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2. 연중29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29주일입니다. 복음말씀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은유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화폐(동전)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비록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소유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3:12-23
  • 시편 – 99
  • 2독서 – 1데살 1:1-10
  • 복음서 – 마태 22:15-22

연중 21주일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출애굽기를 따라 1독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로 출애굽기 독서가 끝납니다.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를 노예로 붙잡고 있는 탈출해야할 ‘이집트’는 무엇인지를 발견해가자고 초대했습니다.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가야할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찾자고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여정’ 위에 있고, 그 길을 잘 걷고 있는지 발견하자고 초대했습니다. 그것들을 찾아내었습니까? 이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우리는 모두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 믿음이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독서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성서정과들의 공통주제는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의 주권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너야말로 과연 내 마음에 드는 자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모세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이고, 내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만 모세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도 하느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인 우리 자신도 알아차리라고 채택된 독서입니다. 시편은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께 마땅한 찬미를 바치라는 노래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서신은 살아계신 ‘참’ 하느님께로 돌아와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에 쓴 사도 바울로 최초의 서신입니다.

이 공통주제를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고대부터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과는 달리 ‘유일신’(일신교)이라는 독특한 신앙문화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당시도 이스라엘은 식민지였지만, 이 신앙을 이유로 타문화로의 동화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제국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골치 아픈 지역인 유대 속주(屬州)에는 크게 5개의 당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헤로데당, 혁명당, 에쎄네파입니다. 마태오 복음 22장에는 바리사이파, 헤로데당, 사두가이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 속 어딘가에 희미하게라도 ‘혁명당’도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그들은 당시로서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을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로 자처했습니다(1열왕 2:35). 특히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가문(제2경전 마카베오 참고)이 ‘시리아’의 식민통치에 맞서 유대 독립을 쟁취하자 정치 전면에 뛰어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서 세력을 키웠던 이들로 제사장 조직이 정치화된 당파입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성경으로 받아들였고, ‘예언서’와 ‘성문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모세오경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오경에 기록되지 않은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후세계와 영적 존재도 부정했고(마태 22:23-33), 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거부했습니다. 종교적 실세였기에 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헤로데 왕권과는 거리를 지켰고, 로마제국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득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힘을 잃고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리사이파’도 사두가이파가 정치 전면에 나서던 기원전 2세기 때 등장합니다. 그들은 헬레니즘화의 물결을 타파하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민(選民)답게 성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된 당파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는 관점은 사두가이파와 달랐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문서와 구전으로 양분되어 전해진다며 사두가이파와 맞섰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율법준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가르침을 거의 문자적으로 지키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엄격한 율법준수와 함께 중산층을 포섭했기에 유대교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율법준수의 방해자로 비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공공연히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마태 21:31). 특히 바리사이파는 유대민족이 로마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反)로마’ 성향의 당파입니다.

‘헤로데 당’은 헤로데 왕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던 당파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들은 헤로데 대왕(기원전 37년 ~ 기원후 4년)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주전 4년~ 주후 39년)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처형했던 헤로데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마르6:14-29). 그는 로마의 하수인이자 꼭두각시 ‘왕’으로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렸습니다. 황제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아 통치했기 때문에 ‘소요’로 로마제국이 개입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무척 애썼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정치적으로 ‘친(親)로마’ 정책을 펴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당파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이 야합하여 벌이는 교묘한 ‘술책’입니다. 복음서에는 현실 정치나 종교적 입장을 두고 우호적이지 않던 그들이 두 번 야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공동 목적에서였습니다. 한번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 후이고(마르 3:1-6), 다른 한 번은 오늘 복음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있기 불과 사흘 전, 그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또 다시 한 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찾아낸 술책은 ‘세금’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생활비인 세금은 국정 운영의 근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세’와 ‘십일조’ 같은 종교적 의무의 세금을 예루살렘 성전에 내야했습니다. 또 로마제국의 속주(屬州)였기에 속주세와 기타 직접세(토지세, 인두세, 소득세)를 내야했고, 관세, 통행료, 판매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간접세도 내야 했습니다. 종교세를 제외한 세금은 로마관리들이 직접 거두어들였는데, 세리는 그 말단에 속합니다. 밥벌이를 하는 유대인 성인 한 명이 바쳐야하는 세금을 합치면 수입의 약 30%에 육박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거운 세금은 반란의 불씨가 되기 쉬운 법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세금은 악정(惡政)의 주요 근거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위민(爲民), 또는 여민(如民)한다는 정치지도자는 세금 때문에 저항이 생기지 않도록 애를 씁니다. 신약학자들은 사도행전에도 ‘세금’(인두세) 걷는 것을 저항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사도 5:37). 소위, ‘혁명당’의 뿌리가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도 그 후예였던 ‘시몬’이 있었습니다(마르 3:18).

혁명당(열혈당: 피가 뜨겁다는 뜻)은 이스라엘이 선민(選民)이기에 오직 유대인만이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 당파입니다. 한마디로 ‘민족주의자들’입니다. 로마와 가까이 지내는 유대인을 민족의 적으로 경멸했고,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그 경멸의 대상에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마제국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을 임명하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 자행되는 비리는 로마제국을 향한 원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제사장들은 ‘성전세’와 ‘십일조’라는 ‘종교세’를 징수하고, 못내는 이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신약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하던 민중들이 땅을 빼앗긴 민중들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악정(惡政)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당연히 ‘혁명당’을 지지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혁명당원을 체포하면 그 저항의지를 말살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실 때, 양옆에 달린 이들도 그냥 강도가 아니라(십자가는 당시 국사범 처형도구였기에) 혁명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하는 신약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기원후 39년, 자신을 신으로 자청한 ‘칼리굴라’ 황제는 제국 전역의 성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게 했습니다. 유대인은 황제를 우상화하는 종교정책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습니다. 게다가 이런 종교적인 이유 말고도 ‘무거운 세금’ 문제가 유대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직할지였던 유대 땅의 장관인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으로 수입의 10%) 대신 예루살렘 성전 창고에서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합니다. 이 일에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 진압한 것이 ‘혁명당’이 주도한 ‘유대 독립전쟁’(기원후 66년~73년)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혁명당원은 ‘성전세’로 민중들을 수탈한 대제사장들을 집단살해하고, 성전세 채무 문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의 착취와 그 배후인 로마제국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독립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지난주 들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 파괴’(기원후 70년)입니다. 그 때 파괴되고 남아있는 서쪽 벽을 흔히 ‘통곡의 벽’이라 부릅니다. 유대인이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디아스포라’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에 대한 다른 당파들의 견해는 어땠을까요? 헤로데 당과 사두가이파는 친(親) 로마였기에 세금 징수를 찬성했습니다. 반면에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금 징수를 찬성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공공연히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도 상하고, 하느님이 주권자시라는 신앙에도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세금을 내지 않았느냐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기쁜 일은 아니었지만, 주권을 잃은 ‘속주민’(屬州民)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무거운 세금도 고역스러웠지만, 세금을 낼 때 사용하는 특정 ‘은화’, 즉 ‘데나리온’도 문제였습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였던 ‘데나리온’은 특별한 방법으로 주조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내보인 데나리온은 아마도 당시 로마의 2대 카이사르(황제의 호칭)인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의 은화였을 것입니다.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옆얼굴과 함께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장엄한 아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황제를 신격화한 문구입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로마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선물 받은 칭호로 신성한 사람, 존엄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뒷면에는 ‘평화의 화신’이라는 의미로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의 좌상과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즉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마 관리가 걷는 직접세 중에서도 ‘인두세’는 이 ‘데나리온’으로만 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인두세는 우리가 1년에 한 번씩 내는 ‘주민세’에 해당합니다. 어린이나 노인만 빼고 12살에서 65살까지의 주민이면 누구나 내야했습니다. 로마는 이를 부과하기 위해 14년마다 한 번씩 정규적으로 ‘인구조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인두세는 전액 로마 황실 금고로 들어가는 재원이었습니다.

세금도 내기 싫지만, 이 은화를 사용하여 인두세를 내거나 일상에서 통용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가증하고 혐오스러우며, 십계명 위반입니다. 즉 황제가 신성한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첫 번째 계명을 위반한 동전입니다(유일신 신성모독). 또 거짓 신의 이미지를 포함함으로써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을 위반한 동전입니다. 이 동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죄에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는 혁명당처럼 극단적인 저항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끔찍한 동전이었지만, 속주민이 감당해야 하는 울분이었고, 당시 권력의 상징인 동전이었습니다.

그림: "The Tribute Money", James Tissot

“The Tribute Money”,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57

세금(인두세)을 ‘핫 이슈’로 채택한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은 다시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다가왔습니다.

선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참 천연덕스럽게 말도 잘합니다. 아첨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경계를 풀게 할 목적이지만 악의에 찬 말입니다.

그 논쟁의 장에 ‘군중들’(민중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로마를 몹시 싫어했고, 세금 내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런 동전으로 환전해 세금을 내라는 것 때문에 군중들은 자주 소요를 일으켜 자신들의 혐오를 드러내곤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 입에서 세금 내는 것을 승인하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이 나올 경우 가만히 있지 않을 참이었습니다.

더욱이 군중들이 모여드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또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결국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로마인들입니다. 지난 정권들에서 경찰지도부가 보였던 태도처럼, 그들은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은 모였다하면 소요를 일으키기 쉬웠고, 그럴 경우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유대인 최고 명절인 ‘과월절 축제’ 기간을 앞두고, 몰려든 순례 객들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과월절 축제 기간은 로마를 대항하여, 특히 세금 문제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일 년 중 가장 유력한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각 당파와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금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세금은 어떤 추상적인 논쟁이 아니라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대단히 완벽하고 교묘한 ‘올가미’였던 셈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밀고할 것이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몰아 ‘국사범’(정치범)으로 체포할 것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내라고 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숭배를 인정했다며 거짓 교사라 비난할 것입니다. 또 군중들 속에 끼어 있는 혁명당원들은 예수님을 민족의 배반자라며 암살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막힌 함정을 팠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악어논법’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집트의 전설에서 비롯됩니다. 옛날 이집트의 한 어머니가 나일강에 목욕을 갔다가 한눈을 파는 사이 아이를 악어에게 빼앗겼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악어에게 아이를 돌려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악어는 자신이 아이를 돌려줄지, 돌려주지 않을지 맞추면 돌려주겠다고 조건을 답니다. 난처하고 억지스런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돌려줄 것이라 말하면, 악어는 틀렸다면서 잡아먹을 것입니다.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 말하면, 돌려주려 했는데 답이 틀렸다면서 잡아먹을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아이는 잡아먹히는 셈입니다. 뭐라고 답을 하던 악어에게 유리한, 즉 아이를 잡아먹기 위한 속임수입니다. 결국 악어는 아이를 삼키며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악어논법을 알아차리신 예수님은 지혜를 발휘해서 그 올가미로부터 빠져나오십니다. 동전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동전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건넵니다. ‘위선자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이라 자부했지만, 그 동전을 갖고 다녔다는 뜻입니다. 십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들의 가르침대로라면 데나리온은 하느님을 순수하게 경배하는 사람에게는 속할 수는 없는 동전입니다. 동시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다른 동전도 아니고 ‘데나리온’을 가져왔다는 것은 이 세금 논쟁이 ‘인두세’라는 점을 알려주는 힌트입니다. 그들은 이미 인두세를 낼 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던 질문을 던진 셈입니다. 간사하고 악독합니다.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동전을 건네받으신 예수님은 물음으로써 물음에 대항합니다. 이제는 공이 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허공에서 빛나는 은화를 보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똑똑히 대답하십니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들에게 날리신 ‘회심의 한 방’, 즉 ‘카운터펀치’입니다.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이고, 제한적이며, 엄밀한 대답입니다. 당시에 ‘카이사르’(황제를 가리키는 칭호)는 로마제국의 주인입니다. 그 주인이라는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형상)을 새겨서 사용하도록 명령한 돈이 데나리온입니다. 오로지 황제에게 속한 황제만의 전유물입니다. 따라서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마디로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황제의 것입니다.

더욱이 제국 안의 백성들이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카이사르를 제국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황제의 종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데나리온에 새겨진 그 문구는 카이사르 자신과 또 스스로를 카이사르의 종이라고 믿는 사람 외에는 아무에게도 해당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그 글귀는 자신을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라고 믿고 경배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동의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들은 이미 그 데나리온을 지니고 사용했기에 자신들이 황제의 통치아래 있음을 공공연히 시인한 셈입니다. 그렇기에 카이사르가 세금(인두세)으로 데나리온을 요구하면 자신들이 이미 시인하고 있는 것처럼 납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 대답으로써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가 사실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임을 꿰뚫으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 동전에 신성한 사람, 대제사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겉보기에는 정치적 복종의 행위로서 특정한 세금을 허락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이 카이사르에게 내는 세금은 ‘종교적 충실성’의 표시이기도 하다는 점을 예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누구를 섬기는 충실성의 표시입니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입니다. 한마디로 그 저주받은 것을 너희가 신의 아들이라 믿는 카이사르에게 되돌려주라는 불호령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몇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이것이 바로 ‘카운터펀치’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나가떨어졌습니다. 분명히 그 동전은 카이사르가 ‘주인’이라는 뜻으로 형상과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달라고 하면 그에게 주어야합니다. 하지만 그의 것이 아닌 다른 것들, 즉 그가 새겨져 있지 않은 것들, 동전이 아닌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카이사르에게 속하지 않은 또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카이사르 말고 하느님이 주인이시라는 표가 되어 있는 또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요구하시면 돌려 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안을 두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예수님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하신 말씀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이 말씀은 ‘성과 속’의 이분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것은 카이사르의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통합적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그 동전은 카이사르의 것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카이사르의 형상과 그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전은 분명 황제의 목적에 따라 황제가 만들었습니다. 동전의 앞뒷면은 그야말로 황제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꽤 좋은 표시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예수님이 그 동전이 황제가 의도하는 목적을 충실히 반영할 정도의 탁월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주님, 무엇이 하느님의 것입니까?” 누군가의 것이려면 황제처럼 거기에 그 사람 것이라는 어떤 표식(형상, 얼굴, 문구, 이름)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하느님의 것이려면 하느님의 것이라는 표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형상(표식)이 새겨져 만들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이 찍혀 있어서,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 카운터펀치를 통해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려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말씀의 손가락이 지금 어디를 가리키는지 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 창조이야기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 창세 1:26-27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받았을 때 우리 영혼에는 “너는 내 것이다”는 하느님의 도장과 십자가의 표식이 새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표 브랜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동전들입니다. 상품마다 만든 회사명이 찍혀있습니다. 하자가 있으면 그 회사에서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유주이십니다. 성찬례는 바로 이것의 재확인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쓰여 지고, 새겨진 모든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자신의 형상이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돌려드리는 산제사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잘 바치고 있습니까?

교우 여러분,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과 속주민은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이 황제의 통치아래 있음을, 황제가 자신의 주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야 만이 하느님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합니다. 카이사르인지(세상인지)? 아니면 하느님인지? 카이사르도 분명히 신(神) 행세를 했습니다. 모양만 바꿨다 뿐이지 오늘날은 돈이, 권력이 신 행세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신의 자녀입니까? 우리는 어느 신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모든 인생의 하느님 되심! 모든 인생의 주인 되심! 카이사르마저도 하느님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카운터 펀치’에 담은 설교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궁극적 충성을 바쳐야하고, 오직 하느님께 가장 충실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적들 앞에서 당당히 설교하셨습니다. 이것이 적들의 올가미 앞에서 예수님이 당당히 선포하신 설교입니다.

이 시간, “너희가 그 동전을 황제의 것이라며 그에게 바쳐왔다면, 너희 자신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데, 너희는 자신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느냐?”고 물으신 주님 앞에서 고요히 침묵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야 할 이 세상적인 것과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하늘의 것을 찾기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카이사르의 것이고, 하느님께 물어서 들은 대답만 진정으로 하느님이 받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존재의 창조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 빚어져 가는 과정 역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예수님은 오늘 너무나 단순하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외에 우리에게 궁극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 우리 자신을 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권세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 그것이 빛이든 어둠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실패든, 우리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이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담겨져 있고,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며, 지금도 하느님이 빚어 가시는 존재라는 점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고, 충성의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현실에서 직면하는 ‘특정 문제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지,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할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해서는 어떤 주장을 해야 할지… 무엇이 이 한반도와 미래 세대를 위해 최선의 조치인지 자동적으로 답변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마음에 새길 수 있는 탁월한 출발점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은유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화폐(동전)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드러내십시오. 우리는 하느님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의 주인이시고, 당신의 형상이 새겨진 모든 것들 위의 통치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다른 질서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고, 이웃을 연민으로 대하며, 의로움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주시는 힘은 하느님의 형상(성령, 하느님 자신)입니다. 이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궁극적 충성을 명령하시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이들을 그 마음에서 인도하시는 힘은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종국에는 궁극적 의미, 궁극적 가치와 연결되도록 이끄시는 힘도 우리에게 새겨진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 안에 영원한 생명이 거하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 부서지고 구원받지 못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온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창조의 숨결과 구원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확신 속에서 오늘도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십시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십시오.
바로 그대 자신을 말입니다.
어둠도 빛도…

찬미하올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를 창조하시고
저를 빚어 가시나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4.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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