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 8. 연중27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27주일입니다. 오늘 성서정과의 주제어는 모든 것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선물 받아 살아갑니다. 청지기라는 마음으로 진정 하느님과 이웃을 살리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하늘의 집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내 기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하늘의 집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어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는 산돌로 쓰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20:1-4,7-20
  • 시편 – 19
  • 2독서 – 필립 3:4하-14
  • 복음서 – 마태 21:33-46

 

오늘 성서정과의 주제어는 모든 것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입니다. 1독서는 세상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선물인 십계명입니다. 시편은 자연과 율법이 세상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다고 찬미합니다. 2독서는 구원의 주권이 하느님께 있다고 교훈합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은총을 입은 청지기(소작인)일 뿐,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라는 비유입니다. 이제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열 마디 말씀들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 출애 20:2

하느님은 십계명을 ‘선물’하시면서 이집트 ‘종살이’를 가장 먼저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십계명은 ‘자유’를 위한 선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삶(영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도록 주신 선물이라는 천명(闡明)입니다.

그렇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 법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지키면 자유를 얻을 것이지만, 어기면 불행해질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십계명의 1,2계명과 9,10계명의 분류를 놓고 교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누르십시오. 이 차이에 근거해 다른 교파를 공격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우리 《성공회기도서》에 실린 표준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못한다.
2.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3.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주님의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5.부모를 공경하라.
6.살인하지 못한다.
7.간음하지 못한다.
8.도둑질하지 못한다.
9.거짓 증언하지 못한다.
10.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못한다.

십계명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느님을 향한 의무인 1~4계명, 이웃을 향한 의무인 5~10계명입니다. 《성공회기도서》는 의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각 계명에 담긴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교단의 ‘공적’ 해석이기에 성공회 신자는 유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문20)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일로써 다음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느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1계명)
  2.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2계명)
  3. 생각과 말과 행실로 하느님을 존경해야 합니다.(3계명)
  4. 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기도, 그리고 그 뜻을 연구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을 따로 정해 두어야 합니다.(4계명)

문21)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다음의 여섯 가지 입니다.

  1. 우리 부모와 가족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돕는 것, 그리고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합니다.(5계명)
  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기도하며, 악의와 편견과 증오를 마음속에 품지 말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다정해야 합니다.(6계명)
  3. 우리의 모든 육체적 욕망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7계명)
  4. 모든 거래에 있어 정직하고 공정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정의와 자유와 생명을 살리는 일들을 추구하고, 하느님께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재능과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8계명)
  5. 진실을 말해야 하고, 침묵함으로써 남을 오도하지 않아야 합니다.(9계명)
  6. 시기와 탐욕과 질투의 유혹을 물리치고, 남들의 재능과 행복을 기뻐하며, 우리를 불러 당신과 교제하게 하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10계명)

그러면 무엇을 원해서 하느님은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선물로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광야를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의 대격변’을 겪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지만 자신들을 누구라 불러야 할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했기에 더 이상 파라오의 백성(노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디에 정착한 도시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 일터를 찾고 있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주저합니다. 최근 이혼한 자신을 누구라 소개해야 할지 주저합니다. 사별 후 자신을 누구라 소개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예전 같으면 쉽게 올라섰을 층계이지만 점점 차오르는 숨을 어쩔 수 없을 때 당황스럽습니다. 친척 중의 한 사람이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하고, 가족들에게 부담 줄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합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대단한 성취들조차도 우리로 하여금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합니다. 마치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라 헤매었듯이 말입니다. 탈출한 이후 자신들이 걸어야할 그 길을 몰라 헤매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정체성의 혼돈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 즉 십계명은 빛이 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단지 복종해야할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붙잡아 주는 진리의 닻으로, 걸어야 길(이치)로 생각해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우리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은 십계명으로써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이스라엘(그들의 영적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씀해 주십니다. 십계명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우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서로를, 특히 ‘약자’를 어떻게 존중하고 관계해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삶의 기준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은총을 입은 ‘청지기들’입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전달해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새로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느님이 떠돌며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이 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듣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우리는 직업으로, 역할로 정체성을 정의하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재능이나, 경력, 역할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살아오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달라져 왔습니까? 금주간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상황, 자리에 근거하여 자신의 언어로 하느님이 주신 십계명을 해석하고, 나름대로 그 10가지를 써보십시오. 분명 자유인인 여러분의 새로운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합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자연’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합니다. 열거된 하늘, 창공, 낮, 밤은 하느님의 창조의 영광을 끊임없이 선포하는 피조물입니다. 비록 그 선포의 메시지가 들리진 않지만 ‘자연 자체’가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찬미합니다. 특히 ‘해’를 묘사하는 장면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고대근동 사람들은 ‘해’를 신(神)으로 섬겼습니다. 시인은 ‘해’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창조 신학(신앙)을 고백합니다.

둘째 부분은 ‘율법’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합니다. 첫 부분에서 묘사한 자연 자체의 선포, 즉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시라는 선포는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이들이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율법’(십계명, 말씀, 성경)은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줍니다. 이것은 율법이 하느님의 창조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것으로 시인에게 간주되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기쁨 속에서 율법에 대한 칭송으로 후반부를 장식합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진리이기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과 지혜에 이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칭송하는 길은 입술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시(詩)를 마감합니다.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시인은 삶에서 흠이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삶의 ‘목표’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생각과 말과 행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기도제목과 성취할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시편을 통해 창조세계와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경탄과 감동은 과학자나 시인들만의 차지인 줄 알고 문을 닫고 지내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말씀’(십계명)의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하며, 행동으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초로 자리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는 운동력으로 작용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2독서 필립비서는 사도 바울로가 논쟁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전해줍니다. 그의 반대파들은 자신들이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통해 이미 ‘구원의 목표점’에 도달했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이들로부터 ‘필립비교회’가 물들지 않도록 단호한 어조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는 구원의 ‘주인’(주권)이 오로지 하느님이라고 교훈합니다.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됨됨이, 즉 자신의 출신 성분(유대인, 베냐민 지파, 할례)이나, 율법의 준수, 쌓아올린 지식(교양, 인품)과 같은 ‘자기 의’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권자이신 하느님이 은총으로 선물하신 ‘믿음’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고 교훈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 자신의 장점과 자랑하고 신뢰했던 모든 것을 ‘장해물’(쓰레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느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로는 자신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친교)로 이끄는 것은 율법적 성취에 바탕을 둔 자기 ‘의’(옳음)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의’, 즉 “하느님의 선물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손을 펴는 ‘믿음’에서 오는 ‘의’라는 것”을 천명(闡明)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은혜 안에 붙잡아주신 데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12절). 하느님이 구원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친교’(올바른 관계)에 이르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는 이 목표를 향하여 열성을 다하여 달려가는 여정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삶을 영원 안에서 완성시키실 때에 비로소 이 목표에 도달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까? 혹시 우리가 안심하고 기대고자 하는 소유물, 즉 ‘인간적 됨됨이’나 ‘자기 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장해물(쓰레기)처럼 여길 수 있습니까? 구원의 목표를 향해 지난 세월 이룬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 보고 다시 달려갈 수 있습니까? 내가 되돌아보며 의지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주권(주인)은 오로지 하느님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이야기는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해오는 비유(우화, allegory)입니다.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치명적인 대립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발설하셨다는 입장도 있고, 교회가 자신들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고 해석해 예수님 입에 담았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직접 발설하셨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예상하고 예고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교회의 말이라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모시지 않으면 심판 받을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입니다.

비유의 줄거리를 풀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어떤 지주) 이스라엘(포도원)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지도자들(소작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도조)하기를 요구하시며 거듭해서 예언자(종)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배척하고 박해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예수)을 보냈지만 그들은 아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끝에 시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의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들었던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이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본래 시편 118편은 축제 때 부르는 찬미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는 노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은 자신들은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던 대사제(성전을 지키는 자들)나 바리사이파(율법을 지키는 자들) 사람들의 예상을 전혀 빗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그 증인입니다. 모세가 그 증인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버려진 돌처럼 불쌍한 인생이었지만, 나중에는 민족을 구원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서신의 사도 바울로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보다도 그를 더 미워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변했습니다. 이런 일은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의 머리에 이사야서 ‘포도밭 노래’가 스쳐갔습니다(이사 5:1-7). 그들은 당시 백성들로부터 신망과 권위를 선물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청지기’로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화의 물결로부터 이스라엘의 고유문화와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거의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그런 태도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율법 해석의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권위’이자 ‘권력’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큰 힘을 행사합니다. 법은 사람들을 무지로 인한 두려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석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돕기 위한 법 해석조차도 때로는 노예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백성을 바로 세우려는 선한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놓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민의 마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청지기로서 자신들이 받은 신망과 권위의 힘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율법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힘만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사악한 소작인’에 비유하심을 알아차렸습니다. 수치심과 분노로 예수님을 체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이 두려워 뜻대로 못합니다. 다행스럽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군중이 갖고 있던 ‘예언자’라는 인식이 예수님을 건져냅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예언자’라는 말 속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기득권자들은 자신들 보다 세상과 삶의 진실을 넓고 깊게 보는 예언자들을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경제, 교육, 사법, 문화, 예술, 종교, 사회전반이 기득권자들 위주로 돌아갈 때 그 길은 잘못되었다고 외친 ‘시대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자들은 그 길로부터 탈출하라고 외친 시대의 예언자들을 억압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들의 말은 기득권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민중들에게는 위협적으로(종북, 좌파) 들리기에 배척을 당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기득권자들이 퍼뜨리는 그런 ‘낙관적 환상’(747, 4대강, 창조경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기만(欺瞞)이라고 쉬지 않고 외쳤지만 외면당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 ‘적폐’(積弊)의 근원인 친일행적, 부(富)의 독점과 분배구조의 모순, 독재와 비민주적인 사회구조, 사상의 자유를 억압해 온 권력가들의 악행을 지적하는 순간, 예언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목숨(사회적 매장)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언자들의 팔자라면 팔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였다고 제가 말하려던 분들입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스스럼없이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기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 전통을 계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전통을 따라 새 세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시고 대안공동체를 꿈꾸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핍박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포하심으로써 말입니다(루가 6:20-23). 그러나 민중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과 거짓 예언자들은 예수님을 ‘국사범’(정치)과 ‘신성모독’(종교)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오늘날도 하느님은 전복된 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해 당신의 예언자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런 이들을 알아차리고 같은 편에 섰습니까?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 시대를 위해 당신이 세우신 ‘예언자’임을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시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은 예수님과, 시대의 예언자들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은 옛 포도원(예루살렘 성전의 은유로 율법의 가시적인 표현입니다)을 대신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포도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본문의 ‘지주’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한 노력이 성공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은혜로 우리를 그 나라로 부르셨고, 충실히 일구고 돌보라고 ‘청지기’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관계를 시작하시는 분은 ‘항상’ 하느님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먼저’ 손 내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받기 위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거저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입증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죽으실 만큼,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소작인들처럼, 주인에게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받은 은총을 ‘불순종’과 ‘이기심’, ‘교만’과 ‘탐욕’으로 무효화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교만이 에덴동산의 혜택을 상실하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자기 탐욕에 빠짐으로써,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스스로를 포도원에서 내쫓고 있는 불행한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도조’(賭租)는 소작인이 지주에게 지불하기로 동의한 ‘계약사항’이고, 자신들이 포도원을 통해 ‘이익’과 ‘혜택’을 얻고 있음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소작인들에게 베풀어진 ‘은총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도조를 잘 낸다는 것은 주인과의  ‘약속’을 잘 이행한다는 뜻이고, ‘순종’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율법)의 참 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외면했습니다. 스스로 교만해졌습니다. 그렇게 불순종과 ‘교만'(탐욕)으로 청지기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에게서 떠났으며 ‘순종’하는 이들이,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차리는 이들이 차지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서 인류가 비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원하시는 것을 외면하고(불순종), 지나친 탐욕(이기심)으로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행세하려 들기 때문에 인류의 시간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청지기입니다. 이것이 속히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인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과 은총은 우리에게 고여 있지 않고, 흘러 넘쳐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신 은총에 우리가 바르게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으로 돌봄으로써, ‘평화롭게’ 지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응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십계명의 정신을 잘 실천하는 삶이 바로 도조를 내는 삶이고,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지금 어떻습니까? 사랑과 연민보다는 증오와 비난이, 평화보다는 전쟁의 기운이 넘쳐납니다.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공정, 혐오와 차별, 폭력과 대립이 여전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의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아무리 유대 지도자들로 대변되는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힘과 영향력을 막강하게 해 놓았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은 여전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이 스스로의 왕국을 위해 세워놓은 힘과 영향력보다도 하느님이 더욱 크십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리켜 하느님 나라의 백성, 일꾼(청지기)이라 고백합니다. 때로는 시대가 바른 길을 가도록 외치는 예언자라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청지기)으로서 ‘도조’를 잘 내고 있습니까? 세상이 두려워하는 예언자다운 면모를 교회는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도조가 갖는 은유는 ‘사랑’이고 ‘평화’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매 맺는 삶’입니다. 물론,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도조를 내야하거나 품삯을 계산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실천해야할 사랑과 평화의 책무’를 벗는 것은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는 책임을 맡은 이들로서 어떻게 ‘사랑과 연민의 모범’을, ‘평화의 모범’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즐거워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습니까? 시편처럼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로처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 구원의 주권조차도 하느님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할 수 있습니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청지기라는 마음으로 진정 하느님과 이웃을 살리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해로움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그 능력과 재능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하늘의 집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내 기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이것들에 대해 묵상하고 잘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찬미하올 하느님,
제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은총을
베푸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를 이 멋진 포도원에서 세우셨으니
감사합니다.
제 모든 것은
당신이 은총으로 빌려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올바로 사용하게 하소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4.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2017.10. 8. 연중27주일”의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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