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내면의 안내자

  • by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시대 많은 이들이 분노나 슬픔, 두려움이나 죄책감 같은 정서적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 정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쩔쩔맵니다. 그대는 자신 안에서 이런 정서적 고통을 느끼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부분은 자신에게 일어난 그 정서적 고통을 인정하기 보다는 피하기 위한 대체물을 찾습니다. 알콜, 약물이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性), 도박(게임), 일, 종교생활(은혜) 등을 그 대체물로 삼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신 안에 일어난 정서로부터 잠깐이라도 도망가게 해주고, 완화시켜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착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서들은 또다시 억압당하는 것이지요. 잠시 잊힐 순 있어도 사라지진 않습니다.

이렇게 맛 본 대체물들은 머잖아 그 사람을 길들이고 중독된 노예로 만듭니다. 그 중독물에 종교생활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여기 저기 더 센 약과 주사를 맞기 위해 주일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방황합니까! 혹은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발한 예배방식을 계발하느라 사목자들은 본질마저도 놓치기 일쑤입니다.

혹 가나안 신자가 되었습니까? 그대의 그 아프고 피 범벅된 상처, 고통스런 영혼을 씻기고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대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교회, 완벽한 예배란 없다는 것을요. 사람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을 외부로 돌리기보다 오히려 내면으로 향하고 그대의 정서적 필요를 좀 더 잘 알아차렸다면 어땠을까요? 사실, 중독증은 자신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참된 정서적 필요’를 외면하고 가짜 대체물로 자신을 마비시킨 데서 옵니다.

그대가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안내하고 싶습니다. 우선 그 대체물들부터 멀어진 자신을 반복적으로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실제로도 멀어지십시오. 자신이 느끼는 그 정서적 고통을 인정하십시오. 그 고통을 알아주십시오. 그 고통에 이름 하나하나를 붙여보십시오. 자신의 외면으로 힘들었을 그 정서를 정직하게 만나십시오. 거기서 그대의 치유는 시작됩니다.

만일 그 만남이 잘 이루어지면 놀랍게도 그 정서적 고통은 그대를 또 다른 곳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 존재의 중심에 있는 ‘신성(神聖)의 방’으로 그대를 데려다 줄 것입니다. 이렇게 그대가 외면해 온 그 정서적 고통이 사실은 더 높은, 더 깊은, 참된 정서, 즉 신성(神聖)으로 부르던 손짓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에게 일렁이는 그 정서들로부터 진정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언제든 그대를 부르고 있는 ‘진실한 감정’(神聖)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을 ‘내면의 안내자’(자기치유능력)로 삼아 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정서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던 삶에서 풀려날 것입니다. ‘그대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한다고 고집부리며 살아온 ‘그대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오정열 사제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