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 5. 연중31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3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우리는 무한 경쟁과 속도 속에 죽어가는 이 세대에게 희망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랬습니다. 이시간 자기를 높이려는 우리 안의 욕망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내려놓습니다. 우리 서로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한 형제임을 더 깊이 새기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하늘공동체로 성장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창조의 하느님, 주께서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로우심을 깨닫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이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지켜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여호 3:7-17
  • 시편 – 107:1-7,33-37
  • 2독서 – 1데살 2:9-13
  • 복음서 – 마태 23:1-12

시대마다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존경받는 스승들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이들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랍비’라는 호칭이 그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고대에 이스라엘에서 율법학자가 되는 데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어떤 계층, 어느 당파 출신이든 율법 교육기관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러 면허장을(학위) 받으면 율법학자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40세쯤이면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이나 학교를 열어 율법을 가르치거나 교육하고 재판관의 일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된 가장 큰 무기는 율법에 대한 탁월한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의 권위가 나왔습니다. 당시 아람어를 쓰던 일반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히브리문자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뜻을 알고자 할 때는 율법학자 주변에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경 지식 독점권을 통해 제사장들과 동등한 위치에까지 서고자 했습니다. 더욱이 탁월한 율법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당대의 ‘예언자’ 역할까지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회당)나 재판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설교를 통해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름난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아래에서 언급할 ‘바리사이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림: 바리사이인들이 예수에게 묻다, James Tissot

바리사이인들이 예수에게 묻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49

바리사이파는 어땠을까요? 기원전 2세기 중엽 사두가이파의 반동으로 시작된 바리사이파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민(選民)답게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된 당파입니다. 사두가이파는 대부분 신분이 높은 제사장이나 경제력이 좋은 평민귀족 출신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주로 수공업에 종사하였기에 상층계급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문헌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출신도 바리사이파에 속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던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나머지 대다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중앙에서 밀려난 이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사두가이파와 대립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기록된 율법’, 즉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기록된 율법 외에 ‘구전(口傳) 율법’도 중요시 여겼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천사나 영혼 불멸도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천사의 존재도 인정했고, 사후세계도 인정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레위기의 정결 규정들과 음식 규정들을 자신들 같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일상에서 철저히 지켜야할 규정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지켜야할 삶의 기준이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개혁가 루터(종교개혁가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의 ‘만인사제설’에 비견할 만큼 혁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장소를 ‘성전’으로 보았고, ‘제의’가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성전 제사에 참여했지만, 대부분은 직업을 가지고 ‘회당’을 근거지로 활동했습니다. 계약관계는 ‘율법 준수’로 유지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율법학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부는 회당에서 율법 해석과 필사,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심지어 메시아 대망에서도 두 당파는 차이가 납니다. 사두가이파는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던 반면 바리사이파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사회정치적인 면에서도 사두가이파와 대립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의회격인 ‘산헤드린’을 장악한 권력집단이고, ‘사법권’(독자적 형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파의 법정에 섰을 때 받으셨던 재판이 바로 이 ‘형법’입니다. 그들은 성전 ‘제의’만 보장된다면, 어떤 정치체제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일종의 ‘실용주의’를 취했습니다. 유대 땅의 정치지배 구조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헤로데와 로마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안정적인 성전 제의를 보장받았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사두가이파는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율법 규정에 따라서 성전 제의뿐만 아니라 그레코, 로만이라는 이민족 문화의 침투 속에서 이스라엘 문화가 영향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인 셈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파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류층에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백성들로부터의 인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는 ‘율법준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만큼 충실한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에 비추어볼 때 오늘 복음이야기는 다소 모순됩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를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들이 그랬을까요? 물론, 그 중에 일부는 책망 받을 사람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전체를 이런 식으로 일반화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해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워주고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자비한 이들이라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라 책망하십니다. 위선과 허영심과 명예욕(자만,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라 책망하십니다. 심지어 마태오복음 23장에는 무려 7개의 ‘저주문’까지 나옵니다. 그들은 착취와 탐욕과 명예욕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진리의 방해꾼, 눈먼 인도자,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파렴치로 불립니다.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뱀(독사) 같은 자들, 의인들과 무죄한 이의 피를 즐기는 이들로 묘사됩니다. 결국 그들 때문에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라며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돌아갑니다.

여러분, 정말 이런 식으로 일반화해서 오명(汚名)을 뒤집어씌워도 괜찮을까요?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역사적으로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던 이들인데, 어째서 복음서 곳곳에서는 그들을 문제 많은 이들로, 예수님의 적대자들로 묘사하는 것일까요? 사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그 예들을 ‘복음서 자체’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사도 바울로’의 고백을 통해서도 그들이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대인들의 이름난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에 속한 지도자였습니다. 만일 그의 행동이 위선으로 가득했다면, 그 대화에서 이미 예수님이 책망했겠지요. 루가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어땠습니까?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칠 만큼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을 예수님이 그렇게 비유에 등장시키셨을 리가 없습니다.

마태오복음 19장에 나오는 젊은이는 또 어떻습니까? 평행본문인 루가복음 18장에서는 그를 유대의 지도자라고 묘사하는 데 지도자라는 말 속에서 그가 율법학자였거나 아니면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다 지켜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평행본문인 마르코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고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는 자신이 유대교를 신봉하고, 조상들의 전통(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열성적이었다고 고백합니다(갈라 1:14). 또 필립비서 3장에 보면, 자신은 바리사이파였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조금도 흠이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합니다(필립 3:5-6).

이처럼 그들은 분명히 ‘율법준수자’였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랍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태오복음서는 이들을 예수님의 적대자들로 보도합니다.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 위선자들이라고, 심지어 저주받을 자들이라는 책망을 예수님의 입에 담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무엇을 의도해서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그리고,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이렇게까지 표현했던 것일까요? 도대체 어떤 숨겨진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신약성서 학자들은 이런 묘사 속에 당시 유대교와 유대계 그리스도교 사이의 대립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 승천 이후 유대교와 초기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큰 충돌 없이 지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각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 모여서 예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미 오신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 사이의 차이점이 점차 명백히 드러나면서 긴장과 갈등이 형성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Francesco Hayez, https://en.wikipedia.org/wiki/Tisha_B%27Av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적대관계로 갈라서게 된 계기는 주후 66-73년 있었던 ‘유대 독립전쟁’입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은 항쟁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성전파괴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하였습니다(마태 24:15-16). 결국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주후 70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겁하게 도망쳤다며 비난하고 증오했습니다.

이 대재난 후 유대교는 대위기에 봉착합니다. 유대에 대한 관용 노선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고 산헤드린도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열혈당원’들도 모두 ‘마사다’에서 전멸 당했습니다. 여태껏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는 1개 군단 이상의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해마다 2드라크마씩 내던 ‘성전세’는 유대인이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유대인세’라는 이름으로 부과되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파괴 후 주로 ‘얌니아’(현재의 지명은 야브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위치)라는 도시로 이주 합니다. 거기서 율법 연구만 천착하는 조건으로 일종의 종교 활동인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교)의 설립을 허가받습니다. 이제 유대교 당파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기존의 전승 자료들을 검토하여 유대교를 재건해야 합니다. 그들은 성지 순례와 희생 제사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과정을 거치기 시작합니다. 즉 오랜 동안 유대교 삶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사라진 성전을 대신할 ‘구심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가르침과 실천 기준에 순응하지 않는 집단들을 구별해 ‘추방’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표적이 된 대상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심혈을 기울인 일은 ‘유대교 정경 선포’입니다. 주후 90년 바리사이파는 로마제국의 허락을 받고 유대교 재건을 위한 ‘얌니아회의’를 개최합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성경(그리스도교 입장에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사용하던 70인역(기원전 250-117년 사이에 번역) 대신에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하는 24권, 그리스도교는 이를 70인역에 따라 39권으로 구분합니다)만을 새로 시작되는 유대교의 ‘정경’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때 정경을 확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때 ‘얌니아회의’에서 정경화 작업이 결정됐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947년 ‘사해(쿰란) 사본’(기원전 250 – 주후 70년 사이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기존의 주후 90년보다 100년도 더 이전에 이미 구약이 정경화 되어 있었다는 징후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70인역인 ‘집회서’ 머리말에도 구약을 ‘율법’(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예언서’(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하,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12 ‘작은예언서’)와 ‘성문서’(시편, 욥기, 잠언, 아가서,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델, 다니엘,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얌니아 지역에서 소집된 유대교 공의회가 경전 정경화 작업을 위한 모임이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얌니아회의를 통해 ‘성전’(聖殿)이 아닌 ‘정경’(正經)이 유대인 삶의 중심이 됩니다. 각 지역의 ‘회당’(會堂)을 통해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바리사이파 주도의 유대교 시대가 열렸습니다. 한마디로 정경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시대가 열려서 오늘에 이릅니다.

더욱이 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저주문’이 담긴 회당 기도문을 유대인들이 암송하도록 결정합니다. “나자렛파와 이단들은 순간에 망할지어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 의인과 함께 섞이지 말게 하소서.”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을 파문하고 단절한 사건입니다. 이 모든 일은 재건(再建) 유대교를 장악한 바리사이파가 주도한 일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더 이상 유대인 중심의 회당에 참여할 수 없었고, 미움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대교의 한 분파라는 자리로부터 벗어나 점차 독자적 종교로 독립해 갔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마태오복음과 다른 복음서들이 기록될 때의 시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마태오복음은 주후 80-90년 사이에 쓰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주도의 재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갈등과 대립, 회당에서 내쫓긴 그리스도인의 복잡한 감정이 복음서에 많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번번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충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서도 바리사이파(율법학자)를 부정적으로 지적하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옵니다. 이미 적대 관계로 돌아섰기에 굳이 긍정적으로 묘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변증하기 위한 의도를 중심에 두고, 유대교(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 심지어 제사장들과 사두가이파, 열혈당까지 포함하여)를 깡그리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한마디로 유대교와의 차별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내부 결속과 믿음을 확고히 하는 일이 중요해진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한 묶음으로 처리되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반대자들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또 오늘 복음이야기처럼 그들을 부정적으로, 논쟁적으로 과장해서 복음서 저자가 묘사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역사적,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 그들 전부를 부정적인 사람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A.D. 70,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하다”, David Roverts

이런 배경이해를 통해 오늘 복음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그리스도교를 변증하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다소 과장적이고 일방적인 일반화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롭게 시작한 마태오 공동체에도,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도,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그런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라고 해서 그런 ‘위선’과 ‘허영’과 ‘명예욕'(교만, 자만, 권위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절부터 7절이고, 후반부는 8절부터 12절입니다. 전반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가장 명예로운 일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법)을 전하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을 알려주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바꾸면 어떤 이들이 여기에 해당할까요? 아마 ‘종교인’이나 ‘인문학적인 전문가 집단’이겠지요. 인생에 대해서, 생명윤리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한 말씀 할 수 있다는 이들 말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스승, 아버지, 지도자처럼 뭔가를 가르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어떤 경고를 예수님 입에 담았습니까? 가르치는 이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겁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신앙생활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뭘 좀 안다고 하는 이들, 체험이 있다는 이들은 신행일치(信行一致), 언행일치(言行一致)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행합일, 신행일치, 언행일치가 제대로 안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대로 알고 싶은 이들은, 제대로 행하고 싶은 이들은, ‘먼저’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사실, ‘모세의 자리’가 갖는 진정한 상징은 ‘듣는 자리’입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 정확히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들어야할 자리입니다. 누구에게 들어야 합니까?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보았듯이 모세는 먼저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묻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제자(학생)의 자리에서, 자녀의 자리에서, 양의 자리에서 먼저 듣는 일입니다. 스승에게, 아버지(어머니)에게, 지도자(목자, 그리스도)에게 가장 사랑받는 제자, 자녀, 양은 누구입니까? 잘 듣는 이들입니다. 잘 듣는데 살 길이 있습니다. 잘 듣는 이들은 겸손한 이들이지만, 스스로를 스승, 아버지, 지도자의 자리에 갖다 놓는 이들은 말하기만 즐기는 교만한 이들입니다.

‘무거운 짐’은 613개나 되는 계명들입니다. ‘남의 어깨에 메워준다’는 말은 율법적 의무를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뜻입니다. 나귀에게 짐을 잔뜩 지게 한 것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라사이파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해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다는 책망입니다. 실제로 율법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라면 몰라도, 일반 백성들이 의무조항으로 가득 찬 계명들 모두를 기억하며 세세히 지키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다보면, 좀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이 수많은 설교를 해 오면서 바로 그렇게 산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대성당에 근무할 때 신자 분으로부터 이런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요즘은 돈 없으면 성당에도 못 다녀요. 왜 그렇게 내야할 헌금이 많은지 몰라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에서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짐’이나 ‘부담’으로 다가오는 일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그 무거운 짐이 ‘십일조’나 ‘감사헌금’ 같은 ‘봉헌’일수도 있고, ‘구역장’이나 ‘활동단체장’ 같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성당청소’나 ‘애찬봉사’일수도 있고, ‘성경공부’나 ‘전도하자’는 권유들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에게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에서 짐입니까? 기쁨입니까? 무거운 짐이라면 사제인 제가 잘못 가르쳐 온 셈입니다. 사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또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짐’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짐 중에서도 가장 많은 짐은 ‘생각의 짐’일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그 생각의 짐에 짓눌리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생각이라는 짐 뿐만 아니라 다른 인생의 무게로 힘겨워하며 도움을 간청하는 우리 중 누구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613개나 되는 무거운 계명의 짐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마태 11:28-30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는 바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짐’을 없애준다고 초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멍에’와 함께 ‘짐’까지 선사하시는 분입니다. 가뜩이나 이미 지고 있는 ‘짐’ 때문에 수고로운 데 ‘짐’이 하나 더 늘어난 격입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고생스럽지 않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면, 우리는 그 멍에가 우리 몸에 꼭 맞아서 편하고, 주님이 주시는 그 ‘짐’이 가볍다는 비밀을 체험해 갑니다. 생각으로 강제된 짐들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져야할 짐을 식별하고, 감사함으로 지게 되면서 피로함이나 피곤함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까지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안에 이 비밀을 체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또 마태오는 어떤 경고를 예수님 입에 담았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가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었다고 책망합니다. 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장신구나 옷차림도 그랬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한다”는 말은 인정받고 싶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명예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남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걸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과 관련될 때는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여러분, 신앙은 원칙적으로 누구하고의 관계라고 배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이 진실하게, 성실하게, 그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오직 하느님께만 평가받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잊고서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꾸만 사람들에게 자기 행동의 평가를 받으려다가 일을 그르칩니다. 사제가 몰라주면 어떻고 다른 교우들이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신앙이 사람에게 하는 행위가 아닌 이상 사람의 평가에 휘둘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향한 행위는 하느님께서 평가해주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이 진실을 잘 깨우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우리 행위 중에 본래의 취지에서 어긋난 행동은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만들어 매다는 이유나 옷단에 ‘술’을 다는 본래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자가 목걸이나 묵주를 지니는 것처럼, 둘 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기억하고 있다는 신앙의 도구적 표현일 뿐입니다.

갑(תפילין, Tefillin)에 넣어진 성구는 ‘쉐마’의 구절들입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 신명 6:4-5

이 성구를 넣은 갑을 이마나 팔에 매달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 정, 의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통제되고, 하느님과 연합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이 갑을 착용하는 이유 역시 다음의 쉐마 구절 때문입니다.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 신명 6:8

Tzitzit

겉 옷단에 ‘술’을 달아 착용하는 이유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성의 표현일 뿐입니다. 유대인에게 옷단 술이 상징하는 의미는 ‘613’입니다. 즉 ‘술’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ציצית, tzitzit)의 자음에 할당된 숫자와 옷단 술을 만드는 전체 매듭의 숫자, 그리고 나온 실의 숫자를 합치면 613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지켜야할 모든 계명의 총수입니다. 유래는 민수기에 나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
대대손손 옷자락에 술을 달고
그 옷자락 술에 자줏빛 끈을 달게 하여라.
이렇게 술을 만들어 달고
그것을 볼 때마다
야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전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눈에 드는 대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가 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지켜
너희 하느님에게 성별된 백성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 민수 15:38-40

이렇게 옷단 술은 스스로에게 하느님의 율법을 되새기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저 손가락 길이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길게 한다는 것은 자신보다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즉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종교적 허영’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 마태오는 어떤 경고를 예수님 입에 담았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는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를 찾는다고 책망합니다.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높이는 ‘교만’과 ‘권위주의’에 물들었다는 뜻입니다. 길거리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고 책망합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 달라는 ‘공경’과 ‘명예욕’에 물들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높은 자리를 찾는 ‘교만’과 ‘권위주의적인’ 태도, 자신을 높이 평가해 달라는 ‘공경’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모습은 없는지 이 시간 돌아보아야 합니다.

후반부인 8절부터 12절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경고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유대교로부터 분리하여 독자적 종단으로 길을 가야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했던 근본정신입니다. 물론, 오늘의 교회로 모여 있는 우리 역시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할 삶의 태도이며, 공동체 유지결속의 근본정신입니다.

중요한 세 단어가 등장합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입을 빌어 자신의 공동체 안에 이 단어가 자리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란 위계가 아니라 ‘형제’(아델포스)적 사랑으로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한 자궁에서 나온 친형제, 다음으로는 친족관계, 그 다음으로는 같은 지향(목표)을 공유한 이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이처럼 마태오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의 ‘평등관계’를 강조합니다. 비록 제가 직무상 ‘사제’라 불리고, 어떤 분은 ‘위원’이라 불리며, 어떤 분은 평신도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진정한 스승, 아버지, 지도자는 단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한 스승의 제자들이고,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며, 한 지도자(목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들입니다. 이런 평등의식으로, 그리고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는 ‘모세의 자리’로 상징되는 ‘권위’의 문제가 늘 대두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장 앞장 서 들어야 하는 자리가 ‘모세의 자리’라는 이해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찬례는 사제와 신자의 공동 집전이지만 사제에게 주집전자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세례성사는 누구나 베풀 수 있지만 견진만은 주교만 베풀도록 함으로써 권위를 부여합니다. 교회의 중요의사 결정은 ‘위원회’가 하도록 권위를 부여합니다. 공동체로부터 부여받은 이 같은 권위가 원래의 평등과 형제적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잃어버릴 때, 권위는 권위주의로 변질됩니다. 한 마디로 진정한 스승, 아버지, 지도자를 잃어버릴 때 변질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로마 교회는 ‘교황’을 내세웠습니다. 중세 때 교황은 절대 권력을 누렸습니다. 지금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개신교회는 로마 교회의 그 나쁜 리더십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것이 싫다며 교회개혁(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을 감행한 개신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자신들이 비판한 그 나쁜 리더십, 고약한 리더십으로서의 ‘권위주의’, ‘명예욕’, ‘교만’, ‘위선’, ‘허영’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비단 성직자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를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은 권위주의자가 아니라 섬기시는 분이셨음을 잊고 있습니다.

흔히 마태오복음은 가르침의 복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은 가르침, 즉 교육의 본질입니다. 산상수훈에서부터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이야기의 교훈을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비유로 말씀해 오셨고, 마침내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로 반복하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 마태 20:27-28

DIVINE SERVANT, at Dallas Theological Seminary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섬기는 사람으로, 즉 종으로 정의하심으로써 모든 사회 질서를 뒤엎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만물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낮아지신 분 덕택에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약해지신 분 덕택에 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선거철만 되면 종이 되겠다고 위선을 떠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종이 될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찾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구세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종이 되는 삶입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길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합니다. 스승노릇, 아버지노릇, 지도자노릇 하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는 망할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종처럼 낮추는 이가 많은 공동체는 살 것입니다. 들으려는 마음이 많으면, 공감하려는 마음이 많으면 공동체는 삽니다. 진정으로 종이 되는 삶은 지금까지 관계에서 평화와 고요를 밀어내고, 연민과 공감을 배제해 온 우리 자신의 모든 자기중심적인 쓰레기들, 즉 허영심, 교만, 명예욕(권위주의)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를 위한 종이 되는 마음, 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제가 기도하는 제목이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목이며, 하느님의 사랑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제목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무슨 영적 의미를 구할 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새기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은 마치 은총이 필요 없는 사람인 것처럼, 오로지 자기 옳음(확신)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역겨워하십니다. 우리의 말(앎)과 실천은 바늘과 실처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신앙생활이나 리더십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이 세상에서 먼저 하느님께 듣는 일을 통해 지행합일, 신행일치, 언행일치의 삶을 훈련하고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고생하며 힘겨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짐을 거들어주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라 불릴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형제적 사랑으로 건네는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선한 눈빛, 나눔의 온정은 살맛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살맛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향합니다. 주님은 맨 윗자리, 제일 높은 자리를 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도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승, 아버지, 지도자로 불릴 생각을 아예 내려놓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듣는 귀를 막고, 필연적으로 자신을 ‘위선’으로 이끌기 때문임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자기를 높이려는 우리 안의 욕망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내려놓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낮은 자리야말로 높은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궁에서 나온 한 형제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이 바로 세우려 하셨던 새로운 세상, 즉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갑시다. 그것만이 무한 경쟁과 속도 속에 죽어가는 이 세대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 마태 23:11-12

찬미하올 하느님,
이 몸은 어느 자리에 있든지
변함없이 당신의 종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4.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2017.11. 5. 연중31주일”의 4개의 댓글

  1. 핑백: 2018.7.22. 연중16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2. 핑백: 2018.5.13. 부활 7주일. 승천후 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3. 핑백: 2018.4.22. 부활4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4. 핑백: 2018.1.28. 연중 4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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