다(1고린 9:5).

 

오늘 복음이야기 후반부는 예수님의 ‘기도생활’과 열정 가득한 ‘전도여행’입니다.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 마르 1:35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인데도 일어나 ‘외딴 곳’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일상을 잠시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따로 떼어냈다’는 뜻입니다.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속에서 성찰하고 해야 할 일을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행동하시는 분이셨지만 그렇다고 일에 매몰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성찰과 분별의 힘은 멈추고 기도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부르셨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신만의 ‘특별한 사명’이 있는 법입니다. 일중독으로 자신을 소진시킬 것이 아니라 때로는 멈추어서 자기 마음을 돌보야 합니다. ‘예’라고만 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니오’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을 돌보는 것보다 앞 설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외딴 곳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레모스’(eremos)는 ‘버림받은’, ‘텅 빈’, ‘고적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즉 ‘광야’(eremia)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집’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곳을 꼭 물리적인 ‘광야’라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외딴 곳, 즉 광야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광야의 의미를 보고 싶으신 분은 2017. 9. 3. 연중 22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예수님은 그 곳에서 기도하십니다.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전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기도 시간이 예수님께 갖는 의미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만의 ‘유일한 인생길’(사명)을 발견하셨고(마태 4:1-11),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분별했고(마르 14:36), 기도 속에서 쉼을 얻은 후 충전된 몸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기도로 새 힘을 공급받고 제자훈련, 치유사역, 복음전도 사역을 수행하셨습니다. 사실,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앞에 머무는 그 ‘고독’의 시간을 통해 자신들의 사명을 분별 했고, 사명을 수행할 새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의도적으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만의 독특한 길(임무, 소명)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 새 힘을 공급받고 세상을 섬기는 우리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하느님과 더 깊은 영적 교제의 시간을 보낸다면 아마도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기도는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까지 사목해 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면, 가장 위대한 기도는 ‘인내’라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일상의 시간을 떼어내는 일은 비교적 잘 합니다. 하지만 ‘인내’에는 실패합니다.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을 때 너무나 빨리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주님,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인내할 용기가 있습니까? 때로는 그저 고요히 앉아서 침묵 속에 주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참고 견디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기도라는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기도는 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일단 우리는 잠시 멈추고, 기도 속에서 우리의 길을 찾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간 사이, 그 집 앞에는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시몬의 일행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삶에서 기도가 빠진 이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분별’은 달랐습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는 말에 예수님은 동의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가파르나움’으로 가시려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곳에는 치료가 필요한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으로 돌아가면 당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선택을 하십니다. 사람들 모두를 당신이 일일이 ‘다 치료해 줄 수 없음’을 분별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음’을 분별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모든 ‘해결책을 다 가지고 있지 않음’을 분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니오.’라는 결정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 수행하는 기도 속에서 일어난 분별입니다. 기도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임무를 분별한 이의 당당함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 마르 1:38

‘동네’라고 하니까 우리는 뭔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전도의 열정으로 타오르신 예수님은 더 이상 그런 한적한 곳으로 찾아다닐 새가 없습니다. 실제로 본문에 ‘동네’란 말로 번역된 그리스어 ‘코모폴리스’(komopolis)는 ‘시장이 서는 마을’(market town)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바쁜 곳’, ‘큰 동네’, ‘삶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는 이의 최종 목적지어디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 곳은 산 속이 아니라 삶의 한 복판이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삶을 위한 것이고, 삶은 기도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드디어 ‘공현절기’주제처럼, 예수님의 빛이 사방으로 두루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빛은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의 방문 때처럼 사람들이 다가올 때까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어두운 곳으로 ‘열정적으로’ 찾아 가십니다. 그 모습을 마르코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
– 마르 1:39

이처럼 아주 짧은 본문이었지만, 이 일련의 이야기를 자신의 내면으로 가지고 들어와 내적 수행의 과정으로도 묵상해 보십시오. 시몬의 장모, 병자, 마귀 들린 사람은 해결되어야 할 마음의 문제를 가진 사람을 상징합니다. 어딘가에 포로로 잡힌 사람의 상징입니다. 잘못된 인식, 허상, 망상, 공상,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서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외딴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는 기도 속에서 이런 우리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십니다. 우리도 기도 속에서 내면의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가야 합니다.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고, 회피하고픈 내 안의 약한 부분, 아프고 쓰라린 상처, 불편한 진실이 있는 내면의 갈릴래아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빛이 필요한 우리 안의 어둠의 영역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방세계를 다니며 두루 선교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필요한 ‘이방인의 땅’, 즉 ‘외국’ 너무나 많습니다. 내 안에 나로 통합되지 않은 내가 그렇게 많다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땅과 가나안 땅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땅으로만 있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는 예루살렘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이 하느님의 영역으로 온전히 ‘의식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상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사랑 아닌 것들이 사랑으로 돌아오는 삶 말합니다.

물론, 우리 내면 안에 있는 갈릴래아와 이방세계를 두루 찾아다니는 데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낸 우리 자신을 통해 내면의 선교지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이면, 비로소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해 온 무의식의 상처들이 치유됩니다. 잘못된 인식, 허상, 망상, 공상에 시달리던 우리의 의식이 바로 잡아집니다. 우리는 독수리처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Christ as the Good Shepherd at the central cemetery of Kufstein, middle of the 19th century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주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이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치유의 손길은 세상 걱정과 자기욕망의 포로로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다정스레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우리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즉 부활(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간 마음으로라도 그 손을 꽉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의(부활) 은총을 경험한 우리가 ‘섬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정이 교회처럼, 포로로 살고 있는 이웃들 사이에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는 하느님 나라 ‘선교의 거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일단 멈추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일단 우리는 잠시 멈추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기도 속에서 인내하며, 우리의 길을 발견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분명 어느 시점에서 복음이야기의 예수님처럼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해결책을 다 갖고 있진 않지만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자신의 내면을 ‘이스라엘’로 복음화한 이들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르십니다. 자,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아, 나와 함께 가자.

예수님이 친히 우리보다 앞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손을 잡고, 세상 걱정과 자기욕망의 포로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어두운 세상 속으로 들어갑시다. 그것이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이유입니다.

아, 우리 주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에겐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참된 ‘복음’이십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새신자가 전도되고 교회가 성장하기를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유복주 권사,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5.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7.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교회학교 최그레이스,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2. 4. 연중5주일”의 1개의 댓글

  1. 복음서의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저는 장로교인이지만, 제주시 서귀포-성공회 교회의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 성공회의 말씀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파 교회의 말씀도 너무나 좋네요. (허훈님의 소개로 들어왔습니다.)
    특히 예수님 자신이 모든 이들을 일일히 치유 할 수 없다는 “분별”을 하였다는 부분이 너무나 좋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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