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7. 나해 대림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기도지향

대림 3주일입니다.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복음서는 참 빛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기쁨’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기 본문에 맞게 주님의 오실 길을 진실한 태도로 겸손히 준비했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를 분명히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자각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자각의 중심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자리합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어 참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고 깨어 기다리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성자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지혜와 믿음을 주시어,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1:1-4,8-11
  • 시편 – 126
  • 2독서 – 1데살 5:16-24
  • 복음서 – 요한 1:6-8,19-28

대림 3주일 전례독서를 채우는 정서는기쁨입니다. 이것은 구세주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임박했다는 점도 한 몫 합니다.

1독서는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새 세상을 꿈꾸는 ‘기쁨’에 찬 선포입니다. 멸시와 천대 속에 살며 의지할 곳 없던 약자들의 인생역전, 약자들이 기를 펴는 새 세상, 약자들의 인권이 회복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기쁨입니다. 메시아는 불의와 억압, 억울함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고난에 찬 사회, 정치 질서를 폐하고 정의와 찬양이 넘치는 기쁨의 새 질서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시편은 암울했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기쁨의 사건’을 되돌아봅니다. 그 귀향사건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 덕택이었습니다. 시편기자는 ‘시온의 번영’을 회복시키신 하느님이 그들 삶의 어려운 시기에 다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고난 속에 있는 그들 희망의 근거는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면서 “씨를 뿌리고 거둔다.”는 시(詩)적 영상을 동원해 기쁨에 찬 미래의 확신을 공동체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찬미를 끝맺습니다. 희망의 하느님은 고난 속에 있는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새로운 삶의 미래, 즉 영원한 기쁨의 미래를 열어주시려 지금 오고 계십니다.

서신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교훈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권면으로 시작해서 기도와 감사, 그 밖에 신앙생활의 성실한 지침들을 제시합니다. 슬픔과 고난으로 질식할 것 같은 이 세상을, 불의와 폭력과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이 세상을, 배금주의(拜金主義)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끝내시려 지금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참 빛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기쁨’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기 본문에 맞게 주님의 오실 길을 진실한 태도로 겸손히 준비했습니다. 본문 속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위대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진실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로 대답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간직할 것이며,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제 전례독서를 좀 더 자세히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1이사야(1장-39장), 2이사야(40장-55장), 3이사야(56장-66장)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게다가 각각의 첫 장(1장, 40장, 56장)에 기록된 첫 마디 말씀이 그 부분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1이사야(1-39장)는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2-3절)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책망과 심판의 선고’가 전체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2이사야(40-55장)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1절)고 하시며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이 전체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3이사야(56-66장)는 “바른 길을 걷고 옳게 살아라.”(1절)고 하시며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오늘은 2이사야와 3이사야를 구분하는 신학적, 역사적 근거 몇 가지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2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황폐화된 상황입니다. 선포의 대상도 아직 바벨론에 체류하고 있습니다(이사 44:26-28; 48:20; 49:19; 52:9). 심판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으로 전환되며(40:1, 9, 21-31; 41:10-14, 27; 43:18-21; 48:20-22; 49:13; 51:9-16; 52:7-12; 54:11-17; 55:1-13) 낙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3이사야는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 포로시대는 끝이 났고, 포로민 중의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상황입니다. 즉 무대가 예루살렘입니다(56:8). 실망과 좌절, 공동체 내부의 분열(의인과 악인의 구분)과 갈등의 분위기가 강합니다(59:9-11; 65:13).

2이사야는 무너진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을 선포합니다. 종교의식, 제의에 관한 언급도 없습니다. 또한 사회, 윤리적 차원의 책망이나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3이사야는 성전 건축은 이미 완료된 상태를 말해줍니다(56:7; 60:7). 그래서 안식일 준수의 강조, 금식에 대한 언급, 성전예배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56:2; 58:13; 66:23). 또한 윤리적 삶과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56:1,9-12; 57:1-13; 58:1-14; 65:1-12).

이런 배경 이해를 가지고 1독서 본문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사야 61장은 예루살렘이 받을 영광을 노래하는 60-62장 속에 위치합니다. 이사야 60-62장은 이사야서에서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시온’(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의 절정입니다. 60장 첫머리 말씀의 대상이 되는 ‘너’는 예루살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위에 비치고, 그 영광의 빛으로 예루살렘은 빛을 발합니다(60:1-3). 흩어졌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60:4), 뭇 민족과 제왕들은 예루살렘으로 금은보화를 가져올 것이며, 그들도 하느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60:5-9,11). 하느님께서 불순종한 죄 때문에 예루살렘을 심판하셨으나, 이제는 이방인들까지 와서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쌓을 것입니다(60:10). 해보다 밝은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예루살렘을 비치고, 예루살렘의 슬픔의 날은 끝날 것입니다(60:19-20).

특히, 61장 1절부터 3절은 한 신비스러운 인물의 도래와 사명을 예언합니다. 물론 1차적으로 이 말씀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메시지를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는 ‘자의식’을 가진 한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그의 사명은 전령(傳令)처럼 ‘구원의 복음(기쁜 소식)’을 시온(예루살렘)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선포는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고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즉 구원의 선포가 구원 성취의 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이 말씀을 전령으로 파송된 예언자 자신의 자의식에 찬 선포라기보다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온 인류에게 전하는 예언자,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이루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말입니다.

이사야서 11장, 35장, 61장에는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신비스러운 인물의 가장 우선하는 사명은 ‘억눌린’(가난한) 자들에게 ‘복음’(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성취하는 일입니다. 찢긴(상처난) 마음을 치유하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성취하는 일입니다. 포로나 갇힌 자들은 바벨론 포로민이 아니라 빚 때문에 고통 하는 일종의 채무 노예들이거나 그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인물은 그들을 향해 야훼께서 반겨주실 해, 즉 ‘희년’(은혜의 해)과 ‘원수 갚으실 기쁨의 날’(온전함의 회복)을 선포하고 성취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인물은 ‘지금’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지금’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지금’ 재를 뒤집어쓰고 뉘우치는 사람을 일으켜 빛나는 관을 씌워줍니다. 상복을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을,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합니다. 이처럼 메시아가 오시어 이루실 장래의 변화를 서로 대비되는 개념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메시아가 오시면 ‘사회적 약자들의 인생역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자들과 강자들 위주로 돌아가는 인간사회는 총체적인 면에서 전복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노래한 것처럼(루가 1:51-53), 약자와 억울한 처지의 사람들이 기를 펴게 되는 기쁜 소식, 즉 새 질서, 새 세상의 아름다운 회복이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것이라고 이사야는 꿈꾸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루가복음서 기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사로 배치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 대목을 펴서 읽으신 다음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 선언이 명확히 드러나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따르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이들의 입과 피난처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가령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생존자와 그 가족들, 생사를 알 수 없는 스텔라 데이지호 가족들, 전직 대통령시절 국책사업으로 시도된 해군기지 건설로 마을과 가족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제주 강정마을, 더욱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청구하는 ‘구상권’ 소송으로 한숨짓는 약자들, 기껏 일구어놓은 문화 거리를 오르는 임차료 때문에 맥없이 건물주에게 내주고 떠나야하는 세입자들(젠트리피케이션), 그 외 종교나 이념을 떠나 교회는 어디 하소연 할 곳 없어 지금 눈물짓고 고통 하는 억울한 이들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사실 그들처럼 새 질서, 새 세상,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서도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관심 속에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반(反)신앙적이고, 반(反)그리스도교적인 삶은 없습니다. 유다 백성은 바로 이 일들에 불순종했고, 무관심했기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참여에 무관심한다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말을 못 믿겠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후심판’을 떠올리십시오(마태 25:3-46). 정말이지 지금도 눈물짓는 사람들, 억울한 처지의 사람들, 약자들과 마음의 자리를 같이 한 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면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주신다고 선포합니다(8절). 적들의 조롱 앞에서 낙담한 그들에게 하느님의 계약이 결코 파기될 수 없다는 확신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여전히 신실하실 것이기 때문에 뭇 민족과 나라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일어난 그 모든 변화를 보고(4-8절), 하느님께 복 받은 자들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9절). ‘나’는 예언자나 어느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시온(예루살렘)의 ‘의인화’입니다(10절). 하느님께서 시온에 ‘구원의 빛나는 옷’과 ‘정의(공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입혀주십니다. 본문에 구원과 정의가 짝으로 쓰이는데, “옷을 입힌다.”는 비유는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맨 마지막 구절은 다시 3절 끝으로 돌아가는 데(정의의 느티나무 숨, 손수 심은 것), 하느님은 ‘정의’가 바로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십니다(11절). 사실, 하느님이 구원(정의)행동을 하시면 구원받은 자들은 찬송하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정의’(구원)와 ‘찬양’이 굳게 결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정교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이들이 주로 꺼내는 말입니다. 그들은 오해합니다. 교회는 정치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사야 말씀에 기반 해 정의가 세워지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그 조건이 충족되어져야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손들고 찬송할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찬송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세상을 꿈꾸며 교회는 오늘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가 불의와 억압, 억울함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고난에 찬 구질서 폐하고, 정의와 찬양이 넘치는 새 질서를 가져오실 것이라 내다보며 기쁨에 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루가 4:21). 그 말씀이 오늘을 사는 여러분과 저의 삶을 통해 현실화되도록 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시편은 암울했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기쁨의 사건’을 되돌아봅니다. 그 귀향사건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 덕택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시인은 “꿈이든가 생시든가!”라고 찬미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순수한 기쁨과 하느님의 위엄과 은총에 대한 경이를 찬미합니다(1-3절). 그러면서 시편기자는 ‘시온의 번영’을 회복시키신 하느님이 그들 삶의 어려운 시기에 다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4절). 그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힘은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 개입은 마치 죽은 듯 말라있던 강바닥이 우기에 물로(생명으로) 가득 차듯이 그렇게 갑자기 닥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처럼 암울한 과거뿐만 아니라 고난의 현재를 살고 있지만 그들 희망의 근거는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면서 “씨를 뿌리고 거둔다”는 시(詩)적 영상을 동원해 기쁨에 찬 힘 있는 위로를 공동체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찬미를 끝맺습니다(5-6절). 이 마지막 찬미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현재 어떤 고난(슬픔) 속에 있든지 그 고난은 ‘기쁨’으로(구원으로, 희망으로) 변화되기 위한 ‘필수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고난은 그 속에 기쁨(구원)의 씨앗이 은밀히 싹트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속에 장차 위대한 결실로 나타날 ‘신성한 씨앗’이 바로 고난입니다. 희망의 하느님은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새로운 삶의 미래, 즉 영원한 기쁨의 미래를 열어주시려 지금 오고 계십니다.

서신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교훈합니다. 우선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와 감사, 그 밖에 신앙생활의 성실한 지침들을 제시합니다. 물론, 항상 기뻐하는 일, 늘 기도하는 일, 어떤 처지에서나 감사하는 일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 속에 살면서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주님으로 인한 ‘기쁨’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나라를 ‘기도’하며 산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하며 산다는 것을 보다 확신에 찬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런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세상은 정말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도우심을 간청하며 용기를 내십시오. 사실, 슬픔과 고난으로 질식할 것 같은 이 세상을, 불의와 부정부패,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을, 배금주의(拜金主義)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끝내시려 이미 주님께서 문밖에 와 계십니다.

그림: 세례자 성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James Tissot,

세례자 성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49

오늘 복음이야기는 지난주에 이어 세례자 요한의 ‘메시아 증언’입니다.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누구요, 당신은?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명령할 권한을 ‘누가’ 주었소?”, “당신의 추종자에게 세례를 주라는 권한을 ‘누가’ 주었소?”, “우리에게 죄를 상기시킬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주었소?”, “누구요, 도대체 당신은?”

영화배우 최민식이 주연한 <올드보이>가 있습니다. 2003년도 작입니다. 15년간 감금되어 있던 오대수(최민식 분)가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구냐, 넌?” 이 대사가 영화 속 ‘명대사’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뭐가 그리 대단해서 명대사라 하는 것일까요? 만약 “넌, 누구냐?”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너무 평범하지요. 맞습니다. ‘간절함의 강조’입니다. 15년의 감금 기간 동안 쌓여왔던 울분과 의문의 감정, 알아야만 하는 그 간절함을 ‘도치법’으로 표현해 대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극의 몰입을 높인 것은 물론 오래도록 관객들의 뇌리에 남는 강렬함을 선사했습니다.

복음이야기에 등장하는 질문도 그런 ‘강조’입니다. 원문에도 그 순서로 써 있습니다(21절). “누구요, 당신은?” 이 질문은 “당신은 누구요?”로 표현되는 ‘정치법’과 맛이 다릅니다. 한글 번역 성경은 이 맛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그 당혹스런 의문의 극치를 여러분이 좀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나는 누구인가?”는 수세기 동안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 산중 어딘 가에서는 이 질문을 ‘화두’(話頭) 삼아 면벽(面壁)하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 질문은 우리가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크게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신성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그 질문을 마주했을 수도 있고, 아직 아니라면 꼭 한번은 직면해서 풀어내야할 실타래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대답해야 합니다. 그는 우선 분명한 사실, 즉 쉬운 것부터 대답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부터 먼저 대답하는 일이 훨씬 쉽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부터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도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나 진지합니다. 자신은 엘리야도 아니고, 그들이 기다리던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라고 명백히 대답합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의 출발은 나 스스로가 ‘누구가 아닌지’를 분명히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신자가 되었다하더라도, 스스로의 힘과 지혜와 자원에 의존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더 위대한 분이심을 고백할 때, 그 분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체험합니다.

혹시 ‘메시아 콤플렉스’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일종의 ‘과대망상증’인데,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자기 몫이라고 착각하는 병입니다. 이런 병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어릴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말들, 가령 “널 믿어. 넌 잘 할 거야. 날 실망시키면 안 돼!”와 같은 기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뭔지 모를 부담감이 강화되고 작동됩니다. 우리에게는 회피하기 원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 안에 있는 이 ‘메시아 콤플렉스’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특히 섬김과 봉사란 말에 자주 노출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찾고 있는, 당신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다 합쳐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습니다. 단지 우리 모두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좀 더 덧붙이자면 나는 ‘샘’이 아닙니다. 아니 나는 ‘옹달샘’ 조차도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샘이신 그 분께 연결된 하나의 ‘파이프’입니다. 또 이미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처럼, 나는 ‘참 빛’이 아닙니다. 나는 참 빛이 당기어진 ‘등잔’입니다. 등잔이 주인이 아니라 빛이 주인입니다. 빛 덕택에 내가 존재합니다. 나는 내 안에 현존하시는 참 빛의 도구입니다. 나는 영원하신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 빛은 결코 어둠에게 지지 않습니다. 간혹 깜박이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나는 영원한 ‘사제’가 아닙니다. 나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분의 ‘도구’입니다. 나는 평화가 아닙니다. 나는 평화의 도구입니다. 나는 정의가 아닙니다. 나는 정의의 도구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종일뿐입니다.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물론 나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어서 얼마든지 도구의 삶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성실히 참여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실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런 유혹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 시간 내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주님께 의탁하십시오. 그 짐은 집이나 일터에서의 문제나 갈등, 지나친 책임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 무엇이든지 겸손히 주님을 초대하고 이렇게 아뢰십시오. “주님, 저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당신의 도구입니다. 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그리스도는 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십니다.”

만약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의탁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안도감’이 찾아들 것입니다. 나를 짓누르던 비현실적인 책임감의 무게가 제거될 것입니다. 둘째는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힘과 희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 바울로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조만간 일상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 필립 4:13

초조해진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다시금 다그치듯 묻습니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들의 물음은 진리 앞에서 인격적 결단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경청하려는 태도 없이 물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고민이 아닌 남의 고민을 대신해 주겠다며 나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우리의 눈과 귀는 멉니다. 진리가 곁에서 빛나고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들이 그랬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를 못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그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마저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제야 자기가 ‘누구인지’ 대답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는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분명히 말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그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 요한 1:7-8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 요한 1:23

그리고 다음과 같은 놀라운 진술을 이어갑니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이 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 요한 1:26-27

그 당시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의 일이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면 흙과 먼지투성이 신발을 벗기기 위해서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굽혀야 했습니다. 놀랍습니다.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낮춥니다. 자신이 ‘빛’이라 증언하고 있는 분과 비교할 때 스스로는 노예보다 더 낮은 처지에 불과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알리고자 하는 분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겸손의 사람이기 이전에 ‘진실’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존중했습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기쁨의 예언자’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들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기쁨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의 음식, 차림새, 거주지는 결코 선망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는 당시 권력가인 헤로데의 ‘불의’를 꾸짖었다는 이유로 생의 마지막 시기를 옥에서 보냈고, 참수로 정의로운 생애를 끝냅니다. 오늘날 누가 그런 삶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와 과업을 재어 보았을 때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칭송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 마태 11:11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종으로 살다간 가장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자신의 빛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그보다도 더 큰 사람이지만 말입니다.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과 온 동네 사람에게 그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어린양’을 기대하며 살았던 희망의 예언자였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며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기쁨과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 들은 증인들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7-30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삶을 묵상해 보면 어떤 특징들을 보입니까? 그들은 진실합니다. 겸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자각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정의에 관심합니다. 정의는 하느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의 없이 평화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에 굴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과 연대합니다. 그들은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입니다. 게다가 목소리 없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우리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이러한 예언자의 특징들을 봅니다. 대림절기는 사회적 약자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목소리 없는 하느님께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할 시기입니다.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대답했습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의 행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는 중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 빛’을 증언했습니다. 우리 또한 빛의 증인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요한처럼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 오실 길을 닦으며 간직했던 ‘기쁨의 삶’은 우리에게서 응답되어야 합니다. 돈의 우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빛’으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그 빛을 바라보는 기쁨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기쁜 소식을 선포할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진실히 증언해야 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구임을 겸손히 말해야 합니다.

주님이 참 빛이시고,
저희는 그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저희는 단지 종입니다.
주님이 제 삶의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데서 우리 기쁨은 솟아올라옵니다. 우리가 대림 3주일을 사는 세례자 요한이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세상을위한기도

  1.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2. 지진으로 고통 속에 있는 이재민들과 ‘포항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히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가난한 이들과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6.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와 군복무자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대한성공회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교육자들을(조요한, 서헬레나 교우)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가족의 화목과 교우들의 보람된 직장생활과 사업장(이버나드교우 한국산업, 최베드로교우 기운찬 한의원)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9. 2018년 3월 5일 행정고시를 앞 두고 있는 김토마스교우와 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10. 교회학교 최그레이스, 조리디아, 최마리아, 조안나, 최글로리아, 최다니엘, 허드보라, 류세실리아, 김루시아, 윤요한, 류니콜라, 허베네딕트, 윤에스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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