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3. 성령강림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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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의 빛과 생명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 마음을 성령의 한없는 은혜로 채우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21
  • 시편 – 104:24-34, 35하
  • 2독서 – 로마 8:22-27
  • 복음서 – 요한 15:26-27, 16:4하-15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오소서, 교회의 빛과 생명이신 진리의 성령이시여!’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의 빛과 생명이 되게 하심을 경축합니다. ‘불혀’ 같은 형상으로 성령이 임하시자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능력을 선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 즉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변화되어 온 세상을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새 계약인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새 계약인 예수 그리스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처럼 ‘증인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증인의 삶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즉 새 이스라엘이 ‘오늘’ 탄생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인 교회’로 성령께서 ‘오늘’ 그들을 낳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펼쳐가도록 성령께서 권능을 주시어 ‘오늘’부터 그들을 ‘파송’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사 속에서 ‘오늘’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불혀 같은 형상으로 강림하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부활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한 가장 결정적인 날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교파는 오늘을 ‘교회의 생일’로 여기며 성대한 축일로 지킵니다. 성공회도 오늘을 ‘부활대축일’(부활밤 예식)로 시작한 50일간의 ‘기쁨의 절기’를 ‘결실’하는 대축일로 지킵니다. 오늘을 경축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사명’을 되새깁니다. ‘온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를 밝히도록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사명’을 되새깁니다. 사도들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세우신 ‘구원(생명)의 새 계약’으로 선포하는 ‘증인의 삶’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되새깁니다.

우선, 말씀 나눔에 앞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의 빛과 생명이신 성령의 은혜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사랑의 불’을 우리 마음마다 붙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이신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의 경솔한 이성과 이기적인 감정을 정결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기쁨이 되도록 행복과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차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참 포도나무처럼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말씀 나눔을 출발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신 첫날’에 대한 두 개의 ‘전승’이 존재합니다. 신자 대부분은 1독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의 영향으로 ‘그날’을 ‘오순절’(五旬節)로 기억합니다. ‘순’(旬)은 ‘10일’이기에 ‘오순절’은 ‘50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펜테코스테’(πεντηκοστή)를 번역한 말입니다. ‘오순절’은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경축하는 세 개의 큰 명절 중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출애 23:14-17; 레위 23:15-16, 신명 16:9-10,16).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사도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서둘러 ‘성령’을 주시는 장면을 전합니다(요한 20:22-23). ‘부활하신 날이 성령을 주신 첫날’인 셈입니다. 우리는 ‘문자’에 매이는 사람들처럼 어느 날이 정확한 ‘사실’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순절’과 ‘부활하신 날’로 각각 ‘다르게’ 전하는 《루가복음》과 《요한복음》 기자의 ‘신학적 의도’(의미)에 초점을 맞춥니다.

게다가 주님께서 성령 보내심이 일회적이지 않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조차도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날’을 ‘오순절’로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고르넬리오 집’에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내려오신 이야기’를 기억합니다(사도 10:34-48). 사도 바울로도 《고린토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을 교훈하는데(1고린 12:4-13), 이 역시 ‘성령 보내주시는 날’이 ‘오순절’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당신 몸의 실체인 교회에게 ‘계속해서’ 성령을 보내시어 살아있게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참으로 성령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그리스도의 숨’입니다. ‘지금도’ 이 진실은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거나, 성령의 현존과 활동이 우리 안에 없으면 교회는 병들고 죽습니다.

이제, ‘성령을 주신 첫날’을 《요한복음》 기자와 다르게 전하는 《루가복음》과 《사도행전》 기자의 ‘신학적 의도’(의미)를 살피기 위해서 <복음서>가 전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책인지부터 밝힙니다.

<복음서>는 ‘자신이 속한 교회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가 ‘예수님의 행적(行蹟)과 가르침’을 ‘자신의 신학’(미드라쉬적)으로 ‘걸러서’ ‘자신이 속한 교회에게’ 기록한 책입니다(물론 세월이 흐른 뒤에는 ‘우리를 위한’ 책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 교회 구성원, 처한 상황, 다루던 문제의 응답에 따라 <복음서>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같은 사건이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어느 부분은 ‘추가’하거나 대폭 ‘생략’합니다. 심지어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 ‘차이점과 다양성’은 <복음서>의 ‘통일성’ 못지않게 ‘각 저자의 신학’(해석)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아시다시피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한 묶음’으로 치밀하게 구상(構想)된 책입니다. 복음사가 ‘루가’라는 인물이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루가복음》을 1부로, 《사도행전》을 2부로 기록했습니다. 1부인 《루가복음》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行蹟)과 가르침을(사도 1:1) 다른 <복음서> 저자들처럼 ‘자신의 신학’(루가 1:3)으로 걸러서 기록했습니다. 흔히 ‘예수의 길’(하느님 나라 운동)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2부인 《사도행전》 역시 ‘루가 자신의 신학’(사도 1:1)으로 걸러서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행적(行蹟)을 기록한 책입니다. 흔히 ‘교회의 길’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의 ‘도착점’이자 교회가 땅끝까지 ‘예수의 길’(하느님 나라 운동)을 이어놓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사도 1:4, 8).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문자 그대로’의 ‘객관적인’ 초대교회의 역사도 아니고 사도들 모두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책도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로’를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뉠 정도로 다른 사도들의 행적(行蹟)은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분명 다른 사도들의 행적(行蹟)을 알려주는 자료들도 많았을 텐데도 말입니다. ‘루가’는 수집한 자료 중에서 ‘자신의 신학’에 필요한 부분만 간추려 ‘역사서’처럼 ‘문학적’(은유적, 상징적, 비유적, 해석적, 신앙적, 미드라쉬적)으로 기술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그 보잘것없던 제자들이 ‘어떻게’(언제) 결정적으로 사도들로 ‘변화’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이어갔는지를 밝히는 ‘루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언제’,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가 생겨났고, ‘무슨 힘’으로 그 보잘것없던 공동체가 세상의 박해와 미움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인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으로 ‘성장’해 갔는지를 밝히는 ‘루가의 신학적 설명’입니다. 이 ‘변화’와 ‘성장’의 중심에 결정적으로 ‘성령’이 자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을 이어간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날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사도행전》을 부활절기에 낭독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특히 전례력을 지키는 모든 교회가 ‘성령강림대축일’인 오늘 1독서 본문을 낭독했을 것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통해’ 다시 ‘소생’(甦生)하게 된 이들이 펼치는 ‘생명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출발한 삶’ 말입니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의 장면’ 묘사이고(2:1-4), 후반부는 ‘사람들의 반응과 베드로의 설교’입니다(2:5-21).

전반부(2:1-4)는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장면 묘사가 생생합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 기록이라기보다는 ‘루가의 신학’이 반영된 ‘문학적’(은유적, 상징적, 비유적, 해석적, 신앙적, 미드라쉬적)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학적’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알맹이(속뜻), 즉 ‘루가’가 그것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신학’(풍부한 의미들)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루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알아듣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문자적, 역사적, 객관적으로)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며(사도 2:2),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져 각 사람 위에 내렸고”(사도 2:3),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사도 2:4)한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문자주의’(근본주의, 반지성주의)에 빠지면 《성경》은 ‘자유’를 주는 ‘생명의 책’이 되기보다는 자칫,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해하는 반지성적인 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집에서 개를 기르는 분이 이 속담을 듣고서 ‘아, 개똥도 약으로 쓰는구나! 다음부터는 개똥을 버리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알아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담은 “평소에 흔하던 것도 막상 긴하게 쓰려고 구하면 없다”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입니다. 이처럼 ‘루가’는 그 ‘문학적’ 표현을 통해 ‘자신이 속한 교회’에게 ‘신학적으로 응답하고 있다’라는 점을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루가’는 성령 강림의 첫 장면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 사도 2:1

‘루가’는 이 사건이 다른 날이 아니라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먼저 ‘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만큼 ‘오순절’이 갖는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오순절 날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입니다. 이 표현은 “드디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와 기한이 완전히 채워져서’ 결정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강조입니다. ‘오순절’이라는 시간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하신 때’이고, ‘성령 강림’은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자연적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저절로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인간의 원함이나 의지, 시간 계획이 일으킨 사건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시간표’ 속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행하신 은총의 사건’임을 ‘신학적’으로 강조합니다(사도 1:7).

물론 사도들을 포함한 신도들은 함께 모여 기도에 힘썼고(사도 1:14), ‘사도직’을 충원하며 조직도 정비했습니다(사도 1:26). 성령을 받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노력했고 준비했습니다. 이 일들은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의 이런 준비와 노력 덕택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령 강림의 때와 시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어났다는 점을 “오순절 날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루가’는 처음부터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면 ‘성령 강림’을 다른 절기나 시간이 아니고 ‘오순절’로 설정한 ‘루가의 신학적 의도’는 무엇입니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루가’가 전하는 ‘성령 강림의 시기’는 《요한복음》과는 대비됩니다. 《요한복음》은 ‘부활’과 ‘승천’뿐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어주시는 사건이 ‘부활하신 날’에 모두 일어났다고 서술합니다(요한 20:17, 19-23). 분명 요한은 자신의 ‘신학적 의도’가 있기에 그렇게 기술했습니다.

반면에 ‘루가’는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위해 <구약성경>에 기록된 ‘큰 명절’을 이용합니다. 훗날 ‘오순절’로 개명(改名)된 ‘추수절’입니다. ‘봄’에 보리와 밀의 ‘추수’를 끝내고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 축제일이 ‘추수절’[공동번역 성경은 ‘맥추절’(출애 23:16), 개역성경은 맥추절, 칠칠절로 번역]입니다. ‘추수절’은 ‘과월절’ 후 처음 맞이하는 ‘안식일’이 지나고 50일째 되는 안식일에 지키는 명절입니다(출애 34:22).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구약의 3대 명절입니다(출애 23:14-17; 레위 23:15-16, 신명 16:9-10,16).

‘추수절’의 유래는 하느님께서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향해 주신 명령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 ‘봄철’ 곡식 추수가 끝나는 때 ‘추수절’[공동번역 성경은 ‘맥추절’(출애 23:16)]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출애 23:16; 34:22, 민수 28:26). 그런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최초의 ‘과월절’(정월 14일)을 지키고, 다음날(정월 15일, 민수 33:3) 그 땅을 탈출한 50일째 되는 날과도 겹칩니다. 그날 야곱의 후손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던 떠돌이들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율법)을 받고(출애 20장), ‘계약 공동체’로 함께 출발했습니다.

이런 포개짐 때문에 ‘추수절’은 그들이 ‘시나이산’에서의 ‘율법 수여’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선택된 민족’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날로 발전할 ‘내부적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발전은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시절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타국에서 귀양살이 중이니 더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봉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과월절’ 후에 오는 ‘추수절’은 ‘시나이산에서의 율법 수여’와 ‘계약 공동체’로 출발했음을 기념하는 명절로 강조점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기원전 536년, 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가 칙령을 통해 포로귀환을 명령합니다. 귀국한 그들은 즈루빠벨의 주도로 ‘제 2성전’을 건축합니다. 이때부터 ‘추수절’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회상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례 절기’의 성격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후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추수절’을 ‘오순절’로 개명(改名)했을 텐데 역사적 자료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 ‘신약시대’에 ‘오순절’은 로마제국 내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대인이 ‘헤로데’가 증축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큰 명절’로 정착했습니다(신명 16:16). 나중에 로마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기 전까지 그들이 ‘율법’을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선택된 민족’, ‘하나의 공동체’로 출발했음을 상기시키는 ‘큰 명절’로 자리했습니다.

‘루가’는 이런 역사성을 갖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을 분명히 합니다. ‘옛 오순절’에는 ‘율법 수여’로 ‘하느님과 계약 관계’를 갖는 ‘이스라엘’이 탄생했습니다(출애 19:6). ‘새 오순절’에는 율법의 요구를 대신하는 ‘성령’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강림’하십니다. ‘성령의 강림’, ‘성령의 수여’로 ‘하느님 새 구원 계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즉 ‘새 이스라엘’이 탄생합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 강림’ 장면에는 ‘시나이산 율법 수여’ 때 묘사된 이미지들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소리’(2절), ‘불길’(3절), ‘외국어’(4절)는 ‘나팔 소리’, ‘불’, ‘말씀’(출애 19:14-25)과 유사합니다. 특히 ‘성령’은 루가의 신학에 있어서 ‘율법의 기능’을 넘어설 뿐 아니라 이방인 선교의 걸림돌이자 장애물인 ‘율법’을 대체하는 효력을 발생합니다. 게다가 ‘봄’에 보리와 밀의 ‘추수’를 무사히 끝내고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인 ‘추수절’처럼,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추수’합니다(사도 2:41).

이제, 성령 강림 장면을 묘사하는 루가의 ‘문학적’(은유적, 상징적, 비유적, 해석적, 신앙적) 표현 하나하나에 주목해 봅니다. 루가는 성령 강림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향하는지 맞혀 보라는 듯, 마치 ‘수수께끼’처럼, ‘스무고개’ 하듯이 ‘문학적’으로 천천히 표현합니다.

‘루가’가 첫 번째로 사용한 ‘문학적’ 표현은 ‘청각’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다시 환기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문학적 표현’임을 기억하십시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 사도 2:2

이 문학적 표현으로 ‘루가’는 ‘교회를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탄생’시키는 ‘성령’이 ‘하느님(하늘)으로부터’ 내려온 ‘초자연적인 영’(힘)임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내면(지상)에서 생겨난 ‘힘’(영)이 결코 아닙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그들에게 보내주셨음을 분명히 합니다(사도 1:5-11). 특히 이 문장의 주어는 ‘바람’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성령’임을 알려주기 위해 ‘바람’이라는 이미지를 덧붙입니다. 그 ‘소리’는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 온 사람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컸습니다(6절).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 강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영’(πνεύμα)과 ‘바람’(πνοή)은 관련이 깊습니다. 참고로 영, 바람, 숨,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רוּח)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의미할 때 ‘바람’이라는 상징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루가는 성령 강림의 양상(樣相)을 ‘바람’이 아니라 ‘소리’가 들려왔다고 ‘청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왜 이런 ‘문학적’ 표현을 썼을까요? 이어지는 ‘혀’(3절), ‘외국어’(4절), ‘하느님의 큰일들을 전함’(11절)에서 밝혀집니다.

이 ‘문학적’ 표현에 루가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도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사도 1:8

이 말씀처럼 성령이 강림하신 장면을 ‘소리’, ‘혀’, ‘외국어 말하기’라는 ‘청각적 현상’으로 묘사한 ‘루가의 신학적 의도’는 명백합니다. “하느님의 큰일들을 전하는” 사람의 언어, 즉 ‘증인의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그 의도가 ‘실현’됩니다. 한마디로 ‘복음 전도’입니다.

이렇게 장차 그들을 ‘증인’으로 살게 할 그 ‘소리’는 신도들이 기도하러 모인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사도 2:2). ‘가득 채웠다’라는 말은 ‘압도했다’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령 강림의 ‘소리’로 가득 찬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들이 있던 ‘집’입니다. 여기에도 ‘루가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되던 1세기 말(80-90년)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입니다. 신자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향수’가 있었습니다. ‘루가’는 예배 장소의 ‘합법성’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루가’는 이 문제를 ‘신도들이 모인 곳’으로 해결합니다. 명확히 말하면 ‘신자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성령’, 즉 ‘협조자’이신 성령(요한 15:26)은 ‘신자공동체 안에 현존’하시기에 더는 ‘예루살렘 성전’ 터를 순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든, 유다이든, 사마리아든, 로마든, 땅끝이든, 어느 곳에서든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협조자이신 하느님의 성령이 현존하시는 ‘성전’입니다(사도 4:23,31; 8:17; 10:44). 이리하여 ‘루가’는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드리는 ‘예배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예배를 위한 ‘합법적인 성전’입니다. 그 무엇도 ‘성령의 현존’보다 상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심을 ‘온 집안’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습니다.

‘루가’가 두 번째로 사용한 ‘문학적’ 표현은 ‘시각’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 사도 2:3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령의 강림을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성령의 역동적인 모습을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혀’입니다. 그 ‘혀’가 ‘성령’임을 알려주기 위해 ‘불길’이라는 ‘이미지’를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불’은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현’(顯現)이기 때문입니다(출애 19:18). 그러나 문장의 주어는 ‘불’이 아니고 ‘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혀’를 강조합니다. 왜 ‘성령’이 강림하신 장면을 루가는 ‘혀’로 표현한 것일까요? ‘소리’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증인의 삶’, 즉 ‘전도’를 강조하려는 ‘루가의 신학’입니다. 이제부터 ‘복음’이 마치 ‘불길’처럼 ‘전파’된다는 ‘문학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다만 ‘혀’는 ‘소리’보다는 ‘언어 능력’에 상대적으로 더 ‘가깝고’, ‘직접적’입니다.

이어지는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라는 표현은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사도 1:5)라고 약속하신 예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신자공동체’(온 집안)에게 강림한 성령이 ‘개인의 체험’으로 구체화 된 모습의 강조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 안’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시고, “살아가는 동안 함께 하신다”(요한 14:16-17)라고 약속하신 예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더욱이 ‘신자공동체’에게 강림한 성령이 ‘개인의 체험’으로 구체화한 모습 속에서 ‘공동체’를 ‘염려’하는 ‘루가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가’는 ‘신자공동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개인의 성령 체험을 정당화’합니다. 공동체와 개인의 유기적 연결입니다. 그렇게 해야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1고린 12:4-13) 교회의 질서와 일치가 유지된다는 신학입니다. 실제로 ‘루가’는 《사도행전》 곳곳에서 신자공동체에서 파송된 권위자들이 베푼 성령 안수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 8:14-17; 9:10-18; 10:17-48; 19:1-7). ‘루가’에게 있어서 ‘신자공동체’는 개인의 성령 체험이 ‘정당성’을 갖는 ‘기준’이자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권위의 근원’입니다. 그 성령 강림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 2:4

그들이 ‘온몸으로’ 성령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치고, 내 잔이 넘치옵니다”라고 고백한 다윗처럼(시편 23) 그들은 완전히 되살아났습니다. 오늘 노래한 《시편》처럼, 그들은 ‘소생’하고 새로워졌습니다(시편 104:30). 그들은 듣고, 보았으며, 이제 ‘증인’이 될 수 있는 ‘거룩한 힘’(선물)까지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말로 ‘언어 능력’입니다. 그들은 ‘귀’와 ‘눈’뿐 아니라 ‘입술’도 성령에 압도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듣고’, ‘보고’, 성령으로 ‘말하기’라는 ‘전인적 체험’을 거쳐 그들 각 사람은 ‘겁쟁이’에서 ‘용기 있는 증인’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일어선 ‘작은 예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하느님의 가족공동체’, ‘성찬공동체’, ‘부활공동체’, ‘구원공동체’, ‘생명공동체’라는 별칭들을 갖게 만든 ‘성령공동체’가 마침내 탄생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성령 강림의 결과로 그들이 갖추게 된 ‘능력’이 다른 것도 많을 텐데 굳이 ‘언어 능력’이라 내세운 ‘루가의 의도’(의미)입니다. 여기에도 ‘루가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루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는 ‘꿈’, ‘희망’,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루가 3:6; 24:47; 사도 1:8). ‘증인의 삶’이 ‘교회의 길’임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큰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민족들이 쓰는 ‘언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땅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는 데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루가’는 이런 고민을 하는 교회에게 ‘언어 능력’ 이야기를 ‘상징’으로 들려주며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하느님의 심판인 ‘바벨탑 언어의 혼란’(창세 11:1-9)을 ‘협조자 성령’께서 ‘소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목적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을”(사도 2:11) ‘모든 민족’에게 전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예수를 선포하며,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을 교회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루가’는 이 ‘증인의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성령이 강림한 ‘현현’(顯現) 양상(樣相)이 ‘언어 능력’을 향해 점점 구체화하도록 ‘문학적’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소리’에서 ‘혀’로, ‘혀’에서 ‘입술’로 옮겨지는 ‘외국어 말하기’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사도들과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들어 쓰신 것처럼, ‘루가’가 속해 있는 교회공동체의 복음 전파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땅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으러 나가자”라고 ‘루가’는 자기 <복음서>의 2부인 《사도행전》 첫 부분부터 ‘교회’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땅끝까지 ‘예수의 길’을 이어놓으려는 ‘교회의 길’, 즉 ‘선교’가 성령을 통해 펼쳐지고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후반부’는 성령 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사도 2:5-13) 성령 강림 사건의 의의를 <구약>의 《요엘》을 통해 인증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사도 2:14-36). <전례독서>는 21절까지만 읽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경험했으나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한쪽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 즉 ‘복음’으로 알아듣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술에 취했군.” 이러면서 빈정댑니다. 그러나 성령은 조금도 지체치 않고 강림하신 목적을 베드로를 통해 성취하십니다.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사도 2:14-36).

설교하는 베드로의 내면은 어땠습니까? 그는 겁쟁이나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 가득히 채우심을 받은 용기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담대히 자신의 ‘모국어’로(이때부터는 외국어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큰일들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구원사’를 지혜롭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구약>의 예언자 ‘요엘’의 말을 인용하고, 몇 마디를 첨가해서(18절)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설교합니다.

《요엘》의 예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부르심 받은 ‘예언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모세가 바랐듯이(민수 11:25-29), 그날은 이스라엘이 ‘예언자 백성이 되는 날’입니다. 아들딸이라는 ‘성별’에 상관없이, 노소(老少)라는 ‘나이’에 상관없이, 자유인과 종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을 하고 ‘계시의 영상’을 보며, ‘꿈을 꿀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며, 어디서 살길을 찾을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요엘 3:5). 한마디로 왕이나 예언자 없이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게 될 것이고, 그 계획에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의 이 같은 예언이 실현되기 시작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물론 ‘요엘’이 언급한 그 ‘마지막 날’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처럼,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역시 개인의 ‘종생’(終生)을 빗겨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아직 코에 ‘호흡’이 달려 있을 때, 이 ‘자비의 시간’을 살고 있을 때, 서둘러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에 동참할 일입니다(21절).

이렇게 ‘루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하느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새 계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즉 ‘새 이스라엘이 탄생’했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합니다. ‘교회의 사명’(길)은 ‘예수의 길’을 땅끝까지 이어놓는 데 있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심에 성령 강림의 ‘목적’이 있다고 처음부터 분명히 합니다.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교회’, 성령을 통해 다시 ‘소생’(甦生)하고, ‘기쁨으로 변화된’ 이들이 펼치는 ‘생명의 역동적인 역사’를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들려줍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들 안에만 담아둘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받은 그들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 용기 있게 일어섰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 길의 출발입니다. 베드로의 선포를 통해 ‘오순절’에 ‘추수된 삼천 명’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예수의 이름’을 ‘그리스도’로 부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오늘의 교회’를 일깨웁니다. 사도들의 후예인 오늘의 우리도 성령을 따라 그 사명의 길을 같이 가자고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받고 있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4편>은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기리는 찬미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돌보심에 철저히 의존합니다(27절). 창조주 하느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만물은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30절). 하느님의 ‘입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영, 바람, 숨, 마음’으로도 번역됩니다. 《시편》은 ‘주님의 입김’이신 ‘성령’이 죽어가는 모든 피조물을 다시 살게 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라고 찬미합니다. 참으로 ‘성령’은 죽어가는 모든 피조물을 다시 살게 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입김’, ‘소생’, ‘새로움’이라는 단어 때문에 <전례독서> 찬미로 배정되었습니다.

어느 때 우리는 죽어가던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습니까? 친절과 배려, 경청과 공감 같은 ‘자비로운 행동들’을 만날 때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어선 이들을 볼 때’입니다. 사랑과 진실을 지향하는 ‘현명한 통찰들’을 내릴 때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공동체를 살리려는 ‘숭고한 용기들’을 마주할 때입니다. 이 모든 ‘생명의 일들’은 죽어가는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무엇도 성령의 이 같은 부드러운 ‘접촉’과 ‘감동’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소생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더 깊이 알아차리고 ‘생명의 도구’가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2독서 《로마서》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고, 견딜 수 있게 해 준다는 교훈입니다. 바울로는 아담의 타락이 결과한 피조물의 ‘신음과 진통’으로 시작합니다. 자연, 즉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언젠가 ‘죽음’을 맞고 ‘먼지’로 돌아갑니다.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시편의 그런 표현, 즉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갑니다”(시편 104:29)를 ‘의인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만물은 정말로 자기 존재의 죽음이라는 탄식과 고통 속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특히 동물들은 탐욕스러운 인간의 착취에서 벗어나 창조의 목적대로 자기 생명을 누리기를 ‘갈망’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자연뿐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도 ‘신음’(탄식, 갈망)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여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으며,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때도 있습니다(1요한 2:16-17). 하늘에 속한 존재이면서도 땅에 속한 존재처럼, 썩어 없어질 일들에 휘둘리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 속에서 ‘신음’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합니다. 우리를 죄의 노예로 만드는 ‘육적인 몸’을 벗고, ‘불멸하는 몸’으로 변화되어(필립 3:21)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을 희망합니다. 한마디로 ‘몸의 부활’, 즉 ‘완전한 구원’을 희망합니다. 지금은 감추어져 있지만,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 ‘희망’은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이 같은 ‘희망’을 복음서에 기대어 말씀드리자면,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승천대축일에 묵상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완성하러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에페 1:23).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신음과 진통의 속박에서 해방(구원)되어 창조의 본래 목적인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그 완성의 날을 고대하며 참고 기다립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제대로 초점이 맞추어진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도와주신다는 이 진실을 온전히 믿는 이들만이 ‘희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참아내며, ‘몸의 부활’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몸의 부활’을 참고 기다리는 우리, 즉 교회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언어’로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교회와 하느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주시고,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덕택에 교회는 ‘신음’하던 자리에서 ‘소생’하는 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고별설교’ 단락 중 ‘아버지께 청하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과 ‘성령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곧 떠나실 예수께서는 스승답게 그 ‘작은 공동체’에게 필요한 결정적인 한 가지를 알고 계십니다. 사실 그것을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한 14:16,2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 요한 14:16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요한 14:26

그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미움과 반대를 받으며, 박해 시절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그들에게 ‘협조자’, 즉 ‘진리의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고아처럼 결코 혼자 남겨지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4:18). 그들은 ‘협조자 성령’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 계신 ‘임마누엘 예수님의 현존’을 생생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협조자’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가 명사화된 단어입니다.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옆에, 곁에’를 의미하는 ‘파라’(παρά)와 ‘부르다’를 의미하는 ‘칼레오’(καλέω)의 합성어입니다. ‘자기 곁으로 부르다’, ‘초청하다’, ‘격려하다’, ‘간청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나란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디서 유래한 말일까요?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법정’에서 유래합니다. 법정에 선 어떤 사람 옆에서 그의 주장을 대신 호소하거나 도와주는 ‘법적 방어자’(조언자, 옹호자, 대언자, 중재자), 오늘날로 말하면 ‘변호사’입니다. 바로 ‘옆’에서 도움을 주기에 ‘협조자’이고, 또한 ‘옆’에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기에 ‘위로자’(상담자)입니다. 따라서 ‘협조자’(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은 우리 편에 서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 ‘간청’하시는 ‘변호사’(옹호자)이시며(이에 비해 사탄은 ‘고발자’, ‘비난자’, ‘반대자’), 어려울 때 ‘힘’이 나도록 ‘위로’하시는 ‘위로자’(조언자, 상담자)이십니다(요한 14:16, 26; 15:26; 16:7).

예수께서는 ‘성령’을 ‘다른 협조자’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역시 ‘협조자’로 그들과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첫 번째 ‘협조자’이셨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밝혀줍니다(요한 1:14).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협조자”이셨습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의 ‘협조자’이셨고, 성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게 해 주신 ‘협조자’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위격은 성자와 구별되지만, 예수님의 본질을 그들에게 알려주실(요한 14:26; 15:26) 똑같은 ‘협조자’이십니다.

교회사에서는 오늘 우리가 낭독한 ‘약속의 성취’를 두고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시는가?” 아니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 나오시는가?”를 두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The Filioque Controversy)이라고 합니다. 서방교회(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일부 장로교)가 고백하는 ‘니케아신경’에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라고 되어 있지만, 동방교회(정교회) ‘니케아신경’에는 “성부로부터 나오시며”(정확히는 성신은 성부께서 쫓아 나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공회는 “성자께서 성부께 청하여 성령을 보내신다”라고 말씀하신 바에 근거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라고 고백합니다.

‘협조자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진리의 성령’은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주실 것입니다(요한 14:17; 16:8~11).

먼저 예수께서는 성령이 ‘죄’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폭로하여) 바로잡아주실(깨우쳐주실)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특히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라고 지적하실 것입니다. 그 불신의 죄는 다른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영혼에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번역한 그리스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표적(목표, 과녁)에서 빗나감을 뜻합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이 ‘근원적인 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을 향한 ‘불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를 중심’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인간사회의 모든 ‘죄’는 여기서 나옵니다.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신 하느님을 ‘불신’하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죄’에서 돌아서도록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언자와 그들의 메시지를 ‘불신’하고 ‘거부’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목표를 벗어나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요한복음》도 하느님을 향한 사람들의 ‘불신’과 ‘불순종’을 ‘죄’라고 서문에서부터 폭로합니다. 우선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생명의 말씀’으로 증언합니다(요한 1:4-5,8).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려고 오신 분으로 증언합니다(요한 1:12). 예수님을 ‘사랑과 구원의 하느님’을 알려주러 오신 하느님과 똑같으신 ‘외아들’이라 증언합니다(요한 1:18).

그러나 유대인들(특히 대사제들과 사회 특권층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참 빛’, ‘생명이신 말씀’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하고 ‘거부’했습니다. 자기 탐욕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인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로마 권력과 야합하여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하느님의 목표를 벗어나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그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자기 탐욕’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삶을 보이신 예수를 따르기보다 ‘자기를 돋보이는 삶’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과녁에서 빗나간 삶을 살았습니다.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 우리가 감사하게도 성령의 은총 덕택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자신이 인생의 진정한 목표에서 빗나간 ‘죄인’임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임을 깨닫고 돌아섰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따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하고 새 삶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세례성사’에서 고백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성령으로부터 지적받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세례를 받았는데 가끔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죄의 상태가 됩니다.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있음에도 ‘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 믿음과 실천이 하나이신 분을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 마태 7:21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는 예배자, 기도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거룩하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 없이 단지 ‘종교심 차원에서’ 예배와 기도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구약에 그런 예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그런 이들을 향해 심각하게 경고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처럼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죄’입니다. 자기 안락과 행복만을 돌보며 산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거역하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정의’(正義)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주실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정의’로 번역한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누군가를 옳다 그르다고 선언하는 ‘재판’과 관련한 용어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인정’하심과 관련한 용어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해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판단 기준에 따르면 어쩌면 예수님도 통과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판단 기준(특히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먹보에 술꾼’, ‘죄인과 세리의 친구’(마태 11:19), ‘귀신두목(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하수인’(루가 11:15)이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불의한 사람’으로 선언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인 예수’를 죽이라고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참 재판관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다르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판결은 원천무효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그렇게 판결한 그들이 ‘유죄’입니다. 무엇을 통해 그렇게 선언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로써 예수님의 삶과 행동이 옳았음을 하느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세워진 사건이 ‘부활’입니다. 나중에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정의’를 깨우쳐주셨습니다(요한 16: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대사제들로 대변되는 당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이 ‘불의’하고, 그들에게 ‘유죄선고’가 내려졌다고 성령은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히심으로써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어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의로운 분’임을 증명하셨다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이 정의, 이 진실을 선포하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율법’이나 ‘다른 무엇’이 줄 수 없는 ‘새로운 의’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심을 성령께서는 깨우쳐주셨습니다. 타락한 인류, 죄인인 인류가 ‘정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즉 ‘절대적인 의’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절대적 의’에 관해 깨우쳐주시어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영원한 구원과 관련한 ‘절대적 의의 주체’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주실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특히 이 ‘세상의 권력자’가 심판받았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정의’의 문제에서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세상 권력자에게 ‘유죄’를 선고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죄’가 선고되었으니 ‘심판’이 뒤따르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와 부활은 정말 심판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준 사건임을 성령께서는 깨우쳐주십니다.

아시다시피 예수께서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들을 향해 유죄를 선고하시는 자리였습니다. 더욱이 그 법정은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셨듯이(요한 12:31) 이 어두운 세상의 권력자, 즉 ‘마귀’가 심판받는 장소였습니다. 그 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입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죄와 죽음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마귀는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령을 깨우쳐주십니다. 동시에 세상의 권력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장차 ‘최후 심판’이 있을 것임을 깨우쳐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이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다가올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며 어서 돌아서라고 성령께서는 세상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세상은 어서 속히 죄에서 돌아서고 하느님의 정의,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의 의미를 제자들이 알아들었습니까? 그들은 아직 미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더는 알려주시지 않고 그 모든 가르침을 교회를 탄생시키실 성령께 의탁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협조자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은 ‘사랑의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처럼 계속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요한 14:26). 믿는 이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6:13a).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시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요한 16:13b-15). 이렇게 성령은 모든 일에서 ‘성부’를 보여주는 사랑의 예수님을 증언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더욱이 제자들도 ‘성령 덕택’에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요한 15:27). 사도들의 증언은 성령의 증언과 연결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이 그들을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협조자 성령’의 증언과 가르침에 힘입어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인류와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증인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에 포함되어있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대로, 《사도행전》에서 들은 것처럼, 성령이 강림하시자 사도들은 복음 전도자가 되어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전파하였습니다. ‘구원의 이름 예수’,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진리의 증인’으로 떨쳐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시작하시고 펼쳐가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이어가도록(요한 14:12) 제자들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협조자’이시고(요한 14:16), ‘무지’(無知)한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한 14:17a; 15:26; 16:13).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하느님의 새 구원 계약이신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협조자’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의 이름이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협조자’이십니다.

하지만 꼭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다 해 주시는 ‘협조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증인의 삶’을 살고자 할 때 은총의 선물들을 주시어 도와주시는 ‘협조자’이십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런 마음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협조자가 ‘성령’이십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 없이 교회는 교회일 수 없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증언입니다. 성령이 교회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에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한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이란,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그 성령은 어느 한때만 역사하시고 그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당신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을 도와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을 경축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성찰합니다. 나는 진정 성령을 사모합니까?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주시는 성령의 도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과 행동이 세상의 권력자가 심판을 받고 무력해졌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진리의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부활 생명’(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부디 죄와 죽음 속에 헤매는 이웃들에게 ‘빛과 생명의 주님’을 전하는 거룩한 사도직을 잘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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