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16. 승천대축일(부활 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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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어 영광을 받으셨나이다. 간절히 비오니,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우리가 비록 육신은 땅에 있으나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1-11
  • 시편 – 47
  • 2독서 – 에페 1:15-23
  • 복음서 – 루가 24:44-53

교회력으로 지난 목요일(13일)이 ‘승천대축일’이었습니다. 교우들이 함께 이 즐거운 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경축하기 위해 부활 7주일인 오늘로 이동하여 지킵니다.

먼저, ‘승천대축일’ 전례독서 내용부터 간단히 안내합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시며,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47편>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시고 당신 백성을 ‘축복’하시며, 온 누리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2독서 《에페소서》는 바울로의 기도와 만물을 완성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문에는 전체가 한 문장입니다. 특히 바울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내시어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시고,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어 만물을 다스리시는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온 우주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루가복음》은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승리’와 ‘기쁨에 찬’ 제자들의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오늘 전례독서 내용은 ‘승천’하시어 ‘우주의 통치자’로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지상에 남겨진 사도들과 그 후예들, 즉 ‘교회의 기쁨과 소망’을 교훈합니다.

<오늘의 본기도>도 전례독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승천대축일’이 갖는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말씀의 전례’를 시작하며(혹은 개회예식의 마감으로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드리는 <본기도>는 주일 성찬례 의향을 명확히 드러내는 ‘주제 기도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어 영광을 받으셨나이다. 간절히 비오니,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우리가 비록 육신은 이 땅에 있으나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본기도>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호명’한 후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 사건을 서술합니다. 그 구원 사건은, 2독서 《에페소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 ‘강한 능력’(성령)을 떨치시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시어 영광을 받게 하셨다는 선포입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즉 우리가 이 기도를 바치는 목적이 서술됩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우리가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물론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쳐집니다.

오늘 성찬례 중에 사용하는 ‘특정문’에도 승천대축일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죄의고백 권고문]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감서서문 특송]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부활을 하시고, 모든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친히 드러내 보이신 후에,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나이다.

[영성체후 기도]

하느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나게 하시어 우리의 인성을 높이시고, 천상의 양식으로 우리를 먹이셨나이다. 비오니, 영적인 축복으로 양육 받은 우리가 언제나 마음을 천상에 두고 살게 하소서.

[축복문]

승천하시어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믿음과 인내를 더하시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이렇게 오늘 사용하는 ‘성찬례 특정문’도 ‘승천대축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등극하신 영광의 날’이자, 그 ‘영광에 참여할 교회인 우리를 격려하는 기쁨의 날’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부활 7주일부터(본래는 오늘이 부활 7주일로 승천후주일에 해당합니다) 성령강림대축일까지의 ‘성찬례 특정문’도 1독서 《사도행전》과 복음 이야기의 선포처럼 우리가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진입했음을 명확히 합니다. 다시 말해 ‘성탄대축일’과 ‘부활대축일’ 앞에 각각 ‘대림’과 ‘사순’이라는 준비의 절기가 있듯이 ‘성령강림대축일’ 앞에도 10일간의 ‘준비기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상으로 ‘승천대축일’과 오늘 이후의 시간이 갖는 의미를 ‘전례독서’와 <성공회기도서>에 근거하여 큰 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승천대축일’에 새길 교훈들, 즉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에 관한 태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승천대축일’에 우리는 ‘사랑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통치자’이시고, 그 몸의 지체인 ‘교회’ 역시 장차 그 영광스러운 통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교훈을 되새깁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간 사도들과 그 후예인 초대교회가 선포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우리 대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시어 온 천하를 다스리는 ‘만물(萬物)의 왕’으로 세우셨고, 교회는 사랑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라 ‘신약성경’은 교훈합니다.

1독서로 선포된 《사도행전》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우주의 통치자’로 등극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당시의 세계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우리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은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가장 신성하고, 높은 나라’의 ‘상징’입니다. 오직 신적 존재들만 ‘지복’(至福)을 누리는 영광스러운 ‘궁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 ‘하늘나라 문’, 그 ‘궁전 문’이 ‘사랑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사랑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종국에는 ‘사랑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 오늘 ‘개선문’처럼 활짝 열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인성을 높여주시기 위해”(물론 2독서 교훈처럼, “만물을 완성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일을 포함하여) 그 ‘궁전 문’을 열고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시어 궁극적 승리를 거두신 ‘하느님 아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오늘 다시 그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더욱이 《사도행전》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르심’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구름’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다”라는 표현은 ‘사랑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의 찬미와 호위를 받으며 아버지가 계신 천상의 궁전에 영광스럽게 ‘개선’하셨다는 뜻입니다. 본래 있어야 할 그 ‘영광의 자리’, 즉 천상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2독서 《에페소서》도 사도 바울로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 널리 퍼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내용을 전해줍니다. 온 누리의 진정한 ‘통치자’지 누구인지 당당히 선포합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신경>으로 고백하듯이,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라고 선포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선포합니다. 성도들이 차지할 ‘영광스러운 날’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승천대축일’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보다 먼저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나라’로 들어가시어 ‘우주의 통치자로 등극’하신 날임을 교훈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장차 누릴 영광, 즉 승천하시어 왕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영원히 다스리는 영광에 참여할 축복의 사건임을 교훈합니다. 한마디로 ‘승천대축일’은 ‘사랑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성도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개선한 기쁨의 날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천’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인 우리도 ‘주님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인 우리는 ‘사랑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얼굴을 맞대고 볼”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우리는 기다립니다(1고린 13:12). 아버지 하느님 곁으로 ‘우리를 높이시어’ 그 거룩하신 영광을 ‘항상’ 뵙게 하여 주실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기다립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아버지의 나라’를 가져오실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기다립니다. “만물을 완성하러 오실”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기다립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승리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기다립니다. 특히 우리가 봉헌하는 ‘성찬례’는 언제가 도래할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미리 맛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찬례’로 모여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사랑으로’ 승리하시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고, 지금도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을 ‘영’(迎)할 때마다 어서 속히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요즘처럼 삶이 힘겹고 고달플수록 우리는 ‘만물을 완성하러 오실’ 그 영광스러운 희망의 날을 더욱 고대합니다. 천상에서 누릴 그 ‘영원한 잔치’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더욱 키워갑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마음껏 소리높여 ‘신앙의 신비’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님이 가져오실 ‘그날’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천사들이 사도들에게 교훈했듯이 단지 ‘하늘’만 쳐다보며 기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책무’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세례 때 사제가 선포한 것처럼,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착한 행실’, 즉 ‘사랑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 증인의 삶이 ‘우주의 통치자’이시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스려 가시는 주님께서 가져오실 ‘그날’(최후 승리의 날)을 사모하는 이들의 마땅한 삶의 태도입니다.

둘째, ‘승천대축일’에 우리는 어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천상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되새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주님이 어떤 삶을 사셨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나라에 불러올리셨습니까? 어떤 삶을 사셨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세우셨습니까?

‘올리브산’에 있는 ‘게쎄마니’에서의 기도를 떠 올려 보십시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루가 22:42b; 마태 26:39b)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핏방울 같은 땀을 뚝뚝 흘리시며’ 바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살고자 하는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 해도 그것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살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바꾸시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과 계획마저도 오직 아버지의 뜻 앞에서 내려놓으셨습니다.

어째서 예수께서는 그토록 충실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까? ‘아버지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난을 겪고 죽은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하늘나라에 오르도록 한 것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게쎄마니’는 예수께서 ‘그 사랑’을 절대적으로 표현하신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에페 1:17)을 통해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 기도, 그 사랑은 누가 하늘나라에 불러올려지며, 누가 천상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명백히 가르쳐줍니다. ‘아버지의 뜻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나의 희생을 요구하고, 아버지의 뜻이 내가 가진 계획을 바꿀 것을 요구할지라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 하늘나라로 불러 올려집니다. 천상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갑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영광에 참여합니다.

우리도 ‘아버지의 뜻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으로 살다, 사랑을 완성하며, 우리 주님처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는 영원한 복락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끝으로 ‘승천대축일’에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교훈을 되새깁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선물’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루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지상에서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게 된 사건임을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방식’이란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고별설교’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협조자, 즉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요한 14:16-17a). 더욱이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별설교’뿐 아니라 ‘승천하시기 전’에도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줄 터이니 예루살렘에 머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새로운 방식의 약속, 즉 임마누엘의 약속은 무엇을 목적한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땅끝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당신의 ‘거룩한 영’을 통해 모든 시공간에 현존하시며, 우리 각 사람 안에 현존하십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항상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협조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능력’이신 예수,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분도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 일도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도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며,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만 부활의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승천대축일’은 우리 마음을 이제 곧 다가올 ‘성령강림대축일’로 향하게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어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천상에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우주의 영원한 통치자’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도 그 영광에 들어갈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만물을 완성하러 오시는 그 영광스러운 날,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다스리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우리는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이제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를 삽니다. 그 사이를 사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성령’이 함께 계시고,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 서로가 함께 있습니다. 이렇게 축복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부터 다음 주일까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를 삽니다. 우리가 ‘교회력’을 지키는 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해마다 시간을 다시 설정하고서, ‘약속하신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승천 이후의 여정을 꿋꿋이 걸어갑니다. 착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처럼(요한 10:3-5),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요한 15:1-6) 우리는 한 떼, 한 나무가 되어 충실히 그 여정을 올곧게 걸어갑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들처럼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이렇게 ‘성전’에 함께 모였습니다.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에게 임하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길 위에 있으니 잘하셨습니다.

오순절처럼, 며칠이 지나면 ‘약속의 날’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침입해 들어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날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제와 다른 나, 우리, 교회가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으로 살면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연민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연민)을 실천하며 ‘증인’과 ‘전도자’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생명력 충만한’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한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도’를 이미 발견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전도자’(傳道者)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생명의 도’(道)를 찾아다니는 ‘구도자’(求道者)처럼 살고 있습니까? 자신이 발견한 ‘생명의 도’를 증언할 만큼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도자’가 아니라 여전히 ‘구도자’일 뿐입니다. 불타는 열정으로 살아가는 ‘전도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빈곤한 구도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충만한 ‘위대한 교회’가 아니라 ‘무기력한 교회’로 우리는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으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빈곤한 구도자들’을 향해 ‘불타는 열정’을 지닌 ’전도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한 교회답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생명의 도’를 기쁨으로 세상에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거룩한 교회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승천대축일’이 교훈하는 이 거룩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우리 안에 차오르기를 기도합니다. 하늘 높이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충만히 보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진실한 ‘사랑의 불’을 붙여주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를 그리스도(주님)로 증언하는 불같은 열정으로 타오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여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전도자의 교회’로 성장시켜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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