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17. 연중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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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 24주일입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의 성찬례에 왔습니다. 불완전한 우리에게 날마다 요청되는 하느님의 선물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용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용서의 다리를 건너 천국에 이르도록 하느님께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끝까지 미워하거나 분노를 품고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용서의 다리를 역주행하여 다시 지옥으로 건너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함으로써 풀려나는 죄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를 선택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제주도를 기반으로 문화선교사역에 헌신하는 성요한 사제의 ‘평화가 꽃피는 섬'(평화꽃섬)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몸이 아파서 성찬례에 참여하지 못한 교우들의 건강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다른 형편으로 성찬례 참여하지 못한 교우들도 이 시간을 기억하며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공동체임을 의식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주 하느님, 교회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용서와 기쁨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4:19-31
  • 시편 – 114
  • 독서 – 로마 14:1-12
  • 복음서 – 마태 18:21-35

오늘 독서들의 밑바탕에 흐르는 교훈의 공통점은 ‘너 자신을 살리는 선택을 하라’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동체마저 고통과 죽음 속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오늘은 나 자신을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이 무엇인지 고요히 묵상해 보십시오. 자신이 탈출해야할 그 옛 길, 자신이 찾아서 걷고 있어야 새로운 길(선택)이 무엇일지 성찰해 보십시오. 1독서인 출애굽기를 읽어나가면서 이 점을 발견할 지혜를 간구하십시오.

오늘 1독서와 시편은 ‘출애굽’이라는 공통의 사건을 기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갑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군대로부터 건지셨습니다. 반면에 이집트 군대는 바다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겪은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의 원인에는 파라오가 자리합니다. 그러나 정작 파라오는 그 모든 불행한 사건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손에 이집트인들의 고통과 죽음을 멈출 수 있는 선택의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는 모두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갔습니다.

2독서와 복음서 역시 ‘마지막 심판’을 기반으로 한 ‘용서’가 주제어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자비롭게 대하는 용서의 선택이 나 자신을 살린다는 교훈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찾아서 걷고 있어야 할 ‘새로운 길’입니다. 오늘은 특히 복음서에 초점을 맞추어 이 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평신도인 ‘C.S루이스’가 있습니다. 그는 용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용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전까지는
용서를 그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용서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루이스’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합니다.

나에게 사기를 치고
그런 금전적 손실을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요?
나를 그처럼 불공정하게 대한
고용주를 용서하라고요?
나를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학대한
부모(연인)를 용서하라고요?
아니요.
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하지도 않을 거예요!

바로 이런 상처와 분노와 적의(敵意)가 지난 수세기 동안, 그리고 앞으로 있을 세대 동안에도 사람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갈 일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이런 상처와 분노와 적의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또 가족이나 이웃관계의 역동성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결정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죽인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 ‘용서’로 번역된 그리스어 ‘아피에미’는 “보내다, 내버려두다”(let go, leave, leave alone, release)입니다. 이것은 용서가 ‘선택’(choice)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암시합니다. 용서는 단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무시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의 바로 그 점에 대한 나의 의식적인 ‘결정'(선택)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두 당사자 간에 화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기적적인 포옹과 눈물의 재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용서하기로 선택한 그 사람(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은 우리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만은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그 상처와 분노와 적의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기로 ‘선택’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1만달란트나 되는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왔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 아니, 그를 결코 용서하기 싫습니까?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1만달란트의 빚을 짊어지고 다닐 것인지, 내려놓을 것인지, 결정(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례는 그 빚을 벗는 선택을 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성찬례는 ‘죄의 고백’과 ‘사죄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만큼 죄의 용서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삶의 핵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주의기도를 바치는 이유도 ‘용서’에 있다는 점은 여러분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관대함이나 아량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규명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사랑과 친절에서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언급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읽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또 다른 이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다른 모든 종교, 신앙, 심지어 시민운동으로부터 차별화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능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관대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을 통하여 주십니다. 과거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즐겁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 또한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는지 복음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지난주에 들었던 말씀과 연결됩니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베드로가 질문한 용서의 ‘빈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그때까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최고의 ‘빈도’를 말합니다.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자신이 아주 아량이 넓은 사람임을 과시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빈도의 최고 제한마저도 철폐하십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무한한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카인의 후예인 라멕의 ‘복수의 노래’와 정반대입니다(창세 4:23-24). 라멕처럼 살아간다면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을 가져오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평화가 피어나지 않을 곳이 없습니다.

그림: 무자비한 종이 자비를 구하다, Eugène Burnand

무자비한 종이 자비를 구하다, Eugène Burnand, http://www.eugene-burnand.com/

후반부는 용서의 ‘당위성’입니다. 형제를 용서해야 할 근거는 ‘하느님의 용서’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처지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드십니다. 특례비유라고 일컬어집니다.

우선 비유에서 대조되는 두 빚의 양상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첫째 채무자가 진 빚은 ‘1만 달란트’이고 둘째 채무자의 빚은 ‘100데나리온’입니다. 그 당시 ‘1데나리온'(약 4g의 은화)의 가치는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5~8만 원정도 됩니다. 100데나리온은 100일 품삯이니까 대략 8백만 원 정도입니다. 또 ‘1달란트'(약 20~40kg의 금)는 6천 데나리온으로 한 푼도 안 쓰고 모은 16년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대략 4억 8천만 원정도 됩니다. 그 사람이 ‘1만 달란트’ 빚졌다고 했으니 4조 8천억 원입니다.

터무니없는 돈입니다. 어쩌다 그리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보다 60만 배나 많은 빚을 왕에게 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첫째 채무자는 자기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는 처지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의 비교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바로 그 첫째 채무자가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우리의 그 많은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첫째 채무자처럼 형제가 우리에게 약간의 빚만 져도 ‘무자비’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용서해야 할 형제의 잘못은 우리가 하느님께 행한 잘못에 비한다면 ‘지극히 작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내게 행한 형제의 잘못이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와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며 용서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자비한 종은 용서를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은 몰랐기에 ‘단죄’를 받습니다. 결국,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의 비유이자, 권유이며, 경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했는데,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냉혹하게 군다면 처벌을 받습니다. 하느님이 빚의 탕감을 취소하고 무서운 심판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영원한 멸망을 가져오는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용서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 비유는 무한히 자애롭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성품이 잘 드러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런 하느님의 성품을 다른 비유들을 통해서도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마태 5:45), 한 시간만 일한 일꾼에게도 하루 품삯을 쳐주시는 포도원 주인(마태 20:1-16),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루가 15:1-7),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루가 15:8-10),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루가 15:11-32) 등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용서와 화해’의 성찬례에 왔습니다. 불완전한 우리에게 날마다 요청되는 하느님의 선물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용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용서의 다리를 건너 천국에 이르도록 하느님께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끝까지 미워하거나 분노를 품고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용서의 다리를 역주행하여 다시 지옥으로 건너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미에서 주님은 나를 영원한 감옥에 넣는 자가 누구라고 하십니까? 또 나로 하여금 용서의 다리를 건너 천국에 이르게 하는 자가 누구라고 하십니까? 바로 ‘나’입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감옥에 넣기도 하고, 나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받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세우신 원칙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함으로써 풀려나는 죄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 죄인을 위해 조건 없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예수님을 닮아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선택’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이미 선물 받은 주님의 크신 자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깊이 깨달아 가시고, 우리도 용서와 자비를 선택하고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들로 변화되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세월호 미수습자들 가족,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4.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5.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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