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5. 성탄 밤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아기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거룩한 밤을 주님의 참 빛으로 비취셨나이다. 비오니, 이 빛으로 우리를 이끄시어 하늘의 영광을 찬미하며, 이 땅에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9:1-6
  • 시편 – 96
  • 2독서 – 디도 2:11-14
  • 복음서 – 루가 2:1-20

 

가수 김세환이 부른 “사랑하는 마음보다”란 노래가 있습니다. 같이 불러볼까요?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 걸. 밀려오는 그 마음보다 포근한 건 없을 걸.” 제가 왜 이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사랑해.” 그렇습니다. 알고 부르면 이 노래처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확한 ‘성탄 메시지’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백하시는 또 하나의 ‘시편’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 따르면,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차서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첫 아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첫아들’이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다’고 증언합니다(1요한 4:8). 그렇습니다. 첫아들은 ‘사랑’입니다. “첫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사랑’이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성탄은 우리 안에 ‘사랑’이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세주, 즉 ‘사랑’이신 분이 베들레헴에 갓난아이로 탄생하시어 ‘말구유’에 누워계신 날입니다. ‘갓난아이’와 1독서에 예언된 ‘큰 빛’은 너무나 대조됩니다. 그러나 낙심할 것 없습니다. 갓난아이가 점점 자라 어른이 되듯, 구유에 누워계신 그 ‘작은 빛’이 언젠가 큰 빛이 될 것입니다. 어디서 그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서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향한 ‘첫사랑’ 탄생하여 구유에 누워 계신 날, 그 날이 바로 ‘성탄’입니다.

성공회는 성탄절에 3차례에 걸쳐 감사성찬례를 봉헌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심야, 두 번째는 새벽, 세 번째는 낮입니다. 이 3차례 걸친 봉헌은 이미 일어난 성자의 탄생과 다시 일어나야할 성자의 탄생을 상징합니다. 첫 번째 탄생은 우리가 ‘니케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성부로부터 ‘영원 전’에 탄생하셨습니다. 두 번째 탄생은 성모 마리아로부터 ‘이천년 전’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탄생은 어디서 일어나야하는 것일까요? 신자들의 마음 안에, 즉 나의 마음에서입니다. 왜 내 마음에 태어나셔야 하냐면 그 일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랑’이야말로 인생이 가진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탄생하면” 분명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1독서 <이사야>의 말씀처럼, “어둠 속, 깜깜한 땅”에 있던 ‘목동들’이 천사의 기별을 듣습니다. 그리스어로 ‘천사’라는 말은 ‘심부름꾼’(메신저)’이라는 뜻입니다. 목동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뜻밖에’ 사건 앞에서 겁에 질려 떨었습니다. 도대체 ‘겁에 질려 떨었다’면 어느 정도 공포감을 느낀 것일까요? 그리스어는 어떤 상황을 강조할 때 단어를 ‘중복’해서 씁니다. 그래서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바로 그 때 천사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1독서 말씀처럼, ‘삶의 위기’라는 어둠 속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좌절과 실패’라는 깜깜한 땅을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이 천사를 통해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여러분, 이 천사의 소식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은유입니다. 우리 속에서 사랑이 잉태되고, 사랑이 태어나면 첫 번 돌아오는 것이 ‘기쁨’이라는 상징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사랑’이 탄생하신 날이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서 성탄하시면 참된 ‘기쁨’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천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선포 했습니다. ‘모든’ 이라는 말 속에는 남녀노소, 인종과 민족, 빈부귀천,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점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만의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닙니다. 모든 백성들의 기쁨의 소식입니다.

어째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사랑만 탄생”한다면, “‘삶의 해답이 사랑’임을 사람마다 발견”한다면, 인류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진실을 예수님께서 깨우쳐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빌려 말하면,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숭고한 ‘힘’이 있는데, 그 사랑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자각’하도록 도와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천사를 시켜 ‘아기 예수’의 탄생이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기쁨의 소식’을 무시하고 사랑 아닌 다른 것들을 ‘마음에 잉태’하고 그것을 세상에 낳으며 살아갑니다. 억압과 착취, 사기와 폭력, 전쟁과 테러로 자라나 세상은 몸살을 앓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탄생하면 우리 안에 ‘기쁨’이 돌아오고 저 하늘에서는 ‘찬미’가 울려 퍼집니다. 그 찬미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천군과 천사’가 만나야 합니다. 인생에는 나의 영적인 삶을 지탱해 주는 ‘군대’가 있고, 하느님과 내가 소통하도록 소식을 날라다주는 ‘심부름꾼’인 천사가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천군과 천사가 무엇인지는 주님께 물어서 들어야 합니다. 천군과 천사는 우리 속에서 성탄이 일어날 때 이렇게 찬미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도대체 왜 영광이고, 평화입니까? 하늘은 누구이고, 땅은 누구입니까? 무엇이 영광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 때 평화입니까? 요한복음이 이 물음들에 대한 종합적인 대답 역할을 합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을 때”, 즉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오면” 이것이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다른 것이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인 하느님 안에 있으면”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이신 그 분 안에 있으면” 이것이 영광입니다. 반대로 땅인 우리에게 ‘평화’가 되려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존재의 중심에 계셔야” 우리는 비로소 제 자리를 잡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신 하느님이 내 안에 탄생하셨을 때”, “내 안에 ‘사랑’이 가득 찼을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내 밖의 사랑과 내 안의 사랑이 하나로 통합”되는 ‘일치의 순간’, “사랑 아닌 것이 없고 은혜 아닌 것이 없는 일치의 순간”이 ‘성탄’이고, ‘영광’이며, ‘평화’입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의 뜻입니다(요한 14:20). 이렇듯 천군 천사가 부르는 성탄의 노래는 “주님과 나와의 일치의 노래”입니다.

이제 성탄하신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이것은 내 안에 사랑이신 예수께서 성탄 하셨다 하더라도 그 분의 빛이 아직 ‘작다’는 뜻일 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태어난 그 빛,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의 깨달음’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것들에 잡아먹히고(구유는 본래 밥통입니다) 휘둘립니다. 깨달음과 연결해서 말씀드리면, 조금 깨달았다고 해서 자랑하고 다녀서도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성탄하신 그 빛이 커질 때까지, 그 깨달음이 커질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이는 인내, 즉 오래 참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인내해야 합니까? 내 안에 아기 예수님이 웃고, 걷고, 장성할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성전 봉헌 예식을 마치고 나자렛으로 돌아가신 어린 시절의 예수님에 대해 루가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성탄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바로 공생애를 사신 것이 아닙니다. 12살 무렵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것 말고는 예수님도 인내하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사적 생애를 인내로 잘 마치고 비로소 공생애의 첫 일성을 발설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처럼 우리 속에서도 그 두 가지가 자라나야합니다. 몸이 자란다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자란다는 뜻입니다.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속에서 잘 자라나 온전한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끝으로 천사들이 하늘로 돌아간 뒤 목동들은 지팡이를 집어 들고, 어둠을 헤치며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천사들이 알려준 곳을 찾아내어 확인합니다. 이 크리스마스에 우리도 목동들처럼, 찾고 확인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그 진실이란 ‘첫 아들’인 ‘사랑’이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다른 말로 그 진실이란, 우리 안에 성육신 하신 참 빛,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진실입니다. 우리 속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온 누리에 가득하시다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진실입니다(사도 17:28).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진실입니다. 목동들처럼 우리는 이 진실을 찾고 확인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봐야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친절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마리아처럼 이 진실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심화 학습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더 성숙한 존재로 만드는 진정한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별을 보셨습니까? 어둠을 뚫고 우리 몸에 도달하는 그 별빛을 언제 느껴보았습니까? 아무리 그 별빛이 강렬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집안에 들어가면 거기까진 그 빛이 따라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예언한 ‘큰 빛’은 우리가 집에 있든 아니면 다른 곳에 있든 결코 방해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빛은 오늘 우리 마음에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마음에 태어난 그 빛은 작습니다. 스스로 크다고 떠벌일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1고린 4:20). 만일 내 안에 성탄 한 그 빛이 한 종지만 하다면 딱 그만큼만 주위를 밝힐 뿐입니다. 남부러워할 것 없이 그저 자기 안의 빛이 점점 커지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한 줄기 작은 빛만으로도 우리는 주변의 어둠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빛들은 인내하며 서로 연대해 ‘큰 빛’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이제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참 사랑, 참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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