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2. 연중 3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3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는 일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을 성찰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시고 지혜를 주시어 오롯이 내 책임인 일을 잘 분별하여 하루하루 성실히 수행해 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간청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깨어있으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믿음의 등불을 밝혀 들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여호 24:1-3상, 14-18
  • 시편 – 78:1-8
  • 2독서 – 1데살 4:13-18
  • 복음서 – 마태 25:1-13

 

이 세상에는 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령, 식당에 좀 늦게 도착하는 나를 위해 좋아하는 음식을 친구가 미리 주문해 줄 수 있습니다. 피곤한 나를 위해 친구가 운전을 대신해 줄 수도 있습니다. 또 남에게 빌려주거나 빌려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가령, 집들이 행사로 그릇이 모자란 옆집에 그릇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 집에 없는 연장도구를 옆집에서 빌려서 가구수리를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에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빌려올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어떤 일들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면서 보니까 인생의 행복은 이런 일들을 잘 분별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누구도, 심지어 가족이라 할지라도, 대신할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며, 빌려주거나 빌려올 수 없는 일들, 자신이 오롯이 책임져야 할 일들을 잘 분별하는 데 행복이 달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우리 스스로 책임져야할 일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돌봐야할 그런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이 주제와 관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열 처녀(신부 들러리)가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유하십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그들을 나눈 기준은 단 하나,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하루 종일 잔치가 열렸고 혼인식은 신랑이 도착하는 밤중에 치러졌습니다. 하지만 신랑의 도착 시간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가 긴장감과 기대감을 품도록 의도적으로 도착을 연기하는 일이 전통이었습니다. 밤늦게 마침내 신랑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면, 신부는 도우미들에 둘러싸여 성대한 혼인잔치가 열리는 곳으로 인도됩니다. 신부 들러리들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가 자신들의 등불(횃불)을 들고나가 신랑이 오는 길을 밝혀야 했습니다.

열 처녀들은 함께 기다렸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루 종일 혼인잔치로 피곤했기에 가끔씩 졸다가 마침내 잠이 들었습니다. 슬기로운 5명은 등잔과 함께 여분의 ‘기름 그릇’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친구의 혼인 축하를 준비했다는 뜻이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입니다. 반면에 미련한 5명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셈입니다. 한밤중이 되자 종일토록 기다리던 신랑 행렬이 마침내 당도한다는 기쁜 전갈을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갑자기 잔치가 활기를 띱니다. 졸다 잠든 열 처녀들도 황급히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미련한 5명은 등불이 꺼져가는 것을 확인합니다. 준비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함께 나누기에는 기름이 모자란다며 ‘거절’합니다. 가게에 가서 사오라고 조언합니다. 도대체 서로 나눌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이 문제의 기름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련한 5명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마침내 신랑 행렬이 당도했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5명은 신랑 행렬을 따라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이 잠겼습니다. 그 뒤 미련한 5명이 돌아와서 간청했지만 신랑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늦어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해석을 참고할 것인지 신중해야 합니다. 신약성서 학자들 중에는 이 비유를 ‘우화’(allegory, 사전적으로는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의해서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뜻, 쉽게 말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그와 유사한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하는 소통의 기술입니다)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신랑은 ‘예수님’이며, 교회는 혼인잔치에 초대 되어 기다리는 ‘처녀들’이라 해석합니다. 또 신랑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이며, 갑자기 신랑이 오는 것은 ‘재림의 갑작스런 도래’(到來)라 해석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에 대한 신랑의 냉혹한 거부는 ‘마지막 심판’이라 해석합니다. 등불이나 기름 각각의 상징은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또 신약성서 학자들 중에는 이 비유가 예수님이 평소 말씀하신 가르침이나 다른 혼인잔치 비유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령 친구 사이인데도 ‘나누기’를 냉정하게 부정한 인상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일상에서 있을 법한 ‘일반비유’가 아니라 ‘특례비유’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특례비유라 주장하는 이들은 이 비유에도 그 선포가 담겨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느님이 친히 다스릴 때가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럴 경우 신랑은 ‘하느님’을(이사 62:5), 혼인잔치는 ‘하느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 비유 이야기의 ‘결론’이 마태오복음서 저자에 의해 추가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 비유의 세부사항들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하면 무리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친구 혼인식에 등불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이 5명에 이른다는 사실. 열 처녀 모두 잠들었다는 사실. 친구 사이인데도 기름 나누어주기를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사실. 신부와 친한 사이인 것이 분명한 데도 미련한 처녀들이 좀 늦게 왔다고 신랑이 입장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의 이런 논쟁과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과 의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 담긴 중요한 교훈과 의미는 ‘기다림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오복음은 서기 80-90년 사이에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50년이 지나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의 차별과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며 살아남아야 했던 당시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어서 속히 재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간격은 점점 더 길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쩌면 일부 신자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신약성서 학자들은 마태오복음서 기자가 ‘재림의 희망’, 즉 믿음(등불)을 잃어가고 있는 교회를 향해 ‘종말’이 올 것이고, 그것도 ‘갑작스럽게’ 올 것임을 ‘경각’(警覺)시키기 위해 이 비유를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바라는 것처럼 반드시 재림이 ‘곧’ 올 필요는 없다는 점도(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았다) 마태오는 담아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럴 경우 ‘신랑’ 이미지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등불은 재림의 희망이나 믿음을, 신랑이 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이 모두 졸다 잠이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신자들의 기다림이 해이해졌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1세기 교회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은유로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키곤 했습니다(2고린 11:2; 묵시 19:7, 21:2,9). 본문에서는 신부 대신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특례비유처럼 본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발설하셨는데, 교회는 이 비유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비유로 재이해한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흥미로운 점이 비유에서 발견됩니다. 결론이 “항상 깨어 있어라.”는 경고 형식으로 끝나지만, 놀랍게도 이 비유에서는 졸음이나 잠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열 처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을 만큼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유의 요점은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기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기다리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해이해지지 말고 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잘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잘 준비하는 것은 ‘기름’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기름을 마련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도대체 서로 나눌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이 문제의 기름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에 답변하기 위해 밑그림부터 그리겠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다림’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실제로 지난 2,000년의 세월이 말해 주듯이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대가’(大家)가 되어야 합니다. 대하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마지막 대단원(최종결정)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용기를 내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날마다 인내하며 기다려야합니다. 이처럼 비유가 ‘기다림’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점을 깨우쳐줍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재림을 통제 할 수 없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지금 당장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항상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하늘 나라(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기 위해 새로운 은유들(metaphors)을 만들어내시기보다 농사일들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시곤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 때든 원한다면, 발달한 건축기술 덕택에 날씨나 계절에 상관없이 집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과를 따는 일이나 벼를 수확하는 일은 단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농사일에서는 기경(起耕)해야 할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지만, 반드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렵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구입하기 쉽고, 즉각적으로 식욕에 만족을 주는 ‘즉석식품들’과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보통 음식의 소비단계는 장보기, 운반, 전처리 및 준비, 조리단계(가열, 간 맞추기, 물리적 변형), 식사단계(그릇에 담기), 뒤처리(설거지 및 쓰레기 처리)로 세분화됩니다. 즉석식품은 이 단계를 최대한 줄여 음식 소비의 편리성을 제공하려는 목적입니다. 이런 즉석식품들과 함께 성장하다 보니 젊은 세대들은 기다리는 일이 어렵습니다. 물론 꼭 젊은이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어떤 일의 결과나 확답을 빨리 받으려 하지 결코 기다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 지도’(규칙)는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도하고, 바라며, 또 기다려야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바라며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 이사 40:31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기다림’의 명수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너진 탄광의 갱도나 건물더미 속에서 갇혀 있다가 생존해 돌아오는 이들은 정말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기자들의 인터뷰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습니까?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습니까? 왜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미래에 대해 희망적일 수 있었습니까?” 어쩌면 인터뷰 주인공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암시를 줍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기다림’ 말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설교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인생에는, 신앙생활에는,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는 일들, 남이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에게 조차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일들, 맡길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일들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그것을 ‘기름’이라는 상징에 담아냈습니다. 결코 나눌 수 없는 일, 남이 나를 위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 내가 준비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이 바로 기름의 상징입니다.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부당합니다. 우리는 분명 친구 집에서 모자란 그릇을 빌려다 손님접대를 한다거나 연장도구를 빌려서 가구수리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의 성격이나 성실성은 나눠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지혜나 사심 없는 봉사는 빌릴 수 없습니다. 그가 쌓아온 기술이나 착한 행실은 나눠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유모어나 재치는 빌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성품이나 성격, 지혜나 봉사, 기술이나 착한 행실, 유모어나 재치는 나눠 받거나 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를 우리는 나눠 받을 수도 빌려올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름’은 바로 이런 것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수렁에 빠집니다. 만일 여러분도 슬기로운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과 ‘기름’ 나누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면 수렁에 빠질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거절은 ‘나눔’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좀 황당해 보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은 나누기를 권하는 분이십니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 마태 5:40-42

그러나 웬일인지 이 비유에서 ‘신랑’(나중에 주님이라 불림)은 기름 나누기를 거절한 처녀들에게 오히려 ‘상’을 줍니다. 그리고 기름 준비가 안 된 처녀들은 외면당합니다. 그들이 그 늦은 시간에 가게에서 기름을 사왔을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비유임을 기억해야하며, 비유 안에는 무리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진짜 중요한 교훈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비유 안에 있는 모순들을 넘어서 더 깊은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신앙생활에는, 분명 나눌 수 없는, 남에게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름은 바로 그것을 찾아내라는 상징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픈 우리를 돌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자원의 일부를 우리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격려하고 지원과 영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대답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선택’을 결코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결코 대신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영적 열매를 거두기 위해 스스로 마음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협력해야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에게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기름’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빌릴 수 없습니다. 오직 본인 자신만이 그 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쌓아올린 ‘영적 수행’이나 ‘영적 자산’, 즉 ‘깨달음’이나 ‘거룩함’에 의존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분명 인생에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없는,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자기 스스로 획득하고 쌓아올려야만 하는, 자기만의 영적 자산(믿음, 깨달음, 거룩함, 착한행실)이 있는 법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 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책임’이 분명 있는 법입니다. 지금 이것을 깨닫고 여기서부터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중에는 늦습니다.

‘인품’(덕성)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애 전체’에 걸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인품을 길러갑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우리는 편협하고, 부정적이며, 비열한 결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관대하고, 친절하며, 용감한 결정을 이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자신의 인품(성품, 덕성)과 영적 자산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구축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대신 받아들여 줄 수 없는 법입니다. 비신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신앙생활 하는 아내나, 남편, 또는 할머니의 신앙의 힘 덕택에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도 자신은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성직자라서, 교회원로라서, 혹은 위대한 사역자라서 자신에게도 그 같은 신앙의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성직자라고해서 저절로 성직자의 믿음이나 사명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비록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공동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나부터 신앙 안에서 바르게 살고, 그 영향력이 자녀들에게 발휘되어야 합니다. 세례도 그렇습니다. 세례 고백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어야 세례를 받습니다.

유아 세례는 예외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아 때는 대부모님이 대신 신앙을 고백해 주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 스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공동체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성체 교육이거나 아니면 견진 교육에 해당합니다. 아무튼 누구도 내 고백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을 책임집니다. 스스로의 결단이고 책임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녀나 친구, 교우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또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 모두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영적 성장이란 믹스 커피 타 먹듯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커피를 타기 위해 물주전자에 물을 채워 넣듯이 영적 성장이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채우고 있는 오래된 자아를 내버리고,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영으로 우리 자신을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영적 성장이 그렇게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라면, 사목은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제마저도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가끔은 사목생활 중 사제가 회의감이 드는 이유는 아무리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성껏 설교를 준비해서 선포해 보아도 그저 제자리걸음만 계속하는 것처럼 보일 때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제의 기도나 설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은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신앙생활이 그렇게 오래지 않은데도, 몇 년 안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사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봐온 사제는 그렇게 빨리 성장하고 변화한 모습이 익숙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영적 삶에서의 변화는 내면에서부터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변화나 성장을 결심할지라도, 그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지름길이란 없습니다. 항상 영적 성장은 자기비움, 자기부인 같은 날마다의 수행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변화시킬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할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웃을 향한 봉사는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오랫동안 우리가 자신의 이기심 너머를 성찰할 수 있을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먹는다고 내 배가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배부르도록 대신 먹어 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영적으로 성장해 줄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오로지 자기 수행을 통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이것이 기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 점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직접적’입니다. 어떤 처녀들은 슬기로웠고 어떤 처녀들은 미련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련한 사람입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기름’처럼 인생에는, 신앙생활에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일,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오롯이 내 책임인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하루하루’ 쌓아져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결정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성찬례에서 우리 자신의 ‘기다림’을 점검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나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 날과 그 시간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안에 밝혀 주신 그 믿음의 등불(빛)을 잘 돌보기를 기대하십니다(마태 5:14). 어쩌면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입니다. 우리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영적 수행’을 통해 ‘날마다’ 꾸준히 성장하면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명령하신 ‘애덕행’(자비행)을 오늘도 성실히 수행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마태 7:24).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이고, 오늘도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천사는 나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 묵시 19:9

신랑되신 주님,
저는 당신의 오심을 갈망하나이다.
저에게 지혜를 주시어
믿음의 등불을 밝히고
기름을 잘 준비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제 53차 교구의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다음주 ‘추수감사주일’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감사가 회복되도록 기도합시다.
  3.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대입수능에 임하는 고 3수험생(최지민 그레이스)과 청소년,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6.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7. 군복무자들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8. 교우들의 일터와 사업장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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