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24. 연중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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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5주일입니다. 오늘 독서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은총, 사랑)를 들려줍니다. 사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 선물, 호의 덕택에 존재합니다. 신앙은 이것에 눈을 뜨고 ‘감사’를 이어가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이 진실을 잊습니다. 오늘 독서들을 통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호의를 보다 깊이 묵상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모두가 불평과 원망의 옛 길에서 탈출하여 ‘감사’라는 새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9월 26일은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한국 전쟁 중 교회를 지키다 순교하신 윤달용, 조용호, 이원창, 이도암, 홍갈로, 클라라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역시 순교자들을 본받아 교회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신앙인들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뿐만 아니라 9월 29일은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축일이자 ‘대한성공회 설립 127주년 기념일’입니다. 대한성공회가 시대의 사명을 분별하여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주님의 자비와 용서는 무한하시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항상 풍성하게 베푸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기꺼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마침내 주님이 주시는 큰 상급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6:2-15
  • 시편 – 105:1-7,38-45
  • 독서 – 필립 1:21-30
  • 복음서 – 마태 20:1-16

오늘 독서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은총, 사랑)를 들려줍니다. 사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 선물, 호의 덕택에 존재합니다. 신앙은 이것에 눈을 뜨고 ‘감사’를 이어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 진실을 잊습니다. 오늘 독서들을 통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호의를 보다 깊이 묵상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불평과 원망의 옛 길에서 탈출하여 ‘감사’라는 새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1독서 출애굽기는 배고픈 이스라엘에게 ‘만나’라는 하늘 양식을 선물로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시편은 자신들에게 구체적으로 실행된 하느님의 ‘자비하심’(구원)에 대한 찬미입니다. 2독서 필립비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의 표상인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온 생애를 건 바울로의 당당한 격려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1데나리온’(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의 은총을 선물하는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제 독서별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끝없이 인내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출애굽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경험했습니다(출애 7-12장). 하느님은 광야의 여정을 시작한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애 13장). 홍해를 가르심으로써 그들을 파라오의 군대로부터 구출하셨습니다(출애 14장). ‘마라’(쓰다는 뜻)의 쓴(또는 짠) 물을 단물로 바꾸시어 그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셨고, 낙원 같은 엘림 오아시스에서 쉬게 해 주셨습니다(출애 15장).

광야 여정을 시작한 그들은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해 자신들이 하느님 덕분에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 여정은 그들의 신앙이 시험대에 오른 기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출애굽 여정에 들어선지 2개월여가 되는 날 그들은 ‘씬’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배고파 죽겠다며 또 투덜거립니다(출애 14:11-14, 15:24).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 출애 16:3

이집트를 떠나올 때 갖고나온 양식이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흥분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경험했지만, 현실의 ‘배고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양식이 없다고 분노하며 항의합니다. 불평과 원망과 비난에 빠져듭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직도 그들이 고난의 시간들을 통해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양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수많은 가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기 가축을 도살하기 싫다는 항변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러분이 모세라면 그 순간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가만 묵상해 보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그들 사이에서 모세가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굳건한 태도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때문입니다.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길과 이스라엘이 가야할 진정한 여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길을 열어주십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 출애 16:4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려준다는 이 황당한 말을 모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아마, 죽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하는 불평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야훼께 하는 것이다.
– 출애 16:8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비난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번지수가 틀렸다는 겁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알아차리는 그런 마음의 눈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차릴 때 우리는 삼갈 수 있고, 경우에 맞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내뱉는 모든 불평과 원망과 비난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 우주의 시간성과 공간성과 인과성 속에 살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관계와 인생살이 모두는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아론’에게 이렇게 상기시켜주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 출애 16:12

상상을 초월할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대로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 그들 모두는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풍성한 선물을 경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은 그저 말뿐인 것이 아니라 항상 ‘구체적’입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양식’(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느님이 그렇게 자비와 은총으로 관계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처럼 도시가 발달하고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들이 느꼈던 배고픔은 낯섭니다. 사실 광야는 모세에게는 익숙할지 모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곳입니다.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첫날처럼 광야는 그들에게 낯선 풍경이고, 긴장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정말이지 광야는 두렵고 걱정스러운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광야에 있지 않고 도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생활도 두렵고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연인들이 부푼 기대를 갖고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생활이 행복할지 후회합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청년들이 부푼 기대를 갖고 직장 생활을 시작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직업이 안정적일지 회의합니다. 도시에 사는 부모들은 자식을 낳고 기르며 공부를 시킵니다. 몸 힘이 약해질수록 노년에 자식들에게 ‘짐’(부담)처럼 여겨질까 봐 걱정합니다. 광야에 있든, 도시에 있든, 두렵고 걱정스럽기는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함께 계십니다. 1독서 출애굽기 말씀이 그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 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도시에 사는 우리의 삶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욕심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울부짖음을 들으시며,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해 주십니다. 때로는 그 방법이 우리의 이해와 상상력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이스라엘은 깜짝 놀랍니다. 하느님이 내려주신 양식으로 지면이 ‘가득’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모세 사이의 대화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

“이게 무엇이냐?”는 히브리어 본문의 ‘만 후’(man hu)를 번역한 말입니다. ‘만 후’에서 ‘만나’(manna)라는 이름이 유래합니다(출애 16:31; 민수 11:6,7,9). ‘무엇’(what)이라는 뜻의 ‘만’(man)을 ‘70인역’ 성서(그리스어)에서 ‘만나’(manna)라고 번역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만나’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길갈’이란 곳에 진을 치고 예리고 평야에서 과월절을 보낸 다음날, 즉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뒤로는 내리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여호 5:10-12).

이처럼 ‘만나’는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은총의 표시입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느님 덕택에 자신들의 생명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양식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우에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양식’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처럼, 뱀의 사악한 음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식을 먹기 전에 먼저 진정한 배고픔을 느껴야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 굶주림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종종 배도 고프지 않으면서 무엇을 먹으려는 유혹에 빠지고 다른 양식을 구하려다 낭패를 당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출애굽(세상)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새 길의 여정은 자비하신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양식을 먹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 ‘만나’를 내려주신 장면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요한 6:30-35, 48-58).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 요한 6:35,48-51,58

사도 바울로도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 1고린 10:3-4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은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성찬례가 바로 그 생명의 양식, 즉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하느님 외에 다른 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으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진정한 양식이 되지도 못할 것에 시간을 바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먹이시고 인도해 오셨는지를 깊이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들에게도 차별 없이 생명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십시오.

 

오늘 시편은 1독서와 연결됩니다. 시인은 ‘감사하라’고 외칩니다. 무엇을 감사해야하는지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이스라엘 고대 역사를 성찰합니다. 아브라함의 여정부터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를 돌아봅니다. 사실, ‘약속의 땅’을 주셨다는 것이 이 시편의 출발점입니다. 그 성찰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약속을 지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자신들에게 ‘구체적’으로 베풀어진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송축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실제적’으로 일어난 구원 섭리(攝理)의 경이로움을 찬미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1독서와 관련해 말하면, 배고픔에 시달리던 선조들에게 하느님이 ‘직접’ 양식을 내려주시어 배불리 먹이셨다고 칭송합니다. 그 일어난 일들이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인지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단지 ‘입술’의 송축이나 찬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점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도록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배고픈 이웃들, 사회적 약자들을 단지 ‘생각’과 ‘말’로만 섬깁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지 않았습니다. 모호한 말과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살리려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떤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동이 절박하게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풍요를 누리지만, 동시에 인류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핵과 군비경쟁의 위협 속에 있습니다. 지구상 어떤 과학자나 인문학자도 당해낼 수 없는 ‘인공지능’의 예견된 공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일자리가 로봇들로 대체될 것이고, 거부하려 해도 도시에 사는 한 ‘사물 인터넷’이 삶의 환경을 점령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보다 인간이 만든 ‘사람’이 유전적으로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훨씬 우월할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인간이 사람의 하느님이 되고, 어쩌면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는 무엇으로 존재해야 합니까?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하느님 자녀 공동체’입니다(마태 5:3-12; 로마 12:1-2). 교회는 세상일에 무관심하거나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생명과 평화의 일, 용서와 화해의 일인지 시대를 향해 분별해 주고, 교회 자신이 생명과 평화, 용서와 화해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대 속에서 하느님이 행하신 ‘자비의 일들’을 알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시편 105:1). 인간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며 부품화하는 세태 속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약자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입’과 ‘피난처’로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 데이터나 통계치 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교회는 소금처럼 세상에 ‘녹아들어가야’ 합니다(마태 5:13).

교회는 이 시대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고난’까지도 감수하는 공동체입니다(필립 1:29). 고난은 교회가 하느님 편에 서 있다는 표시입니다. 교회는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그들에 의해 행해진 불의와 부정에 저항해야 합니다. 인간 중심으로 사물과 환경을 바라보는 모든 이기적 욕망들과 환상의 병폐를 고발해야 합니다. 인간의 ‘피조성’과 ‘죄성’을 외면하게 하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인양 청사진을 제시하는 이들의 ‘음모’를 몰아내는 ‘빛’으로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마태 5:14-16). 개인주의가 극에 치달은 세대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의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생각이나 기도나 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찾아나서야 할 새 길은 생각이나 말만 하는 옛길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새 길’입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배고프다고 불평하던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여전히 이집트에 속한 옛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시편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우리는 단지 생각, 말, 기도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실천하는 사람입니까? 우리의 생각, 말, 기도는 어떻게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 시대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보다 완전하게 구현하기 위해 지금 당장 교회는 무엇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찾는 일에 교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연대해야 합니다.

 

2독서 필립비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의 표상인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걸었던 사도 바울로의 당당한 격려입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던 흥미로운 ‘갈림길’을 고백합니다. 한 편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차원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입니다. 다른 편은 고통을 당하더라도 지상의 교회와 함께 나란히 서서 용기 있게 복음을 위해 분투하는 차원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죽는 편이 나을까? 살아있는 편이 나을까?”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 길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교회와 함께 지상에 머무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우리에게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온 생애가 그리스도께 붙잡힌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전부인 사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대합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은총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임을 발견했고, 그것을 충실히 지키려한 성인(聖人)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에게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 자비와 사랑의 은총 덕택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까? 그렇다고 고백한다면, 이 목숨이 있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얻은 우리는 무엇을 향해 이 생명을 헌신할 것입니까? 매주일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어떤 이들과 연대하고 생명의 시간들을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까?

오늘 복음이야기는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주인은 상상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1데나리온’(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의 ‘은총’를 선물합니다. 복음서 주석가들은 이 비유를 자신을 변호하시는 예수님의 신상발언(身上發言)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직업상의 죄인들(세리), 윤리상의 죄인들(성매매)과 어울려 식사하시곤 했다고 보도합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처신입니다. 그때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마태 11:19; 마르 2:16-17, 루가 7:33-34, 15:1-2). 이런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신상발언을 하십니다. 당신의 처신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본받은 행동임을 비유를 통해 밝힙니다.

우리나라는 지금이 막바지 포도수확 철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10월말이 해당합니다. 포도수확은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기에 일꾼이 많이 필요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이렇게 5번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만큼 포도원이 컸고, 일이 급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자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지불하도록 관리인에게 지시합니다. 놀라운 광경이 벌어집니다. 오후 5시에(직업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 이방인 상징) 온 일꾼들이 ‘1데니리온’의 은화를 받습니다. 그들의 휘둥그레진 눈이 보이십니까? 석양빛에 반짝이는 은화 한 닢을 들어 보이며 뛸 듯이 기뻐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입니까?

그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몸 힘조차 없는 정말 ‘약자’입니다. 본문에는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게으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 힘(능력)이 한 참 떨어져서 아무도 고용하려 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루해가 저물어가도록 일거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 생각에 애가 탔을 것입니다.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인가 보다”라며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일거리를 찾는다 해도 1시간밖에 일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그런데 한 자비로운 주인을 만납니다. 마지막 시간에라도 자신들을 쓰겠답니다.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일이 끝나버립니다. 품삯을 준다기에 민망한 손을 내밀었더니 ‘은화 한 닢’을 건넵니다. 최소한으로 일하고 온전한 하루치 품삯을 받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대우입니다. 과분한 자비(은총)를 경험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이 아니라 자비의 시간을 맛보았고, 넘치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갑자기 길게 줄 서 있던 일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오후 5시에 온 이들이 1데나리온을 받았다는 말이 뒤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먼저 온 일꾼들에게는 분명 ‘플러스 알파’가 있을 것이란 기대감과 껄껄거림이 넘실거립니다. 오후 3시, 12시, 아침 9시에 온 사람들이 손을 내밉니다. 기대가 빗나갑니다. 똑같이 ‘은화 한 닢’입니다.

이제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유대인을 상징) 차례가 되었습니다. 역시 ‘은화 한 닢’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섭섭함은 이내 분노로 바뀝니다. 맨 나중 온 일꾼들에게 눈을 흘기며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마지막에 온 이들은 일찍부터 온 이들의 노동에서 이득을 얻은 셈입니다. 다른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셈입니다. 주인의 처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며 따집니다. 그들은 그것을 다른 일꾼들을 대신하는 ‘의분’(義憤)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주인은 너무합니다. 아니,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으신 분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남이 잘 되면 좋아합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배 아파합니다. 지금 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입니까? 그들은 남보다 먼저 뽑힐 정도로 ‘몸 힘’을 갖춘 이들입니다. 주인이 다른 이들보다 ‘먼저’ 그들을 선택했을 때,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증명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내일도 인력시장에서 남들보다 먼저 뽑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그들은 규칙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들의 손에는 처음 약속되었던 하루치 품삯이 들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겨난 욕심 때문에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감사’를 놓칩니다. 남과 비교함으로써 감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불평의 어둠’이 몰려왔습니다. 약자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은총의 선물을 시기하다가 스스로를 ‘불행의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남들이 강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구덩이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몫을 챙기는 데만 관심했습니다. 자기 품삯이 손해 난 것도 아닌데 약자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마음이 이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태도는 우리 속에서 욕심과 시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이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자비와 감사의 일들마저도 변질시킵니다. 더욱이 그들의 말 속에는 포도원에서 보낸 하루에 대한 ‘부정적 정의’(定義)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에서 보낸 시간을 주인의 자비나 선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행한 ‘수고’라고 대듭니다. 기회를 준 주인이 아니라 일한 자기만 보이는 셈입니다.

여기 쓰인 ‘수고’라는 말은 그리스어 ‘바로스’(baros)의 번역입니다. ‘짐’, ‘압박’, ‘부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포도원에서 보낸 하루를 무거운 짐을 진, 압박과 수고의 시간으로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오후 5시에 들어갔던 이들은 포도원에서 보낸 1시간을 뭐라고 정의했을까요? ‘선물’이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 하루를 자비와 은총과 감사의 날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일상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자비와 은총과 감사입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난과 압박입니까? 세상에 부담이나 압박, 수고의 짐을 지고 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 두 번이야 그럴 수 있지만, 매일 같이 출근하면서 ‘오늘도 나는 무거운 짐을 지러간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일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더 높은 가치와 의미로 향할 때 비로소 불평이 그치고 감사가 나오는 법입니다. 기쁨도 보람도 다 거기서 가능합니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2독서의 사도 바울로입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이 단지 먹고 사는 생존이나 자아실현의 차원을 넘어서,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필립 1:20). 그처럼 당당하게 말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요? 우리도 사도 바울로처럼 하루하루를 그런 맘으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우리가 수행하는 일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주어졌음을 날마다 스스로에게 말해 주십시오. 주부로서의 살림살이든, 학생으로서의 공부든, 무슨 일이든지 하느님의 영광과 연결시키십시오. 그러면 일들은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나 수고의 가면을 벗을 것입니다. 오히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자비와 은총의 얼굴들을 나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하던 그들에게, 약자에게 무자비한 채 자기 이득에만 눈멀었던 그들에게, ‘엄중한’ 주인은 처음에 합의한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은 교만하고 불평하는 이들에게는 엄중하시지만, 약자와 비천한 이들에게는 한 없이 자비하신 분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이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십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오늘 복음이야기는 우리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총 속에 사는 이들임을 가르쳐줍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사’를 발견하는 이들은 자신이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임을 압니다. 그러나 감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을 이른 아침이나 오전 9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이들은 모두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시는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며 분노하거나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불공평하시다고 자기 나름대로 ‘의분'(義憤)을 토하는 우리를 향한 도전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들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는 적게 일하고도 자신이 일한 것보다 더 많이 얻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일을 견디지 못하고 만일, 신이 있다면 어째서 신이 이 불공정을 개선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기까지 합니다.

지식인들 중에도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공정하고 옳은지 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누가 일하기에 합당하고, 누구를 포함시켜야 하는지, 누가 사랑받을만하고, 존경할만하며, 그렇지 않은지 안다고 그들은 말하곤 합니다.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느님은 자신들과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더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느님은 하시려는 일을 의지대로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너무나 ‘관대'(자비)하시어 우리의 이해력이 미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해력 안에서 하느님과 세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과 완고함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에는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와 평생을 일합니다. 그들 덕택에 교회도 세상도 그만큼 더 밝아지고 진보했으니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들 역시 일찍부터 부름 받아 교회와 세상을 섬겼으니 그 만큼의 보람도 누렸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남들보다 먼저 발견하고 충실히 지켜왔으니 그 만큼 ‘감사’할 일이 더 많은 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회에는 늦게 부름 받아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늦게 부름 받았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일찍부터 섬긴 이들과 동일한 품삯, 완전한 품삯, 영원한 생명이라는 은총의 품삯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들어올 때는 꼴찌였지만 나중에는 첫째가 되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교우 여러분, 삶의 진실을 말하자면,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러 온 때와 상관없이 그냥 우리 ‘존재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 포도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사랑)와 은총은 항상 우리의 행동보다 앞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눈에 띠기를 원하십니다. 잠시라도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하러 들어온 시간에 상관없이 1데나리온(구원)의 은총을 선물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사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연약한 우리를 당신의 나라 일에 참여시켜 주셨고, 1데나리온(구원)이나 선물해 주십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고백하는 진실입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이미 받은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삶이 소중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비의 표시’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감사는 다른 이들이 이 세상에 행한 자비(선함)를 기억하는 가장 숭고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에 베풀어진 이러한 자비와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후 5시가 되도록 필요한 양식을 구하지 못해 절망하는 이 시대의 약자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쁜 소식’이 되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부디, 우리를 불러주시고 영생의 품삯까지 약속하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칩시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연약한 이들’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이 됩시다. 자비는 또 다른 자비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마태 5:7).

찬미하올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제게 베푸신 그 자비를
온 맘 다해 감사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9월 26일 한국인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윤달용사제, 조용호사제, 이원창사제, 이도암사제, 홍갈로사제, 클라라수녀).
  3. 9월 29일 설립 127주년을 맞는 대한성공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4.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5.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6.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7.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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