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5. 연중2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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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28주일입니다. 오늘 성서독서들의 공통주제는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면서 하느님 나라 자녀다운 삶의 가치관을 재점검하라고 요청합니다. 복음서는 그 나라의 가치관을 잘 실천하는 삶이 예복을 입은 생활이라 강조합니다. 그 실천이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초대를 완성해 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듣고 배운 것을 잘 실행할 수 있는 힘과 용기 주시기를 사모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주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오직 사랑으로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2:1-14
  • 시편 – 106:1-6,19-23
  • 2독서 – 필립 4:1-9
  • 복음서 – 마태 22:1-14

오늘 성서독서들의 공통주제는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와 시편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한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중보입니다. 복음이야기는 하느님 나라로 초청받은 우리가 그 나라에 맞는 삶의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서신 필립비서 역시 구원 얻은 하느님의 백성답게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금 송아지를 경배하다”, Nicolas Poussin, https://en.wikipedia.org/wiki/The_Adoration_of_the_Golden_Calf

오늘은 복음서를 중심으로 이 주제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옷’을 입고 삽니다. 몸이 커갈수록 옷을 바꾸어 입고, 간혹 특별한 자리에 갈 때는 좀 더 멋진 ‘겉옷’을 차려입기도 합니다. 또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처럼 특수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에는 그에 맞는 복장을 갖춥니다. 이런 ‘물질적인’ 옷 말고도 우리가 평생토록 입고 사는 특별한 ‘정신적인’ 옷도 있습니다. 그 옷을 ‘가치관’이나 ‘세계관’ 또는 ‘신념’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 ‘낱말’로 표현하자면 ‘예복’입니다.

어떤 분은 한 번 입은 그 정신적인 옷을 평생 입고 삽니다. 어떤 분은 ‘지혜’가 자라면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거나 수선해 입기도 합니다. 누가 강제로 입혀준 것이 아니기에 언제든 벗을 수 있고, 또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하고, 결단해서 더 나은 가치관의 옷으로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입고 있어야 할 보다 보편적인 옷, 즉 지혜가 자랄수록 입고 있어야할 보편타당한 가치관의 옷은 무엇일까요? 인류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어느 때든, 어느 자리든 입고 있어야할 그 옷은 무엇일까요? 어떤 옷이 인류를 파멸로부터 지키고,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점점 깊은 고민을 하게 하는 요즘입니다.

사실, 종교는 그 ‘정신적인 옷’의 원천이고 역사마다 그 옷을 재생산해 왔습니다. 유교를 따르는 이들은 ‘공자’의 옷, 불교를 따르는 이들은 붓다의 옷,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라는 옷을 입습니다. 다른 말로는 ‘양심’이라는 옷, ‘자비’라는 옷, ‘사랑’이라는 옷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힌두교나 자이나교도 각자의 ‘옷’이 있습니다. ‘생명’, ‘비폭력’, ‘평화’, ‘공감’, 그리고 ‘삶의 신성함’이라는 옷입니다. 그 정신적인 옷을 다른 말로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절대로 남에게 시키지 말라)을 가르칩니다. ‘유대교’ 랍비 힐렐은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타인에게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힌두교’는 “모든 창조물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마치 자신에게 하듯 그들에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이나교’는 “수도자는 모든 존재자들을 자신이 대우받기를 원하는 대로 대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붓다’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것이니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다른 이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가르칩니다. ‘이슬람교’ 코란은 “나를 위하는 만큼 남을 위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고 가르칩니다.

고요히 성찰해 보면, 각 종교의 ‘황금률’(黃金律)은 일맥상통하고, 가히 인류 보편적 가치로 삼을만합니다.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인 옷’입니다. 물론, 철학자나 비종교인들도 각자 자기 나름의 황금률을 주장했고 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어떤 옷이 자신에게 잘 맞는지는 ‘머리’가 커나갈수록 각자가 사고하고 선택할 일입니다. 타문화권과의 접촉이 어렵던 고대에는 다른 선택지를 갖지 못한 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종교의 옷을 입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타문화권과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는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살아갈지 폭넓게 사고해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전처럼 자식들에게 자기가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부모가 입은 그 옷을 자식들도 입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부모부터 잘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현명하게도 각각의 종교는 신도들이 ‘황금률’을 잘 걸어가도록 안내합니다. 자신이 입은 그 옷이 얼마나 품위 있고 가치 있는지, 그리고 오염된 옷을 세탁하거나 수선하게 하는 정기적인 ‘예식’(예불, 예배, 미사)을 봉헌합니다. 성직자(목사, 신부)나 수도자들(수사, 수녀, 스님)은 신도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선택해서 입은 그 옷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점검하여, 인생길을 잘 걸어가도록 일종의 강론(설교)이나 설법도 하고 행실로 본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잘 살고 있어야할 이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성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성찬례를 하느님이 마련하신 ‘하늘잔치’라고 합니다. 이 하늘잔치의 초대에 참여한 우리는 성찬례 전체를 통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점검합니다. 어떤 분은 그 옷을 잘 세탁하거나 수선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지만, 어떤 분들은 성찬례 전체를 통해서 제공되는 옷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세탁하려 하지도 않고, 수선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하늘잔치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입은 옷이 하늘잔치에 어울리는 옷입니까? 우리의 가치관이 하늘나라에 부합합니까?

오늘 복음이야기에는 입어야할 ‘예복’을 입지 않아서 잔치 자리에서 매몰차게 내쫓기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냥 잔치도 아니고,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축하를 위해 마련한 잔치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에서 주관하는 초청 만찬에 들어간 셈입니다. 본래부터 그 자리에 들어 올 자격이 있던 사람은 아닙니다. 임금에게 어떤 사정이 생겨서 그리되었습니다. 어떤 사정입니까?

“혼인 잔치”, John Everett Millais,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82276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가르치기 위해서 발설하신 비유입니다. 신약학자들은 ‘특례비유’로 분류합니다. 즉, 평상시에는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껍질을 벗기면 말하고자 하는 알맹이를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은(1-10절)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손님들을 초청하는 장면입니다.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은 번번이 거절하다 못해 나중에는 귀찮아하면서 임금이 보낸 이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분노한 임금은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동네까지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불러다가 잔칫집을 채우게 합니다.

뒷부분은(11-14절)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내쫓는 장면입니다. 분명 조건 없이 오라고 해 놓고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트집 잡아서 쫓아내버립니다. 모름지기 잔치라는 것은 즐거움 속에서 끝나기 마련인데, 그에게는 암울하게 끝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고, 심부름 간 ‘종’들은 누구며, 나중에 불러 모아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내쫓긴 사람이 입지 않은 ‘예복’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임금’은 또 누굴까요?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지금 교회와 우리 자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에 답하기 위해 비유가 어느 상황에서 발설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 ‘포도원의 사악한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논쟁하시는 중에 발설하신 비유들입니다. 물론 이 비유들을 발설하신 ‘직접적인’ 계기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 때문입니다(마태 21:12-17). 좀 더 멀게는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처럼 자신을 변호하시는 예수님의 ‘신상발언’(身上發言)과 관련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직업상의 죄인들(세리), 윤리상의 죄인들(성매매)과 어울려 식사하시곤 했다고 보도합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처신입니다. 그때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마태 11:19, 21:31-32; 마르 2:16-17, 루가 7:33-34, 15:1-2). 이런 비난을 받으신 예수님은 당신의 처신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본받은 행동임을 비유들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반대편에 서 있는 예수님을 못 견뎌했습니다. 결국은 ‘국사범’과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신약학자들은 마태오복음서 기자가 전승에서 물려받은 본래의 비유를 자신의 ‘구원사의 시점’에 부합하도록 ‘우화’(allegory,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그와 유사한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하는 소통의 기술입니다)로 바꾸어 기록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들은 ‘혼인잔치의 비유’라고 주장합니다. 즉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옮겨가게 된 이유를 담아내기 위해 전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비유를 ‘우화’로 바꾸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마태오복음서와 그 교회의 상황이 여러 가지로 반영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Francesco Hayez, https://en.wikipedia.org/wiki/Tisha_B%27Av

특히 마태오는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기 몇 년 전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이 비유 속에 담아냈다는 주장이 정설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파괴’입니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을 상대로 한 전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로지 이방인들만을 상대로 전도하게 됩니다. 마태오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를 1절부터 10절에 ‘우화’로 담아냈습니다.

차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임금’(하느님)이 자기 ‘아들’(예수님)의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관계 맺기를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공동성서(오늘날에는 구약을 이렇게 부릅니다)에 따르면, 예언자들은 ‘(혼인)잔치’의 상징을 통해 구원의 때를 예고하곤 했습니다. 바로 그 구원의 때가 이제 시작되어야 합니다. 초청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3절). 오래 전부터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장차 올 구원에 대비하여 준비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손님들은(유대교 지도자들) 거듭된 초대에도 불구하고 오기를 거절하면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4-6절).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풀어 응징합니다(7절). 이 응징이 바로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파괴라는 ‘암시’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오에 따르면, 멀리는 하느님 나라 초대를 거절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교인들, 가깝게는 그리스도교 전도자들의(스테파노, 야고보의 순교) 복음전도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유대교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행하신 일(마태 23:7절, 참고 21:40-41)이 ‘예루살렘 성전파괴였다’고 들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 승천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큰 충돌 없이 지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각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 모여서 예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미 오신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의 차이점이 점차 명백히 드러나면서 긴장과 갈등이 형성됐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멀어지게 된 계기는 위에서 말씀드린, 주후 66-70년 있었던 ‘1차 유대 독립전쟁’입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은 항쟁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하였습니다(마태 24:15-16). 결국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겁하게 도망쳤다며 비난하고 증오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울타리를 확실히 벗어나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해 갔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오늘 혼인잔치 비유에 녹아져 있습니다.

“A.D. 70,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하다”, David Roverts

이어지는 장면인 아무나 혼인잔치에 초청하라는 임금의 명령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결별하고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전도 활동을 벌였다는 ‘암시’입니다(8-10절). 물론, 이 암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내리신 ‘대사명’으로 공식화될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마태 28:18-20

그 사명수행을 통해 초대교회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교회 안에 뒤섞여 있습니다(10절). 성과 속의 뒤섞임, 그것이 초대교회 신앙생활의 실태였다는 ‘암시’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말씀의 정신을 깨닫고 충실히 신앙생활 하는 알곡들도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신자들을 이용하려는 가라지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성속의 뒤섞임이 그때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라고 한다면 지나친 일반화이겠습니까? 대표적으로 한국대통령 3분이 다 장로출신입니다.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이 중에 두 분은 여전히 우리사회 적폐와 분열의 중심에 있다는 부끄러움을 피할 길 없습니다. 타종교는 왜 비판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그리스도교에 없다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 같은 혼합공동체라는 통찰은 이미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 곳곳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3-9,18-23),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36-43)입니다.

뒷부분(11-14절)은 모든 교우들에게 ‘종말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담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이 섞여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 그리스도인이 공존합니다. 복음이야기에 따르면 가짜 그리스도인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부합된 삶(가치관)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초대해 주신 은총의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구원을 사모했던 세리와 죄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부합된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나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비참한 운명을 미래에 맞을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마태오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 마태 22:14

모든 신자들에게 ‘자만심’에 도취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라는 경고로 끝맺습니다. 어쩌면 진짜 그리스도인보다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탄식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부합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진짜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이제 우리가 물어왔던 ‘예복’에 대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예복’(옷)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 갈라 3:27

교회사에도 이 ‘예복’에 대답하는 여러 설교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육신의 거룩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금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로를 따라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1고린 13; 1디모 1:5). 멋진 해석들입니다. 특히 성 어거스틴의 해석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입고 있어야할 옷은 당연히 ‘사랑’(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복’ 이야기를 직접 밝히고 있는 마태오복음서 기자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 역시 예복에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그 예복을 입은 이들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혼인잔치를 누릴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쫓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어떤 예복일까요?

복음서 중에서 마태오는 유독 ‘실천’(참여)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 마태 7:21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 마태 7:24-27

또 최후심판의 이야기에서도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기준이라고 강조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 25:40

이처럼 마태오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 산상수훈을 실천함,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이 우리의 ‘예복’이라고 강조합니다. 구경하는 삶이 아니라 ‘완전히’ 참여하는 삶입니다. 이 외에도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 곳곳에서 ‘실천’(행함)이 ‘예복’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은 ‘주님, 주님!’ 부르기만 하지 아버지의 뜻을 설천하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참여는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복을 입지 않아서 내쫓긴 사람처럼 종말 심판 때에 단죄 받을 것입니다.

The Adoration of the Lamb, Michiel Coxie,c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oxcie_Anbetung_des_Lammes_nach_Jan_van_Eyck.jpg

사도 바울로 역시 오늘 서신에서 하느님 나라에 맞는 ‘옷’으로 이끌기 위해 먼저 이렇게 교훈을 시작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십시오.
– 필립 4:4-6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 필립 4:8

기쁨, 너그러움, 감사. 진리를 따름, 고상함, 순결, 사랑, 영예, 덕망 등은 우리가 품어야할 마음입니다. 그런 다음 마태오처럼 ‘실천’(참여)이야말로 참된 ‘예복’임을 강조합니다. 그 실천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존재들임을 증언합니다.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십시오.
– 필립 4:9

오늘도 성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구원의 성찬례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참되다, 고상하다 가르치는지, 어떤 일을 옳은 일, 순결한 일이라고 가르치는지 잘 배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을 사랑하셨고, 어떤 일을 명예롭게 여기셨는지 잘 듣는 일은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무엇을 양심에 맞는 일이라고 가르쳤고, 어떤 삶의 태도를 칭찬했는지를 잘 배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실천’입니다. 그러니 배우기만 하고, 듣기만 하고 자기를 속이는 가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실천’하는 은총을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그 실천이 우리가 입고 있어야 할 ‘예복’입니다. 언젠가 그 실천이 하느님이 베푸실 영원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케 해 줄 것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초대를 완성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임금이 아들을 위해 베푸신 혼인잔치에 참석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예복을 갖추었습니까?

찬미하올 하느님,
이 몸을 은총 속에서 당신 나라에 ‘초대’하셨으니
그 나라에 맞는 삶의 태도와 실천으로
주님의 빛을 드러내게 하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4.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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