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 3. 대림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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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나해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인 성탄을 기쁨으로 준비하고,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러 다시 오신다 약속하신 만왕의 왕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주님이 은혜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오직 우리 구원의 근거는 오시는 주님의 자발적 ‘의지’와 ‘은총’에 있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사제는 제단에 4개의 대림초를 준비하여 매주일 한 개씩 차례대로 밝힙니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성탄’을 준비하게 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삶으로 안내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이 거룩한 영적 여정을 지금 여기서부터 잘 걸어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게 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으로 늘 새롭게 하시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3:19하-64:8
  • 시편 – 80:1-7,17-19
  • 2독서 – 1고린 1:3-9
  • 복음서 – 마르 13:24-37

교회력으로 나해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인생이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신혼부부는 한 생명이 잉태되어 세상에 나오는 그 환희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정성스런 보살핌 속에 아기가 성장해 갈 때마다 부모는 환호를 지르며 그 다음 단계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양육과 교육을 통해 한 생명이 청소년기를 거쳐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는 발달주기는 ‘원초적 기다림’이 뼈대처럼 자리합니다. 그 오전 인생이 중년을 넘어 해질녘의 노년에 이르면 또 어떻습니까? 생의 통합과 아름다운 마무리, 즉 죽음 너머의 세계를 희망하는 숭고한 기다림으로 옮아갑니다. 가히 인생이란 환희에 찬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숭고한 기다림을 간직한 채 눈을 감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개인사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구성되어 성장 발전해 가는 과정 속에도 반드시 통과해야할 ‘기다림’의 순간이 핵심으로 자리합니다.

그렇지만 속도와 무한경쟁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그런 ‘기다림’의 순간들은 재미없고,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즉석식품, 셀프 계산대, 자동입출금기, 스마트폰 뱅킹, 전자우편(e-mail),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등은 기다림을 시간 낭비로, 어려운 일로 느끼는 현대인들을 위한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물론 때로 기다림은 고단한 일상의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직장인들은 주말을 기다리며 평일의 온갖 스트레스를 참아냅니다. 군복무자들은 휴가와 전역할 날을 기다리며 온갖 고생을 인내합니다. 농부는 추수할 날을 기다리며 봄철과 여름철의 수고로움을 견디어냅니다. 이렇듯 기다림은 현대인들에게 어려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기다림’이란 말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본디 ‘기다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요청되는 태도입니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지에 따라 다르겠으나 ‘기다림’은 지금 여기 ‘그것’(누구, 무엇)의 부재(不在)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더욱이 ‘그것’을 우리가 그리워하는 순간 기다림은 불타오릅니다. 따라서 얼마나 우리가 ‘그것’을 그리워하는지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재하는 지금 여기의 시간과 상황은 초조함과 불안감 필연적으로 발생시키기에 누구에게나 기다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리움의 정도(程度)가 약한 이들은 고통 앞에서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언제나 숭고한 기다림은 ‘그것’을 만나기 전, 그것의 부재가 가져온 지금 여기의 고통을 껴안는 일을 동반합니다. 마침내 그 고통을 껴안고 ‘다른 무엇으로’ 승화한 이들은 성숙합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기다림은 삶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겸손한 인정이자 수용의 태도입니다. 기다림을 감행하는 우리 역시 ‘그것’의 부재를 다른 무엇으로 승화시키는 ‘내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니케아신경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신앙의 신비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성체와 보혈을 영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참여합니다. 그것, 즉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은 부재하지만,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재림하십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새 세상,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는 새 질서의 창조, 즉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십니다. 그 날 이 세상은 두루마리처럼, 텐트처럼 접혀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재림의 부재 속에 기다림의 고통을 껴안은 우리에게 ‘내적인 힘’, 즉 ‘승화’의 원천입니다. 무려 이천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기다림이 발생시키는 고통을 성찬례 안에서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고단한 일상을 견디어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기다림’의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인 성탄을 기쁨으로 준비하고,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러 다시 오신다 약속하신 만왕의 왕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도래했습니다.

1독서 <이사야> 자기 민족을 향한 이사야 예언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디 하느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 약속의 땅을 잃었고, 포로생활의 곤경을 겪어야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귀환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계명을 외면했고 우상숭배를 고집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부터 배운 바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절망적인 민족을 대신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늘의 하느님이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로 지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어 이 땅의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늘이 지상의 구원에 개입해 달라는 뜻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늘의 하느님이 당신의 소유, 자녀, 작품인 이 지상의 이스라엘을 ‘은혜’로 “굽어 살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이 간절한 기도 속에 담긴 정신은 대림절기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평생 간직해야 할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늘의 하느님이 왕으로 오셔야 비로소 지상의 모든 만물은 새롭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느님께 구원을 요청할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구원은 하느님의 자발적인 ‘의지’와 ‘은총’ 덕택입니다. 하느님께서 은혜와 자비로 굽어 살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기는 성탄의 준비뿐 아니라 하늘의 왕이신 주님이 직접 이 세상과 우리 안에 임재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이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의 소유임을 또렷이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인류에게 하느님이 필요함을 선포하는 절기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하느님이 은혜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오직 우리 구원의 근거는 오시는 하느님의 자발적 ‘의지’와 ‘은총’에 있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하느님이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기를” 호소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그 간절한 기도가 500년이 지나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취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마르 1:10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처럼 주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속히 오시어 고통 속에 있는 이 지상의 만물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오늘 성찬례에서 다시금 기도합니다(로마 8:18-23; 묵시 22:20).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몹시 고대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사도 바울로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로마제국의 부패한 통치를 끝내시러 곧 다시 오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희망하고 기다리며 깨어있는 것 말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대해 달리 알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 날에 대해 희망하고, 기다리며, 깨어 있는 것 말고 달리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 같은 위대한 성인도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 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초조함과 불안감을 넘어 우리 믿음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실존적 위협직면해 있습니다.

“A.D. 70,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하다”, David Roverts

오늘 우리가 복음말씀으로 들은 ‘마르코복음’(특히 13장)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의 기록 연대를 주후 70-73년경으로 잡습니다. 그 시기는 ‘로마의 대화재’로(주후 64년) 야기된 ‘네로’(Nero,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37년 12월 15일~68년 6월 9일)의 그리스도인 박해, ‘유대독립전쟁’(주후 66-73)으로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시절입니다. 시절이 몹시 혼란스럽고 어려우면 누구나 현 세상이 어서 속히 끝나고, 새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합니다. 종말론입니다.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바로 이 종말론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교회들에게 대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서를 기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대답은 종말의 날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신자의 바른 삶이라는 교훈입니다.

교회력을 시작하는 첫날 공교롭게도 우리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습니다. 복음이야기 첫 단락은(24-27)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에 의존합니다.

하늘의 별들과 삼성성좌는 빛을 잃고
해는 떠도 침침하고
달 또한 밝게 비치지 아니하리라…
…하늘이 두루마리인 양 말리고
포도 잎 새가 말라 떨어지듯,
무화과나무의 낙엽이 지듯,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사 13:10; 34:4

 

구약에서 이 현상들은 하느님의 분노의 심판이나 야훼의 날에 수반되는 징조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천체들이 이 지상의 피조세계에 밀어닥친 혼란에 빠져듭니다. 만일 ‘문자적’ 표현(오늘날 천문학의 업적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비과학적이어서 믿기 어렵지만) 그대로라면, 정말 공포를 느낄만한 ‘우주적 대파국’입니다. 아무튼 과학적 사실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그 날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속뜻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28-31)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아마도 그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13:4). 자연의 변화를 통해 여름이 가깝다는 사실을 알듯이 다른 어떤 것이(종말) 가까이 다가왔음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조짐(6절, 적그리스도의 출현)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이 모든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이라면, 예수님은 실언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로도 ‘수많은 세대’가 왔다가 사라졌고, 천체는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종말도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실언하신 것일까요?

신약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들이 ‘은유적’ 표현과 사실적인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여부는 종말이 되어야 알 수 있으니 논외로 합니다. 오히려 ‘은유적’ 표현이라는 말에서 그 뜻을 이해할 것 같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어야 된다는 ‘근본주의자들’은 실망스럽겠지만, 은유적 표현이라는 주장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중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늘 복음이야기를 임박한 종말에 대한 ‘문자적’ 표현 그대로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더 이상 그렇게 받아들이긴 어렵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가 ‘칼빈’(John Calvin, 1509년-1564년)조차도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충격이 심할 것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 역시 은유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본래 종교에서 ‘경전’의 역할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인간의 언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가리키려다 보니 당연히 은유상징을 가르침의 수단으로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들이 우리 삶의 ‘힘든 시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면 예수님은 결코 실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안’합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자연재해, 지진, 전염병, 테러, 전쟁, 각종 사고로 우리는 두렵습니다. 가정도, 학교도, 일터도, 사회도, 국가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나만 잘하면, 우리 가족만 잘하면, 안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이상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국가재난시스템은 불안합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땅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아로, 가난으로, 학대로, 폭력으로 고난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우리는 살면서 우주가 붕괴되는 것 같고, 더 이상 해와 달과 별이 빛나지 않는 것 같은 ‘어둠’의 순간들 경험합니다. 우리 존재가 파괴되는 것 같은 감정적인 ‘우울’ 상태모든 세대와 우리 각자의 삶에 불현 듯 침입합니다. 실직, 이혼, 질병, 실패, 사별 등이 이런 상태를 유발합니다. 그야말로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무너져 버린 것 같은 힘겹고 어두운 일들 삶에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 따르면, 이런 어둠의 순간들은 종말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의 징조(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마르 13:29

참 놀랐습니다. 우리가 겪는 실패와 좌절, 고난과 우울, 즉 우리가 삶에서 맞이하는 ‘어둔 밤’의 문 앞에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이 다가와 계십니다. 어둠이 단지 어둠만은 아니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희망의 징조’라는 역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기에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더욱 알아차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 삶에 침입하는 우주적인 우울, 삶의 어둠은 일회적이지 않고 언제든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너머의 것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지금도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우리가 삶에서 겪는 우주적 대파국이 다시 ‘희망의 봄'(春)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아갈 이유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덕택에 현재의 상황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오시는 예수님 덕택에 우리를 포로로 잡았던 어둠의 힘들이 오히려 당황케 됩니다. 예수님 덕택에 우리 안의 삶의 어둠들이 죽고 새로운 무언가가 우리 자신과 이 사회에 일어납니다. 그 새로움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오랜 적폐와 국정농단 세력이 물러가고 촛불 혁명이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새로운 사회 질서도 언젠가 더 나은 질서로 교체될 것입니다. 또한 그 새로움은 우리 각자가 ‘생명’에 대해 갖는 새로운 관점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삶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이들이 이제부터의 삶은 덤이고, 지금 여기가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 세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마르 13:32-33

“항상 깨어 있어라” 이것이 대림 1주일의 묵상 중심주제입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어라’가 문자적으로 잠자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자세’, ‘지금 여기 나’를 돌아보라는 명령입니다. 그 날이 언제 올 것인지 계산하느라 옆길로 빠질 것이 아니라 오시는 주님을 잘 기다리기 위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하라는 뜻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으로서의 시간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를 더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성찰하라 뜻입니다. 눈을 밖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를 맞이할 ‘나’를 정성스럽게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있음’기다림이 발생시키는 고통을 성찬례 안에서 희망으로 승화시켜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깨어 있음은 기다림의 때가 무르익기를 바라며 조용히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침묵’입니다. 날짜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온힘을 다해 기다리면서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용’입니다. 마음의 한계를 정하기보다 내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이할 빈방을 만드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실 터이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항상 깨어 있어라”는 이 명령은 ‘지금 여기’를 껴안고 잘 살라뜻입니다. 그렇게 기다림을 삶의 온전한 동행으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언젠가 그 시간은 열매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깨어 있는 삶, 즉 ‘기다리고 있는 지금 여기 나’를 위해 세 가지 삶의 수행을 가르쳐 왔습니다. 회개, 화해, 용서의 삶입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첫째, 회개의 실천입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완성하실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은 그 나라에 맞지 않는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러 왔던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르 1:3-5). 예수님도 이렇게 전도하셨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우리는 자신만을 이롭게 하려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악행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태도로 전환하는 자기변혁의 길을 가야 합니다. 변혁의 대상이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철저한 인식입니다. 이런 자기변혁의 과정이 깨어있는 삶이며, 종말을 기다리는 신자의 바른 삶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희망입니다.

 

둘째, 화해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던 원한을 풀고, 가족과 형제와 이웃과 화해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 5:23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무시한 채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무엇이 먼저여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셋째, 용서의 실천입니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가 필요한 이를 우리 마음의 감옥에서 놓아주는 삶입니다. 특히 용서에 있어서는 스스로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2

 

우리가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는데도 그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 그의 문제가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자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소식은 우리가 회개, 화해, 용서의 실천, 즉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때,  오늘 시편말씀처럼 우리의 영혼이  ‘소생함’을 맛볼 수 있고, 이미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된다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다림의 거룩한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성탄뿐만 아니라 하늘의 왕이신 주님이 직접 이 세상과 우리 안에 임재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주님이 은혜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오직 우리 구원의 근거는 오시는 주님의 자발적 ‘의지’와 ‘은총’에 있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침묵 속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립니다. 망년회와 크리스마스 준비로 들 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돌아봅니다. 비록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기다리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를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성찰합니다. 회개와 화해와 용서라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작품으로 온전히 빚어지기를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박해의 어둠을 살고 있었지만 희망 속에 기다렸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비록 우리 삶이 어둠 속에 있다 하더라도 희망 속에서 기다립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 저 쪽에서 우리에게로 오고 계심을 믿습니다. 밤이 아무리 길고 힘들더라도 새벽은, 승리는, 기어이 옵니다. 우리가 어떤 ‘어둔 밤’ 속에 있든지 그 어둠을 ‘봄’(春)으로 변화시키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오고 계십니다. 대림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한 목소리가 속삭입니다.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마르 13:37

 

찬미하올 성자 예수님,
매순간 저는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께서 오실 때에
이 연약한 영혼을 기억해 주시고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경배하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지진으로 고통 속에 있는 이재민들과 포항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참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 역시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시다.
  4. 사고 247일이 넘도록 생사를 알 수 없는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교우들의 일터와 사업장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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