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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8. 연중4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우리를 깨우치시는 지혜의 주님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 시편이 찬미하는 하느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깨닫게 해 주시는 ‘새 교훈의 주님’이라 증언합니다. 그의 증언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 온 악령들은 추방당하고 진정한 힘과 자유(안식)을 얻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위에서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는 것처럼 ‘사랑의 언어’로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런 맑고, 축복된 인생들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18:15-20
  • 시편 – 111
  • 2독서 – 1고린 8:1-13
  • 복음서 – 마르 1:21-28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우리를 깨우치시는 지혜의 주님입니다.

1독서 신명기는 40년 광야여정의 끝에서 ‘가나안’을 목전에 둔 모세의 회고와 명령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중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 지켜야할 하느님의 율법을 ‘거듭 명령’합니다. 신명기라는 이름과 어울립니다. 신명기(申命記, Book of Deuteronomy)는 ‘다시, 거듭되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읽은 부분의 핵심은 하느님이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미래에 세워주신다는 예언입니다. 그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지혜)을 ‘듣고 따라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복음 이야기의 예수님이 바로 그 약속된 예언자의 성취입니다.

시편은 야훼께서 하신 일들을 찬미합니다. 그 일이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일입니다(6절). 다른 하나는 ‘율법’을 세워주신 일입니다(7절). 복음서와 연결 짓자면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의 참된 의미를 해석해 주시는 지혜자시요, 슬기자이시기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둘러싼 바울로의 교훈(지식에서 사랑으로)입니다. 고대에는 가축을 신에게 ‘번제’(불에 태움)로 바치는 일이 흔했습니다. 도살한 가축을 통째로 불사르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상징적으로 바쳤고, 나머지는 제사장들과 봉헌자가 나누어 가졌습니다. 봉헌자는 그 고기를 가져다 잔치를 벌이거나 시장에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제의에 사용된 고기와 그렇지 않은 고기가 섞여 있게 됩니다. 누군가 특별히 말해 주지 않으면 구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고대인들은 음식을 통해 악령이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피하려고 가축이든 생선이든 선한 신들의 이름으로 미리 축복하곤 했습니다. 일종의 ‘축복식’ 같은 개념입니다. 이렇듯 고대인들이 먹게 되는 고기나 생선은 신들에게 바쳐진 봉헌물, 즉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고린토교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고린토교회 안에 이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아니면 먹어선 안 되는지를 두고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먹으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오염된다)이라는 ‘지식’을 갖고 있던 이들은(금욕주의) 반대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긴 했지만 하느님만이 참된 아버지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예수님을 통해 만물이 존재한다는 지식을 아직 갖지 못한 이들입니다(6-7절). 반면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지식’을 갖고 있던 이들은(열광주의, 우상은 실체가 아니다) 자유롭게 먹었습니다. 아마 서로의 지식으로 패가 갈릴 정도였나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로는 오염된다는 지식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사랑 없이 자기 지식을 뽐내는 이들에 대해서도 권위를 가지고 엄중히 말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인지 교훈합니다. 그는 믿음이 약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는 ‘사랑’을 강조합니다(9절). 왜냐하면 사랑이 빠진 지식은 교만일 뿐이고(1절), 복음서에 언급된 악령의 지식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슴의 언어’인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향상시키는 ‘지식의 완성’(지혜)입니다.

복음 이야기는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힘 있는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악령까지도 굴복하는 ‘권위 있는 새 교훈’(지혜, 사랑)을 주시는 분이 ‘회당’ 안에서 환하게 빛나고 계십니다. 이렇게 ‘공현절기’(公顯, Epiphany)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오늘은 연중 4주일이지만, 본래 사순절기를 앞두고 지내는 연중시기의 옛이름이 ‘공현절기’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공현은 “드러났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숨김없이 드러나셨음을 기뻐하고 기념합니다. 이 공현절기의 의미(주제)에 맞게 주일 복음서는 선정되고, 전례독서들도 복음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배정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회당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예수님의 빛이 사방으로 두루 퍼져 나감을 복음서 말미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떻게요?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28절) 전례독서들 간의 이런 배경 이해를 가지고 복음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안식일’(히브리어로 Shabbat,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중지하다. 멈추다”에서 유래, 쉬는 날이라는 뜻) 준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엄중한 ‘계명’입니다(출애 20:8-11; 신명 5:12-15). 또한 안식일은 하느님과 그들 사이의 영원한 계약의 ‘표’가 되는 날입니다(출애 31:13-17). 하느님은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출애 20:11). 또한 그들이 이집트의 노예였고 하느님이 그들을 해방하셨음을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신명 5:15). 안식일은 매주 일곱째 날이지만, 오늘날의 요일 개념으로 금요일 해가 진 뒤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동이 터올 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삼는 우리 문화와 비교됩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기록된 ‘밤, 낮 하루가 지났다’에서 유래했습니다(창세 1:5).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과 마을의 회당 봉사자가 세 번에 걸쳐 나팔을 붊으로써 거룩한 날의 시작과 끝을 알렸습니다. 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여러 규례들이 있습니다(대표적으로는 39가지 금지조항).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며(출애 16:29), 마을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둥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문화적 시온주의 제창자였던 ‘아하드 하암’(Ahad Ha-am 1856-1927)은 안식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회당’(그리스어로 Synagog, ‘모임’이라는 뜻)은 유대공동체의 종교와 사회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그 보다 더 중요한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우선 천문학적으로 유대인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배꼽)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천동설’이라 합니다. 이 천동설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 때까지의 보편적인 세계관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지리학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배꼽)에 위치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중심에는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자리합니다. 이 성전은 하느님이 그들 공동체의 한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물리적 상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가장 성스러운(거룩한)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차지하며,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속’(俗)된 곳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회당’은 거룩한 ‘토라’(모세오경)를 필사하여 보관한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을 종교학에서는 ‘중심의 확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기도와 찬양, 성경 낭독과 설교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회당’은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로, 집회장으로, 재판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마르 13:9; 사도 22:19; 2고린 11:24). 심지어 나그네를 환대하는 여관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회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 성전이 있던 기원전 8, 7세기경으로 추정하는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6세기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라고 주장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웠다는 주장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세기경에 회당 제도가 완성되었다 주장합니다. 이처럼 여러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기원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들었듯이, 안식일 회당 예배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예수님 시대에 이미 확고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회당에는 예배(재판,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의 책임을 맡은 ‘회당장’(율법학자이거나 바리사이파 출신)이 있고, 그를 돕는 시중꾼이 있었습니다(루가 4:20). 예배의 중심은 해당 날짜와 절기에 맞춰 ‘토라’(모세오경)를 낭독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매번 ‘예언서’(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분류하는 구약성경의 역사서도 예언서에 속합니다)에서 한 단락씩 선택하여 낭독합니다. 우리 성찬례 전례독서의 원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때 글을 아는 유대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루가 4:16-21; 사도 13:15).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라는 장면이 특이하진 않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침묵합니다. 아무런 암시조차 주지 않습니다. 루가복음을 참고하자면 예언의 성취와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루가 4:16-21). 그렇지만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분명히 묘사해 줍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 마르 1:22

흔히 자신의 말이나 글이 호소력을 갖도록 ‘권위자’의 글이나 자료를 인용하여 구체적인 근거를 확보한 후 자신만의 독창적인 주장을 내놓곤 합니다. 아마 ‘율법학자들’도 그런 식으로 전통에 기대어 가르쳐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지식을 언급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설교를 시작하자 회당 안에 있던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향’을 받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한마디로 ‘소통’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듣고 경험해 온 이전의 많은 가르침(지식)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께는 다른 것이 있음을 지각(知覺)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권위’(權威, 그리스어로 exousia)입니다.

‘권위’로 번역된 그리스어 ‘엑수시아’(exousia)는 힘(power), 능력(ability), 권세(dominance), 자유(freedom), 특권(privilege)의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유함’이 빛났다는 말입니다. 그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인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듣는 그들이 힘이 나게 했습니다. 그들을 자유케 했습니다. 그들 속으로부터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갖는 ‘특권’을 자각시켰습니다. 어떤 때 그런 소통이 가능해 집니까? 그 일은 ‘가르침’이 머리(지식)가 아니라 ‘가슴의 언어’일 때 그렇습니다. 흔히 ‘사랑’이라고도 하고 ‘지혜’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나 동료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갈등하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조용히 가슴(심장)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그런 다음에 말해.” 생각은 가슴(심장)으로 하는 것이고, 말(선택)도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은유적 표현이 주는 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이나 말이 뇌의 ‘신경적 연결’의 산물이라는 뇌과학 연구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가슴’(심장)이 가지고 있는 동서고금의 ‘상징성’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심장은 ‘사랑’, ‘생명’, ‘핵심’, ‘진실’, ‘소통’의 원형으로 자리합니다. 몇 년 전 발표된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심장에도 신경세포가 있어서 기억을 저장한다고 합니다. 생각이 오롯이 뇌의 차지인 것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한 ‘생각’, 심장에서 걸러지지 못한 ‘지식’(말)을 상징하는 ‘머리의 언어’가 갖는 한계는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머리의 언어’(지식)는 어떤 특징을 갖습니까? 오늘 서신 말씀에서 경고하듯이 자신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나와 너를 경계 짓고, 비판하며, 누가 옳은지의 다툼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자신하며 머리의 언어를 쓰고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성이나 논리라는 것이 단지 에고가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말입니다.

그러나 언어 습관에서 보듯이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생각은 가슴(심장)으로 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언어가 상대방의 심장에 ‘울림’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슴에서는 어떤 언어가 나올까요? 다시 말해 머리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가슴이 살아있으면 어떤 언어가 만들어질까요? ‘배려’, ‘나눔’, ‘협동’, ‘더불어’처럼 ‘공감’(共感)의 언어가 만들어져서 나옵니다. 이처럼 가슴의 언어는 ‘우리’ 지향적입니다. 이 가슴의 언어는 벽이나 경계가 없기에 나와 너의 소통을 일으킵니다. 오늘 서신 말씀처럼 상대방을 향상시켜 주는 ‘사랑의 언어’는 가슴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런 가슴의 언어를 배워가는 길이 ‘신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슴의 언어’야말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 즉 권위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가슴의 언어에 반응하고 끌립니다. 가슴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인 지식과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가슴의 언어는 심장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의 근원인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머리의 언어인 ‘지식’은 너와 나의 경계를 짓고, 비판하고, 누가 옳은지의 다툼을 일으키지만, 가슴의 언어인 ‘사랑’은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공감과 소통을 가져옵니다.

예수님 시대 ‘힘’(권력)의 상징은 정치적으로는 유다 총독 빌라도와 갈릴래아의 분봉왕 헤로데(안티파스)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2017년 11월 5일 연중 31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토라’(율법=모세오경)를 해석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누구를 제외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권력 구조’를 이루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그 자유는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그 특권은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들 가르침의 언어는 자기중심적인 머리의 언어였습니다. 전혀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장에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그 언어를 들으면 들을수록 힘이 빠지고, 억압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비참해졌습니다. 한마디로 백성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힘, 즉 ‘권위’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머리의 언어’(지식)로부터 ‘가슴의 언어’(사랑)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솔직히 어렵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종교지도자들’로 상징되는 나의 과거의 ‘경험’, 즉 ‘머리의 언어’로 살아온 ‘에고’가 자신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가슴의 언어’를 직면하는 일은 악령 들린 사람처럼 자신이 얼마나 ‘악하게’ 살아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진실’(악함, 약함)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고 불편해합니다. 자신의 ‘악함과 약함’을 직면하느니 차라리 지금껏 자신에게 말이 되었던 그 ‘머리의 언어’에 더욱 집착하려 합니다. 스스로를 머리의 언어, 즉 자기중심적인 특징을 갖는 ‘악령’(어둠)에 붙잡혀 사는 이의 자리로 내몹니다. 물론 그런 고집스런 우리, 어둠에 갇힌 우리를 해방하고 치유하시러 ‘권위 있는 새 교훈’(지혜)의 주님, 빛이신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연중시기의 옛 이름인 공현절기(公顯, Epiphany)의 주제와 전례독서 채택 의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가지신 진정한 힘(권위)과 종교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가짜 힘(권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더 넓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력으로 황폐화시킨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나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자 복음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력의 ‘나’해 동안 마르코복음서를 전례독서로 읽어갈 것입니다(중간에 요한복음을 읽기도 합니다). 나해의 여정을 걸어간 후에는 예수님을 ‘복음’으로, 즉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한 마르코복음서 기자의 선포가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열매 맺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복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 1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권위 있게 만든 것은 그분의 ‘인격’(사람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분으로 증언됩니다. 그런 분의 가르침이 어찌 ‘권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사랑에 기반한 당신 자신의 진리였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들의 심장을 뛰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뭔가를 또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 마르 1:23-24

성경에는 ‘사단’ 말고도 많은 ‘악령들’이 등장합니다. 악령은 사람에게 들어가 그를 장악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일명 ‘빙의(憑依)현상’이라고 합니다. 고대인들은 육체의 질병이나 당시로서는 불가사의한 정신장애(정신병, 정신질환)의 원인이 빙의에 의한 것이라 믿고 악령을 추방하는 제의를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무속인이나 일부 종교인들이 현대의학을 무시한 행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악령 들린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지장을 받습니다.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하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혹은 다른 이의 과거나 현재 상태를 ‘용’하게 알아맞히기도 하고, 자학(自虐) 행위를 하거나 평소 이상의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악령 들림과 정신병(정신질환, 정신장애)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둘 다 인격 장애 상태이지만 정신병의 원인은 생물학적인 ‘뇌 기능의 이상(異常)’ 요인, 또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같은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병합니다. 정신병은 전문의의 약물처방과 상담을 통해 개선이 가능하기에 빠른 치료를 받도록 권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령 들림은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뇌 기능의 이상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상담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더 힘센 ‘거룩한 영’의 사람이 축마(逐魔)를 통해 자유롭게 해줘야 할 상태입니다.

“예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다 큰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을 악령에 들린 사람으로 보도합니다. 악령은 누구도 몰래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가 악령에 들렸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정체가 발각되자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 ‘용’하게 알아맞힙니다. 대단한 지식입니다. 악령인데도 ‘거룩’을 입에 담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지식은 참되다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시편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10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악령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진정함 ‘경외’도, 그 계명을 지키는 ‘순종’도 없었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신자들이 신구교를 합쳐 1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주일이면 ‘거룩’을 노래하는 성당과 교회들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힘을 잃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와 ‘순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신자인척 교인들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참으로 주님을 ‘경외’합니까? 나는 참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경외’와 ‘순종’이 함께 가지 않는 머리의 지식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경외’와 ‘순종’이 빠진 머리의 지식은 종국에는 예수님을 삶의 간섭자 취급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 마르 1:25

예수님은 ‘회당’에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악령을 내쫓으십니다.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둘은 한 데 어울려 다닙니다. 마치 천지창조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성취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고, ‘치유’는 예수님께 권위가 있음을 증거 하는 표가 됩니다. 예수 ‘선생’(율법교사)은 그들이 알던 이들과는 정말 다른 분이었습니다.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복음 이야기의 악령을 단지 영적 존재로만 한정할 일은 아닙니다. ‘악령’은 자신을 병들게 하는 ‘오염된 생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현듯이 일어난 오염된 생각은 ‘자기’를 즐겁게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자기에게 즐겁지 않은데도 계속 그런 생각을 습관처럼 일으킬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그 오염된 생각들이 자기 인격을 죽입니다.

사실, ‘회당’은 ‘성전’ 다음으로 거룩한 곳인데 ‘악령이 들린 사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악령 들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정결법’을 따르는 그들이 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몰래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성령’을 모신 ‘성전’인 우리 안에도 ‘오염된 생각의 악령’이 몰래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각과 말과 행실로부터 벗어난 순간들이 어쩌면 ‘악령’에 붙잡힌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할 때 그 역시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또 ‘악령’은 자신이 고집하는 ‘사고의 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고의 ‘틀’을 갖는 것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느껴서 부지런히 ‘틀’을 세워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 고정된 사고의 틀에 갇혀 자신이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악령’은 내가 매여 있는 ‘자기 경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 경계가 이웃과의 소통과 공감을 차단해 버립니다.

‘악령’은 요즘 유행하는 거짓 뉴스의 선전(선동) 같은 ‘사회적 거짓말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일부 언론과 방송들이 교묘히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적 거짓말에 속아 부화뇌동하고 있다면 악령에 들린 상태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더러운 ‘악령’에 들린 사람, 즉 ‘머리의 언어’에 집착하는 이는 맑은 ‘가슴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더는 가슴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도록 발악하거나 교묘히 훼방을 놓습니다. 심지어 그 교묘한 훼방은 너무나 그럴듯해서 속기 쉽습니다.

그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 마르 1:23-24

예수님은 악령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입 다물라.

조용히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엄중한 명령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입을 다물어야 합니까? 입은 말이 나오는 곳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멈추어야 합니까?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말을 불편해하실까요? 그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에만 밝은 악령의 말들입니다. 오염된 생각들, 고정된 사고의 틀, 자기 경계에서 나오는 말들, 한 마디로 ‘머리의 언어들’입니다. 진실에 대한 추구도 없이 퍼뜨리고 있는 사회적 거짓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입을 다물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머리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을 이제는 멈추라 명령하십니다. 그런 언어가 계속해서 말해지도록 방치했기에 가슴의 언어,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들이 구석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그제야 안식일이라는 말에 맞게 그는 ‘안식’(쉼)을 얻었고, 거룩한 ‘회당’이라는 말에 맞게 그 공간은 정화되었습니다. 더 넓은 의미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인식(認識)을 바로 잡으셨다는 뜻입니다. 사고의 거짓을 벗겼다는 뜻입니다. 오염된 생각들에 속았고, 자기 사고의 틀과 경계에 속았으며, 사회적 거짓말에 속았던 우리의 인식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속아 온 언어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언어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덕택에 “아, 그게 아니었네”라고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 비추어 말하자면, 한 때 우리 사회는 ‘반공’(빨갱이)의 악령, ‘안보’(좌파)의 악령, ‘지역감정’의 악령, ‘경제 성장’의 악령이 국민을 장악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악령에 붙잡힌 이들이 그런 말을 쓰긴 쓰지만 맑은 영혼들이 불편해합니다. 그 언어를 이용한 사람들, 사회적 거짓말을 퍼뜨려온 이들이 자기 배만 불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맑은 영혼들이 더는 속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말하면 먹힐 줄 알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권에 속았고, 언론에 속았던 국민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진실을 추구하며 깨어난 이들을 통해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권을 가진 국민답게 이 시대의 악령들을 향해 “그 입 다물라”라고 저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목격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그들은 심장에 호소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울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령 들린 사람의 경우처럼 자신들 안에 있는 더러움이 낱낱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서 대놓고 말하진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두려운 중에도 진실을 말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인생들을 위한 위대한 구원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사단(악령)과 세상 문화에 붙잡혀 살던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이 거룩한 식탁으로 부르시어 진정한 ‘안식’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시라고, 하느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깨닫게 해주시는 ‘새 교훈의 주님’이라 증언했습니다. 그의 증언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속에서 악령들은 추방당하고 진정한 힘이 솟아납니다. 묶임은 풀리고 자유(안식)를 얻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위에서 ‘사랑의 언어’로 살게 됩니다. 그런 이들은 오늘 시편처럼 “야훼는 자비롭고 인자하시다”라고 찬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 악령의 언어인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언어인 ‘사랑’이 소통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 서로는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시는 주님께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적인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지향적인 사랑의 언어를 충실히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언어를 말씀하시는 주님께 ‘경청’하고 ‘순종’하는 제자들이 많아질 때 어떤 일이 교회들에서 일어날까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지혜와 슬기의 사람으로 변화된 이들이 많아질 때 어떤 일이 이 사회에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 진실을 따라 사는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나라는 어떻게 진보해 갈까요? 교회는 비로소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빛날 것입니다. 사회는 자유, 민주, 시민이라는 말에 어울린 모습을 갖춰갈 것입니다. 오랫동안 국민을 속여 온 사회적 거짓말은 자취를 감추고 정의와 진실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복된 일의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이정남(휴고)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4. 밀양 화재 참사로 숨진 이들과 유가족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6.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최그레이스,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8. 1.28. 연중4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18. 2.11. 주의변모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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