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 1. 연중2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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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26주일입니다. 오늘 성서정과들의 공통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은 경건한 생각과 말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제까지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불순종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도 ‘오늘’ 회개하여 순종의 길 위에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교회는 이렇게 용납해 주시는 하느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고 익히며, 그 사랑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하늘 공동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례’는 이 세상의 개인주의, 물신주의,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이 자리할 수 없는 ‘하늘 공동체성’을 익히고 기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익히고 기른 ‘사랑의 언어와 하늘 공동체성’을 가지고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기 위해 파송 받는 ‘생명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로 그런 교회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한가위를 평화롭게 맞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비록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뒤숭숭하지만 연휴동안도 평화롭게 이 민족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가족과 일가친척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이 안전하고, 어려운 이웃도 돌아보는 연휴 기간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시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7:1-7
  • 시편 – 78:1-4,12-14
  • 독서 – 필립 2:1-13
  • 복음서 – 마태 21:23-32

오늘 성서정과들의 공통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은 경건한 생각과 말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독서 출애굽기모세의 ‘순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연중 21주일 이래로 1독서로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이집트’로 상징되는 세상 문화의 풍요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는 새로운 여정이라 했습니다. 연중 29주일까지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자신이 탈출해야할 ‘이집트’가 무엇인지, 자신이 찾아서 걷고 있어야 그 약속의 땅에 이르는 ‘새로운 길’(일)이 무엇인지 찾자고 했습니다. 오늘이 연중 26주일인데 이것들을 찾아내셨습니까?

출애굽기를 따라오는 동안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느님은 좀 더 쉽고 편안한 길로 그들의 여정을 인도해 주시지 않은 걸까요? 먹을 것과 마실 물이 풍부한 곳으로 인도하시지도 않습니다. 힘들고 고난스러워서 그들은 번번이 불평하고 반항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여정은 하느님의 지시에 따른 이동이었습니다. 진지(陣地)를 옮겨가면서 전진하지만,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무엇을 원해서 하느님은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돌보심을 의심합니다. ‘생수’ 그 자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반항과 불순종이 도드라집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광야를 가로질러 ‘르비딤’에 당도합니다. 극도로 피곤했고 목말랐습니다.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습니다. 분명 하느님이 지시하시는 여정이지만,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큰 시험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현재 상황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정말 새로운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중인지 신뢰하기 힘듭니다.

그들의 화살은 모세에게로 향합니다. 지도자인 모세가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의심합니다. 그를 따르기로 한 일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자신들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는 결함투성이 지도자를 신뢰하기로 한 것은 아닌지 자책합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다’라는 분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를 약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애 3:8, 4:30). 하지만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르비딤’은 그 무엇도 흐르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를 느낍니다. 따라나선 것을 후회합니다. 꿈이 좌절된 상태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사람이 너무 피곤하고 배고프면 하게 되는 행동을 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대상을, 비난과 공격의 대상을 찾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마라 죽게 할 작정이냐?

요즘 말로 하면 이렇겠지요.

아, 힘들어 죽겠다.
옛날이 좋았어.
다리가 너무나 아파.
발이 다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어.
따뜻한 물에 샤워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푹신한 침대가 그립다.
모세, 당신은 우리가 길을 잃게 만들었어.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어.
당신은 틀렸어.
우리는 결코 약속의 땅에 가지 못 할 거야.
다 당신 때문이야.

교우 여러분, 인간들은 왜 이런 식일까요? 서로 ‘협업’(협동)해서 문제를 헤쳐 나가기보다 불평과 원망의 대상, 즉 ‘희생양’ 찾기에 더 빠른 것일까요? 왜 우리는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하는 대신,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까요?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 필립 2:2-3

그들의 불평과 원망, 비난과 공격을 모세가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모세는 출애굽을 부추긴 당사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구제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들은 현재 처한 곤경 때문에 마음의 눈이 가려졌습니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신앙의 영웅인 모세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쯤 ‘리더’ 역할을 해 본 분이라면, 모세를 그렇게 바라보는 제 심정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목숨을 걸고 도우려했던 바로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믿음과 온유(겸손)의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자유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이집트 땅에서 행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모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충분히 과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과 온유의 사람’, 즉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가려는 겸손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격분한 그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낀 모세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습니다.

놀랍게도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지시사항은 백성들을 진정시키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물이 전혀 없을 곳 같은 곳인 ‘바위’(하느님 자신, 시편 78:35)에서 풍성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실 것이라는 너무나 황당한 약속입니다.

나일 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하느님은 이 말씀으로 흔들리는 모세에게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바위’가 생수의 근원이 될 것이고, 그 바위 옆에서 나타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바위는 목마르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들며, 하느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금 하느님의 임재를 상기시켜 줄 표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말씀을 믿으시겠습니까?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고 하시는 데, 과연 그 말씀에 소망을 걸란 말입니까? 아무래도 따지기 좋아하는 저는 믿을 수 없다며 도망쳤을 것입니다. 모세는 다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결국 ‘순종의 사람’ 모세 덕택에 이스라엘은 예기치 못했던 풍성한 ‘생수’(은총)를 마십니다. 100% 천연 암반수입니다. ‘그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 이집트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게 했던 도구였습니다(출애 7:20). 이제는 그 지팡이가 생명의 도구가 됩니다. 장로들은 이 일의 목격자입니다. 하느님께서 돌보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의 증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꼭 ‘필요한 순간’에 모세 앞에 나타나시어 당신의 현존을 보이셨습니다. 풍성한 은총으로 순종의 사람 모세를 도우셨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은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생명을 가져옵니다. 공동체가 ‘협업’(협동)하는 일은 소중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서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독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도자를 향해서든, 아니면 서로를 향해서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제공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 함께 고난의 문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비난하고 공격할 희생양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정에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했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했습니다. 그것이 그 힘든 여정으로 하느님이 인도하신 이유입니다.

오늘 시편 성전 제사에서 ‘출애굽을 기억’하는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크게 4부분으로 나뉩니다(1-11절, 12-42절, 43-66절, 67-72절). 전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 수수께끼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1독서와 관련한 광야생활 부분만 다루겠습니다.

시인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경험했고, 광야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10-42).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빨리 이것을 잊고 변덕을 부립니다. 하느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힙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거듭거듭 시험합니다(18절, 40-41절).

이것은 시인에게 일종의 ‘역사 속 수수께끼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조들을 그토록 친절하게 인도해 주셨는데도 불평하고 반항함으로써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시인은 지혜의 스승처럼 당부합니다. ‘예배’(성전 제사)에 참여한 ‘공동체’에게 하느님이 친히 행하신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여러 예를 들어 광야의 삶을 상기시킵니다. 아울러 선조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면서 공동체가 교훈을 얻도록 합니다(7-8절).

이와 연결하여 우리의 예배인 ‘성찬례’를 돌아봅시다. 성찬례는 ‘공동체의 행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사건을 경축하는 ‘공동체의 기억’(기념)과 ‘감사의 행위’입니다. ‘창조’가 하느님 백성의 ‘찬양과 감사의 대상’이라면, ‘구원’은 ‘기억(기념)의 대상’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성’(교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단독자, 개별자를 넘어 서로 연결된 한 몸(교회, 공동체)임을 발견합니다. 불평과 원망, 비난과 불순종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받는 공동체임을 발견합니다. 그 발견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끕니다. 세상을 향한 선한 의무를 실천하도록 이끕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존의 ‘작은 공동체’(가족과 마을)가 급속히 붕괴되고, ‘더 큰 새 공동체’(국가와 시장)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작은 공동체가 개인에게 학대를 가할 경우 더 큰 공동체의 개입은 개인의 해방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인간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더 큰 공동체의 ‘해악’(害惡)도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더 큰 공동체는 갈수록 개인을 수단화하고, 부품화하며, 소외시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괴물로 변한 더 큰 공동체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위기를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소홀히 해 온 기존의 작은 공동체를 그리워합니다.

이런 세대에 교회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개미》나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사피엔스》를 참고하자면, 인류의 희망은 개인의 영특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특히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위대함은 개체나 단독자가 아닌 공동체로 환경에 적응하며 지식을 축적해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화이론(과학)’의 입장에서 말하면, 개체의 생존이 아니라 집단의 공존, 즉 공동체성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사피엔스’(sapiens, 라틴어로 똑똑하다는 뜻)’의 지능 때문만이 아니라 ‘언어와 사회성’(공동체성, 협업)의 발달이 가져온 승리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인공지능(AI)을 이길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의 사회는 개인의 지능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이 한데 어울려 증폭시키는 ‘협동의 힘’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흐름을 간파한 ‘구글’과 같은 회사는 미래에도 살아남는 전략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능력’, 즉 ‘협업의 언어’가 뛰어난 인재를 뽑기 위해 다양한 단계의 면접을 시행합니다. 문제는 ‘구글’만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그런 정신이 정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분명 우리 사회는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키우는 교육이나 문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과 공공선’을 조화시킬 수 있는 ‘시민’의 양성이 시급합니다.

이런 시대의 요청을 성찰하면서 우리의 성찬례를 다시금 주목합니다. 성찬례야말로 ‘새 언어’를 배우고, ‘공동체성’을 기르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성찬례는 삼위일체(공동체로 하나이신) 하느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그 사랑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며, 하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길러 세상 속으로 파송 받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2독서 필립비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본받아야 할 삶의 가장 중요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교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 필립 2:2

한 마음을 강조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한 마음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개인의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이 만들어낸 폐단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정치보복이라며 언론 플레이를 하고, 한쪽에서는 적폐청산이라며 맞섭니다. 요즘은 ‘종북 타령’이 안 통하니까 살짝 ‘안보’ 프레임으로 넘어간 면도 있지만, 여전히 해묵은 이념 논쟁과 양극화의 심화는 공동체 구성원 서로를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분열된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로는 이런 세대 속에 존재하는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단호히 명령합니다. 그 명령의 핵심에는 그리스도의 순종, 즉 ‘겸손과 봉사’가 자리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우리 자신, 특히 성직자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에 굴복하는 대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살아가는 그런 공동체로 존재해야 합니다. 겸손과 봉사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교회를 통해 세상에 보여 질 때 세상은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찬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온전히 순종할 성직자, 또는 신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분열된 사회가 한 마음으로 통합하도록 자신을 순종의 제물로 바칠 교회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이야기는 둘로 나뉘지만 사실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복음이야기 전반부는 예수님의 권한(권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인사청문회나 국정조사 장면을 떠올려 보시면 이 전반부를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후보자나 정부 측 인사들, 대정부 질의자들은 예상 질문(답변)을 작성하고 그에 대한 답변(질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준비해서 나오는 자리인데도, 질문이나 답변의 수준을 듣고 있자면,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방어하려는 여당이나 공격하려는 야당들 간의 정치공방은 본래의 취지가 무엇이었는지 의심스럽게 합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많은 질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이냐고 물었습니다(마태 11:3).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마태 15:2).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마태 19:7),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마태 22:36). 이 외에도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세금 내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마태 22:17).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마태 22:28). 심지어 빌라도도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마태 27:11).

오늘 복음이야기에도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 마태 21:23

그들은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마태 21:12-13). 성전을 지켜온 자신들의 권위가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위협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질문으로써 그들의 ‘허위’(虛位)와 ‘허위’(虛威)를 벗겨내시는 중입니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하늘이 준 것이냐?
사람이 준 것이냐?
– 마태 21:25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정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답변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답변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꼭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 같습니다.

그들의 교묘한 꼼수를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마태 21:28

오늘 복음이야기 후반부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 하라고 시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대놓고 “싫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는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아들을 돌아서게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순종) 사이의 대립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비유의 아들들처럼, 살아 본 경험이 많기에 아마 본문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싫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순종한 맏아들’은 ‘회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직업상(세리)으로 윤리상(창녀)으로 죄 속에 있었지만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하느님의 말씀(마음)을 외면했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접하고서는 회개하고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들입니다.

반면에 “가겠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하고서 ‘순종하지 않은 둘째 아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대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마태 23:3). 그들은 자신들을 회개할 필요한 없는 ‘의인’이라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를 촉구하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대상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비판하신 셈입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천(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 겉치레에만 빠진 ‘경건스러운 자기기만’의 대변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만해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시는 비유입니다. 가슴이 철렁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발설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 충격적인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 마태 21:31

유대의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해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제불능’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전복시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너희보다 ‘먼저’ 들어간다.”는 말씀은 “너희는 ‘나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너희는 못 들어가지만, 그들은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문이 아예 막혀 있진 않습니다. 회개한다면 그들 역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비유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참 뜻’을 찾아봅니다. ‘회개’와 ‘순종’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도 잘하고, 순종(실천)도 잘하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이들이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맏아들일까요? 둘째 아들일까요? 여러분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행동입니다(마태 7:21-26, 야고 1:22-25).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 안에는 둘째 아들 같은 모습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감동이 올 때는 다짐하지만 어느 순간 불순종합니다.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을 읽을 때는 “그럼요”라고 약속해 놓고선 어느 순간 미움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합니다. ‘용서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는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해놓고선 어느 순간 평가하고, 판단하며, 비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감사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 앞에 심호흡까지 하며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불평과 원망의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둘째 아들 같은 삶의 태도를 성령 하느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삐걱거리고 녹슨 마음을 닦아주시고, 고장 난 마음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뉘우치는 이 마음을 받아주시고, 진정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의 사람, 용서의 사람, 감사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 말씀들을 마음에 잘 새기십시다. 출애굽만 하면 완전히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 것처럼 기대를 모았던 이스라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순종했습니다. 시편은 선조들의 그런 불순종한 역사의 수수께끼를 상기시키면서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공동체에게 교훈합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힘주어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 필립 2:12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의 삶이란 입술의 고백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순종하는 삶임을 분명히 교훈하십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몸으로, 행동으로, 하느님을 향한 순종의 삶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살아있는 신앙은 생각과 말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항상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구원에서 빗나가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깊이 되새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 불순종의 행위를 버릴 것을 다짐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에 눈멀게 하는 불평과 원망의 말을 버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입술의 고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몸으로,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변화시키는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오늘도 정직하게, 겸손하게 나오라고 요청하십니다. 주님의 이 부르심과 요청 앞에서 어제까지의 불순종했던 삶의 태도에서 탈출하여, ‘오늘’부터는 몸으로 순종하는 길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어제까지의 불순종했던 삶의 길을 벗어나, ‘오늘’부터는 행동으로 충성하는 길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이들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말로는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먼 이들이 아니라 ‘오늘’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의 차지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교는 늘 ‘오늘’을 위한 것입니다. 어제까지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불순종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도 ‘오늘’ 회개하여(새 마음, 새 뜻을 품고) 순종의 길 위에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교회는 이렇게 용납해 주시는 하느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고 익히며, 그 사랑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하늘 공동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례’는 이 세상의 개인주의, 물신주의,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이 자리할 수 없는 ‘하늘 공동체성’을 익히고 기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익히고 기른 ‘사랑의 언어와 하늘 공동체성’을 가지고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기 위해 파송 받는 ‘생명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로 그런 교회야말로 주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이기를 축복합니다.

찬미하올 하느님,
저희를
당신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시니
감사하나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한가위 명절을 맞아 고향과 일가친척을 방문하는 이들이 안전하게 다녀오도록 기도합시다.
  2.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6.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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