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10. 연중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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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23주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단지 혼자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의 구원만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신뢰도 손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할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심정으로 잘못한 이의 마음을 바로 세워주는 접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접근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교우를 구원하려는 마음에 기초해서 나와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늘 푸른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보다 항상 앞서 가시며 이끌어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어 언제나 바른 길로 가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2:1-14
  • 시편 – 149
  • 독서 – 로마 13:8-14
  • 복음서 – 마태 18:15-20

오늘 독서들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공동체’입니다.

1독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해마다 과월절 축제를 지키게 된 유래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자유민이 된 그들을 공동체로 지속시키는 연대의 중심에는 과월절 축제가 자리합니다. 시편은 승리의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향한 공동체의 찬미입니다. 하느님이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찬미입니다.

2독서는 교회공동체가 부여받은 ‘사랑의 의무’와 ‘단정한 처신’입니다. 교회는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복음이야기는 교회공동체에 생겨난 갈등 해소의 방법과 사죄(赦罪)의 권위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무엇인가(누군가)의 끊임없는 희생과 죽음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이치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먹는 밥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밥이 된 그 쌀 속에는 땅과 하늘, 햇빛과 구름, 바람과 비, 농부의 수고와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쌀은 또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위한 밥이 됩니다. 우리는 그 밥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감사하며 먹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살리는 밥(희생물)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먹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과 죽음으로 내어주는 엄마 덕택에 아이는 생명을 영위합니다. 엄마의 생명력은 날마다 새어 나가지만 아이의 생명력은 날마다 커갑니다. 물론, 엄마는 자신의 그 희생과 죽음을 기뻐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났고, 언젠가 자녀들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명을 이어가고, 삶을 영위하는 이치는 무엇인가가(누군가가) 내게 바치는 희생과 죽음, 내가 누군가에게 바치는 희생과 죽음의 선순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체 상호의 돌봄과 제공의 사슬 관계입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희생과 죽음은 손실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생명이고, 또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한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기희생’을 싫어하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밥이 되어주기보다는 타인을 자신의 밥으로 삼으려고만 합니다. 확실히 죽음은 인류에게 ‘원수’(敵)입니다. 그러나 삶의 원리처럼 어떤 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역설도 진실입니다.

오늘 1독서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는 새끼 양의 ‘죽음’이 가져올 역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있게 될 새끼 양의 ‘죽음’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죽음은 노예와 억압, 그들 가운데 군림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거룩한 희생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있게 될 ‘죽음’은 파멸과 비극이 될 것입니다. 새끼 양의 죽음은 그의 생명을 끝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앞으로 나서게 될 ‘여정'(旅程)에 대한 삶의 희망과 양식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처럼 새끼 양의 죽음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원수(敵)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문입니다. 죽음의 역설이고 삶의 이치입니다.

그 때, 하느님은 이집트 땅에 마지막 재앙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이 달 십일에
사람마다 한 가문에 한 마리씩,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마련해 놓아라…
너희는 그것을 십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 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 출애 12:3-6

이 명령은 그 죽음의 밤을 적어도 닷새 정도 남겨둔 시점에 내려집니다(3절, 6절). 그만한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희생제사에 사용할 ‘새끼 양’이 흠이 없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엄청난 수의 ‘새끼 양’이 죽임을 당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들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이 이스라엘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이집트에게는 ‘죽음과 파멸’을 가져올 사건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하여라…
그 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치리라…
집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너희가 있는 집이라는 표가 되리라.
나는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너희를 쳐 죽이지 않고 넘어가겠다.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살리라.
– 출애 12:7, 12-13

과월절의 유래입니다. ‘죽음의 역설’, 즉 ‘삶의 이치’를 발견합니다. 이집트에게는 무시무시한 재앙이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어서 그 날 밤 식사(첫번째 과월절 식사)에 대한 상세한 지시사항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끝부분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해마다 기억하라는 의도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은 과월절 축제를 통해 자신들이 한 때 노예였고, 떠돌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과 자유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새끼 양의 희생과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신들의 식탁에 올려진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을 통해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 쌓여있을지 모르는 적폐(積弊), 즉 하느님을 망각하게 하는 것을 청산(淸算)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혜와 구원, 새끼 양의 희생을 기억하는 축제가 과월절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도는 선조들 못지않게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현재적 사건’으로 다시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생한 현재로써 하느님의 은혜와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원천’이 과월절 축제 준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찬례에도 해당합니다.

과월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민족(다문화가정을 차별하는 말이 아닙니다)의 현재를 돌이켜봅니다. 선조들은 한 때 주권을 상실하고 억압과 모멸과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벌써 72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자유민이 된 우리의 삶을 경축합니다. 다시는 지배받는 어리석은 국민이 되지 않겠다며 광복절 행사를 갖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라기보다는 외세가 주도한 해방이었다는 점이 적폐(積弊)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새로 구성된 이승만 정부의 방해와 반대로 해체되었습니다. 결국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 세력이 독재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민주공화국의 지도층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후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사법, 교육, 문화예술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또 그들이 소유한 부와 권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적폐청산’(積弊淸算)은 아득히 멀게만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민주공화국을 숙주(宿主)로 하여 사회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은 ‘가치관의 전도’(顚倒)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명 비상식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마치 정상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불의는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구속되더라도 풀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합니다. 국가경제에 기여(寄與)해 왔다는 논리를 폅니다. 진정한 기여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했지만 그 공로(功勞)는 기업가들이 차지하는 셈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국민들 사이에는 ‘옳은 일’ 보다는 ‘성공’이 중요해졌습니다. ‘방향’보다는 ‘속도’가 중요해졌습니다. 정의로운 삶보다는 불의한 출세가 추앙받고 있습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들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른바 ‘학습된 패배주의’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정서로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내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학교폭력에 대한 보도들, 월권 공약으로 강서지역민들의 갈등을 부추긴 야당의 모의원, 대화를 약속하고도 사드 배치를 강행한 정부 등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이 병들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문재인 정부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적폐청산’(積弊淸算)에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앞장서고 있습니다. 물론, 누리고 살아온 자들의 저항이 심하겠지요. 좌파라고, 빨갱이라고 선동하기도 하겠지요. 더 이상 그런 이데올로기 놀음에 국민이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침묵하거나 인내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도 뒤집힌 ‘가치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정신에 비추어 현(現) 정부가 잘 하는 일이 있으면 잘 한다, 잘 못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는 그 길이 아니라고 꾸짖고 저항해야합니다.

그러나 저항이든 적폐청산이든 그 근본에는 사랑의 마음이 함께해야 합니다. 모두가 한 땅에 살아가는 국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처럼 온 기회를 분노로, 폭력으로, 날려버릴 것이 아니라 희망의 불길로 이어가야 합니다. 나라 안에서 참회가 일어나고 측은지심과 용서의 마음이 작용하여 국민이 새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비록 외세가 주도한 성격이 강했다 하더라도 ‘다시 빛’(光復)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적폐청산 없이 기념되는 경축일은 단지 하나의 옛 사건으로 머물 뿐이며, 생생한 현재로 작용하지도 못합니다.

꼭 민족 문제가 아니더라도 가정에도, 개개인의 삶에도, 빛을 잃고 헤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울부짖던 우리를 하느님께서 건져주신 체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자신의 삶에 쌓여있는 적폐를 발견했고, 그것들을 청산했습니까? 자신의 고난과 과거로부터 배운 이들만이 새 길을 갑니다. 그들에게만이 진정한 미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이들만이 자신이 걸어온 시간들을 기념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에서 ‘과월절’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과월절 희생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죽임당한 새끼 양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1고린 5:7). 과월절 희생으로 사용될 양이나 염소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을 미리 보여준 상징입니다.

새끼 양은 한 해의 첫 달이 될 14일에 희생당합니다. 예수님도 아빕월(=니산월 3, 4월) 14일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새끼 양의 피는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야 합니다. 그들을 죽음의 사자, 즉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지켜주는 ‘계약의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에서 당신의 살과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교회의 영원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1고린 11:23-26, 히브 10:10-14).

이렇게 그 때 거기서 일어난 새로운 계약과 구원의 사건은 오늘 교회가 봉헌하는 성찬례를 통해 이천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는 능력으로 현재화합니다. 즉 과월절 축제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느님 현존의 선포이듯이, 성찬례는 교회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사제와 신자의 공동의 행위입니다.

오늘의 시편은 승리의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향한 공동체의 찬미입니다.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경축하기 위한 시입니다. 그 핵심에 ‘성모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처럼 삶의 역전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고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셨다고 노래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 루가 1:51~54

이처럼 짓눌린 공동체를 어여삐 여기시고 삶을 역전시켜 주신 하느님께 찬미(예배)를 바치자고 요청합니다. 동시에 그 예배 행위는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을 현재에도 살아있는 사건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예배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스런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2독서 로마서는 교회공동체가 부여받은 ‘사랑의 의무’와 ‘단정한 처신’에 대한 당부입니다. 교회는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특히 ‘단정한 처신’ 문단은 교회사에서 ‘성 어거스틴’ (Augustine)의 회심을 가져온 구절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백록」 8권에서 자신의 나이 32세 때 있었던 회심을 기록합니다. 내면의 고뇌로 눈물을 흘리던 그는 근처 어느 집에서 “그것을 집어 읽어라. 그것을 집어 읽어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이것을 성경을 펴서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알아듣습니다. 그가 집어든 책은 사도 바울로의 서신이었고, 눈길이 처음 닿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로마 13:13-14

이 구절을 읽고 난 후의 감흥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확신의 빛이 밀물처럼
내 마음에 밀려들어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본문을 들었습니다. 확신과 평안이 찾아들었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편지로 그리스도교 물줄기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낸 인물을 얻었습니다. 방탕하게 살아온 한 인생이 빛의 전사로 거듭났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삶의 가치를, 삶의 빛을, 충실히 지켜가는 위대한 신앙의 영웅을 얻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밤거리의 현란한 네온 불빛에 정신이 팔려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런 네온불빛을 참 빛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참 빛이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교회가 구약의 모세처럼,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 세우신 보초이고, 파수꾼입니다(에제 33:7).

본래 ‘예언자’는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의 예언자로 부름 받은 교회는 네온불빛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여기에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침묵했기에 생겨난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교회에게 물으십니다(에제 33:8).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모세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주라는 그 명령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두의 ‘죽음’, ‘파멸’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사랑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고, 단정하게 처신함으로써 자신들이 참 빛의 자녀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물론, 남 말하기 전에 자신은 잘하고 있는지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불의’, 자신 안에 있는 ‘적폐’부터 청산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어둠인 교회는 시대의 빛일 수 없습니다. 정말 단정하게 살면서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오늘날 교회는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우리 안의 어둠은 무엇인지 성찰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다루는 공동체의 대응 절차와 교회에 부여된 사죄(赦罪)의 권위를 들려줍니다.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하면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살면서 가장 힘겨운 일 중의 하나가 ‘갈등에 직면’하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관계가 위태로워질 때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교회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교우 간의 갈등에 대해 이미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 갈라 6:1

마태오도 갈등의 상황에서 취해야할 ‘기본 정신’과 ‘절차’를 제시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마태오는 ‘레위기’에서 그 기본 정신을 가져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 레위 19:17-18

이처럼 갈등을 풀기 위한 기본 정신은 오늘 로마서 말씀처럼 ‘사랑’(온유한 마음)입니다. 또 절차의 맨 앞에는 ‘직면’(直面), 즉 직접 만나는 일이 자리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교회공동체에게 상처를 준 어떤 사람과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혹은 발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만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버려두면 결국 교회는 논쟁에 휘말릴 것입니다. 그의 태도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면, 그와 단 둘이 앉아서 사랑 안에서 형제적 훈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음주 복음복문에 기록된 것처럼, 끝없이 용서할 자세를 가지고 만나야 합니다(마태 18:22).

살면서 보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상대방 ‘앞에서’ 직접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인 사람만이 직접 만나, ‘앞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목적이 아닌 사람은 앞에서 말하지 않고 뒤에서 말합니다. 전문용어로 ‘뒤담화 깐다.’라고 합니다. 흉본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흉을 많이 보는 편입니까? 아니면 사랑을 많이 하는 편입니까? 흉은 언제나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지만, 사랑은 허다한 죄를(허물) 용서해 준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 1베드 4:8

저는 사제생활을 해 오는 동안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이 편을 갈라 대치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픔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만남의 목표가 화해와 회복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사제생활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화해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해와 회복, 용서와 사랑의 궁극적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첫 시도인 개인적인 만남에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고, 갈등을 풀고자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더 데려가서라도 대화를 시도합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뒷담화 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설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절차를 밟는 유익이 있습니다. 내가 옳고 그가 틀렸다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독단에 빠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간 교우들을 통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오류가 바로 잡아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다른 믿을 만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잘못을 저지른 교우가 깨닫고 관계회복의 장으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는 옳고 그는 틀렸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보다는 그를 교회공동체에 계속 남겨두려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방법입니다.

이마저도 실패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경우 전체 회중, 즉 교회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이쯤 되면, 그와 관련한 일은 비밀이 아니라 공개가 됩니다. 교회공동체가 그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기도가 응답된다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단 두세 사람만이라도 형제를 얻기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랑의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 자신에게 그런 사랑의 마음이 있는가,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속일 수 없는 것이 나를 통해 공동체의 수준이 들어나고, 공동체의 수준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거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모든 것이 단 두 사람의 사랑의 기도로 가능하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건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끝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랑조차 받으려 하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 즉 교회 밖의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을 모든 절차를 마무리 짓는 최후수단으로써의 축출로 이해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님을 저버리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같이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뿐만 아니라 교회에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 마태 18:18

하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이 마지막 절차인 축출을 의도하고 만나서도 안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직면의 목표는 형제를 얻는 것이고 화해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이나 세리들을 어떻게 대하셨다고 보도합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비난하고, 판단하며, 정죄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으로, 공감으로 대하셨고, 그들을 믿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1:31).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마태오’가 있습니다. 그는 ‘세리’ 출신입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공동체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이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 파렴치, 매국노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저자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마태오의 이런 경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조차도 포기하지 말고 화해 사역을 계속하라고 교회공동체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절차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로부터 축출하라고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좀 더 기다려라.’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기다리다 보면 또 기회는 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는 ‘자존심’ 때문에, 혹은 얼마 동안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성령께서 ‘시간’이라는 약을 사용하십니다.

자, 그러면 무엇을 원해서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까?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명’(使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폭력적이고 깨어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할 헌신적인 공동체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마태 18:20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기를 원하십니다. 혼자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그런 신앙생활은 고립이나 오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관계의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북돋아 주시는 역동적인 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의 관계도 사랑이어야 함을 삼위일체 속에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관계가 완전한 사랑의 일치 속에 있어야 하고,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삼위일체는 계시합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논쟁과 갈등의 장소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도 ‘누가 높으냐’를 두고 다투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마르 9:33-37). 또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듯이 초대교회들조차도 때로는 긴장과 불일치(불화)를 경험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사도 11:3, 15:2, 39)

그 긴장과 불일치는 교회사에도 전해옵니다. 교회가 예루살렘을 넘어 점점 확장됨에 따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다른 규범과 관습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를 찾아냈습니다. 철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신학을 세웠고, 그 시대의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성서를 각 나라말로 번역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가 보다 적절한 도구를 찾기 위해 좀 더 수고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면 다시 신뢰를 회복할 것입니다. 교회 자체의 생존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때 교회 내부의 갈등도 줄고 세상도 교회를 다르게 볼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공동체의 건강은 우리가 느끼고 있는 ‘사명감’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다면 교회공동체는 무너집니다. 교회의 건강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영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죽음으로써 우리는 삽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빛의 갑옷을 입고 이 시대의 문화들에 좀 더 유연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품어내려는 의지에 교회의 건강성은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단지 혼자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의 구원만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신뢰도 손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할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심정으로 잘못한 이의 마음을 바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접근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교우를 구원하려는 마음에 기초해서 나와야 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기도가 삶의 위기, 신앙의 죽음에 처한 그를 다시 회복시킵니다. 공동체의 사랑의 기도가 그를 살립니다. 사실, 기도는 우리가 죽고 하느님이 사시는 시간이고, 삶의 위기에 처한 그는 살고 우리는 죽는 시간입니다. 공동체의 기도는 과월절 희생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죄 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구원해 내신 형제를, 자매를,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어제보다 더욱 사랑하는 공동체로 자라가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5명의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3.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청소년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6.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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