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4. 연중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부르심과 소명(계시)”입니다. 우리를 환히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삼아주시어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화’로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찾음을 마무리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절친한 친구’에게 다가가 자신이 발견한 그 ‘보화’를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러한 신앙고백과 전도로 올 한 해를 채워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무상 3:1-20
  • 시편 – 139:1-6,13-18
  • 2독서 – 1고린 6:12-20
  • 복음서 – 요한 1:43-51

연중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부르심과 소명(계시)”입니다.

1독서는 복음서의 ‘나타나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무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 빌어서 얻었다”는 뜻입니다(1사무 1:20). 어머니 ‘한나’는 젖을 떼자 아기를 낳기 전에 서원한대로(1사무 1:11) 사무엘을 하느님의 전에 바쳤습니다. 사무엘은 ‘시편’ 말씀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환히 아시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자라납니다. 하느님은 그의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보고 계셨고, 어머니 뱃속에 점지해 주신 분이며, 그의 나날 중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앞으로 걸어야할 모든 길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어느 날 어린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성전에서 자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참 의외입니다. 오랫동안 침묵하시고 숨어계셨던 하느님이 제의에 ‘능숙한’ 사제 ‘엘리’가 아니라 ‘어린’ 심부름꾼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장면의 대조가 재미있습니다. 순백의 어린이와 오염된 노인, 하느님의 성전과 인간의 잠자리, 성전 안의 켜진 등불과 초점 잃은 노인의 어두운 눈,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가 대조됩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내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가문을 심판하시겠다는 ‘계시’(말씀)를 들려주십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엘리의 자식들은 ‘서신’ 말씀처럼 자신들의 배경을 이용해 ‘식탐과 음행’을 저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일들을 환히 아셨고 이미 ‘엘리’에게 경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아들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세월이 흘러 사무엘은 하느님이 세우신 예언자로 드높여집니다.

1독서를 들으며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특히 저 같은 사제들은 엘리처럼 눈이 어둡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궤’ 옆에 있는 사무엘은 늘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맑고 밝은 사람의 상징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합니까? 비록 처음에는 알아듣기 어렵더라도 계속 해서 말씀을 읽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삶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뜻을 똑똑히 알아듣고 응답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이, 밝혀져 있던 성전 등불처럼, 하느님의 거룩한 몸인 우리를 망가뜨리려는 시대의 어둠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내면의 빛이 됩니다. 식탐과 음행처럼 하느님을 모독하는 시대의 죄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내면의 힘이 됩니다.

‘시편’은 1독서의 ‘사무엘’과 복음서의 ‘나타나엘’의 경우처럼, “나를 이미 환히 알고 계시는 하느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와 너무도 친밀히 계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렇게 찬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를 ‘손수’ 지으신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 대한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찬미입니다. 1독서와 관련해 묵상해 보면, 이 시편은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궤’ 옆에서 자라난 사무엘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비단 사무엘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몸소 지으신 우리들을 늘 지켜보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서신 말씀처럼 우리 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 ‘값이 지불된’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서신’은 하느님이 내신 이 몸으로 어떻게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입니다. ‘몸’이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몸에 대한 이 같은 언급을 통해 당시 고린토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의 집안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식탐과 음행이 큰 문제 거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두 가지는 크고 작은 죄악의 씨앗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몸이 갖는 의미를 명백히 교훈합니다. 시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 몸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고 찬미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바울로는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교훈합니다. 하느님과 내가 둘도 없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값을 치르고 우리의 몸을 사셨기에 소유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고 교훈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교훈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성령의 성전인 우리 몸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전례독서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우리 몸의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증거들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의 이름은 “하느님께 빌어서 얻었다”는 뜻이고, 복음서에서 다루게 될 ‘나타나엘’은 “하느님이 주셨다”는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모두 다 하느님의 은총,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이들은 쾌락 추구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로의 권면처럼 자신의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에 바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로의 이 같은 권면에서 다소라도 우리가 요즘 지내고 있는(비록 2004년 기도서에서는 공현절기를 없앴다 하더라도) ‘공현’(公顯, Epiphany)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두 제자를 부르심과 소명(계시)”입니다. 연중 2주일 전례독서의 주제들이 여기서 파생되었고, 본문들도 복음서에 맞게 선정되었습니다. 물론 그 무엇보다 부르심이 ‘먼저’ 있었지만,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이 오랫동안 찾아온 ‘보화’(목표, 목적)를 발견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다.” 요한복음 1장은 이 ‘믿음의 정의’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19절부터 51절까지는 자신이 찾아온 ‘보화’를 발견한 이들의 환희에 찬 신앙고백을 들려줍니다. 그들이 인생에서 발견한 가장 소중한 보화, 목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화’로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찾음을 마무리합니다(요한 1:36, 39, 41, 45, 49). 그런 다음에는 ‘절친한 친구’(절친)에게 다가가 자신이 발견한 그 ‘보화’를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요한 1:41, 45). 초대의 방식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와서 보라”(요한 1:39, 46). 이른 바 ‘관계 전도’입니다. 우리는 이 초대의 이야기를 통해 초대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 하나의 모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형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부 출신의 첫 번째 제자 그룹을(이 부분은 연중 3주일 다룹니다) 얻으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을 첫 번 사역지로 결정하십니다. 복음서는 이 결정이 ‘예언의 성취’라고 보도합니다(이사 9:1-2, 마태 4:15-16). 그 지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아래에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제 ‘갈릴래아’로 떠나실 참이었던 예수님은 또 한 그룹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입니다. 필립보라는 이름은 “말(馬)을 좋아하는 사람, 말의 친구”라는 뜻이고, 나타나엘은 “하느님이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교회사에서는 9세기 이후 나타나엘을 사도 ‘바르톨로메오’(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해 왔습니다.

첫 번째 제자 그룹처럼 그들 역시 ‘메시아’를 찾고 대망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갈릴래아 ‘가나’ 출신이지만(요한 21:2), 필립보는 베드로와 동향(同鄕)인 ‘베싸이다’(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 출신입니다. 복음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건너 띄고 있지만 동향이라는 말을 통해 그들이 필립보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필립보 역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깊은 감동과 확신을 얻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 필립보는 얼른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5절). 이 말은 나타나엘 역시 ‘메시아’를 찾고 대망해 온 인물임을 말해줍니다. 필립보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 즉 ‘구약성경’ 말씀에 근거해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그가 다른 말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자기주장을 펼쳤다는 사실은 그만큼 나타나엘이 ‘성경’에 일가견 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그는 경멸하는 어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어찌 이리 ‘무안’(無顏)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자렛에서 정말 ‘신통한 것’(메시아)이 나온다면 어쩌려고 그랬을까요? 그가 그렇게 핀잔을 줄 수 있었던 근거 역시 ‘성경’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조건은 다윗 왕처럼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어야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듣기로 예수님은 이 첫 번째 조건에도 맞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는 유다에 살던 기득권자들, 즉 예루살렘 중심적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이미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비하되어 불렸습니다(마태 4:15-16; 마르 14:70). 좀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지리적으로 갈릴래아는 ‘비옥한 곡창지대’입니다. 그렇기에 주변국들은 이 땅을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특히 주전 8세기경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 ‘갈릴래아’는 유다로부터 더욱 고립되고 소외됩니다. 점령군들은 이 지역에 여러 민족을 이주시키는 ‘혼혈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유다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 낙인찍힙니다. 그 땅에 살던 이들은 고아처럼 버려져 이스라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살려가는 일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와도 싸워야하는 ‘한(恨)’ 많은 지역으로 변합니다.

세월이 흘러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는 ‘로마’와 ‘기득권자’(대지주들)에게 ‘살림’이 거덜 난 이들이 찾아드는 땅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을 예루살렘 기득권자들은 ‘죄인’이라 규정하고 ‘멸시’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대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해 자주 ‘봉기’하곤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갈릴래아는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열혈당’(젤롯당)의 본거지였습니다(루가 13:1). 열혈당원들은 암살자로도 활약했는데, 예루살렘에 살던 대지주들, 즉 왕족이나 대사제들 같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라고 하면 ‘기득권자들’ 눈에는 ‘불순분자’나 ‘반란자’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나자렛’은 너무나 하찮은 곳이어서 구약성경이나 초기 유대교 문헌들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자라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갈릴래아’는 ‘수탈’과 ‘절망’,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나타나엘의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그의 핀잔은 단지 자신의 성경연구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득권자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의 영향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 모두 자기주장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자기 옳음을 주장할 때도 보면, 꼭 자기주장의 근거를 성경을 끌어다 대잖습니까!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필립보는 더 이상 설득하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묘사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간단히 이렇게 초대합니다.

와서 보시게.

필립보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초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나타나엘이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메시아를 만난 체험’입니다. 보면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를 쓰자면 “백문이 불여일견”(百聞이 不如一見)입니다. 경전이 있기 전 체험이 먼저였듯이 그리스도교는 책의 종교 이상입니다. 묵상이나 명상의 종교 이상입니다. 종교가 본디 체험 위에 세워지듯이 그리스도교 역시 체험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는 것을 넘어 ‘보는’(체험) 신앙으로 초대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 초대는 나타나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와서 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초대입니다. 찾고 발견한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초대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보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성공회’라고 하면 ‘서울대성당’이 하나의 상징처럼 쓰입니다. 여러분 건물이 성공회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버린 비극적인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까요? 신자들 중에는 유리타일로 모자이크된 제단화와 색유리로 장식된 성당내부를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대한 십자가를 앞세운 순행 행렬과 화려한 제의를 입고 제단을 채우고 있는 성직자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멋진 파이프 오르간과 성가대를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직자의 설교를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고, 교회 프로그램과 성당의 복지시설을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 영화 ‘1987’이 흥행에 성공인데, 그 때 있었던 6.10 민주항쟁의 진원지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관광이나 방문 목적으로 온 이들이 그런 것에 주목하고, 또 그런 것들을 통한 ‘초대’가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초대장’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낼 수 있을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하게 하는 힘이 있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힘이 있을까요? 건축미를 따지자면 이 세상에는 성당보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잠깐은 감탄할지 모르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목'(耳目)을 끌던 것들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고 나면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는 법입니다(사람도 그렇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뇌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는 건물이나 음악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성당을 찾아온 한 인격이 좀 더 일찍 예수를 체험하도록 모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건물은 내세울만한 건축미도 없고, 그렇다고 성찬례가 화려하거나 세련된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의미 있는 성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누구를 보고 있고, 또 누구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교우 여러분, “와서 보라”는 필립보의 그 확신에 찬 초대가 우리 자신의 것이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하고, 보여줄 수 있는 분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워져 있지 않으면 곁길로 빠집니다. 우리는 올 한 해 교회의 존재 이유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합니다.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갈구합니다.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을 갈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공동체가 있음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와서 예수를 보라”고 초대할만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구원의 일을 하시는 예수를 “와서 보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와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들어보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말씀처럼 우리를 지으셨으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미’ 알고 계신 주님을 만나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바로 그 일을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설교를 준비할 것이고, 성가대는 우리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찬미할 것이며, 애찬을 준비하는 이들은 식사를 통해서도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분명히 맛보도록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령 안에서 더욱 새로워져야 합니다.

필립보의 초대로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오자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 요한 1:47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낚싯밥을 ‘미끼’라고 합니다. 미끼는 언뜻 안전해 보이지만 일종의 거짓이자, 속임수이며, 배신입니다. 물고기 잡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관계를 그런 식으로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거짓말, 속임수, 유혹, 덫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시며 기뻐하시는 지를 봅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나타나엘’ 말입니다. 1독서에 등장하는 순백의 사무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림: 야곱의 꿈, Giorgio Vasari II

야곱의 꿈, Giorgio Vasari II, http://art.thewalters.org/detail/17863/jacobs-dream/

구약성경에 보면, 속임수와 거짓의 명수로 살다가 ‘이스라엘’이라 불린 인물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은 그의 이름처럼 한평생 ‘속임수’를 쓰며 살았습니다(창세 27:36). 그런 그가 ‘야뽁’ 나루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여 이긴 후에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창세 32:23-33). 씨름이라는 말 속에는 그가 빛이신 하느님과 대면하여(하느님을 보고) 자신의 어두운 진실을 직면한(본)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속이는 자로 살아온 그의 과거를, 그런 자신의 추함을 더 이상 외면치 않고,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진실을 ‘본’ 사람은 더 이상 그 누구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깨달음을 추구하며 영적 씨름(체험) 속에 살아온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며 살아온 영적 여정을 초자연적으로 다 알아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나타나엘은 깜짝 놀랐습니다. 필립보에게 보였던 그의 싸늘한 반응과 경멸의 어투가 후회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입은 벌어지고 두 눈이 동그라진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의 표정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전부터 예수님이 나타나엘을 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금 오늘 시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를 환히 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눈여겨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대답에 나타나엘은 모든 경계를 풀고 맙니다. 마치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듯 나타나엘은 즉시 마음을 바꿉니다. 도대체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는 ‘성스러운 나무’라는 상징이 있습니다. 나무가 주기적 생명의 순환이라는 우주의 속성을 재현한다고 고대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나무는 재생, 풍요를 넘어 하늘, 땅, 지하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의 중심축(우주목), 신이 범속한 세상과 접하는 매개, 성스러움이 내려오는 통로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나무’ 또는 ‘나무 아래’는 중요한 상징을 갖습니다. 가령 도교에서 ‘복숭아나무’는 이상향(理想鄕), 선계(仙界)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불교에서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기에 보리수 자체를 붓다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단군신화에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지상으로 처음 강림한 나무인 ‘신단수’(神壇樹)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원죄의 빌미가 되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무화과나무(일부 고대 랍비들은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무화과나무를 먹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창세기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9), 즉 지식의 나무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 종려나무를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십자가(十字架)를 ‘십자가 나무’라고 부르며 경배합니다. 언제 그렇게 하냐고요? 성주간 전례 중 성금요일 구주수난 예식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면서 사제가 이렇게 초대합니다. “구세주께서 달리신 십자가 나무를 보라.” 이 때의 십자가 나무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초대교부였던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도 보면, 그가 ‘회심’하게 된 계기가 된 장소가 재미있게도 ‘무화과나무 아래’였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종교학 관련 이야기를 언급하다 보니 좀 멀기까지 간 기분입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 문화를 봐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마을 어귀마다 나무로 만든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과거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근대화 계발에 밀려 요즘은 보기 쉽지 않지만,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에 가면 신목(神木), 신수(神樹)라 불리는 ‘당산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명 ‘나무’, 또는 ‘나무 아래가 갖는 상징’은 ‘이상향’(理想鄕), ‘깨달음’, ‘구원’, ‘성스러움의 통로’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복음이야기로 돌아가서 “무화과나무 아래”로 집중해 보면, 이스라엘에서 잎이 가장 크고 그늘을 짙게 잘 만드는 나무는 단연 무화과나무입니다. 또 익어가는 무화과에서 달콤한 향내가 풍겨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율법을 공부하거나 기도하는 장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실제로 랍비 문헌에도 율법을 전심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간사하지 않은 사람이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렇게 볼 때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율법(성경)을 연구하거나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전심으로 기도하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기도 중에 ‘깨달음’ 혹은 ‘신비체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영적 씨름’의 골방, ‘배움’의 골방, ‘기도의 골방’, 즉 속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예수님이 단박에 알아보셨습니다. 풀어서 말씀드리면, “네가 연구하고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나요, 네가 전심으로 기대하던 그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임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씨름과 간절한 염원, 자신의 영적 체험과 깨달음까지도 한 눈에 알아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맙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 요한 1:49

남이 전해 준 지식과 정보에 바탕 한 신앙이 진짜를 만나 진리를 보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이제야 진짜 앎이 시작된 그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혀주십니다. 전례독서의 주제인 “부르심과 계시”가 명확해 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야말로 ‘성전’이심을 드러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요한 1:51

그림: "Jacob's Dream", William Blake

“Jacob’s Dream”, William Blake, 1805

예수님은 ‘야곱의 꿈’ 이야기를 가져다 그 만남의 자리에 있던 그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본 것(깨달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나타나엘’(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이들)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어제까지의 자기 그 이상의 존재가 되는 길이 예수를 통해 그들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사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길이 예수님을 통해 그들에게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잘 들어두어라”(원문에는 ‘아멘’으로 시작됨)로 시작하실 정도로 이 약속을 확실히 ‘보증’하십니다.

다음으로 “하늘이 열렸다”는 뜻은 “무화과나무 아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일종의 ‘성소’(聖所) 같은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늘과 땅을 잇는 새 베델’, ‘참된 성전’이신 분이 앞에 계시기에 ‘나타나엘’은 더 이상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따르는 이들,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 나무 아래’로 나오는 이들은 ‘야곱’ 같은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타나엘’ 뿐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약속’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야말로 ‘하느님과 소통하는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다른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전 기득권 세력들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서만 백성들을 만나신다고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파괴되었고 후에 ‘재건된 성전’이나 ‘증축된 성전’도 더 이상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원형’ 앞에서 ‘모형’(그림자) 노릇하던 지상의 성전은 사라져야 합니다(마태 24:1∼2).

《요한복음》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참된 성전’이 나타났다고 증언합니다(요한 2:19~22).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을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은 사라졌습니다. 하느님은 성전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느님과 영원토록 연결됩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교제는 구체화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에게 하신 약속은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나무’를 통해 이루실 ‘구원’ 역사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 ‘십자가 나무 아래’ 있는 이들, ‘예수’라는 ‘성전 안에’ 있는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는 더 놀랍고 새로운 성전을 또 하나 소개합니다. 서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 1고린 6:19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셨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축복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하느님의 뜻, 말씀)을 무시하고 내 뜻, 내 욕심만 고집하며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삶을 ‘죄’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1독서 《창세기》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집’이 되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의 강림과 내주하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전’인가? 아니면 ‘돼지우리’인가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증명해 줍니다. 우리 안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있는 곳마다에서 평화와 화해가 일구어지며, 이해와 배려, 경청과 격려, 사랑과 나눔, 꿈과 희망이라는 믿음의 에너지가 채워진다면, 여러분이 저처럼 특별한 예복을 입고 있지 않다 해도 여러분은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향기로운 ‘성전’인 것이 분명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를 환히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신 성전’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 존재는 사무엘처럼, 나타나엘처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불러 그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2018년을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의 몸을 어디에 바칠 것입니까? 사무엘처럼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맑은 영혼의 눈을 가진 이들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필립보처럼 여러분의 ‘절친’들을 우리 인생들의 진정한 ‘선물’(보화)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복된 인생이어야 합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배신, 편법과 유혹이 난무한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엘처럼 정직한 영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엘리의 집안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인생이 ‘십자가 나무 아래’에서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이 쉼이 필요한 이웃을 ‘십자가 나무 아래’로 인도하는 복된 인생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사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다정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필립보야! 필립보야!
나타나엘아! 나타나엘아!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찬미하올 나의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바로 연중 2주일에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2. 지진으로 고통 속에 있는 이재민들과 ‘포항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처럼 스텔라데이지호 수색과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나서도록 기도합시다.
  6. KTX 승무원의 복직과 원만한 사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9.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1. 교회학교 최그레이스,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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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이 ‘나자렛’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지명’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또는 ‘나자렛 예수’라 강조해서 부릅니다(마태 2:23; 21:11; 26:71; 마르 1:9, 24; 10:47; 14:67; 16:6; 루가 1:26; 2:39,51; 4:16,34; 18:37; 24:19; 요한 1:45-46; 18:5,7; 19:19). 복음서에 여러 번 등장하니까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 꽤 유명한 동네인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나자렛’이라는 지명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정말 보잘 것 없는(중요하지 않은) 작은 동네였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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