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6.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 연중3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전례력으로 ‘가’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로 시작한 한 해의 결론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듯이 우리도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복된 신자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이야기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 눈을 뜨라는 가르침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어 사랑의 눈을 뜨고 살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만왕의 왕이 되셨나이다. 비오니, 온 세상에 자유를 주시어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통치 안에서 모든 민족이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34:11-16,20-24
  • 시편 – 95:1-7
  • 2독서 – 에페 1:15-23
  • 복음서 – 마태 25:31-46

 

그리스도교는 수세기 동안 ‘교회력’을 지켜왔습니다. 교회력은 자연적인 세속의 시간(크로노스 chronos)을 의미로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kairos)으로 성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의 여정과 죽음, 부활과 승천,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강림 사건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중요한 사건들을 자연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달력 위에 위치시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시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나, 과거의 사건을 단지 때마다 상기시키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시간을 살면서 생물학적으로 쇠퇴해가는 우리가 그 시간을 의미로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가자는 의도입니다. 특히 그 중요한 사건들이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일부로 재현될 때 우리의 삶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사건이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축복의 일이 일어납니다.

A stained-glass window of Jesus wearing a crown is seen at St. Joseph’s Seminary in Yonkers, N.Y., Nov. 11. The feast of Christ the King, celebrated the last Sunday in ordinary time, is observed Nov. 20 this year. (CNS photo/Gregory A. Shemitz) (Nov. 18, 2011)

오늘 ‘연중 34주일’은 교회력으로 가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 다음부터 시작된 ‘연중시기’가 오늘 축일 주간으로 마감되고, 다음주일이면 ‘나’해 ‘대림 1주일’로 다시 기다림이 시작됩니다. 아시다시피 ‘연중시기’는 교회력에서 가장 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묵상해 왔습니다. 하느님이 참된 주인이시고 우리는 다만 관리자요 청지기임을 묵상해 왔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장해 가야하는 지를 꾸준히 묵상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삶의 발자취에 참여하면서 한 해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진 다른 축일들과는 달리 제정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1925년 로마 가톨릭의 교황 ‘비오 11세’ 때 처음 제정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민족주의’(nationalism)와 무신론적인 현상인 ‘세속주의’(secularism)가 급부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파시즘’(독재적인 전체주의)을 강화하였고, 독일 전체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나치당’ 히틀러의 욕망(뮌헨 폭동)과 폭력 앞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떨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세계사적 물결 속에서 위협 받는 교회와 신앙이 약해져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상기시키기 위해 교황 비오 11세가 이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우며 그리스도인은 욕망에 가득 찬 민족주의적인 의무로부터 면제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웁니다. 각 나라와 민족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해야 한다는 희망 속에서 이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에는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키던 것을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왕권을 가지고 심판하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을 교회력의 끝에 배치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회력의 시작과 끝이 다시 오실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지는 효과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축일이 대림절기와 연결되기에 지금은 교회력을 준수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교파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축일에 묵상하도록 되어 있는 전례독서 복음말씀을 살펴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마지막 날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둘로 나뉠 것이라 경고합니다. 마치 낮 동안에 함께 풀을 뜯던 양과 염소가 저녁이면 갈라지듯이 그렇게 둘로 나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여섯 가지 사랑의 행위를 열거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랑의 행위를 총망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던 그들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를 한 번 채워줄 때마다 그것이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눈이 향하신 곳,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곳,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가리켜줍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히 가르쳐줍니다.

이번에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요?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거나 응답하지 않을 때 그것은 곧바로 예수님 자신과 관련한 행위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미래에 우리가 있게 될 오른편이냐 왼편이냐를 정하고 있습니다. 오른편 의인들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은혜롭게 나누었습니다. 왼편의 저주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오른편 의인들은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이웃을 보았을 때 연민으로 움직였습니다. 반면에 왼편의 저주받은 자들은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이웃을 보았을 때 무시했습니다.

분명 그들은 둘 다 똑같이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집 없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을 보았습니다. 보았지만 왼편의 저주받은 자들은 단지 불행한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른편 의인들은 단지 불행한 사람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보고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복된 음성에 따르면, 그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누구를 봅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오늘 가르침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가르침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놓으시기 전 들려주신 일종의 최후의 설교와도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가르침을 오늘 교회력의 종착점에서 듣습니다. 어떤 미사여구나 감언이설도 없이 너무도 명료하고, 절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 속에서 이미 미래를 지켜보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떤 종류의 심판을 선택하고 있는지 이미 지켜보고 계십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고,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주십시오. 이들에게 연민으로 다가가 도움을 준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도운 셈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보상이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한 이들이 아버지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숨김없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사랑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오른편으로 향하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웃에게 무관심하게 살고 있는 이들은 왼편으로 향하게 되고,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하느님 나라나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후 심판의 잣대는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동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모든 개개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도움이 필요한 그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에게 우리가 마음을 열어놓았느냐 아니면 닫았느냐는 예수님의 눈에 결정적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형편이 좋을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우리가 실천해야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실천이 없는 이론적 박애주의는 무가치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냉철히 돌아봅니다. 나는 그저 입술로 예수님을 높이며 찬미하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행동으로, 희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동 없이, 희생 없이 ‘믿습니다’를 반복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제자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에 걸맞은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착한 행위가 스스로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이들임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친절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관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이며, 본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다면,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를 우리가 상속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면, 우리는 안개처럼 일시적인 이 세상의 것들에 결코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15일에 있었던 포항 지역 지진이 입힌 피해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그런 재난의 소식을 들을 때면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째서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데
그런 자연재해를 막지 않으시는 것일까?
어째서 이 세상에
가난과 기근과 불의를 허용하시는 것일까?

마치 우리에게 그렇게 질문할 수 있는 권리라도 있는 듯 항변합니다. 그런데 고요히 침묵하고 있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이 우리게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어째서 너는
그런 궁핍과 곤경과 고난과 불행을
보고만 있느냐?
어째서 너는
그들이 계속해서 아파하도록 허용하고 있느냐?

다음주일이면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대림절기는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오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주제와 함께 대림절기의 중요한 묵상주제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질문’하실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그 질문이 무엇을 담고 있고, 얼마나 깊은 사랑과 연민을 담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이웃들의 마음에 가닿도록 일상의 언어로 전달해 줄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을 곳과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궁핍과 곤경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조건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림:

“선한 사마리아인”, Vincent van Gogh, 1890

이제 오늘로 ‘가해’를 마감하고 다음 주일이면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 눈을 뜨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눈을 떠서 모든 이들을 예수님으로 대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선 우리 자신을 함부로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예수님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을 홀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삶이란 결국 이런 눈을 떠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는 그 눈을 떴는가?” 그 눈을 뜨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기도합니다. 그러한 눈 뜸은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 배웠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이웃을 그런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 그 사랑과 연민의 눈을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어 새로운 한 해를 사랑의 눈을 뜨고 살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지진으로 고통 속에 있는 이재민들과 포항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사고 240일이 넘도록 생사를 알 수 없는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교우들의 일터와 사업장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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