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9. 부활6주일(가정주일)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택하시어 벗이라 불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썩지 않는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0:44-48
  • 시편 – 98
  • 2독서 – 1요한 5:1-6
  • 복음서 – 요한 15:9-17

부활 6주일이자 ‘가정주일’로 지킵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으로 살아가며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혼인한 부부’를 중심으로 생활을 함께하는 ‘혈연관계’를 전통적으로 ‘가정’(家庭)이라 불렀습니다. 이제는 1인 가구의 증가 등 사회 변화와 더불어 훨씬 유연한 관점에서 가정을 정의(定義)하자는 운동도 있습니다. 혼인이나 혈연을 넘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활 동반자’ 형태도 ‘가정’이라 부르자는 겁니다.

교회에서 ‘가정주일’을 정하고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회화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회화’를 배우는 곳이어서만은 아닙니다. 또한 내 가정의 번성과 가족의 화목을 위해 기도하려는 차원도 넘어섭니다.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되찾자는 ‘지향’(志向)이 더 중심에 자리합니다.

교회의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계성’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서로의 관계성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교회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정의입니다(마태 12:48-50; 에페 2:19-22; 1요한 3:16).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세우신 ‘새 가족’입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삶을 나누는 가족공동체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이전에는 모르던 사이더라도,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생명의 양식’이요, ‘참된 음료’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식구’(食口), 즉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지내는 ‘친교 모임’이 아니라 ‘진짜’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진짜’ 형제자매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정의 속에 서로의 관계와 소유와 시간, 심지어 목숨까지 ‘서로를 위해 사랑’으로 바칠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한 가족인 형제자매로 사는 일’이 ‘교회의 본질’임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 본질과 멀어 보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 만하지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정주일’을 지키며 이러한 현실을 반성합니다.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지금까지 ‘가정주일’의 의미와 기도지향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오늘은 교회력으로 ‘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을 몇 걸음 앞두고 있습니다. 곧 있게 될 이들 대축일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낭독해 온 <전례독서>(특히 1독서와 2독서)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는 일이 유익하겠습니다.

부활절기 동안 ‘1독서’는 <구약성경>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낭독합니다. 그 이유는 <4복음서>의 부활전승 이야기나 부활주일 2독서로 낭독한 ‘사도 바울로의 개인적 증언’(1고린 15:1-11) 이후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 전체의 증언’이 부활절기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 특히 ‘교회’를 통해 활동하시는 ‘성령’을 깊이 묵상하도록 신자들을 이끕니다.

‘부활대축일’에 낭독한 본문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선교내용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고르넬리오’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힘차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10:34-43).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이 그가 선포한 ‘복음의 정수’입니다.

‘부활 2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성령으로’ 시작한 초대교회가 모든 것을 가족처럼 공유하며 친교를 나누는 공동생활입니다(사도 4:32-35). ‘부활 3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며 회개로 초대하는 이야기입니다(사도 3:12-20). ‘부활 4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 ‘산헤드린’(종교지도자들)에서 구원의 이름 예수를 담대히 선포하는 설교입니다(사도 4:5-12). ‘부활 5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인 ‘필립보’가 ‘성령의 인도’로 이방 사람(혹은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 일원인)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부활의 복음’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이야기입니다(사도 8:26-40).

이처럼 1독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사도들의 선교와 그 전개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교회생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과월절 신비’에서 시작되어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과 주도’로 진행됨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둔 부활절기에는 《사도행전》을 1독서로 낭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함과 동시에 부활절기의 완성인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사모’하게 하는 여정인 셈입니다.

오늘, ‘부활 6주일’ 1독서 《사도행전》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성령의 은혜’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가족공동체’(교회)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기억력이 좋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부활대축일’ 1독서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르넬리오’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설교하는 동안 ‘성령의 은혜’(선물)가 내려오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몹시) 놀랐습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을 때처럼 이방인인 그들도 ‘기이한 언어’로 말하며 하느님을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개종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자신들이 받은 것과 같은 ‘성령의 은혜’가 내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순종하여 설교를 중단하고 선언합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이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10:47

베드로는 그들의 성령 체험을 정식으로 인정합니다. 그들을 ‘세례’로 초대합니다. ‘세례’는 이전에 지은 ‘죄를 씻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의 일원으로 ‘새로 태어나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성령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선포하는 ‘성사’입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며칠을 더 머뭅니다. 그야말로 성령께서 그들을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친교 공동체로 만들어주십니다. 모두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 교회로 성령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을 누구도 시비 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을 하느님의 한 가족인 예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정당성을 성령께서 친히 주도해 가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종,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나 직업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성령의 역사’를 봅니다. 그들은 이방인(가장자리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이 한 가족이 되어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친교를 나눕니다. 모두가 <구약성경>에 약속된 것처럼(창세 12:1-4; 이사 60:1-3) 하느님께서 구원을 위해 세밀히 예비하시고 개입하시어 성취하신 일들입니다.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일의 성취입니다(요한 12:32). 여러분과 저의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절기 동안 ‘나’해 ‘2독서’는 《요한의 첫째 편지》를 차례로 낭독합니다. 그 이유는 ‘가’해의 ‘2독서’인 《베드로의 첫째 편지》처럼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언급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성사를 받을 예비자들의 교육 기간에서 유래한다’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비자들은 ‘부활대축일’(또는 부활밤)에 ‘세례성사’를 받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거듭난 신자들은 부활절기 동안 ‘성찬례’에 참예(參詣)합니다. 자신이 받은 ‘세례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책무’(責務)를 꾸준히 배워갑니다. 특히 ‘적대자들’(특히 초대교회 시절에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오늘날에는 이단들과 그리스도교 반대자들)에 맞서 ‘교회의 일꾼’으로 든든히 세워져 가는 일이 중요하기에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언급이 많은 《요한의 첫째 편지》를 부활절기에 낭독합니다.

‘부활 2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에 있는 ‘변호자’시고, 온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이라는 단락입니다(1요한 1:1-2:2). ‘부활 3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실과 ‘죄의 문제’를 다루는 단락입니다(1요한 3:1-7). ‘부활 4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다루는 단락입니다(1요한 3:16-24). ‘부활 5주일’에 낭독한 본문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속속들이 밝히는 ‘사랑의 찬가’ 단락입니다(1요한 4:7-21).

오늘, ‘부활 6주일’에 낭독한 2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 ‘전반부’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교훈합니다(1요한 5:1-5). 물론 이 ‘믿음’은 ‘사랑’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은 우리를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불러주시고, ‘사랑’을 보여주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땅한 ‘믿음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있는 곳마다 세상의 추한 욕망(2:15-17)과 악마적 삶(2:13-14)은 극복됩니다.

‘후반부’(6절)는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영지’(靈知)를 소유했기에 구원받았고, 세상을 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 ‘거짓 교사들’에 맞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세상을 이기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일’입니다.

‘영지주의’에 속한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의미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는 ‘가현설’(假現設, Docetism)을 은밀히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참된 지식)이신 ‘성령’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인간으로 오시어(성육신)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수난의 피)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 ‘성령의 증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고,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세상을 이깁니다.

이처럼 오늘 낭독한 2독서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말하면서, ‘세례’와 ‘수난의 피’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고(6절), ‘성령’이 예수님을 증언하시며(6절), 하느님께서도 직접 아들에 관해 증언한다(1요한 5:9)는 ‘삼위일체’의 암시를 보여줍니다. 승천대축일, 성령강림대축일이 지나면 삼위일체주일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활절기에 낭독해 온 복음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오늘의 시편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98편>은 왕이신 하느님의 승리와 장차 새로운 세상을 세우러 오실 그 통치권을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출애굽)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공평과 공의’로 온 세상을 다스리러(구원하러) 오실 것이라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시작과 끝이 앞선 <96편>과 유사합니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구원(승리와 정의)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친히 그 계획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1절). 다시 말해 사랑과 능력으로 ‘놀라운 기적’(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그 구원(승리와 정의)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2절). 다시 말해 그 ‘구원의 메시지’가 널리 선포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덕을 입게 될 것이라는(창세 12:3) 그 계약(사랑과 진실)을 기억하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3절).

따라서 시편 기자는 온 세상을 향해 구원의 하느님을 인정하고 합당한 찬양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4-8절). 왕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기뻐하며 찬양하도록 모든 피조물을 불러세웁니다.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하여 왕이신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기쁨으로 노래해야 합니다. 끝으로 시편 기자는 왕이신 주님께서 ‘공평과 공의’로 온 세상을 다스리러(구원하러) 오실 것이라 예언합니다(9절). 주님께서 오시어 새로운 세상을 세우실 것입니다. 다시 오시어 만물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98편>이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전례독서>가 선포하듯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건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인류를 영원한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그 ‘승리와 정의’(구원의 메시지)를 고르넬리오 가정으로 대표되는 온 세상에 숨김없이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은혜’가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을 통해’ 이방인까지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기쁨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더욱이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적 구원을 이루신 주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뻐하며 목청껏 노래합니다.

부활절기 동안 ‘나’해 복음 이야기는 부활 1, 3주일을 제외하고 사순절에 이어 《요한복음》을 계속해서 낭독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의 ‘제자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십자가 수난이 있기 전 행하신 ‘고별설교’ 단락입니다. 반복해서 ‘고별설교’가 선정된 이유는 교회가 금주 목요일에 있을 ‘승천대축일’과 곧 다가올 ‘성령강림대축일’을 염두에 두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지난주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부활의 열매를 맺는 우리’라는 주제로 말씀 나눔을 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이어지는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 요한 15:9

놀랍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우리)들을 어떻게 사랑해 오셨는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그 방식’을 따라서입니다. 본문에 쓰인 ‘사랑’이라는 단어는 전부 ‘무조건적 사랑’을 가리킬 때 쓴다는 ‘아가페’(αγάπη)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 있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유일한 기준’입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제자’(우리)에게 퍼부으신 주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듯, 그들(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온 ‘예수님의 사랑’(아가페)에 머물러야 한다고 ‘순종’을 명령하십니다. 이어서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음’(순종함)이 어떻게 살아가는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 요한 15:10

‘계명’(誡命, 히브리어로 ‘미츠와’ מִצְוָה, 그리스어로는 ‘엔톨레’ έντολή)이란 어떤 뜻입니까? 좁은 의미로 그 종교의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들, 즉 ‘하라’와 ‘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입니다. 간단히 ‘십계명’을 생각하면 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계명’(613개)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느님의 명령, 즉 달리 조건을 달아서는 안 되는 ‘하느님의 요구사항들’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 정신, 의지, 마음이 담긴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살림’하시는 어머니처럼 인류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들을 ‘계명’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진정으로 그 ‘계명’을 지킵니까? 계명이 자기 삶의 ‘억압’(抑壓)이 아니라 ‘완덕’으로 이끄는 ‘기쁨의 길’임을 깨달은 사람이 ‘순종’합니다(11절). 다른 말로 하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고귀한 삶’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이 지킵니다. 쉽게 말해 ‘계명’을 주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기쁨’(그리스어로 카라, χαρά)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순종’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이에게 ‘계명 준수’는 ‘복종’이 아니라 ‘기쁨에의 참여’(순종)입니다. 따라서 “나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10절)라는 예수님의 당당한 말씀은 하느님의 뜻, 정신, 의지, 마음이 담긴 계명을 ‘기쁨 속에서 충실히 구현’(실천)하며 살아오셨다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은 하느님의 그 뜻을 ‘하느님의 나라’로, 《요한복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진정한 ‘기쁨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계명을 지키면’(순종하면) 그들도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명’ 역시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시려는 ‘하느님의 뜻, 정신, 의지, 마음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계명)을 순종으로 성취하셨듯이 제자(우리)들도 예수님의 뜻(계명)을 순종으로 성취해야 합니다. 거기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 요한 15:12

“서로 사랑하라”라는 이 ‘형제애’(자매애)가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그 계명의 실천이야말로 제자(우리)들이 예수님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절대적 표시입니다. ‘형제애’(자매애)의 실천이 ‘주님의 참된 교회’를 알아보는 유일한 ‘시금석’(試金石)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사랑 아닌 일들이 더 많이 들어와 있다면 지나친 주장일까요? 우리는 경쟁이나 논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선택된’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서로 사랑의 위대함’을 세상 속에서 증언하라고 ‘파송된’(내세우신)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과 어떤 사이가 됩니까?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 요한 15:14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출애 33:11). 이 관계가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에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결코 제자와 우정의 관계가 아니었고, 제자 역시 그런 관계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랍비들과 달랐습니다. ‘계명 준수’는 제자(우리)들이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벗’(친구, 동무, 동지)이 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친구’(親舊)란 본디 “뜻, 정신, 의지, 마음을 같이 하는 사이”입니다. 우리나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면서 친해져 어느새 가족처럼 된 관계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면서 친해졌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 친구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친구를 ‘제 2의 자아’라고도 말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세월 자신과 뜻(의도), 정신, 마음을 공유’하고, ‘같은 목적을 지향하며 친해진 사이’가 바로 ‘친구’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뜻을 같이하는 사이’라고 해서 ‘동지’(同志)라고도 부릅니다. 과거 민주화의 두 산맥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의 ‘동지’인지 아닌지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에는 항상 그가 ‘지향’(의도)하는 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명하신 것을 지킬 때, 즉 당신과 뜻, 정신, 의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을 때 ‘우의’(友誼) 깊은 ‘벗’이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인류의 기록 속에는 ‘우의’가 깊었던 친구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서사시는(기원전 3300년경)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길가메시’(길가는 ‘노인’, 메시는 ‘청년’, 즉 노인이 청년이 되었다는 뜻)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도전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이야기에 보면, 악한 폭군인 ‘길가메시’를 ‘개과천선’(改過遷善)하게 만든 친구가 바로 ‘엔키두’입니다. 그들은 ‘명성’(名聲)이라는 하나의 ‘지향’을 위해 ‘의기투합한 사이’가 됩니다.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서게 된 동기도 자신의 ‘제 2자아’인 ‘친구 엔키두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다윗과 요나단’의 ‘숭고한 우정(友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무상 18:1-5; 20:8-17, 41-42). 저는 그들의 우정을 전해주는 대화 장면을 읽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저에게 그런 친구가 있는지, 또는 그런 친구로 살아왔는지 돌이켜 보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문화에서는 나이나 처지가 비슷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를 보면 그것을 초월합니다. 요나단은 장차 왕위를 이을 왕자였고, 다윗보다도 연장자였습니다(삼하 1:26). 사실 좀 더 멀리 내다본다면, 동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성별이나 나이를 떠나 뜻을 같이하는 ‘인생길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큰 거목이자 광야의 예언자로 알려진 ‘함석헌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인 ‘김교신’을 ‘추도’하며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선생님의 시집 《수평선 너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어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상에서 돌아본 것처럼 ‘친구’란 결국 ‘자신과 뜻, 정신, 의지, 마음까지도 같이 하는 사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빠졌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벗으로 만들어주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그 같은 ‘형제애’(자매애) 수행의 ‘척도’(尺度)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 요한 15:12a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아가페)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을 따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기준으로 제시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 요한 15:13-14

벗을 사랑하기에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는 희생’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닥쳐올 ‘십자가 수난’이 사실은 ‘같은 뜻, 정신, 마음, 지향을 간직한 친구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친구’ 속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도 포함됩니다(마태 12:48-50; 에페 2:19; 1요한 3:16).

정말이지 이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감정적으로 포근한 느낌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주는 희생’입니다. 한마디로 ‘감정’이 아니라 ‘행동’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제자인 우리가 간직하고 수행해야 할 형제애(자매애)의 ‘척도’(尺度)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썩지 않을 열매를 맺기 위해 서로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의 희생’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서로를 위해 핍박도 환난도 견디며, 심지어 순교로써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예수님의 친구’임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형제애(자매애)를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친구’라고 부를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뜻, 정신, 마음을 지닌, 심지어 목숨까지도 나누는 ‘진정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위에서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시오”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우리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교회’인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 척도(기준) 앞에 ‘껍데기’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는 더 놀라운 점이 발견됩니다. 제자들(우리)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셨던지 예수님은 자신이 택하여 내세우신 제자들(우리)을 ‘종’이 아니라 ‘벗’(친구)이라 부르겠다고 ‘갑자기 선언’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어떤 특별한 사랑을 보여 드린 것도 아닌 데, 그 같은 ‘복’을 ‘이미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무슨 사랑을 보여드린 것도 아닌데, ‘이미 그렇게 불러주고’ 계십니다. 마치 “나는 네가 결국은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 믿어!” 이런 뜻 같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계속 이어가십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 요한 15:15b

정말 그렇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친구인 다윗에게 그대로 전해줍니다(사무상 19:1-3; 20:1-23). 왜 그랬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택에 다윗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사무상 20:30-42). 이렇게 요나단이 다윗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을 모두 다 알려주셨다고 하십니다. ‘친구’라고 부르시기 전부터 ‘이미’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친구인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알려주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사랑의 일’을 펼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우리)을 친히 ‘선택’하시어 당신과의 우정의 관계로 ‘이미’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붙잡으셨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친구인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속속들이 알려주신 예수님의 크신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버지의 일을 같이하자고 ‘제자’(우리)들을 불러주신 예수님의 크신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 크신 마음 앞에서 이제는 정말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모두가 그 크신 ‘사랑에 빚진 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선택된 이들임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성가 581장>처럼, ‘예수님의 친구’로 선택된 우리는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사랑의 열매’, 즉 ‘영원한 생명’을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열매 맺는 이들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정신, 의지, 마음으로 변화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가정주일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 있는 한 가족입니다.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시오”라고 말하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당신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벗’으로 살아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친구’이십니다. 모름지기 진정한 친구는 뜻, 정신, 의지, 마음, 목숨까지도 같이 하는 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사도 20:28). 교회는 단 두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이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주님의 몸’입니다(에페 1:23). 거룩한 ‘주님의 집’(성전)입니다(에페 2:21-22).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교회는 세상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사랑을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어린 세대들과 젊은 세대들이 주님의 집인 교회에서 사랑을 배우고, 키워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종’처럼 하느님의 계명에 ‘복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 역시 ‘종’처럼 하느님(예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는 일’, 즉 ‘순종’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하신 그 계명에 ‘기쁘게 참여하는 삶’(순종)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고귀한 사명’입니다.

아무쪼록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가족’으로 선택받고 부르심 받은 우리 안에 이 복되고 거룩한 사명이 다시금 되새겨지고 실천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희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는 가족으로 불러주셨으니 저희의 품은 뜻이 성자의 뜻같이 되도록 ‘성령’을 보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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