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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6일 / 연중 33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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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하 6:18-31 / 시편 11 / 루가 19:1-10

오늘, 우리 주님을 보려고 애쓰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자캐오입니다. ‘순결한 자’라는 뜻입니다. 일찍 남편을 여읜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보다는 친구들에게서 놀림 받은 기억이 더 큽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직업 때문입니다. 그는 예리고라는 도시의 통행세를 관장하는 돈 많은 세관장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니까 세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사랑스러운 그의 이름과 지금까지 해 온 직업은 어울릴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납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제국은 현지인을 고용하여 온갖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유대 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나 악명높던 ‘통행세’ 징수권을 독점한 사람이 ‘세관장’입니다. 그는 총독에게서 입찰권을 따내 예상 세입을 선지급합니다. 세리들을 고용하여 자신이 투자한 선급금을 회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투자한 돈 이상으로 수입을 챙겨야 했기에 세리들을 쪼았습니다. 고용된 세리들도 자신의 이익을 챙겨야 했기에 지역 주민에게 통행세를 징수할 때 부당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손에 칼만 들지 않았지 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세관장과 세리를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매국노, 죄인이라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어째서 자캐오가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사는 세리의 길로 갔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작은 키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성격 형성에 어떤 작용을 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받는 놀림과 따돌림은 마음속에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키가 작다는 열등감은 성공에 대한 열망과 강한 의지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살아남아 돈 많은 세관장의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동족들과 연결이 끊긴 경멸과 작은 키만 빼놓고는 괜찮은 삶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내면은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인생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삶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돈 많은 세관장이라 해도 그는 동족들에게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손가락질받는 배신자, 로마의 하수인,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운명의 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입니다. 그는 나자렛 출신의 예언자가 그가 관장하는 예리고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랍비이자 기적을 행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자기 같은 ‘세관장’ 출신의 마태오도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는 ‘다윗의 자손’이라 불린다는 소문입니다. ‘예수….’ 그의 내면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리로 나섰습니다.

키 작은 그가 북적거리는 군중들 너머로 우리 주님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북적거리던 군중이나 그의 작은 키도 우리 주님을 보고 싶어 하던 그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돈 많은 세관장이기도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구도자’(求道者)였습니다.

구도자로서의 그의 갈망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몸에 밴 강한 의지력으로 그는 우리 주님을 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어떻게 해야 지금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그는 군중 속에서 우리 주님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뜁니다. 마침내 ‘도’(道)를 찾았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이 나무 사이에서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주님은 나무 위에 오르기 전부터 앞질러 달려가는 그를 이미 보셨습니다. 그가 오르는 돌무화과나무를 이미 보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은 마치 목자가 양을 부르듯 다정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와의 연결을 시작하십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외에 동족 중 누구도 그처럼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진정한 관계를 갖기 시작합니다.

군중들은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잔치를 베풀던 자캐오는 그에게 일어난 완전한 기쁨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수정하고 새롭게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해서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 구원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을 사는 당신과 나입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자캐오는 자신의 고백대로 행동했을까요? 그가 예수님 앞에서 한 고백이 일종의 ‘기도’라면, 그는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했을까요? 저는 그가 자기 고백처럼, 자기 기도처럼, 구체적으로 행동했다고 믿습니다. 그랬기에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겠지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기도만 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도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행동이 없는 기도는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가식’입니다. 행동하기 위해 기도합니까?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찾기 전 당신께서 먼저 저를 보셨고, 구원하러 오셨나이다. 지금도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 마음을 열고 찾아오신 당신을 믿음으로 영접합니다. 오늘도 저를 찾으시고 이끄소서. 저 역시 단지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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